본문 바로가기
현대/2차대전

서부전선의 대반전 - 코브라Cobra작전 (1부)

by uesgi2003 2020. 7. 13.

1944년 6월 말, 노르망디 상륙 후에 고전을 하던 연합군은 셀부르Cherbourg항을 탈환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마련했고 7월 중순에는 미 1군이 생로St Lo까지 진격했다. 브래들리는 영국군을 대신해 직접 방어선을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생로 남쪽으로 더 진출해 보카쥬지대를 벗어나기로 했다. 대신에 이전과 같이 전체 전선을 공격하지 않고 중앙에 전력을 집중시키고 양 측면의 군단은 독일군을 잡아 두기로 했다.

원래 1군은 브리타니Brittany의 항구탈환이 목표였기 때문에 코브라작전에서는 그곳으로 통하는 관문인 아브헝슈Avarranches가 일차 목표였다. 1군이 생뢰에서 출발해 서쪽의 아브헝슈를 탈환하면 독일 7군을 가두어 전멸시킬 수 있었다.

 

아브헝슈와 앞으로 자주 나올 캉(지도 중간 위)의 위치입니다. 

 

독일군은 동서전선 양쪽에서 재앙을 맞이했다. 1944년 여름, 적군Red Army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동부전선 전체가 무너졌다. 레닌그라드Leningrad 포위망이 완전히 와해되었고 핀란드에 이어 발트해까지 내주었다. 바그라티온Bagration작전으로 벨로러시아Byelorussia의 중앙집단군이 전멸했고 적군은 폴란드까지 파죽지세로 진입했다. 남쪽에서는 발칸반도를 지키지 못해 귀중한 유전지대가 위협받았다. 설상가상으로 6월에는 롬멜Rommel까지 부상당했다.

 

독일 7군은 국방군Wehrmacht, 무장친위대Waffen-SS, 공군Luftwaffe의 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6월부터 쉴 새없이 전투를 벌여 대부분의 부대가 전력이하였다. 그 동안 평온했던 프랑스점령지역 관할이어서 프랑스 철도에 의존했는데 연합군의 맹폭격으로 모든 철도망이 끊어지면서 코브라작전이 시작될 때에는 겨우 2일치의 군수품이 전부였다.

독일군의 방어전술교리는 전차부대를 후방으로 빼두었다가 위기를 봉합하거나 반격에 투입하는 것이었는데 전차부대를 후방에 그대로 둘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부품수급문제로 71일 당시, 판터의 58%4호전차의 42%가 수리를 받기 위해 전선에서 이탈해 있었다.

사령부는 영국군이 공세로 나온다고 예상했기 때문에 미군을 상대로 방어하는 하우서Hausser7군은 병력이 크게 부족했다. 생로 남쪽의 2공수군단은 군단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였고 352사단은 이전 전투에서 궤멸된 5개 사단을 합쳐 편성했기 때문에 전력이 크게 부족했다. 정예 3공수사단이 그나마 전력을 유지했다.

 

 롬멜과 같이 있는 파울 하우서(오른쪽)입니다. 집단군 사령관으로 종전까지 살아남았지만 무장친위대를 옹호하는 극우활동을 했습니다. 

 

완편상태로 투입되었던 전차교도Panzer Lehr사단(그림 참조)도 7월 격전으로 전차 80대로 줄어들었고 그나마도 판터 16대와 4호전차 15대만 움직였다. 방어전에만 적합한 3급전력이었다. 8군단을 상대하는 17 SS기갑척탄병사단은 이전의 영국군과의 격전으로 4급전력이었다. 일부 방어전에만 적합한 전력이었다.

유일한 1급전력은 악명높은 2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Das Reich였다. 7월 말, 4호전차 37, 판터 41, 3호돌격포 25대를 전투에 투입할 수 있었다. 제한적 공격에 적합한 2급부대로는 91공수사단, 353보병사단 정도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아예 전력 외인 4급이었다.

7군은 총 30,000명의 병력과 367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보유했는데 미군은 전력을 너무 약소평가하고 있었다.

 

 

전력뿐만 아니라 배치도 심각한 문제였다. 하우저는 그나마 온전한 기계화사단 3개를 모두 최전방에 배치하고 보병사단 2개는 후방으로 뺐다. 클루거Kluger는 이런 배치가 너무 위험하다며 기계화사단 2개와 후방의 보병사단 2개를 서로 바꾸라고 조언했다.

하우서는 보병사단이 너무 약하다며 상관의 조언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363보병사단의 합류를 기다리면서 2 SS전차사단의 2개 중대만 후방으로 돌렸다. 클루거는 영국군이 공세로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몽고메리가 718일에 굳우드작전을 시작했기 때문에 예상이 맞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늘이었다. 롬멜의 참모가 말했듯이 독일군의 열린 공간은 측면이 아니라 하늘이었다. 독일공군은 심각한 출혈을 거듭해 훈련도 제대로 못받은 신참 조종사로 대거 보충되고 있었고 독일상공 방어에도 부족한 상태였다.

독일공군 3항공단Luftflotte는 하루 350대의 항공기를 띄울 수 있었다. 주간 450, 야간 250회의 출격을 할 수 있었는데 이미 하늘은 연합군 항공기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겨우 3~40회의 출격만 목표에 도착할 수 있었다.

728, 47대의 전폭기가 미군상공에 도착했지만 14대가 격추되었다. 야간출격은 확률이 높은 반면에 폭격효과가 크게 떨어졌다. 일부는 210mm 로켓발사기를 장착했지만 별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Me-410Ju-188의 주간정찰은 너무 위험해서 야간에 조명탄을 사용한 고고도정찰을 했고 주간저고도정찰은 Bf-109에게 맡겼는데 단편적인 정보만 얻었다. Ar-234 제트기 2대를 프랑스에 급히 투입한 덕분에 2개월 만에 겨우 노르망디해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7군 반대편의 미군예비전력에 대해서는 정보가 전무했다.

 

최고시속 742km로 연합군 전투기와 상관없이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닌 세계최초의 제트폭격기 Ar-234입니다. 문제는 너무 빨라 폭격이 무척 부정확했습니다.  

 

반대쪽의 미 1군은 보병사단 11, 기갑사단 3개를와 예비사단을 완편했다. 독일군 방어선을 상대로 3배의 전력이면 충분했지만 보카쥬 지형에서 벌어진 7월 전투에서 보병 36,700명을 잃었기 때문에 6배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6배 이상을 투입하기로 했다.

보자큐전투에서 손실만 입은 것은 아니었다. 신병수준의 전력이 점차 정예병으로 성장했고 지휘관의 역량이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특히 보병분대 수준에서는 독일군의 전투력이 앞선다는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 급히 톰슨Thomson기관단총과 BAR 기관총을 추가로 지급했다. 그리고 포병을 크게 보강하고 독일군에게는 없는 휴대용무전기로 보병과 포병이 협력하게 했다.

보카쥬에서는 전차가 관목을 넘는 동안 가장 취약한 하체를 무방비로 드러내서 독일군의 대전차포에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관목 사이의 좁은 통로는 판처파우스트나 판처슈렉이 매복하기에 최적의 지형이었다. 미군은 88mm 대전차포를 두려워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효율적인 75mm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M4 셔먼전차는 FM 주파수를 사용하고 보병의 휴대용 무전기는 AM 주파수를 사용해 보병과 원활한 협력이 어려웠다. 그리고 대전차전에서도 실망스러웠다. 판터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판터의 두터운 전면경사장갑은 셔먼의 75mm로는 근거리에서도 격파하기 힘들었다. 보카쥬에서는 셔먼의 장점은 기동력이 크게 줄어들어 판터의 측면을 노리기 힘들었다.

미군이 기대한 M10 3인치 구축전차는 더 심각했다. 3인치는 화력이 크게 모자랐고 얇은 장갑과 열린 포탑 때문에 방어력이 취약했다. 보카쥬 전투에서 전차의 30%을 잃었는데 원래 예상치인 7%와는 비교도 안되게 심각한 손실이었다.

 

102기병대의 커티스 컬린Curtis Culin이 독일군 해안방어용 철제빔을 이용해서 전차에 관목제거용 쟁기를 달았다. 전차는 관목을 넘어서지 않고 쟁기로 뿌리채 뽑아 배를 드러내지 않았다. 1군은 500대의 전차에 쟁기를 달고 컬린의 뿔Rhino(사진 참조)이라고 불렀다. 공병부대는 M1 불도저전차를 사용해 관목을 제거했다. 그리고 전차 뒤에 전화기를 설치해서 보병과 바로 통신할 수 있게 했다.

M4셔먼도 76mm포를 장착한 M4A1이 배치되었다. 1943년에 이미 개발되었지만 단점이 많아서 일선의 반대가 심했다. 포연기Muzzle Brake가 없어서 포를 쏘면 많은 포연이 일어나 이후 전투에 불리했다. 그리고 75mm 고폭탄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다. 판터용으로 23전차사단이 51대의 M4A1을 투입했지만 여전히 판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미군은 지금도 전차 뒤의 전화기로 보병과 통신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공격력과 방어력은 공군의 지원으로 보완했다. 1군은 9전술항공사령부Tactical Air Command를 독차지했다. 2차대전 당시 공군은 육군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육군의 요청에 바로 움직였다.

9TAC는 전투기, 전폭기와 정찰기 400여대로 사전제압출격과 즉각대응출격을 했다. 육군에 파견된 항공지원장교가 무전으로 합동작전센터에 요청하고 다시 전폭기항공대에 전달하는 몇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지만 공군지원이 거의 없었던 독일군에 비하면 엄청난 우위였다.

9TAC 사령관 케사다Quesada는 아예 코브라작전 선봉대에 P-47 전폭기를 전담시키기로 했다. 4~8대의 전폭기가 선봉대열 위를 날아가며 근접지원했고 무력정찰을 벌이며 226kg의 폭탄을 투하했다. 케사다는 셔먼전차 일부에 공군용 무전기를 장착해 육군과 공군의 실시간으로 협력할 수 있게 했다.

 

포병도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양측의 야포 성능은 비슷했지만 미군은 100% 기계화견인포인 반면에 독일군은 군마견인포였다. 그리고 통신과 사격통제에서도 훨씬 우수했다. 미군은 여러 개의 포대가 하나의 목표에 집중포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피신하지 못하고 포화를 뒤집어썼다. 포탄이 충분하지 않았어도 독일군의 처절한 상황에 비하면 자유롭게 포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정보망에서도 앞섰다. 정찰기가 하늘을 마음껏 날며 독일군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독일군의 에니그마Enigma암호체계를 해독했기 때문에 무선교신을 감청해 분석했다. 심지어 매일의 보고를 입수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도 독일군의 사소한 움직임까지 전달했다.

 

미군의 전술은 캉지역의 영국과 캐나다군의 전술과 달랐다. 영국군은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갑부대를 선봉에 세웠지만 미군은 보병으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에 전차로 전선을 넓혔다. 930보병사단이 선봉을 맡았다.

9보병사단은 북아프리카와 시실리에서 격전을 치르고 보카쥬에서 3,500명을 잃은 역전의 부대였다. 30보병사단도 보카쥬에서 많은 피해를 입으며 정예로 거듭났다. 1보병사단이 측면을 지원하기로 했다.

23기갑사단이 그 뒤를 이었다. 두 사단 모두 보카쥬의 피해를 모두 보충했다. 2기갑사단은 M4236, 경전차 M5A1158대 보유했고 3기갑사단은 M4241, M5A1158대 보유했다. 이밖에 새로 보강된 4기갑사단은 M4 165, M5A183대 보유했다. 전차는 부족한 대신에 보병과 포병을 더 많이 보유했다.

1군은 M4 1,269, M5A1 694대를 가지고 있었고 M10 3인치 구축전차 288대와 76mm M18 구축전차 38대까지 포함하면 독일군의 10배가 넘는 전력이었다.

 

 M10과 M18 구축전차입니다. M18은 화력뿐만 아니라 최고시속 88km라는 엄청난 속도를 자랑했습니다. 

 

 

1944724일 오후 1, 코브라작전은 융단폭격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예정되었다가 기상악화로 취소되었다. 6개 전폭기항공단 중 3개는 취소명령을 받고 귀환했지만 나머지 3개는 그대로 목표지점으로 향했다. 예정된 1,600대 중 500대가 폭격을 했고 또 다시 335대의 폭격기가 685톤의 폭탄을 떨어트렸다. 오폭으로 미군 30보병사단의 25명이 죽고 131명이 부상당하는 일이 있었다.

브래들리는 공군의 어정쩡한 폭격으로 기습효과가 떨어졌다고 화를 냈지만 하우저는 어느 쪽이던 두들겨 맞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다. 브래들리는 하늘이 개는 25일에 다시 대대적인 폭격을 하기로 했다.

전차교도사단은 첫번째 폭격으로 350명과 장갑차 10대의 가벼운 피해를 입었고 이제 본격적인 미군의 공격이 시작된다고 착각했다. 사단장 바이엘라인Bayerlein은 미군의 포격을 피할 수 있는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는데 25일의 융단폭격 목표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