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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서부전선의 대반전 - 코브라Cobra작전 (2부)

by uesgi2003 2020. 7. 17.

7월 25일 오전 9시 36분, P-47의 공습에 이어 본격적인 폭격이 시작되었다. B-17과 B-24 중폭격기 1,495대가 6.4*2.3km 범위에 무려 3,370톤의 폭탄을 떨어트렸다. 다시 B-26 폭격기 380대가 4,700톤의 폭탄으로 융단폭격을 마무리지었다. 미군이 대응포격으로 대공포를 잠재웠기 때문에 피해는 거의 없었다.
독일군 방어선은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전차교도사단의 3,600명 중 2,000명 이상이 사상당했다. 전화선으로 연결된 독일군 통신망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토막났다. 

 


이번에도 오폭으로 미군 600명이 사상당하고 준장까지 죽는 불상사가 벌어져 선봉대가 대혼란을 겪었지만 예정대로 오전 11시에 공격에 나섰다. 독일군에게는 다행히도 대부분의 폭격이 미군 전선에서 떨어진 중앙부분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5공수사단의 13연대 등이 미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미 9와 30사단은 독일군 1차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그쳤고 공격 첫날의 성과는 실망스러웠다. 원래 기대했던 5km가 아니라 2km만 진격했다. 전차교도사단의 판터가 겨우 5대만 나타났고 이전과 같은 독일군의 반격이 없었기 때문에 콜린스Collins는 과감하게 기갑부대를 투입하기로 했다. 
바이엘라인은 하우서에게 전차교도사단의 보병과 전차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예비사단의 보병연대 2개와 2 SS전차사단의 몇 개 중대를 급히 보냈다. 클루거와 하우서의 오판이 드러났다. 클루거는 최고사령부에 프랑스 남부의 9전차사단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연합군의 공습때문에 10일 이상 걸려 너무 늦은 상태였다. 

 


26일, 콜린스는 기갑사단을 투입했고 미리 준비했던 불도저 전차의 활약이 대단했다. 하우서가 투입한 353사단의 반격은 P-47의 공습으로 이동 중에 무산되었다. 3기갑사단은 마히늬Maginy외곽에서 막혔지만 2기갑사단은 전차 한 대에 보병 8명씩 태우고 훨씬 깊숙이 침투했다. 

 


전차교도사단은 4호전차 4대와 돌격포 1대로 생질르St Gilles 교차로를 방어했다가 공습과 전차전에서 모조리 격파당했다. 2기갑사단은 전차 3대만 잃는 대신에 13km를 돌파했고 전차교도사단의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을 밀어냈다. 콜린스는 독일군이 무너지고 있다고 확신하며 밤에도 무조건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7월 27일 오전, M4 중대와 M3 반궤도트럭 중대가 꾸떵스Countances로 접근했다가 에른스트 바크만Ernst Barkmann의 판터의 기습을 받았다. 셔먼 3대가 격파당했지만 공습으로 판터를 내쫓았다. 2와 3기갑사단 모두 무리없이 전선을 돌파했다. 8군단도 남쪽으로 경주하듯이 진격했다. 

 


하우서는 이제야 미군이 84군단을 묶어두고 꾸떵스로 돌아 포위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클루거가 캉지역에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84군단의 퇴각명령이 지연되었다. 통신망이 산산조각나 두 사람 모두 전차교도사단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알지 못했다. 다행히도 히틀러는 9전차사단 외에 보병 3개 사단의 이동을 허락해주었다. 
7월 28일, 미군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괴롭혔다. 84군단이 꾸떵스로 후퇴하자 8군단은 즉시 4와 6기갑사단을 투입했다. 4기갑사단은 꾸떵스 바로 앞까지 진격했고 독일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콜린스 7군단의 2와 3기갑사단도 전날의 진격속도를 그대로 이어갔다. 

 


7월 28일 오후가 되자 독일군 84군단은 거의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다. 후방에 미군 정찰대가 마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2전차사단장은 미군 정찰대에 사살되었고 하우서도 포로가 될 뻔했다. 새로 2전차사단과 17장갑척탄병사단의 지휘를 맡은 오토 바움Otto Baum은 패잔병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물리기로 했지만 하우서는 남동쪽 뻬흑씨Percy로 퇴각시키기로 했다. 
하우서는 84군단을 일단 물렸다가 새로 합류하는 부대와 함께 반격에 투입할 생각이었다. 84군단장 콜티츠Choltitz는 해안을 무방비로 비우면 미군이 군단을 포위한다며 강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남동쪽으로 이동하면 반대로 해안을 향해 서진하는 미군과 충돌할 판이었다. 
클루게는 콜티츠의 판단이 옳다며 하우서에게 전령을 보냈다. 뒤늦게 콜티츠의 의견을 채택했지만 그때에는 이미 일선 부대와 통신이 완전히 끊긴 상태였고 이튿날 새벽부터 뻬흑씨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콜린스는 독일군이 포위망을 돌파할 것을 예상하고 2기갑사단의 예비병력을 더 투입했다. 훔멜Hummel 150mm 자주포를 앞세운 독일군 전차와 장갑차 30대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2기갑사단의 보병중대와 M4 몇 대와 근접전이 벌어졌고 날이 밝을 때까지 돌파하지 못했다. 
2SS전차사단의 4호전차 15대와 공수부대 200명이 합류해 미군을 밀어냈지만 78기계화포병중대의 M7 105mm 자주포와 M10 구축전차의 2차 포위망에 막혔다. 2SS전차사단과 17SS장갑척탄병사단의 대부분은 포위망에 계속 갇혔다. 설상가상으로 연료까지 떨어져 후퇴대열은 곳곳에서 주저 앉았다. 
이튿날 P-47 전폭기는 좁은 도로에 길게 늘어서 500대의 차량을 발견했고 날이 저물 때까지 폭탄을 떨어트렸다. 롱세Loncey포위망에서 전차 122대, 차량 259대, 야포 11문이 파괴되거나 버려졌다. 영국군 타이푼Typhoon전폭기도 다른 곳에서 전차 9대, 장갑차 8대, 차량 20대를 파괴했다. 

 

 


어두워지자 연료가 남은 차량과 보병이 미군 포위망의 빈 곳을 찾아 탈출을 시도하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생 드니르 르 갸스뜨St Denis le gast에서 1,000명의 독일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돌파를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125명이 죽고 124명이 부상당하고 5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전차 7대와 장갑차 25대도 파괴되었다. 미군은 100명이 죽고 차량 12대를 잃었다. 17SS장갑척탄병사단의 돌격포 11대가 탈출했다가 78기갑포병을 만났다. M7 자주포는 영거리에서 선두전차를 격파했고 화염에 부근이 밝아지면서 M10 구축전차가 후속전차를 격파했다. 독일군 90명이 죽고 2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셩브히Cambry 부근을 돌파했던 독일군 2,500명은 M4전차와 보병의 저지선을 뚫다가 집중포화를 뒤집어 썼다. 450명이 죽고 1,000명이 포로가 되었고 100대의 차량을 잃었다. 독일군은 모두 1,500명이 죽고 4,000명이 포로가 된 반면에 미군은 겨우 400명만 사상당했다. 
콜티츠가 계획한 대로 해안을 따라 후퇴한 91사단만 큰 피해없이 탈출할 수 있었다. 하우서의 가장 강력한 전력이었던 2SS전차사단 다스 라이히는 아무런 전과없이 전멸되었다. 

 


클루게는 반격을 위해 병력을 모으려 했지만 7군의 전체상황이 붕괴하고 있어 그럴 여력이 없었다. 증원된 9은 10일 후에나 도착하기 때문에 영국군전선에서 2와 116전차사단을 빼내 방어선 재구축에 투입하기로 했다. 
7월 28일, 2전차사단의 선봉대가 비흐Vire강을 건너 증원되었다. 7월 30일, 116전차사단이 도착했고 미 2기갑사단의 진격을 막았지만 방어선을 유지하기에는 전력이 너무 부족했다. 클루게는 뚜떵스 방어선을 포기했다. 
미 1군은 코브라작전에서 20,000명의 포로를 잡고 2개 군단을 거의 궤멸시켰다. 

원래는 전선을 돌파하고 확대하면 안정화시킨다는 계획이었는데, 독일군의 붕괴에 고무되어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독일군은 종심방어선을 만들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 밀리자 더 이상의 방어선이 없었고 주요 다리를 파괴하지 않아 미군에게 그대로 넘겨주었다. 미군은 지뢰와 낙오부대의 기습 정도만 걱정할 정도였다. 
7월 29일, 4기깁사단장 존 우드John Wood는 아브헝슈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0일, 선봉대가 간발의 차이로 하우저와 참모부대를 놓쳤다. 31일, 브리트니로 이어지는 다리를 총 한번 쏘지 않고 확보했다. 31일에만 4,000명의 포로를 잡았고 뒤를 따르던 부대가 3,000명의 낙오병을 포로로 잡았다. 

 


클루게는 서부전선최고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하우서가 남동쪽으로 후퇴해 이 지경이 되었다고 비난했다. 참모장이 방어선을 어디에 구축했냐고 묻자, 클루게는 최고사령부가 달에 있냐고 비꼬았다. 
그는 미군이 아브헝슈를 점령하면 보카쥬를 벗어나 마음대로 진격할 수 있으며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클루게는 생말로St Malo 수비대를 빼내 다리를 다시 탈환하려고 했지만 이미 미군의 증원부대가 도착한 상태였다. 
최후의 수단으로 공군에게 폭격을 요청했다. 8월 2일, 연합군 전투기를 피해 도르니에Dornier Do-217이 Hs 293 무선조종미사일을 사용해 폭격했지만 4일 동안의 폭격이 실패하고 6대만 잃었다. 

 


8월 1일, 예정대로 미 1군은 12집단군에 편제되었다. 브리트니로 진격 중인 사단을 중심으로 패튼Patton의 3군이 새로 편제되었다. 브르통Bretons 주도 렌Rennes공항은 독일공군의 88mm 방어막에 막혀 탈환하지 못했다. 맹폭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증원이 보강되어 렌공항 공략은 실패했다. 
4기갑사단장 우드는 브리트니는 보병으로 탈환할 수 있기 때문에 전차부대는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8군단장 미들턴Middleton은 렌을 바로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드는 치명적인 시가전을 피해 도시를 포위하고 독일군의 증원을 차단했다. 
8월 3일, 하우서는 렌 수비대장에게 렌을 포기해도 좋다고 허락했고 2,000명이 포위망을 탈출했다. 8월 5일, 4기갑사단이 브리트니를 완전히 봉쇄했다. 독일군의 다급한 반격은 소용이 없었다. 

 


로리앙Lorient항도 독일군의 수비태세가 워낙 단단해서 기갑부대만으로는 공략할 수 없었다. 내륙은 대전차호와 지뢰 천지였고 해상쪽은 각종 해안포와 대공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2일 간의 정찰에서 약 500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지만 실제로는 대공포 80문, 야포 197문과 병력 25,000명이 있었다. 수비대장은 내부가 워낙 혼란스러워 미군이 며칠 만에 함락시킬 줄 알았다고 말했다. 
4기갑사단은 보병이 부족했고 미군교리는 요새화된 도시에 기계화부대를 투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쉘부르 등의 항구를 탈환했을 때에도 독일군이 미리 파괴시켜 잔해더미만 손에 넣었었다. 미군병참부대는 무리해서 항구를 탈환하지 말고 차라리 새 항구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미들턴은 6기갑사단에게 브레스트Brest를 빨리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자 자연스럽게 생말로가 고립되었다. 패튼은 6기갑사단에게 생말로 등의 요새가 버티면 그대로 지나치라고 명령했다. 
8월 5일, 83사단이 생말로를 맡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8월 7일, 8사단의 1개 연대, 전차와 항공기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했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8월 14일에 성채만 남겨두었다.

 


독일군은 18세기에 건축된 성채를 대대적으로 보강했고, 폭격기의 450kg 폭탄은 흠집 정도만 냈다. 1.3km 거리에서 8인치 포를 퍼부어서야 성채 수비대가 항복했다. 다른 요새들은 9월 2일까지도 공략하지 못했다. 생말로의 악전고투는 앞으로 남은 해안 요새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보병사단이 생말로를 공략하느라 고생하는 동안 6기갑사단은 브리트니 중앙으로 깊게 진입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지원을 받아 겨우 1개 기갑사단이 320km나 파고들었고 소규모 독일군 수비대를 포로로 잡았다 
8월 7일, 브레스트Brest에 도착했다. 1개 기갑사단으로 공격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했다. 브레스트는 343보병사단을 포함해 해군 등 온갖 잡다한 부대 15,000명이 있었다. 그리고 8월 중순까지 전선에서 밀려난 병력들이 몰리면서 35,000명까지 늘어났다. 
8월 8일, 행운을 바라고 항복을 권유했지만 바로 거절당했다. 독일군 266사단이 동쪽에서 브레스트 진입을 시도하면서 외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6기갑사단은 2일에 걸쳐 브레스트 외곽을 공격했다가 실패했다. 초대형화기와 대대적인 공습이 필요했지만 생말로에 이미 투입된 상태였다. 
8월 12일, 패튼은 브레스트의 포위망을 유지할 병력만 남기고 6기갑사단을 동쪽으로 보냈다. 브레스트는 9월 19일에 함락되었는데 항구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파리로 향하는 길이 열렸고 안트워프Antwerp 등 더 가까운 항구를 확보했기 때문에 로리앙 등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고 독일군 수비대는 2차대전 종전 후에 항복했다. 

 

폐허가 된 성채 지하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버텨 미친 인간이라는 별명을 얻은 안드레아스 폰 아울로크Andreas von Auloch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