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한 장면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전사이야기는 실생활에 조금도 도움이 안되는 잡상식일 뿐입니다. 너무 민감하게 또는 완고하게 반응하는 대신에 재미로만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엉터리 카더라식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고 외국학자의 정식출간자료를 인용했습니다.
1943년 7월 17일, 적군Red Army은 쿠르스크Kursk 돌출부를 없애려던 히틀러의 성채작전Operation Citadel을 저지하고 오히려 공세에 나섰다. 쿠르스크 북부전선에서 소련군은 만신창이가 된 곳일 9군을 마구 두들겼다. 하우프트만 롤프 헤닝Hauptman Rolf Henning전투단이 소련군의 반격을 막아섰다.
날이 저물기까지 전투단은 2.5km 거리에서 소련군 전차 22를 격파했다. 헤닝 혼자서 10대를 격파했고 헤르만 펠트하임Hermann Feldheim 중위는 11대를 격파했다. 쿠르스크에서 신형 중구축전차 페르디난트Ferdinand로 올린 대전과였다.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의 이름은 딴 신형전차는 나중에 엘레판트Elefant로 명명되었고 이후 대전차전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전투가 독일군의 승리가 멈춘 전투라면, 쿠르스크전투는 독일군의 패배가 시작된 전투입니다. 히틀러는 긁어 모은 귀중한 전력을 소련군의 밀집방어선에 밀어 넣었고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히틀러가 일부러 작전을 연기할 정도로 믿었던 페르디난트와 판터가 실전투입되었지만 기계결함이 컸고 지연된 시간만큼 소련군의 준비가 철저했습니다.
페르디난트의 원형은 전설이 될 타이거전차의 입찰경쟁에서 탈락했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친했던 포르쉐는 당연히 경쟁에서 이길 줄 알고 오스트리아 공장에 100대의 차체를 미리 만들어 두었다. 그렇지만 포르쉐 모델은 진흙주행이 어려웠고 구동시스템의 기계적 결함 때문에 탈락하고 헨셀Henschel 모델로 결정되었다.
그는 여분의 차체로 중구축전차를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포탑이 없는 페르디난트는 전면 200mm의 중장갑에 88mm Pak 43/2 대전차포를 장착해서 당시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전차였다. 1942년 1월에 90대의 차체를 신형중구축전차로 개조했다.
포르쉐가 개조작업을 감독했다. 전면에 구동부를 전투부는 중간에 엔진 2개는 뒤에 배치했다가 주포의 반동을 흡수할 수 있도록 포격납부를 차체끝까지 늘리고 엔진을 중간에 다시 배치했다.
1943년 2월 6일에 페르디난트로 이름을 붙였다.
포르쉐 모델의 타이거입니다. 킹 타이거도 헨셀형이 채택되었습니다.
6명의 전차병이 탑승했다. 운전병과 통신병은 전면에 앉고 전차장, 포수와 2명의 장전수는 전투부에 앉았다. 대전차전용이었기 때문에 88mm Pak 43/2 L71을 장착했다. 고정랙에 철갑탄과 고폭탄 36발을 장비했지만 최대 90발을 실을 수 있었다.
주포는 2.3km 거리에서 소련 IS-2 전면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고 IS-2는 500m 거리로 들어와야 페르디난트의 전면장갑을 격파할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독일 설계자는 기관총을 고려하지 않아서 실전에서 심각한 약점을 보였다.
실전을 위해 100mm의 전면장갑에 100mm의 보강장갑을 덧붙여 페르디난트는 무적이 되었다.
페르디난트 포수 엠마누엘 슐렌츠카는 “정면인 경우 엘레판트는 무적이었다. 심지어 소련 요세프 스탈린Josef Stalin중전차도 전면장갑을 여러 번 맞췄지만 무용지물이었다”라고 말한다.
차체 상부와 측면도 80mm였고 윗면과 아랫면은 20mm였다.
워낙 무거웠기 때문에 최전선에 정비창이 있었고 지뢰피해나 기계고장이 나면 소련내의 공장에서 거대한 크레인으로 페르디난트의 차체 상부를 들어올렸다.
256마력의 V-12 마이바흐Maybach HL 120 기솔린엔진 2개가 장착되었다. 비좁은 공간에 엔진2개, 연료통, 발전기와 구동모터가 있었기 때문에 흡기와 배기불량으로 과열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설계결함은 종전때까지 고쳐지지 않았다.
엔진음이 너무 커서 8km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거의 69톤이 나가는 거대한 전차를 지지하기 위해 전통적인 전차설계와 다르게 서스펜션에 리턴 롤러를 장착하지 않았다.
높이 3m, 길이(포신포함) 8.2m의 거대한 전차는 최고시속 (험지) 10km에 불과했고 작전거리도 (험지) 90km였다.
독일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초기 90대를 개수했다. 1943년 2월 16일에 오스트리아 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해서 3달 만에 마지막 전차가 나왔다. 3월 22일, 각각 45대의 페르디난트로 중구축전차대대 653과 654 2개를 편제했다.
그리고 6월 8일, 중구축전차연대 656을 편제했다. 이 연대에는 신형 4호돌격포Sturmpanzer IV도배치되었는데 다급한 상황 때문에 연대훈련을 할 시간이 없었다.
656연대는 6월 9일에 바로 오렐Orel로 향했다. 발터 모델Walter Model의 9군 41전차군단에 편성되었다. 가장 왼쪽에 배치되어 성채작전에서 첫번째 실전을 치렀다. 2개 대대는 86보병사단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적진을 돌파한 후에 654대대는 292보병사단을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오렐-쿠르스크철로가 경계선이었다.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페르디난트 6대가 고장으로 빠졌고 무척 나쁜 징조였다.
6월 5일 오전 3시 40분, 성채작전이 시작되었다. 656연대의 첫번째 목표는 소련군 방어선의 모서리 고지 257.7이었다. 강력한 주포와 장갑덕분에 페르디난트는 소련군의 첫번째 방어선을 돌파했다. 대전차포 여러 문과 T-34전차 26대를 격파했다고 보고했다. 그렇지만 10여대의 페르디난트가 지뢰에 파괴되었다.
적군은 대전차포가 무용지물이라고 판단했고 온갖 포를 집중시켰기 때문에 전차를 따르던 장갑척탄병은 이 전차를 무척 싫어했다.
소련군은 페르디난트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다른 전차처럼 트랙이 약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차체가 워낙 커서 모든 포병의 눈길을 잡아 끌 수 밖에 없었다. 포화를 함께 뒤집어 써야 했던 보병은 자연스럽게 페르디난트를 멀리 했고 페르디난트는 치명적인 설계실수로 대인 기관총이 없었다. 화염병으로 페르디난트를 격파했다는 소련군의 기록은 과장된 것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첫번째 방어선을 돌파하고 두번째 방어선도 무너트렸지만 겨우 12대만 움직일 수 있었다. 소련군의 지뢰와 대전차포가 페르디난트의 트랙과 서스펜션에 피해를 주었다. 전손은 2대가 전부였다.
다음 날, 페르디난트는 포니리Ponyri마을을 공격하다가 SU-152 중자주포와 교전을 벌였다. SU-152(그림 참조)는 원래 구축전차가 아니었지만 타이거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유일한 전차여서 구축전차로 사용했다.
3km 거리에서 벌어진 전차전에서 페르디난트 1대를 잃고 SU-152 여러 대를 격파했다. 88mm의 빠른 포속과 우수한 광학장치는 저속의 152mm 곡사포를 능가했다. 이후 며칠 동안 페르디난트는 포니리철도역 부분의 작전을 지원했다.
이제 가동전차는 한자리 수로 줄어들었다. 회수불가능한 4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수리를 받았다. 정비창은 만성적인 부품부족에 시달렸다. 그리고 독일군은 페르디난트를 견인할만한 회수전차가 없었다. 급히 3대를 회수전차Bergepanzer Ferdinand로 개조했지만 크레인 장착이 고작이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6월 11일까지 20대의 전차를 다시 복귀시켰고 소련군의 두번째 방어선을 돌파했다.
베르게판처 페르디난트 회수전차입니다. 중전차 회수전차는 워낙 적었기 때문에 절대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차나 장갑차로 견인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6월 11일, 포니리부근의 전투로 독일군의 인명과 장비 피해가 극심하게 늘었다. 소수의 페르디난트가 측면을 공격하는 소련군을 막아냈다. 일주일 동안 페르디난트 19대가 전손처리되었다. 이중 한 대는 소련군에게 넘어갔다(사진 참조).
12일부터 소련이 오렐돌출부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벌이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소련군은 9군의 북쪽에 배치된 2전차군을 노렸다. 656연대가 포니리전투를 계속 지원하는 동시에 페르디난트 10대가 북쪽으로 응급지원에 나섰다.
이후 며칠동안 페르디난트는 소련군전차를 대거 격파하면서 방어에 최적화된 움직이는 성채의 위력을 발휘했다. 6월 20일, 전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대부분의 전차를 기차에 태워 후방으로 이동시켰고 6대는 계속 남아 후퇴하는 독일군을 지원했다.
8월이 되면서 독일군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페르디난트 전손은 39대로 늘었다. 기계고장으로회수할 수 없는 20대는 자폭시켰다.
8월 6일, 654대대는 모든 전차를 653대대에게 넘겨주고 프랑스로 가서 45톤의 야크트판터Jadpanther로 재편했다. 히틀러는 모든 페르디난트를 정비창으로 보내 대대적인 수리를 받게 했다. 페르디난트는 새 트랙과 엔진 등을 교체했지만 656연대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설계변경은 없었다.
9월 말, 대대적인 수리를 받아야 하는 40대가 니코폴Nikopol로 갔고 10대는 드니에페르Dnieper강교두보에 배치되었다. 페르디난트는 귀중한 기동전력으로 10월 10일에는 48대의 전차를 격파하며 소련군의 침투를 막았다.
크리프이 리Krivoj Rog에서는 전차 21대와 대전차포 34문을 격파했다. 연대기록에 따르면 7월 5일~11월 5일까지 전차 582대, 대전차포 344문, 야포 133문, 돌격포 3대, 대전차총 103정과 항공기 3대를 격파했다. 얼마나 많은 병사를 사살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12월, 페르디난트를 모두 오스트리아로 보내 수리와 개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1944년 1월, 그렇게 바라던 수리와 개수작업이 시작되었다. 차체 기관총, 3호전차와 같은 7개 거울의 전차장 큐폴라, 차체 아래의 30mm 보강장갑 등의 작업이 있었다. 1월 22일, 연합군이 안치오Anzio에 상륙해 로마Rome 남부방어선을 위협하자 다시 전선으로 급히 출동했다.
2월 15일, 653대대의 1중대가 페르디난트 11대, 회수전차 1대와 정비분대 1개를 받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2주 후에 안치오에 도착해 79전차군단에 편제되었다. 중전차는 이탈리아 산악지대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69톤의 무게도 이탈리아의 열악한 다리와 교량을 통과할 수 없었다.
페르디난트는 오래된 로마다리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다. 적과 교전을 벌이기도 전에 사고와 지뢰로 2대를 잃었다.
5월, 독일은 엘레판트로 이름을 바꿨다. 연합군이 안치오 교두보를 확장하자 남은 엘레판트 9대는로마로 가는 아피아 가도Via Appia를 따라 배치되었다. 1중대는 며칠만에 연합군전차 여러 대를 격파했지만 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연합군전폭기에 2대를 잃었고 회수할 수 없는 1대는 자폭시켰다. 미군은 버려진 엘레판트를 가져갔다. 6월 21일, 3대의 엘레판트와 회수전차 1대만 움직였다. 1944년 여름 동안, 1중대는 북쪽으로 퇴각했다가 수리를 받으러 빈Vienna로 돌아갔다.
1중대가 이탈리아에서 격전을 벌이는 동안 독일국방군Wehrmacht은 2개 중대를 새로 편성했다. 1944년 4월 2일, 총 31대의 엘레판트, 회수전차 2대와 지원차량을 폴란드 베레즈하니Brzezany로 보내 9 SS기갑사단에 편제했고 타른노폴Tarnoppol 구원전투에 투입되었다.
진흙탕에서 엔진이 과열되어 여러 대를 잃었지만 여전히 부품부족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나머지 엘레판트는 4월 말에 스트리파Strypa강을 건너는 소련군을 막았다. 엘레판트는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소련군 지휘관은 전차대신에 대전차포와 야포를 집중 배치했다.
5월 내내 전선은 비교적 안정되었고 독일군은 다시 수리를 할 여유를 가졌다. 겨우 7대가 수리를 받고 복귀해 28대로 늘어났다. 7월 13일, 소련군이 중앙집단군Army Group Center에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으면서 전선이 무너졌다. 653대대는 포모르조니Pomorzony에서 후위를 맡았다. 독일은 7월 말에 남은 12대를 철수시켰다. 엘레판트 손실은 대부분 회수할 수 없어서 자폭시킨 것들이었다.
653대대는 위기에서 벗어나자 마자 폴란드 크라코프Krakow에서 재정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중대의 전차 2대가 복귀해 14대가 가동되었다. 남은 엘레판트를 하나의 엘레판트중대로 합쳤다. 7월 말, 엘레판트중대는 17군에 편제되었고 다른 2개 중대는 야크트타이거Jagdtiger로 무장했다.
엘레판트중대는 몇 개월 동안 크라코프 일대에 주둔했다. 12월 15일, 4전차군 중구축전차중대 614로 편제된 후에 키엘체Kielce로 이동했다. 1945년 1월 12일, 적군은 비스와-오데르Wisla-Odra강 전체에 공세를 시작했다. 중대는 계속 후퇴했다.
4대의 엘레판트만 남았고 수리를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1개월 후, 4대의 엘레판트는 베를린 남쪽에서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4월 22일, 조센Zossen에서 전투를 벌였다. 기계고장으로 2대를 방기했고 나머지 2대가 베를린전투에 참전했다. 한 대는 칼-아우구스트Karl-August광장에서 다른 한대는 트리니티교회Trinity Church에서 전투를 벌였다. 소련군은 2대 모두를 노획했다.
페르디난트(엘레판트)전차는 부족한 출력과 기동력뿐만 아니라 기계결함이 끊임없이 발생했지만 그 당시 최고의 중구축전차로 10대 1의 교환비율을 보였다. 소련군이 가장 두려워한 중전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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