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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서부전선의 대반전 - 블루코트작전

by uesgi2003 2020. 7. 23.

(서부전선의 대반전 시리즈는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코브라작전부터 읽어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미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토막 내자, 몽고메리는 클루게가 미군에게 반격을 가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기로 했다. 7월 27일, 몽고메리는 돌파작전이 시작되었고 영국군 전선에서도 보조를 맞춰 진격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클루게가 영국군이 캉 부근에서 돌파할 것을 예상하고 누와예Noyers 동쪽에 6개 전차사단을 모아 두었기 때문에 누와예 서쪽으로 총력돌파해 독일군을 묶어 두고 미 1군의 왼쪽에서 나란히 진격해야 한다고 영국 2군 지휘관 뎀프시Dempsey에게 말했다. 작전명 블루코트Bluecoat였다.

 

 

왼쪽이 뎀프시, 오른쪽이 몽고메리입니다. 


7월 28~29일, 영국군 전선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8, 30, 12, 캐나다 2와 1 군단 순서로 재정렬하느라 혼란스러웠다. 반대편에서는 독일군 326, 276, 277, 271보병사단, 21전차사단, 중전차대대 1개가 있었고 보병사단 2개와 전차사단 1개가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겉만 보면 영국군이 전차에서 3:1, 보병에서 2:1의 우위였지만 실제로는 독일군 사단은 병력이 크게 부족했고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포병과 공군전력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독일군에게 유리한 것이라고는 지형밖에 없었다. 보카쥬는 프랑스 특유의 험지로, 높은 관목이 우거져 있는 오솔길로 양방향 통행이 불가능했고 다리는 오래되어서 전차가 지날 수 없었다. 

 

 

복잡하지만 그래도 확대해서 참조하시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8과 30군단이 꼬몽Caumont에서 비흐Vire와 오른Orne 사이로 진출해서 독일군이 몽빵송Mont Pincon에 집결해 후퇴하지 못하게 막기로 했다. 뎀프시가 미군과 보조를 제대로 맞춰 진격하면 독일군의 오른-캉 방어선은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왼쪽의 30군단은 43웨섹스Wessex사단과 50노섬브리아Northumbrian사단이 투입되고 오른쪽의 8군단은 15스코티시사단과 11기갑사단이 투입되었다. 일단 독일방어선을 돌파하면 8군단의 근위기갑사단과 30군단의 7기갑사단이 전선을 확대시키기로 했다. 
8과 30군단이 서쪽에서 진격하는 동안, 12군단은 오른강으로 진출해 독일군에게 압박을 가할 예정이었다. 몽고메리는 독일군을 기습하기 위해 선제포격이나 폭격을 하지 않았다. 주요 거점에 대해서만 포격하고 전선을 돌파하면서 영국공군과 미9항공단이 폭격하기로 했다. 전폭기가 특정 목표물에 대해서만 정밀폭격하기로 했다. 

7월 30일 오전 6시, 30군단이 블루코트작전을 시작했다. 가장 왼쪽의 50사단 231과 56여단이 독일군 326과 276보병사단 중간을 끊었고 43사단의 130여단은 나란히 서쪽으로 진격했다. 8군단도 한시간 후에 공격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한동안 전선을 유지했었기 때문에 강력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왕립공병대와 79기갑사단의 지뢰제거Flail전차가 지뢰밭에 통로를 만들었다. 지뢰밭의 규모는 예상을 뛰어넘었고 많은 피해가 발생하며 발목을 잡았다. 8군단의 처칠전차 7대와 셔먼지뢰제거전차 2대가 몇 백미터도 못 가 주저 앉았다.
30군단은 강력한 저항에 막혀 첫날에 최대 5km 돌파가 고작이었다. 8군단은 형편이 좀 더 나았다. 스코티시사단돠 6근위기갑여단은 저녁에 목표인 309지점을 점령했고 독일군은 다급하게 반격에 나섰다. 야크트판터Jagdpanther 3대가 언덕 반대편에서 내려와 처칠전차 여러 대를 격파했다. 곧바로 반격을 받아 2대가 궤도파손으로 버려지고 1대는 후퇴했다. 

 

 

연합군, 특히 영국군은 처칠Chuchill전차를 이용해 특수목적전차를 많이 투입했습니다. 독일군의 무시무시한 지뢰밭 개척을 위해 지뢰제거용 도리깨를 달아 두들겨 폭발시켰습니다. 

반면에 독일은 아래사진처럼 밟아서 터트리는 전차를 채택했습니다. 당연히 효과도 적었고 계속 충격을 받아 고장나기 일쑤였습니다. 

 


영국군은 독일군 74군단을 정면돌파하면서 미군의 진격을 막던 2공수군단의 측면을 위협했다. 클루게는 만신창이 상태인 21전차사단을 이동시키고 2공수군단의 퇴각을 허락했다. 단단하던 독일군 방어선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7월 31일, 50사단은 독일군 276사단의 저항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측의 43사단도 2개 마을을 점령하는데 하루를 다 보냈다. 7기갑사단을 남동쪽으로 투입해 독일군 방어선 배후로 침투하기로 했다. 
제대로 된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기갑사단은 좁은 길에서 헤맸고 전투가 거의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8km 전진이 전부였다. 30군단은 전체적으로 실망스러웠다. 
반면에 8군단은 계속 전진했다. 스코티시사단은 309지점의 전선을 확대하면서 급히 달려온 독일군 21전차사단과 마주쳤다. 21전차사단이 반격을 위해 집결할 때마다 연합군 전폭기와 포탄이 날아들었다. 영국공군 타이푼전폭기 5개 편대는 아침내내 공습을 퍼부어 전차 30대를 격파했다. 11기갑사단은 아직 파괴되지 않은 다리를 확보하고 비흐강 15km 앞까지 전진했다. 


서부전차군Panzer Group West(또는 5기갑군)의 에버바흐Eberbach는 21전차사단의 반격이 막히자 74군단의 방어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여기를 돌파당하면 7군과 단절되고 전체 방어선이 무너질 판이었다. 
클루게에게 다른 전차부대로 꼬몽을 방어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마침내 캉 남쪽에 있던 2SS전차군단을 이동시키기로 했다. 21전차사단과 함께 3개 전차사단으로 영국군의 진격을 막기로 했다. 10SS전차사단 프룬츠베르크Frundsberg가 7기갑사단을 맡고, 9SS전차사단 호헨슈타우펜Hohenstaufen이 영국군 교두보를 밀어낸 후에 2공수군단과 방어선을 잇기로 했다. 
8월 2일, 영국군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때마침 독일군 9SS전차사단의 일부가 도착해 본격적인 저항이 시작되었다. 8월 3일, 10SS전차사단이 반격하면서 7기갑사단은 전날 출발했던 위치로 밀려났다. 

몽고메리는 30군단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30군단장 버크놀Bucknall, 7기갑사단장 어스킨Erskine과 22기갑여단장 힌디Hinde를 경질했다. 특히 최정예 ‘사막의 쥐Desert Rats’ 7기갑사단이 실망스러웠다. 몽고메리는 일부러 이 사단을 지중해에서 노르망디로 이동시켰고 중심이 될 줄 알았다. 신임 사단장 버니Verney는 사단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데 성공했고 병력을 보충해서 종전까지 기대한 역할을 다 해냈다. 
8월 4일, 호록스Horrocks가 30군단을 맡았다. 그는 몽고메리가 신임하는 지휘관으로 알라메인Alamein 등에서 활약했고 튀니지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1년 동안 물러나 있었다. 가장 필요한 시기와 위치에 맞는 인재였다. 

미군은 코브라작전으로 독일군을 아브헝슈 너머로 밀어냈고 독일군 방어선은 이제 후방에 고립된 수비대가 고작이었다. 8월 1일, 패튼Patton의 미 3군이 편성되어 프랑스 북서부의 빈틈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갔다. 
8월 3일, 클루게Kluge는 독일 최고사령부의 경악스러운 명령을 받았다. 서부전선이 통째로 사라지게 될 명령이었다. 히틀러는 보병사단으로 비흐와 오른 방어선을 지키고 좌측에 기갑사단들을 투입하기로 했다. 
기갑병력을 모흐땅Mortain에 집결시켜 브리트니Brittany와 루아르Loire로 진격하는 미 3군을 고립시켜 궤멸시킨다는 계획이었다. 6월 6일 이후부터 엄청난 연합군공군이 독일군의 대규모 이동을 모조리 차단했고 연합군육군 전력도 이미 독일군을 몇배나 뛰어넘었기 때문에 미친 작전이었고 클루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7군과 서부기갑군(5기갑군)을 세느Seine강으로 바로 후퇴시키고 새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명령에 따라 전차부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동시에 몽고메리는 연합군 4개 군에게 대대적인 공격명령을 내렸다. 좌측을 고정시키고 우측으로 강공한다는 계획은 그대로였다. 영국과 캐나다군이 독일기갑부대를 묶어두고 오른과 팔레즈Falaise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미군은 이미 서쪽으로 돌아 브리트니와 루아르를 돌파했고 동쪽으로 다시 방향을 바꿔 북동쪽 파리와 세느강 하류로 진격하기로 했다. 공수부대가 샤르트르Chartres를 확보해 독일군의 퇴각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히틀러의 오판은 8월 4일 오전부터 재앙의 조짐이 보였다. 영국 12군단은 전방의 독일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지뢰밭에 길을 낸 후에 2달 동안 고생하던 도시를 탈환했다. 그리고 50사단과 같이 노르망디상륙 후에 휴식을 가지지 못했던 병력을 예비대로 돌렸다. 
이제 2군은 전략요충지 몽빵숑 고지를 눈앞에 두었다. 이 고지에서 주변을 모두 내려다보며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독일군은 절대로 내줄 수 없는 방어선의 중심이었다. 43웨섹스사단이 고지점령을 맡았다. 
웨섹스사단은 모든 대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을 정도로 고전하다가 방치된 오솔길을 발견하고 정상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튿날 전차와 보병부대가 증원되었고 블루코트작전의 결정적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8월 5~7일, 패튼은 3개 군단을 독일군 7군 배후까지 진격시켰다. 

 

히틀러는 전방의 상황을 모르거나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미군의 보급과 통신이 아브헝슈의 좁은 통로에 몰려 있기 때문에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모흑땅Mortain에서 바다쪽으로 대규모 기갑부대를 투입해 미 3군의 배후를 끊으면서 7군과 방어선을 다시 연결하고 다시 미 1군의 배후로 돌라는 명령을 내렸다. 
실현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연합군공군은 무시하고 반대로 몇주째 악전고투로 전력이 바닥난 전차사단을 과대평가했다. 히틀러는 9전차사단을 아비뇽Avignon에서, 708보병사단을 후와양Royan에서 빼내기로 했지만 작전 개시까지 도착하지도 못하고 미 3군에게 가로막혔다.
클루게는 무너지고 있는 전선에서 병력을 빼내서 반격을 준비해야 했다. 에버바흐Eberbach는 5기갑군이 영국군을 막고 있어서 빼내면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한다고 설명했고 클루게도 동의했다. 히틀러의 강요에 못이긴 클루게는 47XLVII전차군단의 1과 2SS전차사단, 2와 116전차사단, 17SS기갑척탄병과 275보병사단으로 반격을 시작하기로 했다. 47전차군단은 전차 120대와 돌격포 32문 만으로 연합군의 전선을 뚫고 바다로 향해야 했다. 
8월 7일, 뤼티흐Luttich(뤼에쥬)작전이 시작되었지만 브래들리는 암호해독과 공중정찰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모흑땅에 30보병사단을 배치해 두었고 2SS전차사단 다스 라이히는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317고지에서 30보병사단을 쫓아내지 못했다. 작전개시 24시간 만에 브래들리는 7개 사단을 투입했고 독일군의 반격은 완전히 무산되어 출발점으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