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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믿거나 말거나, 토막 전사 (1부)

by uesgi2003 2020. 10. 10.

릭 베이어Rick Beyer의 100가지 가벼운 전사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상세한 전사 이야기도 갑론을박이 있는데 이처럼 가볍고 짧은 이야기는 축약과 오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재미로만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 신성부대Sacred Band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는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두려운 전사집단이었다. 스파르타만큼 무술에 전념한 국민이 없었다. 스파르타 소년은 7살에 집을 떠나 군사학교에 입학했고 20~60살의 남성은 현역으로 복무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자리잡았다. 
그렇지만 막강한 스파르타군도 기원전 371년에 벌어진 레우크트라Leuctra전투에서 테베(테바이)Thebes군에게 패전했다. 신성부대로 알려진 테베 정예부대가 스파르타 우익을 돌파하면서 승패가 결정되었다. 그리스 역사를 바꾼 신성부대 300명은 모든 것을 공유한 동성애자였다. 

 


150명의 동성애커플은 자신의 연인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연인에게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극한의 전투력을 발휘했다. 연인부대로 구성된 테베 신성부대는 다른 어떤 부대보다 단결했다고 한다. 
신성부대는 30년 이상 무적의 부대였다. 마케도니아Macedonia에게 패전하자 단 한 명도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다. 

 



참고로 스파르타는 말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 스파르타는 라코니아Laconia의 일부였고 그래서 말수가 적은Laconic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필리포스Philip 2세가 “내가 라코니아에 발을 들여 놓으면 폐허로 만들겠다”고 스파르타를 협박하자 스파르타는 “올 수 있다면…”이라며 짧게 대응했다.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의 비밀무기

기원전 213년, 마르쿠스 클라디우스 마르켈루스Marcus Claudis Marcellus의 로마함대가 그리스 도시국가 시라쿠스Syracuse를 공격했다. 그는 5일 만에 도시를 점령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한 노인에 막혀 일년동안 고전했다. 바로 아르키메데스였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나체로 뛰어나와 거리를 달린 유레카Eureka!로 더 유명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이자 발명가로 아인슈타인Einstein과 에디슨Edison을 합쳐 놓은 천재였다. 시라쿠스 왕의 군사고문으로 도시방어용 기계를 만들었다. 로마군이 접근하자 신비의 방어기계를 투입했다. 
거대한 돌덩이를 날릴 수 있는 대형 투석기와 짧은 화살을 쏠 수 있는 스콜피온이라는 작은 투석기가 있었고 로마함선을 바위로 잡아 올려 부수는 거대한 기중기도 있었다. 쥐덫과 같은 기계는 로마군의 공성탑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반사경도 있었다. 
여러 기록을 보면, 그는 여러 개의 반사경을 만들어서 태양열을 전함에 쏘아 불을 질렀다고 한다. 고대의 레이저 공격무기였다. 로마군이 얼마나 공포에 질렸던지 시라쿠스 성벽 밖으로 뭔가가 나오기만 하면 새로운 비밀병기라고 생각하고 도망쳤다. 

 

 

플루타르크Plutarch는 로마군이 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마르켈루스는 무력으로 도시를 점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포위한 채로 시간을 끌다가 허점을 찾아냈다. 아르키메데스는 로마군에게 살해당했지만 노인 한 명이 로마군단을 상대로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많은 역사가는 반사경 기록을 믿지 않는데, 1747년 프랑스과학자 조르주루이 루이 르끌레르 드 뷔퐁Gerorge Louis Leclerc de Buffon이 반사경 기술을 성공시켰다. 그는 거울벽을 만들어 60m 거리의 숲 일부를 불태웠고 자신의 이름을 유럽 전체에 알렸다. 


성벽을 상대한 성벽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6년만에 처음으로 패전을 당했다. 마침내 단결한 골Gaul족이 카이사르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군량이 부족했고 증원은 불가능했다. 카이사르는 전사상 가장 무모하면서 창의적인 반전을 이끌어냈다. 
기원전 52년, 카이사르는 골족 8,000명이 요새도시 알레시아Alesia에서 나오지 않자 도시를 포위하는 성벽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그 순간 200,000명의 골족이 로마군을 격파하고 도시를 구원하려고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오히려 카이사르가 포위된 상태였다. 

 


카이사르는 천재전략가였다. 그는 군단에게 두번째 성벽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첫번째 성벽은 도시를 향해, 두번째 성벽은 접근하는 골족을 향해 세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보다 더 많은 적을 포위하고 다시 엄청난 수의 적에게 포위당했다. 6배가 넘는 골족을 상대로 양면에서 전투를 벌였다. 
카이사르는 불가능했던 전쟁을 승리로 바꾸었고 예비병력을 직접 이끌고 성벽 밖으로 나가 골족을 공격했다. 그는 포위군을 격파하고 알레시아의 항복을 받아냈다.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골족은 로마의 뜻을 따랐고 카이사르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서 황제의 자리로 향했다. 

 


카이사르 군단의 이중 성벽은 전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건축물 중 하나다. 기초토대, 성벽, 나무감시탑, 방어용 말뚝 등을 갖춘 매우 정교한 성벽이었다. 놀랍게도 로마군은 한달도 안되어 이중 성벽을 완성했다. 
포로가 된 골족은 로마군의 노예가 되었다.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카이사르는 다른 도시를 더 함락시킨 후에는 저항한 모든 포로의 손을 잘라내서 보복성 경고를 했다. 카이사르는 8년동안 골족을 정복하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지휘관으로 이름을 남겼지만 1백만명이 죽고 1백만명이 노예가 되었고 800개의 마을과 도시가 폐허가 되었다. 


 

켈트 전사여왕(60년)

여성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여왕 부디카Boudicca는 한을 품은 정도가 아니었다. 로마군은 이케니Icani족의 왕을 죽인 후에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그의 가족을 학대했다. 부디카는 항의하다가 매를 맞고 딸들은 성폭행당했다. 
로마군은 그 대가를 치렀다. 부디카는 복수를 다짐하며 켈트Celt족을 집결시켜 로마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로마 식민지 콜체스터Colchester를 공격해 주민을 학살하고 모두 불태웠다. 로마 9군단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매복해 있다가 로마보병 1,500명을 전멸시켰다. 

 


로마총독은 그녀가 런던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도시를 버렸다. 부디카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훼손시켰다. 런던은 잿더미로 변했다. 

 


로마군도 전투를 많이 겪었지만 그녀의 잔인함에는 눈을 감았다. 로마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부디카가 70,000명 정도의 병사와 시민을 죽였다고 추측하며 “영국원주민은 목을 자르고 매달고 태우고 말뚝에 박았다고”기록했다. 
로마군은 병력을 집결시켜 부디카와 결전을 벌였고 켈트군은 격파했다. 켈트족 수만명이 전사했고 부디카는 포로대신에 자살을 선택했다. 로마는 이후 300년 이상 영국을 통치했지만 부디카의 이름을 절대로 잊지 못했다. 

부디카의 런던약탈은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고고학자는 1m 정도의 잿더미 층을 발견했다. 

 




제국을 구한 무희(532년)

테오도라Theodora는 스트립쇼 무희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 서커스에서 사자와 함께 반나체로 춤을 추었다. 황제의 조카이자 비잔티움Byzantine제국의 차기 황제인 유스타니아누스Justinian이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가 황제에 오르면서 천한 신분이었던 테오도라는 황후가 되었다. 황제가 그녀를 구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황제를 구하게 된다. 
몇 년 후에 과세에 반란이 일어났고 거리는 성난 시민으로 가득 찼다. 유스타니아누스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황제는 공포에 질려 달아나려고 했다. 배를 준비시키고 아내와 함께 언제라도 달아날 준비를 했다. 
테오도라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렵게 오른 황궁생활을 버리느니 죽기로 했다. 테오도라는 남편에게 “명예롭게 죽는 편이 낫다Royalty is a good burial shroud”라며 진정시켰다. 그녀의 설득에 용기를 얻는 황제는 황제군을 보내 폭도를 진압했다. 
두 사람은 이후 20년 동안 통치했으며 황제는 테오도라보다 17년을 더 살았다. 

상원의원은 창녀와 다를 바 없는 배우나 무희와 결혼할 수 없었따. 유스타니아누스는 황제를 설득해 금지법을 폐지하고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이슬람의 첫번째 유럽침공

610년, 천사 가브리엘Gabriel이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의 꿈에 나타나면서 이슬람이 창시되었고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무함마드가 죽고 100년 후인 732년에는 인도부터 스페인에 걸쳐 아랍제국이 만들어졌고 무슬림은 3천 만명으로 늘어났다. 이슬람이 유럽 전체를 장악할 것처럼 보였다. 
북아프리카의 무어족Moors이 가장 위협적이었고 무력으로 이슬람을 포교했다. 8,000명의 무어족이 스페인을 통과해 피레네Pyrenees산맥을 넘어 프랑스에 들어섰다. 아랍 역사가는 “시미타Schimitar앞에 모두 항복했다”고 기록했다. 무어족은 이제 파리에서 160km 거리까지 진격했다. 
절대절명의 순간에 프랑크Franks왕 카롤루스Charles이 나섰다. 그는 파리에서 나와 군대를 이끌고 남진해 투르Tours에서 무어족을 상대했다. 프랑크보병은 무어기병의 공격을 막아냈고 적을 격파했다. 
투르전투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무어족이 승리했다면 유럽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카룰로스는 망치왕Charles Martel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피사의 사탑


832년, 사라센Saracen이라고 불리는 아랍, 베르베르Berber, 스페인 무어인이 시실리Sicily를 침략했다. 50년 만에 섬 대부분을 장악했고 이후 200년 동안 통치했다. 
1004년, 사라센은 이탈리아 도시국가 피사Pisa를 약탈했다. 피사주민은 전사가 아니라 상인이었지만 사라센에 대항하기 위해 함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반격에 나서 시실리의 수도인 팔레르모Palermo를 공격했다. 사라센 선박을 격침시키고 도시를 약탈했다. 사라센 선박 한 척만 남겨두었다가 약탈물을 수송하는데 사용했다. 
대성당을 짓는데 약탈물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종탑이 없는 상태로 지어져서 1172년, 부유한 미망인 종탑건축을 위해 큰 돈을 유산으로 남겼다. 종탑건축이 곧바로 시작되었지만 플로랑스Florence 등의 다른 이탈리아 도시국가와의 전투 때문에 지연되었다. 종탑건축에만 20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종탑은 무른 땅 위에 그것도 기초를 제대로 다지지 않고 만들었다. 심각한 결함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 탄생했다. 이슬람의 침공, 미망인의 유산 그리고 심각한 결함으로 피사의 사탑Leaning Tower of Pisa가 탄생했다. 

 


1944년 여름, 미육군 레온 웩스타인Leon Weckstein하사가 사탑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독일군이 사탑을 관측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웩스타인하사가 독일군의 존재를 확인하고 포격을 요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단 한 명이라도 발견하면 즉시 포격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독일군의 흔적이 없었고 천만다행으로 역사의 걸작이 살아남았다. 
피사의 사탑은 첫번째 위원회가 안정성을 조사한 1298년에도 완공되지 않았다. 17번의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7번째 위원회의 노력 덕분에 피사의 사탑이 수백 년 동안 버틸 수 있었다.

 




최초의 테러단체

11세기, 테헤란Teheran 외곽이 산성에 과격 이슬람 분파인 시아파Shiites가 살고 있었다. 세력을 확장하면서 중동의 성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시아파는 이슬람 지도자에게 도전하며 정치지도자를 암살했다. 그들은 주로 단검으로 왕자, 학자, 십자군과 칼리프Caliph 등 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을 암살했다. 
현재의 알카에다Al-Qaeda와 비슷했다. 그리고 정치와 종교목적은 물론이고 군자금을 걷기 위해 테러를 벌였다. 암살과 테러를 자행하면 영원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150년 동안 위세를 떨쳤다. 1200년대에 칭기스 칸의 손자 훌라구Hulagu가 산성 본거지를 점령하면서 테러도 끝났다. 
십자군이 귀국하면서 이야기는 전설처럼 포장되었고 지금까지 공포스러운 존재로 남아있다. 정치지도자가 암살될 때마다 시아파 암살자의 이야기가 부활했다. 

광신도집단 하시시Hashishi가 잘못 전해져 암살자Assasin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십자군은 테러리스트가 하시시(대마)를 먹는 사람으로 오해했고 공포에 악명까지 더해졌다. 외부 방문자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자랑하기 위해 두 명의 신도에게 성벽에서 떨어지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산 에 사바흐Hassan I Sabbah가 암살조직을 만들었고 아들 두 명도 처형했다. 한 명은 술을 마셨다는 이유였다. 암살조직은 적과 아군의 경계가 모호해서 십자군 지도자를 암살하면서도 필요한 경우에는 십자군을 위해 이슬람 지도자를 죽였다. 




볼로하이Volohai의 참새

칭기스 칸Genghis Khan은 몽골부족을 통일하고 막강한 몽골군을 이끈 군사지휘관이었다. 1207년, 몽골군은 고비Gobi사막을 건너 중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볼로하이의 성벽 앞에서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몽골군의 장기인 기병만으로는 단단한 성벽을 공략할 수 없었다. 
징기스 칸은 전략을 바꾸었다. 고양이 1,000마리와 참새 10,000마리를 내놓으면 포위를 풀고 물러가겠다고 제안했다. 수비군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징기스 칸의 계략에 걸려 들었다. 
공물을 받은 몽골군은 꼬리에 목화뭉치를 매달고 불을 질렀다. 공포에 질린 동물은 도시 안으로 도망쳤고 성벽 안에서는 동시에 수많은 화재가 일어났다. 주민이 불을 끄는 동안 몽골군이 공격했다. 
볼로하이가 함락되었고 70년 후에 중국(남송)도 그 뒤를 따랐다. 

 


징기스 칸은 새로 정복한 지역주민을 앞세우는 전술을 즐겼다. 수비군이 동족에게 화살을 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몽골군이 성벽에 접근했다. 
볼로하이에서 고전한 징기스 칸은 중국인을 동원해 투석기, 화약과 공성탑을 사용했다. 덕분에 아무리 단단한 성도 함락시킬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군비경쟁

역사상 첫번째 군비경쟁은 중국화학자가 개발한 화약과 함께 시작되었다. 중국화약은 10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00년 후에 중국에서 대포가 사용되었지만 위력이 너무 약했다. 200년 후에 유럽에서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대포는 중요한 무기로 자리잡았다. 유럽은 원시적인 포격수준을 기적의 무기로 발전시켰고 전세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대포를 먼저 사용했는데 어떻게 유럽이 군비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질산칼륨 3/4에 석탄과 유황을 섞은 화약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질소칼륨은 동물 배설물에서 대량으로 구할 수 있었는데 유럽이 중국보다 훨씬 많은 가축을 키웠고 그만큼 화약을 만들기 쉬웠다. 질소칼륨 비율이 적은 중국화약은 성능이 크게 떨어졌다. 
유럽은 강력한 화약으로 대포의 성능을 크게 높였다. 근거없는 주장이 아니다. 

유럽에 대포가 전해지자, 모든 영주와 왕족이 대포를 원했다. 그렇지만 대포는 비쌌고 현금이 귀했다. 체코에서 은광이 발견되었고 수백만 개의 은화 탈레스Thalers(달러)가 발행되었다. 탈레스가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군수산업도 급격하게 성장했다. 
1300년대 중국기술자는 대포와 투석기로 쏘는 폭탄에 주력했다. 

 




미국역사상 최악의 지휘관

미국인이 아니어도 워싱턴, 그랜트, 아이젠하워 등, 미국의 위대한 지휘관 이름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역사상 최악의 지휘관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제임스 윌킨슨James Wilkinson으로 그의 이력서는 부패와 반역으로 가득 채워졌다. 

 


- 미국독립전쟁 중, 그는 워싱턴을 제거하려고 했다. 나중에 에론 버Aaron Burr와 결탁해서 주 몇 개를 분리시켜 독립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버를 밀고했다. 
- 미군 장성으로 복무 중, 스페인에 정보를 팔아 넘겼다. 스페인 문서를 보면 그를 비밀요원 13호로 불렀고 급여를 지급했다. 심지어 스페인왕에게 충성맹세를 했다.
- 대륙군 군복담당 장군으로 임명되었지만 공금횡령이 드러나 사임했다. 
- 1812년 캐나다침공에서 결정적인 오판으로 미군 4,000명이 캐나다군 180명에게 패했다. 술과 마약에 찌들어 패전 자체를 몰랐다는 주장도 있다. 

 


온갖 부패와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1796년 대륙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그는 음모를 즐겼고 강자에게 조아리는 아첨꾼이었다. 3번의 군사재판, 여러 번의 의회와 위원회 조사를 빠져나갔다. 제임스 윌킨슨장군은 범죄자, 스파이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은 놈이 강한 놈’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를 몇 가지 인용하면 “전투는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지만 군사재판은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장군”, “윌킨슨의 지휘를 받느니 자살하겠다”, “천수를 누린 최악의 악당”, “자신이 주장한 모든 것을 배신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