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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믿거나 말거나, 토막 전사 (2부)

by uesgi2003 2020. 10. 16.

릭 베이어Rick Beyer의 100가지 가벼운 전사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상세한 전사 이야기도 갑론을박이 있는데 이처럼 가볍고 짧은 이야기는 축약과 오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재미로만 보시기 바랍니다. 

 

 

국가를 위협하는 축구

1314년, 영국 에드워드Edward 2세는 축구게임을 금지한다는 왕명을 내렸다. 그가 축구를 싫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인기가 좋아서 영국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축구를 하다가 잡히면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는 경고였다. 
에드워드 3세, 리차드 Richard 2세, 헨리Henry 4세도 금지령을 내렸다. 스코틀랜드 제임스James 2세는 1457년에 축구와 골프를 금지시켰다. 제임스 4세는 “축구, 골프, 기타 생산성없는 스포츠는 왕국 어디에서도 할 수 없다”고 엄명했다. 
도대체 축구, 골프, 기타 비생산적인 스포츠가 왜 왕국을 위협했을까? 당시 영국은 장궁병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스포츠 때문에 궁술연마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모두 숙련된 궁병이 없으면 전쟁에 대응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왕령은 스포츠 열기를 이길 수 없었다. 왕명은 무시되었고 잊혀졌다. 축구와 골프는 계속 퍼져 나갔고 왕은 속앓이를 했다. 

모든 왕이 골프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스코틀랜드 메리Mary여왕은 골프 광팬이었다. 남편의 사망 직후에 골프를 즐겨 1563년에 그 대가를 치렀다. 

 



설득력 만렙의 잔다르크

1428년, 영국군을 상대로 오를레앙Orleans을 탈환한 잔다르크Joan of Arc는 17살의 농촌 소녀였다. 그녀는 13살에 영국군을 격파하고 샤를 도팽Charles the Dauphin(왕세자의 즉위를 도우라는 성령을 받았다. 여성이 재산취급 받던 당시에 그녀는 상상을 뛰어넘는 대활약을 했다. 


- 그녀는 친척에게 부탁해 지역군 사령관에게 갔다. 
- 사령관을 설득해 군호위를 받으며 왕세자에게 갔다.
-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왕세자를 만나야 한다고 신부들을 설득했다. 
- 단 5분 만에 왕세자에게서 군대를 받아냈다. 
- 당황한 기사와 병사들이 17살 소녀의 지휘를 받게 설득했다. 심지어 욕설과 성행위를 하지 못하게 금지했다. 
- 지희관도 백병전을 벌이던 시절에 잔다르크는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살아남았다. 
- 오를레앙에서 승리를 거뒀고 수십 개의 프랑스 마을과 도시를 해방시키고 빠떼Patay에서도 영국군을 격파했다. 


실제로 잔다르크는 신의 계시를 받았을까? 그렇게 믿은 군대는 그녀를 따랐고 그렇게 믿은 가톨릭교회는 그녀를 성인으로 모셨다. 신의 계시를 받지 않았다면, 그녀는 엄청난 설득력과 행운을 있었을 것이다. 

적대적 프랑스군에게 포로가 된 잔다르크는 영국군에게 넘겨져 종교재판을 받았다. 심문과정에서 그녀에게 불리한 증언이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지만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1431년 5월 30일, 화형을 당했다. 

 



빵과 버터의 공성전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hilas Copernicus덕분에 지구가 태양주변을 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과학은 한 단계 더 발전했다. 우리는 그에게 한가지 더 신세를 지고 있는데 코페르니쿠스덕분에 빵에 버터를 발라 먹기 시작했다. 
1519년, 그는 프로이센Prussia국경의 폴란드 요새도시 알렌슈타인Allenstein에 고립된 폴란드군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포위당한 도시에 전염병이 퍼졌고 그는 빵 때문에 병이 퍼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고 빵 자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가 빵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의심했다. 고립된 도시의 위생은 한계상황까지 몰리기 마련이고 품질이 떨어진 호밀빵이 더러운 거리를 굴러다니며 오염될 수 있었다. 
게하르트Gerhard라는 사람이 밝은 색 스프레드를 빵에 바르면 무언가 묻었을 때에 안 먹으면 된다고 말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였고 도시의 전염병이 사라졌다. 
이렇게 빵과 버터가 만났고 유럽 전역에 퍼지는데 100년이 걸렸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뿐만 아니라 쉐프로도 시대를 앞선 사람이었다. 

그는 과학적으로 전염병원을 밝혀냈다. 도시주민을 4그룹으로 나누고 서로 다른 음식을 보급했다. 빵을 먹지 않은 그룹만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의 지동설은 죽은 해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갈릴레오Galileo와 같이 가톨릭교회에 수난을 당하지 않았다. 

알렌슈타인은 당시 튜턴 기사단Teutonic Knights에 포위되었었다. 튜턴 기사단은 십자군원정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독일기사가 결성한 기사수호회로 독일기사단으로 부르기도 한다. 나중에 프로이센을 정복했고 오랜 기간 폴란드와 충돌했다. 

 



프라하 추락사건 

1618년 5월, 프라하Prague 흐라드차니Hradcany성 창문에서 3명이 추락했다. 다행히도 높은 똥더미에 떨어져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모양새만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들은 서둘러 종종 걸음으로 달아났다. 
마치 코미디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이 사건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3명은 로마가톨릭 합스부르크Hapsburg제국의 공식 대표였는데 개신교 귀족들이 몰려와 개신교 교회폐쇄를 항의하며 창문 밖으로 집어 던졌다. 황제는 노골적인 반역으로 받아들였고 내전으로 이어졌다.

 


보헤미아Bohemia의 가톨릭과 개신교도 사이의 무력충돌로 시작되었다가 오스트리아가 개입했고 덴마크와 스웨덴이 참전했다. 폴란드, 프랑스, 네덜란드가 뛰어들면서 보헤미아의 종교갈등은 유럽 대부분이 참전한 30년 전쟁으로 확전되었다. 
중앙 유럽인구의 25%가 넘는 1천만명 이상이 죽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크게 꺾이면서 전쟁이 끝났다. 30년 전쟁으로 유럽은 군주국, 종교자유와 국경이 만들어졌다.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프라하는 원래 창밖 투척 역사를 가진 도시였다. 이미 200년 전에 프라하 시청 창문으로 여러 명의 시의원을 던진 적이 있었고 그때도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흐라드차니 창문 밖에는 3명의 대표가 떨어진 지점이 표시되어 있다. 그들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기록으로는 성 해자에 똥이 잔뜩 쌓여 있었다고 한다. 

 

 

 

잠수함 탄생


청교도인이 메이플라워Mayflower를 타고 영국을 떠나고 얼마 후에 런던 테임즈Thames강에는 여러 척의 배가 모험을 시작했다. 겨우 몇 km만 항해했지만 메이플라워와 다른 의미로 역사를 바꾸었다. 
이 배는 물밑으로 항해했다. 
네덜란드 발명가 코르넬리우스 드레벨Cornelius Drebbel이 설계한 역사상 최초의 잠수함이었다. 드레벨은 영국왕 제임스James의 궁전발명가로 고용되었고 영국해군을 위해 미래의 배를 만들었다. 
낚시배에 목재 지붕을 덮고 선체 전체에 그리스를 적신 가죽을 입혔다. 12명의 선원이 노를 저었고 공기는 수면으로 올라간 공기관으로 공급했다. 수면에서 약 3.5m 아래로 항해했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궁에서 그린위치Greenwitch까지 갔다고 하는데 3시간 만에 약 5km를 항해한 셈이다. 
왕은 관심을 보였고 드레벨은 더 큰 잠수함을 2척 만들었다. 왕이 직접 탑승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영국해군은 군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채택하지 않았다. 영국해군이 생각을 바꾸는데 300년이 걸렸다. 

 



드레벨은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유리세공, 조각, 화학, 의료경력이 있었다. 그의 화려한 이력과 달리 1634년에 삶에 찌들려 죽었다. 

군용으로 처음 채택된 잠수함은 미국 데이비드 부시넬David Bushnell이 설계한 거북이Turtle였다. 1776년, 뉴욕항에 정박한 영국전함에 기뢰를 부착하려고 만든 일인용 잠수함이었다. 성공하지 못했고 기뢰는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조지 워싱턴은 나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천재라고 할 수 밖에 없다고 기록했다. 

전투에 제대로 사용된 첫번째 잠수함은 헌리Hunley였다. 남군의 잠수함으로 1864년 어뢰를 장착하고 북군 호사토닉Hausatonic과 충돌했다. 호사토닉을 침몰시켰지만 자신도 사우스 캐럴라이나 해안에 침몰했고 선원 전원이 사망했다. 

 

 

 

꿀벌전쟁


30년 전쟁 막바지, 스웨덴군은 바바리아Bavaria의 요새도시 키센겐Kissengen을 공격했다. 궁지에 몰린 수비군은 성벽 위에서 벌집을 스웨덴군 대열에 집어 던지며 저항했고 스웨덴군은 총탄이 아닌 벌침세례를 못이기고 퇴각했다. 
벌집은 종종 무기로 사용되었다. 시대를 불문하고 벌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로마군은 투석기로 벌집을 날렸다. 사자심왕 리차드Richard of Lionheart도 십자군원정 중에 사라센Saracen군을 향해 벌집을 사용했다. 작센Saxon, 무어Moor, 헝가리군도 전투에 벌병사를 투입했다. 
바다에서도 벌을 사용했다. 지중해에서 큰 선박이 높이를 이용해 작은 선박에 벌집을 던졌다는 기록이 있다. 베트남전에서는 서양벌보다 크고 난폭한 아시아벌집으로 부비트랩을 만들었다. 펜타곤Pentagon 과학자는 벌을 이용해 폭탄을 배달하는 연구를 했다. 그리고 지뢰와 폭탄을 탐지용 벌도 시도했다. 
아주 달콤한 시험이었을 것 같다. 

겉보기에 난폭해 보이지만, 벌은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조심해서 벌집을 투석기에 올리면 별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성벽이나 적군에 떨어지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1차대전 동아프리카 탕가Tanga에서 전투를 벌이던 영국과 독일군은 기관총에 놀란 벌의 공격을 받았다. 일부 병사는 100번도 넘게 쏘였고 꿀벌전투라고 불렀다. 남북전쟁 엔티에탐Antietam전투에서 남군이 쏜 포탄이 부근 농부의 양봉장을 건드렸고 꿀벌이 북군 132 펜실바니아보병연대를 물리쳤다. 

로마군이 너무나도 벌집공격을 즐길 덕분에 로마제국 후기에 유럽내 벌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분석이 있다. 



크루와상의 탄생
 
아마 크루와상Croissant을 프랑스 빵으로 알고 있을텐데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되었다. 1683년, 10만 명 이상의 오스만Ottoman 투르크군이 빈Vienna를 포위했다. 몇 개월 동안 포위했고 구원군 소식이 없자 빈은 함락될 것처럼 보였다. 
투르크군이 성벽 아래로 갱도를 파자, 밤에 일하고 있던 제빵사들이 그 소음을 듣고 경보를 울렸다. 투르크군의 시도는 실패했고 폴란드 얀John 3세가 빈에 도착해 투르크군을 몰아냈다.
제빵사는 승리를 축하하며 적군의 깃발에 있는 초생달을 흉내내 빵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킵펠Kipfel(독일어 초생달)이라 부르면 제빵사들끼리 즐기던 빵이었다. 

 



빈 공성전에서 베이글이 탄생했다는 주장이 많다. 얀 3세는 능숙한 기병이었고 제빵사가 그를 기리기 위해 등자모양의 빵을 구웠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어로 등자를 뜻하는 뷔겔Bugel이 영어 베이글로 전해졌다. 빈 공성전은 역사책뿐만 아니라 전세계 식탁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킵펠은 1770년, 당시 15살이던 오스트리아공주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ette가 프랑스에 와서 루이Louis 16세와 결혼하면서 크루와상으로 바뀌었다. 파리 제빵사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킵펠을 굽기 시작했고 프랑스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며 프랑스 빵으로 자리잡았다. 

 



젠킨스 귀전쟁

젠킨스 귀전쟁War of Jenkins’s Ear이라니? 로버트 젠킨스는 영국 함장이었고 캐리브해에서 스페인 해안경비대의 공격을 받았다. 스페인 지휘관이 자신의 귀를 잘랐다고 주장했다. 잘린 귀를 들고 영국의회를 찾아갔고 수상은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했다. 
실제는 좀 복잡한 상황이었다. 젠킨스는 실제로 귀가 잘린 후 7년 만에 의회를 찾았다. 사람들은 진짜로 그의 귀인지 의심했다. 술집에서 싸우다가 귀를 잘렸다는 소문과 수상에게 전쟁을 강요하기 위한 정치음모라는 소문이 있었다. 
진실과 상관없이 대중은 자극적인 소재에 쉽게 불타올랐다. 영국은 분노했고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제독이 대활약했다. 그의 활약보다는 다른 이야기로 더 유명해졌지만.
그의 부관 중 한 명인 로렌스 워싱턴Lawrence Washington은 리틀 헌팅 플렌테이션이라는 버지니아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상관을 기리며 농장을 이름을 마운트 버넌으로 바꿨다. 로렌스가 죽자 동생 조지가 그 농장을 물려 받았다. 미국에서는 조지 워싱턴의 저택이 젠킨스 귀전쟁을 유일하게 기념하고 있다. 

 



버논은 스페인 식민지인 파나마 포르토 베요Porto Bello를 공격해 명성을 얻었다. 그는 단 6척의 전열함으로 항구도시를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런던시민은 포토벨로 로드에서 쇼핑을 즐기며 그 승리를 기억할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