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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믿거나 말거나, 토막 전사 (3부)

by uesgi2003 2020. 12. 22.

글록 번역을 끝내서 정말 오래간만에 역사이야기를 정리하는군요. 이번은 공교롭게도 모두 미국독립전쟁 당시의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노인민병대의 전설

전쟁은 젊은이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1775년 4월 19일, 미국독립전쟁이 벌어진 첫번째 전투는 구세대가 전장을 지배했다. 

렉싱턴과 콩코드전투(그림 참조)에서, 식민지민병대는 전설적인 레드코트Redcoat와 맞붙어서 보스턴으로 쫓아냈다. 사무엘 위트모어Samuel Whittemore가 그날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이런 전투방식을 비웃는 사람이 많은데... 그 당시 용감하게 전열을 지키셨던 분들이 우리보다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원전부터 1차대전 초반까지 전투는 2차원이었고 기동전이라는 것이 없는 밀집대형 충돌이었습니다. 

저 당시에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전투방식이었습니다. 

 

렉싱턴과 콩코드전투는 민병대의 숫자가 훨씬 많아서 영국군을 비교적 쉽게 격파했습니다. 영국군의 사상자 수도 행불자 포함해서 30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78세에 등이 굽은 위트모어는 민병대소집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는 중무장을 하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소총 한 자루, 권총 두 자루, 구식 기병 칼을 가지고 갔다. 

영국군이 접근하자, 그는 돌담 뒤에 자리를 잡고 아주 정확한 사격을 하기 시작했고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영국군은 따로 병력을 떼어내 그를 상대했다. 그는 소총으로 한 명을 죽이고 다른 두 명은 권총으로 죽였다. 그리고 칼을 뽑아 들었다. 영국군 병사가 그의 얼굴에 총을 쏘았고 다른 병사들은 그에게 복수의 총검질을 계속 해댔다. 

 



사무엘 위트모어는 14군데나 상처를 입었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위트모어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운명을 거부했고 살아남았다. 영국군이 항복하고, 헌법이 제정되고, 조지 워싱턴이 초대대통령이 되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는 96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노인민병대가 영국군 탄약수송마차를 기습해서 두 명을 죽이고 나머지를 쫓았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영국군병사들은 마더 베트릭Mother Bathrick이라는 할머니에게 다다가 항복할 테니 제발 목숨을 건지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에서는 “양키 할멈 한 명이 영국군 척탄병 6명을 상대할 수 있다면, 미국을 진압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새러토가의 기적

새러토가Saratoga 부근의 언덕에서 오합지졸 미군(대륙군)과 영국군 혼성부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미군 최고의 장교 한 명이 전투에 참가하지 못해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부대지휘관과 심하게 대립했다가 몇시간 전에 명령불복종으로 지위해제당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 장교는 명령따위는 처음부터 들을 생각이 없었다. 럼주를 들이켜고는 말을 빌려 최전방으로 달려나갔다. 그가 칼을 높이 치켜들자 병사들이 모였고 그는 영국군의 맹렬한 사격에도 불구하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우익에서 좌익으로 말을 몰며 전투를 지휘했다. 결국 다리에 총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새러토가전투에서 얼마나 열심히 지휘했던지, 마구 휘두른 칼에 부관 한 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까지 있었다. 

 



새러토가전투는 영국군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고, 프랑스가 미국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러토가전투로 미국독립전쟁의 승패가 결정 났다. 새러토가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장교의 이름은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인데 재미있게도 그는 몇 년 후에 영웅에서 반역과 배반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아놀드는 상당히 유능한 장교였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인정받지 못했고 전공도 빼앗겼다는군요. 그래서 아놀드는 대륙군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2만 파운드를 받고 웨스트 포인트요새를 영국군에게 넘겨주기로 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었고 영국전함을 타고 달아나게 됩니다. 나중에 영국군준장으로 미군을 공격하는 황당한 신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능력을 출중했다는군요. 영국군에서도 자신의 뜻이 맞지 않았고 양쪽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다가 60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저 만평처럼 악마와 동급으로 취급했습니다. 


참담한 실패에서 피어난 독립의지

미국독립전쟁 중 규모가 가장 컸던 뉴욕전투는 거꾸로 가장 기억되지 않는 전투이기도 하다. 영국군함대는 400척의 선박에 35,000명의 병력을 태우고 있었고 1차대전까지 영국군 최대의 원정군이었다. 조지 워싱턴이 지휘하는 대륙군은 25,000명의 비정규군이었고 그는 단 한 번도 대규모전투를 지휘해 본 적이 없었다. 

 


최초이자 마지막의 대회전이었다. 1776년 8월~11월까지, 두 군대는 맨하튼거리를 오르내리며 브룩클린, 할렘과 웨스트체스터에서 격전을 벌였다. 잊힌 이유는 간단했다. 대륙군은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워싱턴은 병력 3/4를 잃었는데 가슴 아픈 기록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싶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이 전투는 나름대로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반나절만에 미국의 독립시도가 완전히 무산될 수도 있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후 대륙군은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몇 주 후에 워싱턴의 패잔병이 벌인 트렌턴Trenton전투는 위대한 역사로 남았다. 대륙군은 뉴욕전투에서 피흘리며 학습한 교훈을 제대로 활용했다. 

 

의미로만 따지면 아마도 미국독립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트렌턴전투입니다.

참패를 당했던 조지 워싱턴은 다시 돌아와 영국군용병인 헤센(독일)군을 기습했고 겨우 사상자 5명만으로 용병부대 1,000명을 완전히 전멸(포로 900명 포함)시켰습니다. 


뉴욕전투에서는 나단 헤일Nathan Hale이라는 코네티컷연대 대위의 이름이 유명한데, 미국은 목숨을 바쳐 조국을 사랑한 스파이로 기억하지만 영국은 방화범으로 기억하고 있다. 헤일은 전투 며칠 전에 뉴욕에 불을 지르는 무리에 속해 있었는데, 뉴욕의 1/4가 잿더미가 되었다. 

영국군은 스탠튼아일랜드에서 만든 상륙정을 타고 브룩클린에 상륙했다. 2차대전 히긴스Higgins상륙정처럼 선수를 열고 내릴 수 있었다. 

 




워싱턴의 도박

조지 워싱턴은 캠브리지에서 겨울을 보낸 후에, 영국군을 보스턴에서 몰아내기로 했다. 영국군은 보통때처럼 기상했다가 보스턴 주변의 고지에 배치된 대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래로 향한 포구에서는 언제라도 포탄을 토해낼 것처럼 보였다. 

영국군은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10,000명과 200척이 보스턴을 비웠고 대륙군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보스턴을 손에 넣었다.

 


그렇지만 영국군은 워싱턴이 너무나도 위험한 도박을 벌인 것을 알지 못했다. 대륙군과 대포배치가 겉으로 보기에는 무시무시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한가지가 빠져 있었다. 바로 화약이었다. 

대륙군은 영국군이 버텼다면 대포를 겨우 몇 발만 쏠 수 있을 정도의 화약 밖에 없었다. 이전 6개월 동안 영국군이 마음만 먹었다면 대륙군을 손쉽게 상대할 수 있었을 정도로 화약이 바닥난 상태였다. 

만약 영국군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미국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워싱턴은 화약대신에 훨씬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군지휘관보다 강한 의미와 용기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775년 6월, 워싱턴이 대륙군을 지휘하기 시작하면서 병사 한 명이 겨우 몇 발만 사격할 화약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존 설리반John Sullivan준장은 “장군님은 너무 충격을 받아서 30분 동안 한마디도 안 했다”고 기록했다. 

영국이 식민지에서 화약을 제조하지 못하도록 오랫동안 통제했기 때문에 화약이 부족했다. 프랑스무역업자를 통해 대량의 화약을 수입하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그렇지만 5년 후, 요크타운전투 직전에 대륙군의 화약재고는 다시 바닥 수준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가 요약한 아주 간단한 결과만 기억하기 쉬운데 배경을 보면 그럴만한 다른 사정이 숨어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도대체 대륙군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신병을 무장시킬 수 있었고 보급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미국독립전쟁은 프랑스의 적극적인 참전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무지막지한 무기공급말고도 체사피크만Chesapeake해전처럼 직접 영국군과 격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 해전에서는 영국군 구원함대를 몰아내서 요크타운의 영국군 8,000명이 탈출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미국독립전쟁에 13억 리브르(프랑스 통화단위)라는 엄청난 재정지출을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