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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믿거나 말거나 토막전사 (12부)

by uesgi2003 2020. 12. 31.

승리아닌 승리

1942년, 일본군이 애투Attu와 키스카Kiska의 알류샨Aleutian열도를 침공해 점령했다. 1812년 영미전쟁 이후에 외국에게 영토를 처음으로 점령당했다. 당연히 미국은 단호하게 처리하기로 했다. 

미국은 1943년 5월에 애투섬을 탈환하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8월, 다시 키스카섬을 탈환할 차례였다. 

 

애투섬에서는 양측이 모두 6,000명이 사상당하는 격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미군의 오해도 당연했습니다.

미국-캐나다연합군 35,000명이 해안에 상륙했고 그 뒤에는 함대가 지원하고 있었다. 무저항으로 상륙했지만 일본군 특유의 전술이 갑자기 달려드는 것이어서 병사들은 초긴장 상태였다. 예상대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중화기가 불을 뿜었지만 짙은 안개 때문에 적이 보이지 않았다. 사상자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부상자를 후송했다. 병사들은 천천히 전진하며 절벽을 기어오르고 총을 쏘았다. 

2일간의 격전 끝에 32명의 병사가 전사했고 50명이 부상당했다. 예상보다 너무나도 가벼운 손실이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없었다. 

일본군은 3주 전에 이미 철수했는데 6,000명이 빠져나가는 동안 미군의 봉쇄망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상은 모두 오인사격에서 발생했다. 미군과 캐나다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서로를 상대하고 있었다. 

기습이 성공했지만 기습당한 것은 일본군이 아니었다. 
-   군 전투보고서

타임지는 작전명 오두막을 JANFU로 불렀다. Joint Army Navy Foul-Up의 약자로 육해군 합동실수라는 뜻이다. 

 




영웅의 나라

1943년 9월, 아돌프 히틀러는 덴마크의 유대인처리를 지시했다. 아직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대대적으로 자행하기 이전이어서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라는 지시였다. 

나치장교는 10월 1일 밤에 대대적인 체포작전을 계획했다. 1,000명의 독일경찰과 게슈타포장교가 덴마크로 갔고 유대인을 실어 나를 선박과 기차를 준비했다. 

덴마크국민의 대응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체포작전을 입수한 덴마크정부는 유대인가족에게 숨으라고 경고했다. 비유대인 덴마크국민은 목숨을 걸고 유대인 이웃을 숨기고 보호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덴마크 유대인을 스웨덴 안전지대로 보냈다. 처음에는 마구잡이로 진행되던 탈출행렬은 덴마크 지하조직의 도움을 받아 조직적으로 확대되었다. 대학은 일주일 동안 문을 닫았고 학생들은 레지스탕스와 함께 유대인을 해변으로 에스코트했다. 

300척 이상의 고깃배가 유대인을 스웨덴으로 날랐고 스웨덴은 그들을 환영했다. 덴마크에 살던 7,000명의 유대인 중 90% 이상이 독일의 체포를 피해 달아났다. 

 


덴마크 나라 전체가 영웅이었다.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추모관에서 덴마크국민 전체를 “정의의 국가”로 기록한 이유다. 

독일외교관 게오르그 더크비츠George Duckwitz가 덴마크정부에 미리 체포작전을 누설하지 않았다면 덴마크 유대인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덴마크에 있던 많은 독일군장교는 덴마크국민의 행동을 보고도 모르는 척했다. 아마도 전쟁의 향방을 알고 있어서 그랬을 수 있다. 

스웨덴행은 무료가 아니었고 덴마크어부는 위험한 항해를 핑계로 많은 돈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덴마크국민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대인가족을 위해 돈을 지불했고 통행료 때문에 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스웨덴정부가 덴마크유대인에게 쉼터를 제공하자, 독일은 스웨덴을 돼지놈들이라며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역사상 최대의 사기작전
1944년 봄, 연합군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는 조지 패튼Geroge Patton장군에게 프랑스를 탈환할 강력한 전력을 주었다. 미1집단군은 도버의 화이트 클리프White Cliff 부근에 11개 사단을 집결시켰다. 가장 짧은 경로인 파드칼레Pas-de-Calais로 프랑스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1집단군이 상륙했다니? 무슨 소리야? 대대적인 사기극이었다. 

연합군은 쉘브루Cherbourg 부근에 상륙할 것처럼 히틀러는 속이고 실제로는 160km 떨어진 곳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퀵실버Quicksilver작전이 진행되었다. 

 


런던의 유명한 쉐퍼튼 스튜디오Shepperton Studios의 세트장 디자이너를 초대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렇지만 독일군에게 엄청난 대군처럼 보이는 세트를 만들었다. 고무전차 대대, 목재병사연대, 천비행기와 가짜 활주로가 생겼고 항구에는 가짜 상륙정으로 가득 찼다. 무선통신병은 존재하지도 않는 부대 간에 쉼없이 명령을 발송하고 수신했다. 

 


영국 로얄 아카데미의 건축학교수는 하수도 파이프와 녹슨 기름통을 사용해서 가짜 정유소를 만들었다. 영화스튜디오 선풍기는 현장에 흙먼지를 일으켜서 정말로 연합군이 정유소 건설을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히틀러는 완전히 속았다. 연합군이 6월 6일에 노르망디에 상륙했는데도, 독일군은 전차사단을 예비대로 남겨두면서 유령군대의 상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합군은 교두보를 확보할 충분한 시간을 가졌고 상륙작전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패튼장군은 실제 상륙에 참가하지 못해 낙담했지만 영국남부를 돌며 가짜 부대를 순시해서 독일군 기만작전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나는 타고난 관종이야”라고 말했다. 

미군은 유령군대를 더 가지고 있었는데 23사령부특수군으로 전쟁기간 내내 비슷한 기만작전을 벌였다.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대거 동원되어 적을 기만했다. 이 부대에서 복무한 병사는 패션디자이너였다. 

다양한 방식으로 독일군을 기만했는데 오스트레일리아출신 영국배우 클리프턴 제임스Clifton James라는 배우는 영국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Bernard Montgomey 역할을 맡아 노르망디 상륙 직전에 지브랄타와 알제리를 순회했다. 독일군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이 작전을 벌이는 줄 알고 있었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1944년 8월, 연합군이 프랑스를 탈환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를 절대로 넘겨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에게 도시를 통제하라고 직접 명령했다. 폰 콜티츠는 동부전선의 영웅이었지만 이런 명령은 처음이었다. 그는 “명령을 받았는데, 파리를 폐허로 만들고 그 폐허 속에서 싸우다가 죽으라는 명령이었다”고 말했다. 

폰 콜티츠는 임무를 다할 준비를 했다. 그는 노트르담Notre-Dame대성당과 앵발리드Les Invalides와 같은 건축물에 폭탄을 설치했다. 상관에게는 에펠탑까지 폭파할 준비를 마쳤다고 보고했다. 

히틀러는 폰 콜티츠가 절대적으로 충성하기 때문에 그를 선택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명령을 그대로 수행할 수는 없었다. 그는 파리를 파괴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처형당할 수도 있는 결정을 내렸다. 파리를 파괴하라는 압박이 거세지자, 그는 조용히 레지스탕스와 휴전을 맺고 연합군에게 빨리 진격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연합군이 48시간 내에 파리에 진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명령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연합군은 파리를 우회할 계획이었지만 오마르 브래들리Omar Bradley는 그 정보를 받자 빠르게 대응했다. 그는 “프랑스사단에게 미친듯이 달리라고 하게”라고 명령했다. 

히틀러는 베를린 벙커에서 소리를 질렀다. “파리가 불타고 있는가?” 그렇지만 폰 콜티츠덕분에 문화의 도시는 안전했다. 

폰 콜티츠는 히틀러가 명령했던 처절한 시가전 대신에 간단한 전투만 치르고 도시를 내주었다. 독일최고사령부는 그를 반역자로 간주했고 전후에 동료들에게서 소외당했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1,500일 동안 통제했지만, 히틀러는 1940년 6월에 겨우 몇시간만 머물렀고 다시는 방문하지 않았다. 

 


폰 콜티츠는 연합군을 기다리는 동안 파괴명령 불복종으로 지휘권을 박탈당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렇지만 독일대사 오토 아베츠Otto Abetz는 베를린으로 폰 콜티츠의 잔학성에 항의하는 전신을 보내 그를 도와주었다. 베를린은 그가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고 잘못 알았고 그 덕분에 귀중한 며칠의 시간을 벌었다. 

파리를 적의 손에 넘겨주어서는 안된다. 만약 그럴 경우에는 적이 잔해더미만 발견하게 하라.
- 1944년 8월 23일, 히틀러의 명령서

 

 

일본의 풍선폭탄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4개월 후에, 호넷Hornet항모 갑판에서 폭격기 16대가 이륙해 도쿄를 기습했다. 
피해는 미미했지만 심리적인 충격이 상당했다. 일본은 미국본토에 반격할 방법을 찾느라 골몰했다. 2년간의 극비준비 끝에 1944년에 세계최초의 대륙간 무기를 미국쪽에 날려보냈다. 
말그대로 날려보냈다. 폭탄풍선이었다. 

 


황당하게 들리지만 일본은 정말 진지했다. 몇 개월 동안 일본은 6,000개의 푸고Fugo폭탄을 미국에 날려보냈다. 제트기류를 타고 태평양을 빠르게 건너 미국도시, 숲과 농장에 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풍선 하나에는 불을 지를 화염폭탄 4개와 공포를 조장할 파열탄 1개를 매달았다. 

1,000개 정도는 미시건까지 날아갔지만 대부분은 북서태평양에 떨어졌다. 폭탄 한 개가 오레곤의 일반인 6명을 죽였고 다른 한 개는 원자폭탄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워싱턴 핸포드Hanford공장을 일시 정지시켰다.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폭탄이 계속 날아왔다. 정부는 공격에 대한 모든 보도를 통제했다. 침묵방어때문에 일본최고사령부는 풍선폭탄이 실패했다고 생각했고 다른 보복수단을 찾을 때까지 중단하기로 했다. 

136kg을 달 수 있는 풍선에는 항해기구, 도화선, 화염탄이 매달렸다. 

제트기류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태평양 관통에는 겨우 4일만 걸렸다. 

일본이 1945년 봄과 여름에도 계속 폭탄을 보냈다면 미국의 산불시즌이었기 때문에 큰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서부지역은 대혼란이 생겼을 수 있다. 그렇지만 보도통제로 이 작전은 조기에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