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기타

믿거나 말거나 토막전사 (11부)

by uesgi2003 2020. 12. 31.

바주카의 탄생


밥 번즈Bob Burns하사는 1차대전 당시에 해병군단의 최고 소총수였다. 사격솜씨만큼이나 음악에도 한 실력했다. 번즈는 해병군단 재즈밴드를 조직해서 유럽을 순회하며 연주했다. 

번즈는 특히 자신이 직접 고안한 악기를 연주해서 유명해졌다. 가스파이프 2개를 연결해야 만든 악기였다. 트럼본에 슬라이드 휘슬을 추가한 것 같았는데 번즈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는 재미있는 이름까지 붙였다. 

 


1차대전 후, 번즈는 라디오 연예인과 영화배우가 되었다. 그는 알칸사스 여행자Arkansas Traveler라는 예명으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의 절정기는 이상한 악기였다. 1930년대 말부터 40년대 초까지, 수천 종의 장난감이 제작되어 팔렸다. 

번즈의 악기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그가 만든 이름은 살아 있다. 그것도 엉뚱한 곳에서.

2차대전 초기, 미군은 애버딘 프로빙 그라운드Aberdeen Proving Ground에서 M1A1이라는 어깨견착식 대전차포를 테스트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번즈가 만들었던 악기와 상당히 닮았다고 생각하고 그 이름을 붙였다. 
바로 바주카다. 

 

미군병기창인 에버딘 프로빙 그라운드는 원래 전차박물관도 있어서 민간인이 어렵게 입장할 수 있었는데 모두 다 옮겼고 지금은 전차박물관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압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3번 다녀와서 다행입니다. 실제로 저 전차들 모두 직접 만져보았습니다. 앞에 서면 강철괴물 앞에 서 있는 공포감이 저절로 듭니다. 


번즈의 바주카는 6개 음계를 내는 저음 색소폰 소리를 냈다. 번지는 이 악기로 웃음소리를 냈는데 재즈공연에서 자주 사용했다. 

미국은 2차대전 중에 50만 개 정도의 바주카를 만들었고 1500만 발을 발사했다. 바주카는 워낙 성능이 좋아서 독일이 바로 복제했다. 그렇지만 판쩨르슈렉Panzerschreck이라는 다른 이름을 붙였다. 전차의 악몽(공포)라는 뜻이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전쟁에서는 별 일이 다 벌어지기 마련이다. 2차대전 중에 미해군정보부가 마피아Mafia와 협력했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프랑스여객선인 SS 노르망디Normandie가 군용 수송선으로 개조되어 1942년 2월에 뉴욕에 왔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해군은 사보타지Sabotage로 생각했다. 항구보안 문제가 대두되었고 정보를 수집하던 해군정보부는 뉴욕에서 가장 강력한 갱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찰스 럭키 루치아노Charles Lucky Luciano(중앙)였다. 

 


루치아노는 30년형으로 수감 중이었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갱단에게 해군과 협력하라고 지시했고 이탈리아 갱단은 수백명의 항구인부와 어부에게 수상한 활동을 제보하라고 당부했다. 미국은 시칠리아Sicily 침공준비를 하면서 루치아노를 통해 시칠리아 갱단과 사전에 연락을 해 두었다. 

전후, 해군은 갱단과의 협력을 숨기려고 했다. 모든 기록을 파기하고 해군은 공식적으로 루치아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대부분 부인했다. 그의 도움이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분명했다. 여론악화에도 불구하고 전후 6개월도 안되어서 루치아노를 석방해서 시칠리아로 추방했다. 그가 별 도움이 안되었다면 절대로 받지 못할 보상이었다. 

시칠리아전역에서 수집한 정보 대부분은… 찰스 럭키 연락망에서 나왔다
-   해군정보부 찰스 헤픈던Charles Haffenden

나중에 루치아노는 부하를 시켜서 노르망디에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해군을 혼란을 줄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노년의 루치아노는 과거를 허황되게 과장했던 것으로 유명했고 해군조사에 따르면 사보타지 흔적이 없었다. 

루치나오는 연합군 상륙에 앞서 직접 시칠리아로 낙하해서 정보를 수집하겠다고 자원했다. 해군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이름하는 갱단이 정보부와 협력했다. 메이어 랭스키Meyer Lansky, 벅시 시겔Bugsy Siegel, 프랭크 코스텔로Frank Costello가 해군의 정보수집에 협력했다. 랭스키는 히틀러의 유럽 유대인 학대를 혐오했다. 

 




가장 어린 영웅

1942년 8월, 캘빈 그래함Calvin Graham은 텍사스 포트 워스Fort Worth의 모병소에 들어갔다. 태평양으로 배치되어 USS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의 포수가 되었다. 

 

1942년에 실전배치된 전함치고는 너무나도 빠른 1947년에 퇴역했습니다. 


10월에 산타 크루즈Santa Cruz전투가 벌어졌다. 2주 후에는 과달카날Guadacanal전투가 있었고 야간작전에서 전함이 47발을 맞았다. 그래함은 파편에 턱을 맞고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중상이었는데도 밤새 자리를 지키면서 불을 끄고 더 심한 동료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냈다. 


해군은 캘빈 크래함의 영웅적인 행동을 어떻게 대우했을까? 해군은 그를 본토쪽으로 후송해서 교도소에 3개월 동안 수감했다가 참전용사 혜택을 모두 박탈하고 불명예제대시켰다. 전투 후에 그는 부주의하게 자원입대서류를 조작했다고 말을 흘렸다. 실제로 그는 나이를 속이고 입대했다. 
캘빈 그래함은 12살 밖에 안되었다. 

 

 

심한 노안이기는 합니다. 

그는 2차대전 당시에 조국을 위해 싸웠던 수 천명의 미성년 자원입대병 중에서도 가장 어렸다. 

해군은 그래함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결국 누나가 신문에 제보하겠다고 나서서 그래함을 학교로 보냈다. 그래함이 13살 생일 2일 후에 포트 워스 학교 7학년에 다시 입학했다. 

그래함은 실제 나이를 사우스 다코타함의 포병장교 사전트 쉬버Sargent Shiver에게 털어 놓았었는데, 그는 나중에 케네디대통령의 동생과 결혼했고 1976년 대통령후보로 나섰다. 

캘빈 그래함은 새아버지의 가정폭력을 피해 해군에 입대했었다. 모병장교는 그가 미성년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2살인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해군군의관이 그의 이빨을 보고 미성년이라며 승인하지 않았는데, 그래함은 군의관이 다른 곳을 볼 때에 합격서류더미에 몰래 집어넣었다. 

그래함은 계속 자신의 복무기록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다.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은 해군에게 명예제대를 인정하라고 지시했다. 1994년, 해군은 과달카날전투에서 입은 부상에 대해 퍼플 하트Purple Heart훈장을 수여했다. 그래함은 2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그 명예를 직접 느끼지 못했다. 

 

 

 




액체괴물의 탄생

2차대전 중, 극동의 일본군은 미국의 고무공급선을 차단했다. 미국은 자동차 타이어에 사용하는 고무공급을 늘리기 위해 기름배급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 

과학자들은 합성고무대체재를 찾느라 분주했다. 제네럴 일렉트릭GE의 엔지니어 제임스 라이트James Wright는 실리콘에서 고무 비슷한 대체재를 만들어냈다. 1943년 어느 날, 그는 실리콘 기름을 가득 채운 시험관에 붕산을 붓고 경질 고무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랬다. 대신에 부드럽고 끈적이는 퍼티가 만들어졌다. 일부를 꺼내서 탁자에 떨어트렸는데…
튀어 올랐다. 

GE는 새 물질의 샘플을 전세계 과학자에게 보내 용도를 수소문했다. 모든 사람이 장난감으로는 만족했지만 용도를 제안하지 못했다. 새 물질은 실패로 폐기되었다. 

1950년, 코네티컷 마케팅 컨설턴트 피터 호짓슨Peter Hodgson이 화학자 친구에게서 이 물질을 입수했고 금광을 발견했다. 과학자들은 무용지물로 간주한 반면에, 그는 아이들이 좋아할 것으로 직감했다. 그는 퍼티를 플라스틱 달걀에 넣고 지금까지 불리는 이름을 붙였다. 
실리 퍼티Silly Putty. 

1950년부터 3억개 이상의 달걀과 실리 퍼티 4,500톤이 이상이 팔렸다. 2000년 탄생 50주년에 실리 퍼티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훌라후프 바로 옆에 안치되었다. 

 

다양한 신문, 잡지와 웹사이트는 아폴로 8호 우주인이 실리 퍼티를 달에 가져가서 장난감으로 놀고 우주선 벽에 도구를 붙였다고 주장한다. 안타깝게도 그냥 도시괴담일 뿐이다. 실리 퍼티 제조업체, 나사와 아폴로 8호 우주인 짐 러벨Jim Lovell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새대가리 미사일

2차대전 중, 미해군은 로켓추진형 유도미사일을 개발하기 시작했지만 펠리칸Pelican이라는 원형은 기대에 못 미쳤다. 과학자 한 명이 괴상한 방식으로 미사일을 목표물로 유도하자도 제안했다. 
비둘기가 유도시스템을 조종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유명한 행동과학자 스키너B.F. Skinner는 긍정행동강화로 비둘기가 미사일을 목표물로 유도하게 훈련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결과는 비둘기에게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지만. 그는 국방부를 설득해서 연구자금을 받아냈다. 
그렇게 ‘비둘기 프로젝트Project Pigeon’이 시작되었다. 

 


렌즈와 거울 시스템이 비둘기 바로 앞의 화면에 멀리 있는 목표물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비둘기는 목표물을 쪼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에 미사일이 그 방향으로 계속 날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황당한 소리같지만, 스키너팀은 비둘기훈련에 성공했고 순항시스템 원형을 완성했다. 매우 효과적이고 제작하기에도 쉬웠다. 그렇지만 비둘기 프로젝트는 실제로 하늘을 날지 못했다. 과학자와 지휘관 모두 이 프로젝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순항시스템을 실제 미사일에 넣어 테스트하지 않았다. 
그렇게 새대가리 미사일은 영원히 폐기되었다. 

우와, 레이더보다 낫네.
- 비둘기 유도 테스트결과를 검토한 MIT 전문가. 

스키너는 비둘기 프로젝트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종전 15년 후, 그는 여전히 비둘기를 옹호하며 로켓을 달까지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펠리칸은 단순한 유도미사일이 아니라 무선조종 로켓비행기에 가까웠다.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지만 박쥐Bat유도미사일 개발로 이어졌고 전쟁 말에 일본선박 여러 척을 격침시켰다. 

 


미사일 끝의 삼각뿔 원형은 비둘기 3마리가 들어가서 유도시스템을 중복보완시켰다. 나사는 이런 중복유도 시스템을 우주 프로그램에 적용했다. 비둘기는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