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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믿거나 말거나 토막전사 (13부)

by uesgi2003 2021. 1. 2.

이제 토막전사는 끝내고 다른 이야기로 이동할 생각입니다. 아직 주제를 결정하지 못해서 조금 시간이 걸릴 겁니다. 

 

 

운이 나쁜 날

AP 사진가 조 로젠탈Joe Rosenthal에게는 고생스러운 날이었다. 이오지마Iwo Jima전투를 촬영하려고 상륙정에 타다가 사다리에서 미끄러져서 바다로 떨어졌다. 해변에 내리자 수리바치Suribachi산에 깃발을 꽂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진에 반드시 담아야 할 결정적인 순간이었지만 이미 늦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산에 오르는 병사들과 합류했다. 총탄세례가 쏟아졌다. 중간쯤 올라갔을 때에, 산에서 내려오던 병사들이 이미 깃발을 올렸다는 실망스러운 말을 했다. 그는 되돌아가려 다가 계속 올라가기로 했다. 좋은 결정이었다. 

그는 정상에서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한 무리의 해병이 두 번째 깃발을 꽂으려는 것도 보았다. 해병대령은 첫번째 깃발을 역사기록으로 보관하고 두 번째 깃발을 남겨놓기로 했다. 

조렌탈은 하마터면 그 장면을 놓칠 뻔 했다. 그는 무거운 카메라장비를 짊어지고 바위에 올라서자 깃발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도 않고 셔터부터 눌렀다. 제대로 촬영되었는지도 몰랐다. 필름을 현상하자 9번째와 11번째 프레임은 빛에 노출된 상태였다. 

그렇지만 10번째 프레임은 대단한 작품이었다. 사진편집직원은 보자 마자 “영원히 남을 사진이군요”라고 말했다. 전국판 일면에 게재되었고 풀리처Pulitzer상을 수상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종군사진가 중의 한 명이 되었다. 
다시 생각하면 그렇게 운이 나쁜 날이 아니었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에서와 같이, 역사에 기록된 이 명장면은 연출이었습니다. 소련군이 찍은 베를린 시가전 국회의사당 점령도 연출이었다고 하죠. 

첫번째 게양은 해병군단 하사 루이스 로워리Louis Lowery가 찍었다. 이 국기는 조심스럽게 보존되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두번째 깃발이 3주 동안 휘날리다가 바람에 꺾였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그냥 현장보존용이었기 때문이다. 

 


깃발을 게양했던 6명 중에 3명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전사했다. 이오지마전투에서는 미군병사 6.821명이 전사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군의 피해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일본본토 상륙을 포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군에서 적군으로

1920년대, 호Ho는 보스턴 파커 하우스Parker House 호텔식당 잡역부로 일했다. 1954년에는 독립북베트남의 대통령이 되었고 1960년대에는 미국 최대의 적이 되었다. 

1945년, ‘사슴Deer’라는 암호명의 미국정보부팀이 아시아 정글로 낙하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게릴라를 지원했다. 그들은 게릴라 지휘관인 응우옌 아이꾸옥Nguyen Ai Quoc이 말라리아와 이질로 심각한 상태인 것을 보았다. 팀의무병은 “이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고 진단했지만 다행히도 그를 살려 놓았다. 도움을 받은 지휘관은 정보를 제공하고 격추당한 미군조종사를 구해냈다. 대신에 탄약과 무기를 지원받았다. 

정보팀은 미국이 전후에도 계속 응우옌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격론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수용되지 않았다. 이듬해 게릴라 지휘관은 트루먼대통령에게 프랑스에게서 독립할 수 있게 지원해달라고 간청했는데 이번에도 미국정부는 베트남 편을 들지 않았다. 

응우옌 아이꾸옥은 가명이었고 실명은 호치민Ho Chi Minh이었다. 한때 미군이 살리려고 애를 썼던 사람을 상대로 베트남전쟁에서 60,000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호치민(오른쪽에서 3번째)과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미정보팀 사슴멤버. 왼쪽의 흰색 정장은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으로 나중에 군사령관이 되어 프랑스와 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폭탄 투하!

1961년 1월 24일 자정직후, 미공군은 노스 캐롤라이나 골드스보로Goldsboro에 핵폭탄 2개를 떨어트렸다. 물론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전략공군사령부 B-52 스트래토포트리스가 연료누출을 일으켜 폭발하면서 폭탄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비행기는 곧바로 추락했다. 

 

폐기되었다가 다시 부활한 덕분에, 세계에서 극소수만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 중의 한 대를 가지고 있고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위용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폭탄 한 개는 땅에 안전하게 낙하했지만 다른 한 개는 농장에 곤두박질쳤다. 둘 모두 폭발하지 않았다. 

국방부는 폭탄이 동작하지 않아서 폭발위험이 없었다고 발표했지만 나중의 증거는 발표와 거리가 멀었다. 

폭탄은 떨어지면서 부분적으로 동작했고 연료누출 폭발충격으로 도화장치가 동작한 것이 밝혀졌다. 폭탄은 6단계에 걸쳐 동작하면서 폭발하는데 두 폭탄은 마지막 단계까지 진행되었다. 단 한 개한 스위치가 동작하지 않아서 폭발하지 않았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핵폭발사고가 일어날 수 있었던 최악의 사고였다고 결론내렸다. 

공군장교는 잔해에서 폭탄을 수색하면서 기자에게는 조종사 좌석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폭탄 한 개의 일부는 여전히 농장에 남아 있다. 공군은 땅 사용권을 사들여서 아무도 땅을 파지 못하게 하고 있다. 

MK39폭탄은 히로시마를 파괴했던 폭탄보다 250배 강력했다. 사고 발생 4일 전에 취임한 케네디대통령은 사고재발을 막기 위해 더 정교한 기폭장치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1947년에 조지아해안에 사고로 투하된 원자폭탄은 3~4m의 진흙 속에 여전히 그대로 있다. 공군은 기폭하는데 필요한 플루토늄캡슐이 없기 때문에 폭발할 위험이 없다고 말한다. 

 

 




G.I. JOE의 탄생

하스브로Hasbro장난감회사 사장은 1964년 뉴욕장난감쇼에서 인기를 끌고 싶었다. 어떤 제품을 출품할 것인가? 하스브로사장 메릴 하센펠드Merrill Hassenfeld는 남자아이용 인형을 선택했다. 

물론 인형이라고 부를 리가 없었다. 다혈질 미국소년 중에 인형놀이를 좋아할 아이는 없었다. 그래서 디자인팀은 제품을 액션 피겨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생산에 들어갔다. 

1964년 2월 9일, 그렇게 G.I. JOE가 탄생했다. 몸통은 관절을 구부릴 수 있는 나무조각 인형을 모방했다. 오른쪽 뺨에는 상처를 내서 바비인형의 남자친구 켄Ken보다 다부지게 보였다. 

 


미국은 아직 케네디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고 비틀즈가 전국을 강타했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발이 크지 않았다. G.I. JOE는 아주 알맞은 시기에 탄생했다. 곧바로 조군대가 미국가정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회의와 OPEC 기름파동으로 플라스틱 원자재가격 상승으로 조는 1978년에 퇴역했다. 1980년대에 축소형 조가 부활했지만 이전 크기의 병사는 1994년 30주년 기념제품으로 재출시되었고 여전히 인기가 높다. 9/11테러 후에 판매량이 치솟았다. 

하스브로는 명예훈장 군인 20명의 얼굴을 조합해서 G.I. JOE의 얼굴을 만들었다고 발표했지만 그냥 마케팅 장난질이었다. 조형가 필Phil이 600달러를 지불하고 조의 머리를 조형했다. 그는 케네디대통령의 흉상도 다양하게 만들었는데 케네디대통령의 특징을 조에 조합했다는 의견이 많다. 




도청 고양이

1960년대, 냉전으로 CIA와 KGB 간의 정보전이 치열했고 고양이와 쥐의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실제로 고양이를 동원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최근에 공개된 문서를 보면 60년대에 CIA 과학기술국장은 고양이를 도청기로 사용하려고 했다. 공공장소에서 소련외교관의 대화를 듣는 용도였다. 음향 고양이Acoustic Kitty 프로젝트는 5년 간 수백만 달러의 비용을 사용했다. 

 

고양이의 배 안에 소형발신기를 삽입했다. 전 CIA 요원은 “배를 갈라서 배터리를 넣고 꿰맸다 꼬리를 안테나로 사용했다”고 말한다. 

당연히 문제가 많았다. CIA는 고양이집사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었다. 고양이는 훈련시키기 힘들었다. 고양이는 배가 고프거나 지루하면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그래도 CIA는 고집불통이었다. 일부만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고양이과 동물을 연구한 사람들의 인내심을 칭찬하고 있다. 

마침내 본격적인 실전테스트 준비가 되자 고양이를 공원으로 데리고 가서 풀어주었다. 그 순간에 참사가 벌어졌다. 택시가 고양이요원을 치어 죽였다. “밴 안에 있던 직원들은 모두 그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

닭 전원공급 핵폭탄이라는 황당무계한 프로젝트도 있었다. 1960년대 영국과학자들은 핵지뢰 안에 닭을 넣고 전원을 공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폭탄을 소련군 침공로에 매설하고 추운 겨울에는 닭의 체온으로 기폭장치가 얼어붙지 않게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연히 닭이 먹고 살 수 있는 모이도 함께 넣어줬다. 

냉전 중에는 저빌Gerbil(사막쥐)도 사용했다. 공포에 질린 병사의 땀냄새, 아드레날린 냄새를 맡을 수 있다. 1970년대 다양한 국가에서 간첩체포용으로 테스트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공항보안전문가가 실제로 저빌을 사용하자, 발각을 두려워하는 범죄자의 냄새와 비행공포를 느낀 승객의 냄새를 구분하지 못했다. 

 




축구전쟁

1969년 6월, 온두라스Honduras와 엘 살바도르El Salvador는 월드컵 예선에서 첫번째 경기를 벌였다. 두 나라는 서로 앙숙이었고 온두라스 팬은 원정 온 살바도르 팀의 잠을 방해하겠다고 호텔 밖에서 폭죽을 터트리고 나팔을 불어 댔다. 그 덕분이었는지 온두라스가 1:0으로 승리했다. 

엘 살바도르 팬은 매우 흥분했다. 18살의 아멜리아 볼라니오스는 너무 상심해서 총을 쏘아 자살했다. 그녀의 죽음은 국가의 비극으로 확대되었다. 살바도르 신문 엘 나시오날El Nacional은 “젊은 소녀는 조국이 무릎 꿇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고 보도했다. 육군근위대가 장례식을 호위했고 대통령이 장례행렬을 따랐다. 

몇 주 후에 온두라스 팀이 2차전을 벌이기 위해 왔지만 국민의 흥분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살바도르 군대와 전차가 경기장을 둘러쌌다. 엘 살바도르가 3:0으로 이기자 폭동이 일어났고 여러 명이 죽었다. 

 


경기장에서만 폭력이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축구경기로 해묵은 국경분쟁이 다시 벌어졌고 7월 14일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겨우 100시간 계속되다가 휴전했지만 피해가 컸다. 5,000명이 죽었고 10,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축구전쟁이라고 부른다. 

 

국토와 인구가 적은 엘 살바도르가 온두라스를 침공했습니다. 사상자도 온두라스가 더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 이 전쟁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전세계가 우주 밖에 시선을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고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과 버즈 알드린Buzz Aldrin이 1969년 7월 20일에 달 지면에 올랐다. 



포클랜드전쟁

영국은 코클랜드Falklands로, 아르헨티나는 라스 말비나스Las Malvinas로 부른다. 1982년, 남대서양 섬을 둘러싼 양국의 오랜 분쟁이 계속 가열되었다.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은 영국령의 섬을 점령해서 국민의 지지를 되살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전쟁까지는 가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부유한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 고철거래상 꼰스딴띠노 다비도프Constantino Davidoff는 분쟁의 섬 남쪽 끝에 버려진 포경시설에서 고철을 회수하려고 했다. 소유자와 영국대사관에서 상륙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고철작업팀이 섬에 아르헨티나 국기를 꽂았고 영국남극조사팀의 과학자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 그들은 영국정부에 아르헨티나인이 상륙했다고 보고했다. 

영국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의심하고, 아르헨티나에 항의서한을 보내면서 전함 인듀어런스Endurnace를 급파했다. 아르헨티나도 전함을 파견했다. 영국은 해병이 상륙했고 아르헨티나는 더 많은 전투함을 투입했다. 

아마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노리던 구실이었던 것 같다. 일부러 선을 넘었고 일주일도 안되어서 아르헨티나군이 상륙했다. 
고철작업이 끝난 대신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거의 700명 정도의 아르헨티나군이 목숨을 잃었다. 바람이 거친 섬에 그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아르헨티나군이다. 양국은 여전히 섬의 소유권에 대해 분쟁 중이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전쟁을 벌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전쟁 6주 후. 다비도프  

군사정권은 침공으로 애국심에 호소하고 600%의 인플레이션과 다른 경제문제에서 국민의 시선을 돌릴 구실을 찾았다. 영국이 런던에서 23.000km나 떨어진, 겨우 2,000명만 사는 황무지섬에 군사력을 동원해 대응할 것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프랑스 엑조세Exoset미사일을 전세계에 알린 전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