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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믿거나 말거나 토막전사 (10부)

by uesgi2003 2020. 12. 29.

 

 

검은 참새

유진 불라드Eugene Bullard의 마지막 직업은 뉴욕 RCA 빌딩 엘리베이터 조종기사였다. 그는 엘리베이터 조종기사 중 가장 놀라운 이력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1894년, 노예의 손자로 태어나 10살에 유럽으로 건너갔다. 16살에 사설 권투선수를 시작했고 1차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외인부대에 입대했다. 그의 보병부대는 죽음의 참새Swallows of Death라고 불렀다. 

불라드는 전방에서 2년을 보낸 후에 베르덩Verdun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 회복 중에 프랑스공군에 자원했다. 1917년, 그는 세계최초의 흑인 전투기조종사가 되었다. 수많은 공중전을 치루고 확인격추 1기와 미확인격추 1기를 기록했다. 

전후에 그는 파리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재즈학교에서 드럼을 배웠고 몽마르뜨Maontmartre 재즈바에서 밴드지휘자 일을 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클럽도 가졌다. 그렇지만 완전히 민간인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1939년, 불라드는 프랑스정보부의 정보원으로 자원했다. 1940년에 독일이 침공하자, 그는 제2의 조국을 위해 소총을 들었고 중상을 입었다. 그는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조지아 콜럼버스의 유진 불라드는 프랑스 복무동안 15개 이상의 훈장을 받았다. 1954년, 프랑스는 파리 개선문Arc de Triomphe에 무명의 병사들 묘역에 영원한 불을 밝혔는데, 누가 불을 붙였을까?
바로 뉴욕의 엘리베이터 조종기사였다. 

 


1960년, 불라드는 레지옹 도뇌르훈장Chevalier of the French Legion of Honor을 받았다. 그 밖에도 다양한 프랑스 훈장을 받았다. 

 


불라드는 첫번째 공중전에서 독일 포커Fokker기를 격추시키고 엔진고장으로 동체착륙을 했었다. 기지로 돌아오자 정비병은 그의 스패드Spad기에서 78개 구멍을 세었다. 

 


불라드는 평생 인종차별에 저항했다. 그의 비행기에는 모든 피는 붉다(위 그림 참조)라는 모토를 그려 넣었다. 1917년에 미국이 참전하자, 불라드는 미군비행부대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라크 분쟁의 씨앗

거트루드 벨Gertrude Bell은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을 해냈다. 영국에서 적당히 결혼해 조용한 삶을 살아가는 대신에 중동에서 꿈을 펼쳤다. 그녀는 베두인Bedouin사람들을 정말로 좋아했다. 

1차대전이 발발하기 몇 년 전, 벨은 중동 곳곳을 여행했다. 시리아와 아라비아사막을 횡단하고, 부족과 족장에 대해 자세한 지식을 얻은 후에 유명한 여행기를 작성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는 영국정보부를 위해 중동 전역의 아랍부족 원로의 지지도를 파악했다. 벨은 적진 후방까지 침투해서 정보를 수집했다. 로렌스Lawrence가 아랍혁명을 주도하면서 그녀가 수집한 조사기록과 정보를 활용했다. 그녀는 로렌스 두뇌 속의 두뇌였던 셈이다. 

거침없었던 그녀는 영국군장교에게 지시를 해서 불편한 사이가 되기도 했지만 그녀의 지식은 너무나도 귀중했다. 그녀는 중동에서 작전하는 군과 외교관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1921년, 영국식민지장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벨에게 지금의 이라크 국경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시아파, 수니파, 쿠르드족을 한 나라에 모두 섞어버려 현재까지 계속 일어나는 분쟁의 씨앗을 심었다. 

 


거트루드 벨은 남성세계에서 여성의 흔적을 확실하게 남기려고 했고 그렇게 했다. 

베일을 두르지 않은 여성을 처음 본 이슬람 지도자와 부족원로도 그녀와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며 조언이나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를 엘 카툰El Khatun(아가씨)라고 불렀다. 

그녀가 처칠과 로렌스와 함께 한 사진이다. 1차대전의 공훈으로 그녀는 영국제국지휘관으로 명예추대되었다. 

 


"반도의 모든 아랍인이 그녀를 알고 있다. 거투르드라고 하면, 카이로에서 테헤란까지의 모든 영국인은 그녀를 말하는 것으로 안다." 
1926년 뉴욕헤럴드

 

 

 

 

 

 


에니그마의 진실

1929년 1월의 어느 토요일, 베를린에서 보낸 나무상자 하나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세관에 도착했다. 독일관리가 실수로 발송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세관통관없이 독일로 반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관원은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강제로 상자를 열고 내부에 있는 이상하게 생긴 기계의 다이어그램을 그린 후에 독일로 반송했다. 
독일의 유명한 에니그마Enigma암호기가 대외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독일의 에니그마암호를 해독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처음으로 폴란드가 도전했다. 마리안 레예프스키Marian Rejewski의 암호해독팀은 기발한 수학기법으로 에니그마를 파헤쳤다. 1932년, 팀은 암호기를 복제해냈고 독일군 메시지를 해독했다. 그렇지만 장군멍군의 연속이었다. 

 


1938년, 독일군은 신형 에니그마를 개발했다. 폴란드는 더 이상 독일군 암호를 해독할 수 없었고 전쟁이 곧 터질 것을 알고 프랑스와 영국에게 정보를 넘겼다. 그 직후에 독일군이 침공했다.
연합군에게는 너무나도 귀중한 선물이었다. 

폴란드는 에니그마 해독에서 다른 나라를 수 십년앞섰다. 폴란드가 깔아 놓은 길덕분에 연합군은 보다 쉽게 독일의 극비정보를 해독할 수 있었고 승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74년에야 연합군의 대대적인 암호해독 프로젝트가 공개되었다. 그 이전에는 마리안 레예프스키의 공헌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독일군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의 지휘차량에 있는 에니그마암호기. 독일군은 에니그마가 난공불락이라고 믿었고 에니그마 암호로 극비정보를 발송했다. 

 


폴란드는 복제한 에니그마암호기를 프랑스와 영국에 보냈다. 그 중에 하나는 극작가 사차 귀트리Sacha Guitry와 아내이자 배우인 이본느 프린템프스Yvonne Printemps의 짐에 넣어 런던에 몰래 보냈다. 그 덕분에 독일첩보망을 피할 수 있었다. 2주 후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난징대학살에 나타난 천사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1937년 12월 13일에 난징에 도착했다. 도시를 점령하고 전쟁포로를 처형하기 시작했는데, 곧바로 걷잡을 수 없는 대학살로 번졌다. 남자들을 묶어 총검술을 연습했고 수만명의 여성이 성폭행당했다. 심심풀이로 사람들 목을 잘랐다. 일본군이 찍은 사진은 미치광이 학살과 강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공포가 지배한 시간에 놀라운 영웅이 등장했다. 욘 라베John Rabe라는 평범한 독일사업가였다. 

난징에 남아 있던 소수의 서양인은 안전지대를 만들고 피난민에게 피신처를 제공하려고 했다. 그들은 라베가 나치당원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표로 뽑았다. 

중국인들이 필사적으로 학살을 피해 안전지대로 몰려들었다. 일본군이 안전지대까지 들어오자, 라베는 보호자 역할을 자임했다. 그는 두려움을 떨치고 일본군 지휘관에게 맞서 부하들을 통제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집을 피난민에게 제공했다. 직접 안전지대를 순찰하고 강간 피해자에게서 일본군을 떼어내고 맨주먹으로 그것(! 더 심한 말을 쓰고 싶지만... 이 !@$%&%^*@ㅉ^&#%&)들을 몰아냈다. 그의 유일한 무기는 팔에 두른 나치 스와스티카Swastika였다. 그는 일기에 “그들은 독일인에게는 심하게 대하지 않는다. 내가 도이치Deutsch와 히틀러라고 외치기만 하면 정중해진다”고 썼다. 

 


일본군은 난징에서 8주 동안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해 또 하나의 대학살현장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안전지대로 피신한 25망 명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욘 라베라는 신사덕분이었다. 

안전위원회 그리고 라베(중앙). 그는 귀국해서 난징만행에 대해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총통이 일본군동맹에 대해 분노해줄 것을 기대했다. 기대와 달리 게슈타포가 그를 체포했고 중국 일을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그의 손녀인 우르술라 라인하르트Ursula Reinhardt는 “그 일을 겪고 할아버지는 히틀러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일본정부와 일본교과서는 난징강간에 대해 피해자가 크게 과장되었다며 애써 부인하고 있다. 

“오로지 강간이었다. 남편이나 형제가 말리면 총으로 쏴 죽였다.”
- 욘 라베

 

 




덩케르크의 기적

덩케르크Dunkirk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1940년 5월, 독일군은 프랑스를 거침없이 침공해 연합군 전체를 포로로 잡을 뻔했다. 바다만 열린 영국과 프랑스군은 덩케르크 해안도시를 향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했다. 

영국군 해군성은 긴급구원에 나설 수 있는 모든 선박에게 간곡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요트, 고깃배, 모터보트 등 병사를 실어나를 수 있는 모든 배가 동원되었다. 독일폭격기의 폭격을 무릅쓰고 오합지졸함대는 30만 명이상을 싣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윈스턴 처칠은 구원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영웅적인 구원자 중에는 찰스 라이톨러Charles Lightoller라는 66세의 노인도 있었다. 한 명이라도 더 데려오겠다고 결심한 그는 작은 모터요트에 120명 이상을 태웠다. 너무나도 위험하게 가득 찬 요트는 폭탄과 총탄을 피해 영국해협을 건너왔다. 

 


그는 30년 전의 기억 때문에 무리한 항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겨우 절반도 안탔는데 물위에 띄워진 구명보트… 물속에서 들리는 울부짖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좌절감. 1912년 4월, 찰스 라이톨러는 무기력하게 900명이 차가운 바닷물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RMS 타이타닉Titanic의 항해사였었다. 

다이나모Dynamo작전이라고 부른 구원작전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극소수의 병사만 구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지만 10일 동안 338,000명을 구출했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독일군이 마지막 순간에 왜 멈췄는지에 대해서는 온갖 주장만 있을 뿐입니다. 모두가 맞을 수도 있고 모두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로 돌아가서 히틀러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 밖에 없겠죠.

어쨌든, 우리의 흔한 오해와 달리 프랑스군은 덩케르크 방어선 외곽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낸 것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