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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드레드노트부터 항공모함까지 - 잠수함과 항공모함의 탄생

by uesgi2003 2021. 1. 11.

1909년, 프랑스정부는 프랑스해군이 세계 5위권으로 추락한 것을 알고 급히 함대재건에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해군전력은 1907년, 전드레드노트 전함 레나Lena(그림 참조)가 툴롱Toulon 드라이 도크에서 탄약고가 폭발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전드레드노트 리베흐트Liberte가 1911년 9월에 폭발을 일으켰다. 두 건의 사고에서 모두 322명이 죽었다. 
프랑스는 재건프로그램으로 첫번째 드레드노트 4척 쿠르베Courbet, 프랑스, 장 바르Jean Bart, 파리를 1910~1911년에 건조하기 시작했다. 3개의 포탑에 305mm 12문을 장착하고 선체 양쪽에 포탑을 하나씩 더 배치했다. 2척을 간신히 완성했을 때에 1차대전이 일어났다. 

 


이탈리아의 첫번째 드레드노트는 배수량 19,813톤의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사진 참조)로 305mm 12문을 모두 중앙선에 배치해 측면 일제사격을 퍼부을 수 있게 설계했다. 1910년에 진수되어 이탈리아 아드리아해 함대 기함이 되었지만 실전에는 투입되지 못했다. 
그 다음에는 카보우르Cavour급으로 꽁테 디 카보우르Conte di Cavour, 줄리오 체사레Giulio Cesare,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hi 3척을 진수했는데 배수량 23,485톤에 305mm 13문을 장착했다. 
카보우르와 체사레는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 완전히 개장했다. 전쟁발발 이전에 마지막으로 건조된 이탈리아 드레드노트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와 카이오 둘리오Caio Duilio는 카보우르급으로 개수되어 152mm 부포를 장착했다. 1930년대에 마찬가지로 완전히 개장했다. 

 


미국에서는 현대식 신형전함 건조시도가 상대적으로 뒤늦게 시작되었다. 남북전쟁에서 철갑선이 큰 위력을 발휘했는데도 해군에 대한 관심이 곧바로 식었고 연안방어용 감시선 정도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신형 선박을 건조할 예산이 없었고 구형선박 수리비용이 전부였다. 1883년, 신해군New Navy를 만들 법안이 통과하면서 외국설계를 기반으로 신형전함 작업에 착수했다. 여전히 모니터Monitor전함에 집착했지만 어쨌든 인디애나Indiana급으로 부르는 신형전함이 해안방어전함으로 완성되었다. 
1898년, 아바나Havana에서 미전함 메인Maine이 폭발을 일으켜 침몰하자 이것을 빌미로 미국과 스페인 전쟁이 발발했다. 스페인해군의 시대착오적 구형 순양함과 건보트가 마닐라만전투에서 궤멸했고 그나마 신형인 장갑순양함전대를 캐리비안으로 급파했지만 미국전함에게 침몰당했다. 
스페인은 함대와 식민지를 잃고 패전했고 1909년에 신형전함 에스빠냐Espana를 건조하면서 해군재건에 착수했다. 

 

미국이 제국주의 팽창을 노골적으로 기획하던 시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미해군은 이제 7척의 신형 장갑전함을 보유했고 마닐라만을 장악하면서 해군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신형 전투함 건조계획도 통과했다. 스페인-미국전쟁에 해군차관으로 참전했던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대통령은 파나마운하 건설에 참여하고 1907년에는 미전함 16척의 대백색함대Great White Fleet로 전세계를 순회하며 미국의 국력을 자랑했다. 
2년 전에 이미 드레드노트가 등장했기 때문에 대백색함대는 구형이 되었지만 어쨌든 전세계순항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미국 최초의 드레드노트는 미시건Michigan과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였다. 영국이 HMS 드레드노트를 건조했지만, 미시건과 사우스캐롤라이나는 305mm 8문과 수퍼파이어링SuperFiring 포탑을 갖춘 첫번째 드레드노트였고 곧바로 다른 국가에서도 채택했다. 
2개의 스크류를 직각으로 3개 배치한 추진시스템은 겨우 17노트의 속도밖에 못 냈고 델라웨어Delaware와 다코타Dakota급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대신에 더 큰 구경의 부무장을 장착해서 이 전함들보다는 성공적이었다. 
미국은 1차대전 발발 전에 플로리다, 유타, 아칸소, 와이오밍, 뉴욕, 텍사스, 네바다, 오클라호마, 애리조나와 펜실바니아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모두 거대한 케이지 마스트가 특징이었고 전부 355mm 10~12문을 장착해서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고 태평양 반대편의 일본을 자극시켰다. 

 

슈퍼파이어링은 두번째 포탑을 더 높이 배치해서 자유로운 포격이 가능했지만 그만큼 마스트가 높이 올라가서 선체가 상당히 불안정해지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일본해군은 대한해협전투에서 러시아함대를 격파한 후에 태평양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해군의 성장을 그대로 지켜볼 수 없었다. 일본해군의 첫번째 드레드노트는 카와치Kawachi와 셋츠Settsu로 1910년에 건조하기 시작했다. 6개의 이중 포탑에 305mm 12문을 장착했다. 두터운 장갑에도 21노트의 속력을 냈다. 
1910~11년에는 곤고Kongo급 전함순양함 설계가 완성되어 하루나Haruna, 히에이Hiei, 키리시마Kirishima와 곤고Kongo가 건조되기 시작했고 일본은 계속 우수한 설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G.R. 서스턴Thurston이 설계한 곤고는 영국의 빅커스가 건조했는데 일본 밖에서 건조한 마지막 주력함으로 영국의 라이언Lion급 전투순양함을 개선했다. 전함을 능가하는 크기였다. 콩고급은 배수량 27,940톤에 355mm 8문과 152mm 16문을 장착했고 30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1,437명이 탑승해 당시 가장 많은 승무원 수를 자랑했다. 

 

고베에서 건조된 하루나, 1914년도 모습입니다. 

1차대전이 발발하기 몇 년 전까지는 강력한 드레드노트와 전투순양함이 대양을 지배했다. 그렇지만 막후에서는 이것들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대변화가 조용히 진행 중이었다. 
1912년 5월 4일, 새로 편성된 영국해군비행단Naval Wing의 조종사 C.R. 샘슨Samson은 전드레드노트 전함 HMS 하이베르니아Hibernia의 갑판에서 쌍엽기 쇼트Short S27로 10노트의 속도로 날아올라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1년 후, 구형 순양함 HMS 에르메스Hermes를 해군비행단의 본선으로 지정했다. 선수부분에 활로를 설치했고 쿠드롱Coudron 수상기로 여러 차례 시험비행을 했다. 나중에는 쇼트Short S41 수상기를 고정 배치했다. 
1913년 7월, 영국함대기동훈련 중 처음으로 항공기를 이륙시켰고 에르메스는 항공기와 무선전신으로 교신했다. 여름에는 해군성이 두 번째 수상기함으로 아직 건조 중인 7,518톤의 상선을 구입했다. 
이 상선은 1914년에 취역해서 명예로운 이름을 남겼는데 바로 아크 로얄Ark Royal이다. 엠프레스Empress, 엥거딘Engadine과 비리에라Riviera 3척을 더 사서 수싱기함으로 개장했다. 그 당시만 해도 해군항공기가 전함을 격침시키며 해전의 판도를 바꿀 것으로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1914년에 전쟁위기가 닥칠 당시, 바다를 가장 위협하는 존재는 잠수함이었다. 영국해군은 피셔제독덕분에 잠수함함대를 갖췄다. 그는 대대적인 잠수함건조를 시작했고 1910년에는 A급 잠수함 12척, B급 11척, C급 37척을 보유했는데 모두 홀랜드 설계를 기반으로 건조되었다. 
대양작전용으로 설계된 D급은 길이 50.2m에 수상배수량 503톤이었다. 첫번째 이중 스크류로 휘발유엔진대신에 중유엔진을 채택해서 안전도가 높았고 내부공기가 더 좋았다. 
1910년 훈련 중 D.1은 엔진 하나가 고장을 일으켰는데도 포츠머스에서 스코틀랜드 서부해안까지 가서 3일 동안 머물렀고 순양함 2척에게 연습어뢰 39발을 발사했다. 
D급을 개량한 E급은 1차대전과 함께 실전에 배치되었다. 수상배수량 677톤으로 승무원 30명이 탑승했고 선수에 어뢰관 2개, 선미에 1개, 중간에 2개를 장착했다. 1913~1916년 기간 동안 모두 55척이 건조되었는데 1차대전 모든 전역에서 잠수함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렇지만 잠수함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 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독일잠수함이었다. 재미있게도 20년 전만 해도 독일해군은 잠수함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1904년에 독일 최초의 카프Karp급 잠수함 3척이 건조되었는데 그것도 러시아해군의 주문제작이었다. 
독일의 첫번째 실전용 잠수함인 UI은 1906년에도 미완성 상태였다. U1은 당대를 호령한 가장 성공적이고 안정적인 잠수함이 되었다. 등유엔진 2개와 전기모터로 400마력을 냈고 잠수로 80km를 운항했다. 1906년 12월에 실험과 훈련용으로 취역했다. 
독일이 1차대전 발발 이전에 잠수함건조에 뒤쳐졌지만, 처음부터 이중 선체와 이중 스크류를 사용했다. 독일엔지니어는 더 안전하고 배기오염이 적은 등유를 선호했다. 1908년, 원하던 디젤엔진을 개발했고 U19급 4척에 처음으로 설치했고 그 이후에는 디젤엔진만 사용했다. 

 


1차대전이 점차 전세계를 끌어들였지만 바다에서는 영국과 독일함대의 맞대결이었다. 처음부터 영국해군은 영국본토를 지키고, 영국의 생명줄과 같은 교역로를 보호하고, 영국해협을 열어서 서부전선에 파병된 육군에게 증원군과 보급품을 공급하는 것이 목표였다. 
반면에 독일은 해군전력이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오크니Orkney 스카파 플로우Scapa Flow에 있는 영국대함대British Grand Fleet가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의 해군기지를 공격해올 것 같아 걱정이 많았다. 
영국해군은 당연히 공세에 나왔고 1914년 8월 28일, 영국함대가 헬리골란트 바이트Heligoland Bight를 기습하는데 성공했다. 순양함 아레투사Arethusa와 피어리스Feraless가 1과 2 소함대 구축함과 함께 독일순양함과 구축함을 공격했다. 
아레투사가 중파되었지만 독일순양함 SMS 마인츠Mainz와 구축함 V.187이 침몰했다. 뒤늦게 영국전투순양함 5척이 증원되었고 순양함 쾰른Koln과 아리아드네Ariadne을 격침시켰고 경순양함 2척과 구축함 3척이 파손되었다.  

그렇지만 영국의 환호는 곧바로 잦아들었다. 1914년 9월 22일, 영국장갑순양함 아부키르Aboukir, 크레시Crecy와 호그Hogue가 홀란드 남서쪽 48km 지점에서 독일잠수함 U-9에게 연달아 격침당했다. 장교 60명과 1,400명이 전사했다. 몇 주 후에는 남대서양에서 영국의 패전소식이 들어왔다. 
전쟁 발발 당시, 그라프 폰 쉬페Graf von Spee부제독의 독일전대가 중국 칭타오에 주둔하고 있다가 귀국 중이었다. 장갑순양함 샤른호스트Scharnhorst와 그나이제우Gneisenau, 경순양함 라이프치히Leipzig, 드레스덴Dresden과 뉘른베르크Nurnberg였다. 
1914년 10월 말, 일본 순양함전대를 따돌린 후에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에서 대서양으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영국해군은 급히 긁어 모은 장갑순양함 굿호프Good Hope와 몬마우스Monmouth, 경순양함 글래스고우Glasgow, 보조함 오트란토Otranto와 전드레드노트 전함 카노퍼스Canopus로 앞을 막았다. 

 


1914년 11월 1일, 영국전대는 칠레 해안의 코로넬Coronel 앞바다에서 독일전대와 만났다. 화력과 사거리 모두에서 뒤쳐진 굿호프와 몬마우스가 바로 불이 붙었고 저녁에 굿호프가 폭발하며 침몰했다. 몬마우스도 뒤이어 침몰했고 글래스고우는 황급히 카노퍼스쪽으로 퇴각했다. 

 

두 전투함은 포클랜드Falkland섬쪽으로 이동해서 섬의 무선송신소, 석탄과 기름저장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쉬페의 전대는 영국의 남미교역로를 완전히 마비시킬 수 있었고 그대로 두면 대서양을 건너 남아프리카 교역로도 위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쉬페는 그러지 않고 칠레에서 보급한 후에 포클랜드를 공격해 시설을 점령할 생각이었다. 포클랜드에는 귀중한 석탄과 기름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작전기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런던의 존 피셔제독은 쉬페의 계획을 미리 예상하고 참모장인 프레드릭 도브턴 스터디Frederick Doveton Sturdee부제독을 전투순양함 인빈서블Invincible, 인플렉서블Inflexible과 함께 남쪽으로 급파했다. 
동시에 중남미해안에 주둔해 있던 순양함 콘웰Cornwell, 켄트Kent, 캐나번Caernarvon, 브리스톨Bristol에게 전속으로 포클랜드로 달려가 두 전투함과 합류하게 했다. 

 


12월 초에 독일전대를 만난 스터디는 빠른 속도와 정확한 포술을 사용해 효과적으로 독일전대를 공격했다. 오후 4시 17분, 3시간의 전투 끝에 샤른호스트가 침몰했다. 이제 영국전투순양함 2척은 그나이제우를 상대했고, 그나이제우는 치열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오후 6시에 침몰했다. 
그나이제우 승무원 800명 중 200명 정도가 구조되었고 샤른호스트의 860명은 모두 전사했다. 그 동안 영국순양함은 달아나는 독일전투함을 추격했다. 계속된 전투에서 라이프치히와 뉘렌베르크가 침몰했다. 
뉘렌베르크가 켄트 자매함인 몬마우스를 침몰시켰기 때문에, 켄트함장은 뉘렌베르크 승무원을 구조하지 않고 전부 익사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불타는 뉘렌부르크에 불을 더 질렀다. 
쉬페의 태평양전대 중에 드레스덴만 탈출했지만 그나마도 살아남지 못했다. 1915년 3월 14일, 켄트와 글래스고우가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andez앞바다에서 드레스덴을 따라잡았고 큰 피해를 입은 드레스덴은 자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