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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 동부전선 전차전력의 1943년 상황 (3부)

by uesgi2003 2021. 3. 4.

blog.daum.net/uesgi2003/1185?category=10783

 

오래간만에 동부전선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해전이야기는 잠시만 뒤로 미루겠습니다. 

 

 

독일군 동부전선 전차전력의 1943년 상황 (1부)

일본여행에 이사까지 겹치면서 전사 이야기 정리가 많이 지연되었습니다. 나이 먹고 이사를 하려니 정말 힘들군요. 그래도 복층이라 1층에서 좀 여유있게 음악과 영화를 즐길 수 있어서 다행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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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동부전선 전차전력의 1943년 상황 (2부)

30년 전쟁에 관심을 가진 분이 있어서 다음 이야기부터는 당분간 30년 전쟁을 다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독일군 동부전선 전차전력의 1943년 상황 (2부) 1943년 2월 28일, 히틀러는 상급대장Gener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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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기동전술은 전차, 기계화보병, 기계화공병, 자주포병과 자유로운 공군의 근접지원이 어우러져 1940~42년에는 제대로 먹혀 들었다. 이 당시 독일군은 기상조건이 좋을 때에 완충부대를 동원해서 공세에 나섰다. 적의 취약한 측면이나 허점에 기갑부대를 투입해서 방어선을 돌파하고 기계화부대가 후방으로 돌아서 적의 주력을 포위했다. 
1943년이 되자 독일군은 연합작전과 기동전술을 점차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42년 12월, 스탈린그라드 6군을 구원하는 겨울폭풍Wintergewitter작전(지도참조)에서, 호트Hoth전차부대는 보병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리고 공군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공격에 나섰다. 
이후부터 독일군은 기갑부대를 동원해 포위된 병력을 구출했는데 그나마도 부족한 전력으로 다급하게 진행되었다. 1943년 2월 중순, 만슈타인Manstein은 수십대로 줄어든 국방군 전차사단으로 반격하면서 1943년 내내 비슷한 일이 벌어졌고 이런 대응이 전술교리로 굳혀졌다. 

 



무엇보다 공군의 근접지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1943년 중반의 성채Zitadelle작전(지도참조)에서는 상당한 전폭기와 폭격기를 집중시켰지만 다른 작전에서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다. 이제 전차사단은 자신의 힘으로 적의 단단한 방어선을 돌파해야 했다. 
전쟁초기의 독일전차사단은 화력과 방어력보다 속도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공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2, 3, 4호전차만으로도 T-34와 KV-1을 상대할 수 있었다. 
1942년 말부터 소련방어선이 두터워졌고 이제 경전차와 오토바이부대로는 전선을 돌파할 수 없게 되었다. 독일군의 전술은 자연스럽게 속도와 기동력에서 화력과 돌파력 중심으로 수정되었다. 전차사단의 정찰대대도 반궤도장갑차 122대와 장갑차 18대로 편성되어 무력정찰능력을 갖췄고 정찰보다는 기동병력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지역방어, 분산작전과 지역반격으로 집중되었다. 독일군 교리는 보병사단으로 주방어선을 유지하고 예비대로 전차사단을 후방에 두는 것이었는데 1943년이 되자 완전히 바뀌었다. 중앙집단군 A와 B는 대부분의 전차사단이 방어선에 투입된 상태였고 예비병력은 거의 없었다. 
소련군이 전선을 돌파하면 지역 보병지휘관은 근처의 전차사단에게 전투단을 보내 반격해달라고 요청했다. 자연스럽게 전차사단은 보병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작은 전투단 단위로 배치되었고 전력을 집중시키지 못했다. 독일전차는 독립 기동전이 아니라 중대규모로 반격에 투입되었다. 

독일전차와 장갑차도 지난 2년 간의 동부전선 경험을 바탕으로 크게 강화되었다. 우수한 T-34와 KV-1전차를 상대로 큰 피해를 입었고, 1941년 중반 이후에 신형전차에 대한 요구사항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943년, 5호전차 판터가 생산되었고 전차사단에 1개 대대씩 배치될 예정이었다. 5호전차는 기존전차에 비해 훨씬 화력이 강화되었고 이름만 중형전차로 44톤의 무게 때문에 전술교량을 건널 수 없었다. 
판터는 3호전차와 비교해 100km 주행에 2배의 연료를 소비했고 54톤의 타이거처럼 전장에서 회수하기 힘들었다. 중장갑의 판터와 타이거에 의존할수록 독일군의 기동전은 불가능해졌다. 하루 100km 이상 주행이 어려웠다. 
무포탑 돌격포와 마르더Marder(사진참조)와 같은 경장갑 대전차자주포의 투입도 전술교리 수정에 한 몫을 했다. 돌격포와 대전차자주포는 이전과 같은 기동전이 아니라 방어전에 적합했다. 3호 돌격포StuG-III과 같은 돌격포는 은폐된 적의 대전차포를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다. 독일군은 돌격포나 대전차자주포가 보다 유리한 장거리 포격전을 선호했다.

 


2차대전 초기의 독일군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훈련을 유지했고 적을 상대로 전술적 우위를 가져갈 수 있었다. 1941~42년에 피해가 누적되면서 독일군의 훈련체계로는 손실을 메울 수 없었다. 1942년의 코카서스Caucasus전역에서, 클라이스트Kleist 1전차군의 3, 13, 23전차사단은 매달 150~300명 전사를 포함해 600~1,200명이 사상당했다. 
1942년 7~10월 4개월 동안, 3전차사단은 3,000명을 잃었다. 23전차사단은 1942년 한해동안 6,569명을 잃었다. 전차사단은 기갑척탄병사단에 비해 손실이 훨씬 적었지만 전차병은 부사관이나 장교였고 손실을 쉽게 보충할 수 없었다. 
부상병 중 2/3 정도가 복귀했는데 동부전선 전차사단은 평균적으로 매년 4~500명울 충원해야 960명 정원인 전차연대를 완충할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매년 1,000명의 신병을 훈련시킬 수 있었지만 장교와 부사관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심지어 전차학교를 졸업해도 다른 보직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고 후방에 투입되는 경우도 많았다. 
To the Gate of Hell: A Memoir of a Panzer Crewman의 저자 아르민 보트게르Armin Bottger는 2년 동안 전차를 철로로 운반하고 전차수리창에서 작업하다가 최전선으로 이동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12중전차대대Panzer-Abteilungen가 전멸하자 수천명의 보충병을 돌려 대대를 다시 만들었다. 다른 부대는 보충병을 거의 받지 못했다. 

독일전차보충대대는 1호와 2호전차를 타면서 전차조종을 배우다가 3호와 4호 단포신전차로 포술과 기동전술을 배웠다. 소련군은 전차운전병을 대수롭지 않게 다룬 반면에 독일군은 전차운전병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초기훈련 중에는 선별된 교육생만이 10톤 정도의 전차를 운전하다가 4주 후에 10톤 이상의 전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독일운전병은 지시를 받지 않아도 경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이 잘 되었지만 소련운전병은 매번 지시를 받아야 했다. 
1943년 상황 때문에 훈련에 할당된 연료와 시간이 크게 줄어들었고 특히 타이거전차는 전선투입이 다급했기 때문에 타이거전차병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해서 최전선에서 많은 사고를 일으켰다. 
1943년, 전차병의 기본훈련은 16주에서 12주로 단축되었다. 그리고 훈련과정도 포술과 전술에 집중되었다. 교실강의는 최소한으로 줄였고 훈련병은 대부분의 시간을 현장에서 보냈다. 프로이센 전통의 사열과 분열도 모두 폐지되었다. 
기본훈련을 통과한 훈련병은 4~6주간 부사관훈련을 받았고 포병은 고급포술훈련을 추가로 받았다. 독일포술훈련은 상당히 정교해서 포병은 800~1,200미터 거리에서 25~30%의 확률로 적 전차를 명중시킬 수 있었다. 
소련전차병은 1945년에 독일포술사격장에 이동식 타겟이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동부전선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독일전차포술훈련은 야간전투까지 포함시켰다. 

1942년 말에 타이거전차가, 1943년 초에 판터전차가 투입되면서 전차훈련 프로그램도 크게 변경되었다. 기존의 3호와 4호전차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파더보른Paderborn에서 타이거전차병을 훈련시켰는데 한 번에 24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 전선의 상황이 너무 다급해서 최소한의 과정으로 4~6주만 훈련받았다. 
1943년 3월에 설치된 판터훈련소도 제조업체 만MAN의 도움을 받았어도 타이거훈련과정처럼 시간에 쫓겼다. 전차사단마다 판터 중전차대대를 하나씩 편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훈련병을 양산했고 전투에서 많은 문제가 일어났다. 
무장친위대와 공군은 아예 전차훈련소가 없었고 육군의 훈련병을 배당받았다. 당연히 1943년 판터의 전장투입이 지연되었다. 

연료와 부품부족도 전차사단 운용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은 연료를 제대로 비축도 하지 않고 소련을 침공했고 1941년 바르바로사Barbarossa작전 중에 비축량의 절반을 소비했다. 합성연료 생산에 박차를 가했지만 1942년 월간 연료소비량이 생산량보다 많았다. 1942년 말에는 자동차 가솔린비축량이 313,000톤에 불과해 3개월 치도 안되었다. 
1943년, 매월 가솔린 136,000톤을 생산하고 120,000톤을 소비해서 비축량을 조금씩 늘릴 수 있었다. 디젤은 매월 약 47,500톤을 생산했다. 만약 연합군의 폭격 등으로 생산시설이 피해를 입으면 무척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대규모 작전을 펼치면 모든 연료가 바닥날 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몇 개월에 걸친 대규모작전보다는 몇 주 단위의 단기작전을 펼쳤다. 

독일연료단위는 V.S.(Verbrauchssatz)로 부대의 모든 차량이 100km를 주행할 수 있는 단위였다. 전차사단은 공격에 앞서 4V.S.를 비축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사용하는 차량에 따라 양이 달랐다. 
1941~42년 독일전차는 1943~45년의 중전차와 자주포보다 당연히 경제적이었다. 1941년, 전차사단 1개의 1V.S.는 약 111톤이었다. 3호와 4호전차는 100km 주행에 340~360리터를 사용한 반면, 판터는 720리터, 타이거는 711리터를 사용했다. 
기계화차량을 더 많이 갖춘 전차사단일수록, 중전차사단일수록 연료소비량이 급증했고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연료보급 때문에 독일과 서유럽의 전차훈련소는 최소한의 연료만 보급받았다. 1호전차는 연료와 별 상관이 없어서 아무런 영향이 없었지만 판터와 타이거훈련은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운전병은 연료를 많이 소비하는 험지주행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프랑스훈련소는 아예 연료와 탄약이 없을 정도였다. 나스호른Nashorn대전차자주포로 편성된 중구축대대Panzerjäger Abteilung 560은 프랑스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연료는 아예 없었고 중대별로 8.8cm 탄을 겨우 10발만 받았다. 운전병은 훈련없이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소련의 열악한 연료보급로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악천후뿐만 아니라 파르티잔과 소련공군기가 철도와 연료저장소를 노렸다. 동부전선 첫번째 겨울동안, 독일열차의 80%가 한파를 못견디고 고장났고 하루 필요량의 1/3만 간신히 운송했다. 
1942년에는 드네프르Dnepr강 철교가 파괴되어 남부집단군에게 보급품을 보내려면 길게 늘어진 우회철도를 통해야 했다. 1943년에 전선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고 철로규격을 맞춰서 철로운송문제를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지만 기존의 소련철로가 워낙 엉망이어서 발목을 잡았다. 
최고사령부는 남부집단군에게 최우선보급을 했기 때문에 중앙과 북부집단군은 훨씬 적은 연료와 탄약을 받았다. 

 

히틀러의 고집때문에 천혜의 자연장애물인 강에 방어선을 펼치지 못했고 1943년 여름에 드네프르강을 너무나도 쉽게 내주게 됩니다.

예비부품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1943년 초만 해도 1,000대 이상의 전차가 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전 초기에는 다양한 제조업체와 국가에서 만든 장비를 사용했기 때문에 부품이 규격화될 수 없었다. 1943년에 체코 Pz 38t와 프랑스 트럭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3호와 4호전차 중심으로 바뀌면서 부품이 제대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선이 안정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과부하상태인 정비창이 더 이상 소련군의 반격에 쫓기지 않고 정비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판터와 타이거가 투입되면서 다시 정비문제가 터졌다. 다급한 전선상황 때문에 예비부품보다는 생산에만 집중했다. 중전차대대는 타이거 10대당 교체엔진과 변속기 1개씩만 받았다. 판터는 그렇지 않아도 완성도가 낮았는데 연료펌프 등이 고질적인 문제를 일으켰다.
신무기를 투입하기 전에 반드시 충분한 예비부품을 비축해야 했지만 히틀러의 강요로 신형전차를 전선에 조기투입했다. 타이거와 판터는 3, 4호전차와 다른 로드휠과 트랙, 엔진, 변속기, 장갑을 사용했고 기존 예비부품을 사용할 방법이 없었다. 1943년에도 4호전차가 주력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충격이 가시자 독일군은 전차생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942년 10월, 히틀러는 향후 2년 동안 매월 전차와 돌격포 생산을 기존의 400대에서 1,200대로 높이라고 명령했다.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하고 서부전선이 위태로워지면서 반드시 생산량을 높여야 할 지경에 몰렸다. 
1943년 1월 22~23일, 히틀러는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사진참조)를 만나, 1944년 말까지 장갑전투차량 생산을 5배 늘리라고 명령했다. 아돌프 히틀러 전차프로그램에 따라 1944년 초에는 매월 1,100대, 1944년 말까지 2,000대로 늘리기로 했다. 
그렇지만 1943년 1월, 독일은 타이거 35대, 4호전차 163대, 돌격포 130대, 구축전차 140대 등 장갑전투차량을 겨우 518대만 생산했다. 반면에 소련은 1월에만 전차 1,433대를 생산했는데 그 중에는 우수한 T-34대를 1,000대 이상 생산해서 독일군을 압도했다. 독일군 주력전차인 4호 G형을 6배나 넘게 전선에 투입했다. 

 

 

독일의 판터 생산량과 생산공장입니다. 
 
슈페어의 기적적인 생산프로그램은 선전과 임시변통에 불과했다. 노동력과 강철생산량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전차생산에 더 많은 강철을 할당했어도 독일군수산업의 15%에 불과했고 대부분 탄약과 비행기생산에 투입되었다. 
슈페어는 점령지에서 강제노역을 동원했다. 1941년, 독일전차공장과 관련공장 노동력이 50,000명 이하였다가 1943년에는 160,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렇지만 신규인력의 1/3은 미숙련에 의지가 없는 외국인노동자였다. 
그리고 독일의 생산우선순위는 비행기, 탄약, 전차, 유보트, 서부전선 방어선과 V-2로켓 등을 계속 오갔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구리와 고무수입도 발목을 잡았다. 4호전차 한대만 해도 구리 195kg이 필요했는데 구리수입 대부분은 탄약생산에 들어갔다. 전차는 로드휠에 고무를 사용했는데 1943년, 독일은 고무를 50% 덜 사용하는 로드휠을 장착했고 당연히 마모문제가 일어났다. 

슈페어는 히틀러의 허가를 받아 3호전차 생산을 중단하고 3호 돌격포로 전환했다. 1943년 초가 되자 슈페어의 계획은 점차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목표량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구데리안과 슈페어는 성능이 입증된 한 두 모델만 생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동의했다. 
구데리안은 4호전차를 매월 400대까지 증산하고 판터는 철저한 테스트로 결함을 제거한 후에 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과 의견이 달랐다. 대신에 폭스바겐전설을 만든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가 히틀러의 환심을 샀다. 
포르쉐는 나치당원이자 무장친위대원이었고 히틀러는 그를 위대한 독일엔지니어라고 칭송했다. 그는 히틀러측근으로 머물면서 전차생산에 깊게 개입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는 장갑차를 설계한 경험이 전혀 없는데도 직접 전차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전투경험이나 최전선 전차병의 의견보다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전차를 개발했다. 
포르쉐는 독일군의 기동전술과 동떨어진 거대한 전차를 꿈꿨고 히틀러에게 터무니없는 프로젝트를 지원하게 설득했다. 

 

포르쉐의 작품인 초중전차 마우스입니다. 192톤 무게로 도로주행이 시속 8km에 불과했고 주행거리도 도로 80km가 고적이었습니다. 더구나 모터구동식이어서 실전에 투입될 수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