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2차대전

독일군 동부전선 전차전력의 1943년 상황 (5부)

by uesgi2003 2021. 3. 10.

1942년 10월, 스탈린은 소련군의 전차전술 문제를 지적하는 명령을 내렸다. 전차, 지원보병, 포병, 공병, 공군의 협력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그 다음으로 정찰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지형을 이용하지 못하는 전차장의 능력을 지적했다. 소련전차는 독일군 위치나 지뢰매설 등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전장을 마구 돌아다녔다. 마지막으로 무전기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에 여단장 이상의 지휘관이 후방지휘소에서 상황과 동떨어진 결정을 했다. 전차대대나 여단은 사전에 결정된 대로 맹목적인 돌격을 했다. 
반면에 독일군은 전선의 상황에 따라 무전기로 유연하게 그리고 최전선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했다. 소련전차부대는 훨씬 작은 독일군전차부대에게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소련전차전술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했지만 자신의 책임은 외면했다. 그는 지휘관이 정찰 후에 작전을 제대로 수립하기도 전에 공격을 하라고 막무가내로 몰아붙였다. 

스탈린의 325호 명령은 사전포격과 보병-전차의 긴밀한 협력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소련전차군단은 독일전차를 상대하지 않고 보병공격에 집중했고 포병과 대전차포부대가 독일군전차를 상대했었다. 
그는 지형정찰, 기습과 기만공격을 강조했다. 1943년의 상황이 그만큼 호전되었다는 뜻이었고 소련전차병의 전술교리의 출발점이 되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처럼 SU(자주포전차)전차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SU-76은 T-70 차체를 늘리고 76.2mm ZIS-3 대전차포를 장착했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T-34 차체에 122mm 포를 장착한 SU-122는 보병에게 강력한 화력을 제공했다. 연대급 자주포전차부대를 창설하면서 전차는 보병지원에서 자유로워졌다. 
1943년 1월, 전차군단에 120mm 박격포 36문의 박격포연대, SU-76 8대와 SU-122 8대의 SU 연대를 증원편제했다. 그리고 T-34 33대와 T-70 7대를 예비전차로 증원시켜 전력을 보강했다. 2월에는 전차군단의 공병을 중대급에서 대대급으로 강화시켰다. 
다시 3월에는 통신부대와 37mm 대공포 16문의 대공포연대도 추가했다. 4월에는 독일중전차에 대항해 대전차포를 크게 강화시켰다. 전차군단은 45mm, 57mm와 76.2mm 20문, 85mm 52-K 대공포 12문의 대전차포대대를 갖췄다. 85로 독일중전차를 상대했다. 

 


명령 325호로 전술을 크게 바꾸었지만 여전히 전쟁전의 종심전투Deep Battle교리에는 많이 못미쳤다.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와 바실레프스키Vasilevsky와 같은 고위지휘관은 단순무식한 집단작전을 벗어나 전술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제파전술Echelonment을 공격과 방어작전 모두에 사용했다. 
독일군은 작전개시부터 모든 전력을 투입하는 반면, 소련군은 결정적인 순간에 새 병력을 투입해서 기세를 유지시켰다. 이전에는 1942년 5월의 하르코프Kharkov전투처럼 모든 전력을 일시에 밀어 넣었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었었다. 소련군은 제파공격으로 공격시간을 오래 가져갔고 독일방어전력을 최대한 소진시켰다. 
독일군보다 병력이 많은 소련군에게는 제파전술이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쿠르스크전투처럼 방어에서도 제파방어(그림 참조)가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전차부대의 기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후방이 아니라 전방기준으로 보급선을 구축했다. 1942년 말까지, 소련군은 전진하기 보다는 후퇴하는 경우가 많았고 근처 철도에서 재보급을 쉽게 받았다. 그렇지만 1942년 12월의 타친스카야 공격Tatsinskaya Raid에서 전방보급이 발목을 잡았다. 
24전차군단은 중요한 독일공군기지를 점령했지만 남서전선군이 제대로 보급하지 못해서 독일전차사단 2개에게 포위되어 사실상 전멸했다. 
소련전차부대에 트럭, 무전기와 지원부대를 더 많이 증원해서 마구잡이식 작전기획과 진행을 크게 개선시켰다. 그리고 장거리보급도 크게 개선했다. 

 

 


개전 후 2년 동안은 심각한 피해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은 전차병을 양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전쟁 전에는 많은 전차훈련학교를 운영했었고 1943년에도 고르키, 카잔, 울야노프스크에 2개씩, 사라토프에 3개의 학교를 운영했다. 전차훈련학교는 6개월의 장기과정으로 500명의 전차장을 배출했다. 일년 동안 약 12,000명의 전차장을 양산할 수 있었다. 타슈켄트로 이동했다가 1943년에 모스크바에 설치한 고급전차학교에서는 대대와 연대장교육을 진행했다. 
대부분의 전차훈련부대는 전차를 생산하는 공장 부근에 주둔했다. 공장근처에 전차자동차훈련소UABTTS를 설치해서 전차훈련연대와 대대를 도왔다. 훈련대대는 전차종류에 따라 나뉘었고 미국과 영국전차는 별도의 부대에서 훈련시켰다. 
첼냐빈스크의 전차자동차훈련소의 규모가 가장 컸고 6개월만에 2,500명의 전차병을 배출할 수 있었다. 훈련대대는 약 1,190명의 훈병과 171명의 스탭이 있었고 훈련연대는 4,000명 이상의 훈병이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전차학교의 모든 훈병을 최전선에 투입해서 1942년의 전차병훈련에 심각한 지장을 받았다. 1943년 1월, 전차훈련대대를 전차훈련여단으로 통합해 전차훈련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상황이 나아졌다. 
부상을 입은 고참병을 훈련학교로 보내 실전경험을 공유했지만 1943년 내내 전차병의 수준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T-34 훈련대대는 여전히 T-26과 BT-7경전차로 교육시켰다. 암기식교육이어서 운전병과 포수의 이해도가 많이 떨어졌다. 
야외실전훈련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단순히 이동하고 대열을 맞추는 정도만 교육했다. 
‘엔진시동을 걸고 직진하는 기초과정만 가르쳤다. 전술교육도 받았지만 전차를 가상해 걸어다니는 훈련이었다.’ 

소련전차소대장은 지도를 읽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소련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독일군과 달리 운전병, 포수, 장전수 중 하나만 교육을 받아서 전선에서 다른 역할을 대체할 수도 없었다. 
운전병은 험지주행 훈련을 받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였고 포수훈련도 거의 없어서 독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차 한 대를 받아서 사격장까지 50km를 몰고 갔다. 주포로 3발을 쏘았고 기관총으로 드럼탄창 하나를 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최전선으로 가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소련전차 포수와 전차장은 10초 내에 목표물을 쏘면 된다고 훈련받았지만 실전에서 10초는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독일군은 5초 내에 첫발을 쏘아야 했다. 실전에서 독일전차병은 소련전차의 발사속도가 너무 느렸다고 기록했다. 소련전차병은 이동목표물의 속도를 맞추거나 포구로 조준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고 광학조준경도 포신과 제대로 정렬되지 않아서 정확도가 크게 떨어졌다. 
소련전차가 실전에서 독일전차를 명중시켰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1943~44년 전투에서 살아남은 고참은 전차학교에서 받았어야 할 훈련을 실전에서 배웠다. 1944년, 근위전차부대를 위한 전차훈련소가 설립되면서 포격과 기동훈련을 좀 더 받았지만 독일전차병에 비하면 여전히 기초수준에 머물렀다. 
소련은 초보수준의 전차병이라도 매년 수만명을 양산했고 결국에는 독일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만약 소련이 독일의 푸틀로스Putlos 포격훈련소나 그라펜보르Grafenwöhr 훈련장과 같은 현대적인 훈련시설을 하나라도 갖췄다면 막대한 손실을 줄이고 거꾸로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스탈린은 5개년 계획에서 전차산업 인민위원으로 뱌체슬라프 말리쉐프Vyacheslav Malyshev를 임명했다. 말리쉐프는 1941년에 산업시설을 철수시키고 첼랴빈스크와 니즈니이 타길에서 전차를 생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그렇지만 그는 전차설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1942년 7월, 스탈린은 말리쉐프를 레닌그라드 키로프공장 관리자였던 이삭 살즈만Isaac Salzman으로 교체했다. 그는 전차에 대해 전임자보다는 많이 알고 있었지만 복잡한 전차설계파벌에 휘말렸고 키로프그룹의 설계에 힘을 실어주었다. 
1942년 12월에 T-34를 1,568대나 생산하며 절정에 달했다. 최고사령부는 전차생산량에 지장을 주는 변경을 일체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살즈만은 독일전차와 같은 기술개발을 할 수 없었다. 

말리쉐프와 살즈만의 노력덕분에 소련은 독일보다 훨씬 많은 전차를 생산했다. 자동용접기술을 도입해서 조립시간을 크게 줄였다. 그리고 과정보다 결과를 우선하면서 1942년 초에 T-34 한 대 조립의 5,300~9,000인시를 1943년 1월에는 3,700~7,200인시로 크게 줄였다. 니즈니 타길(스탈린 우랄전차공장 183. 사진참조)는 최고의 효율성으로 T-34의 절반을 생산해냈다. 
지나친 효율성은 반대로 품질저하를 의미한다. 1942년 말에 도입한 신형 주조포탑은 균열덩어리였고 차체도 균열이 많았다. 심지어 안정적인 V2 디젤엔진도 오동작률이 늘어서 1942년에는 원래의 1,000km에 훨씬 못 미치는 200~300km마다 정비가 필요했다. 
1943년 초기에 투입된 전차를 기계신뢰성이 낮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전차병은 기본적인 정비교육을 아예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고장으로 이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은 독일군 하나만 상대하면 되었고 전차공장을 폭격맞을 염려가 없었다. 독일처럼 원자재를 해군 등에 전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독일은 1942~1944년 동안 상당한 원자재와 부품을 유보트함대로 돌려야 했다. 
전차생산을 위해 트럭공장인 GAZ에서 경전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대신에 렌드리스로 들여온 트럭으로 빈틈을 메웠지만 앞에서 설명한대로 장갑차의 경우에는 도저히 독일군을 따라갈 방법이 없었다. 
1943년, 소련기계화보병부대는 이름뿐이었고 1개 여단 중 최소한 1개 대대는 전차에 올라타고 이동했다. 독일군은 전차에서는 상당히 밀렸지만 기계회부대에서는 1944년 중반까지 소련군을 압도했다. 

 


1943~44년, 렌드리스로 들여온 전차도 소련의 전력에 상당한 보탬이 되었다. 1943년, 소련은 영국에게서 2,102대(발렌타인 1,776대, 처칠 179대, 마틸다 147대), 미국에게서 893대(M4A4셔먼 469대, M3/M5 스튜어트 260대, M3 Lee 164대)를 받았다. 그리고 M31회수전차도 41대를 받았다. 소련은 회수전차가 없었다. 
소련군은 렌드리스 전차의 품질에 대해 불만을 터트렸지만 셔먼과 발렌타인은 안정적이었고 종전까지 계속 운용되었다. 
소련은 실제로 1942년 말~1943년 초에 이미 독일보다 더 많은 장갑전투차량을 생산하고 있었다. T-34/85와 IS-2와 같은 신형 중전차를 도입하면서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최고사령부는 살즈만에게 SU프로그램에 대해서만 약간의 재량권을 주었다. 

그는 세묜 긴즈부르크Semyon Ginsburg에게 SU-76 자주포전차 개발을 맡겼고 T-70 차체를 늘리고 76.2mm 포를 얹어 1942년 12월에 원형을 만들었다. 살즈만은 시험기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일정량만 생산했다. 
1943년 1월, 이렇게 생산된 SU-76이 볼코프Vlokhov전선에 투입되었는데 완전히 실패작으로 드러났다. T-70의 GAZ-202트럭엔진 2개는 T-70경전차에만 맞아서 무게가 늘어난 SU-76은 출력부족 문제가 속출했다. 
살즈만은 이런 문제 때문에 1943년 4월에 생산을 중단시켰다. 스탈린은 히틀러와 달리 설계결함을 참지 않았고 6개월 후인 1943년 6월에 두 사람을 비난하는 명령을 발표했다. 긴즈부르크는 자주포전차 설계에서 쫓겨나 32전차여단의 참모로 배속되었다가 2개월 후에 전사했다. 살즈만도 공장관리자로 숙청되었다. 
말리쉐프가 복귀해 SU-76 문제를 수정한 SU-76M을 개발했다. 그리고 스탈린을 설득해 T-34의 주포를 강화시킨 신형을 통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