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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 동부전선 전차전력의 1943년 상황 (4부)

by uesgi2003 2021. 3. 7.

1943년 당시, 독일최대 전차제조업체 3곳은 오스트리아 상트 발렌틴St Valentin의 니벨룽겐베르케Nibelungenwerke, 작센 플라우엔Plauen의 포마크VOMAG,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크루프 그루존베르크Krupp Grusonwerk로 9,000명의 인력이 독일전차 52%를 생산했다. 
장갑전투차량 최대공장은 베를린의 알케트Alkett로 3,500명의 인력이 1943년에만 2,000대의 돌격포를 생산했다. 7개의 공장이 25,000명의 인력으로 거의 모든 전차와 장갑차를 생산했다. 
독일은 소련보다 원자재 수급이 훨씬 수월했지만 용접공이나 전기공 등의 숙련공이 많이 부족했다. 소련은 전쟁초기에 알루미늄, 철광석과 석탄광산 중 절반 정도를 잃었다. 독일은 소련 니코폴Nikopol과 크리보이 로그Krivoy Rog에서 노획한 마그네슘광석을 독일전차생산에 투입했다. 

 

니벨룽켄베르케의 4호전차 조립작업장입니다.

아래는 100호 전차기념 도색입니다. 

 


소련광산덕분에 독일은 1943년에 소련보다 4배나 많은 강철을 생산해냈다. 그렇지만 독일은 소련이 생산하지 않는 유보트와 반궤도장갑차 등의 다양한 장비를 생산했고, 전차생산에서는 소련에 크게 뒤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니벨룽겐베르케의 전차생산을 보면 독일의 비효율성이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 지를 알 수 있다. 1939~41년에 만든 이 공장은 1942년에 매월 4호전차를 150대씩 생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생산을 시작하자, 최고사령부는 중전차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니벨룽겐베르케는 포르쉐와 협력해 VK 4501(P) 타이거 원형(그림참조)을 개발했고 헨쉘Hneschel은 VK 4501(H) 프로젝트를 자체적으로 진행했다. 포르쉐 설계는 기술문제가 심각했는데도 4호전차보다 더 우선했고 니벨룽겐베르케의 가장 큰 작업장 2곳이 포르쉐의 원형에 매달렸다. 

 


1942년 4월 20일, 히틀러 생일이전까지 타이거 원형을 완성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니벨룽겐베르케는 막무가내식 일정에 맞춰 VK 4501(P) 한 대를 조립했지만 5개월 동안 4호전차를 겨우 2~8대씩만 생산할 수 있었다. 
슈페어는 VK 4501(P)가 너무 불안정해서 헨셀 타이거를 선택했다. 그런데도 포르쉐는 히틀러의 환심을 이용해 니벨룽겐베르케에서 VK 4501(P) 차체 90대를 만들고 아직 설계도 준비되지 않은 페르디난트 중구축전차에 사용하기로 했다. 
니벨룽겐베르케에서 간신히 4호전차 32대를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에, 페르디난트 중구축전차에 집중해 1943년 4월까지 조립을 완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4호전차를 생산하던 작업장 VII의 걸반이 포르쉐에게 할당되었다(사진참조). 

 


니벨룽겐베르케는 계획된 4호전차 1,800대 대신에 겨우 186대만 생산했다. 공장은 페르디난트 프로그램에서 벗어난 1943년 6월이 되어서야 120대씩을 생산할 수 있었다. 니벨룽겐베르케는 4호전차의 로드휠도 생산해야 했기 때문에 부품수급 문제도 있었다. 스탈린은 이런 일탈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지만 독일에서는 흔하게 벌어졌다. 
포르쉐는 문제투성이 VK 4501(P) 말고도 초중전차 목재원형을 만들어 히틀러와 구데리안에게 보여주었다. 포르쉐는 188톤, 12.8cm 주포의 초중전차를 만들고 싶어했다. 구데리안은 황당한 상상이라며 거부했지만 히틀러는 150대 생산을 허가했다. 마우스Maus였다. 
크루프와 알케트 공장은 포르쉐의 황당무계한 초중전차 생산을 위해 생산시설과 기술인력을 할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헨셀도 초중전차 개발행진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140톤, 12.8cm 주포의 초중전차 개발을 시작했다. 

히틀러는 12.8cm의 화력에 너무 만족해서, 기존의 7.5cm KwK 42와 8.8cm KwK 36으로도 소련군전차를 상대하기 충분한데도 타이거와 판터의 변형에 장착하라고 명령했다. 니벨룽겐베르케는 쿠르스크Kursk작전 후에 바닥난 4호전차 생산에 박차를 가하던 중에 다시 야크트타이거Jagdtiger 신형구축전차(사진참조)를 설계하고 생산하게 되었다. 
포르쉐의 비현실적인 설계와 히틀러의 거대무기 집착으로 독일전차산업은 입증된 주력전차 대신에 실험단계로 되돌아가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다른 공장도 이런 저런 이유로 비슷한 상황이었다. 헨셀이 유일하게 타이거를 생산하던 카셀Kassel공장은 생산시설의 2/3이 전차가 아니라 기관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뉘른베르크Nurnberg의 만공장도 계획된 판터생산이 아니라 트럭생산이 더 많았다. 종전 후 경제재건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128mm 주포는 3km 밖의 셔먼을 격파할 수 있을 정도였고 애버딘전차박물관에서 직접 본 전면장갑에 포탄이 튕겨나간 상처가 있을 정도로 장갑이 두터웠지만 71톤의 무게로 겨우 시속 31km, 도로주행 120km가 고작이었습니다.

88대만 제작되었고 제공권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별 활약을 하지 못했습니다. 


군수장관은 판터생산을 위해 만의 트럭조립라인을 폐쇄하라고 요구했지만 만의 경영진은 무시했다. 히틀러의 예상할 수 없는 변덕도 한 몫을 했고 1942년 당시에는 승전을 예상하고 군수용 설비에 과도한 투자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슈페어는 전차공장이 여전히 2부제 가동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헨셀이 1942년 말에 처음으로 12시간 2부제 근무를 실시했고 슈페어는 1943년 초에 다른 공장도 2부제 가동을 하라고 압박했지만 숙련공이 부족했고 외국인노동자 의존도가 높아져서 품질과 효율성이 크게 떨어졌다. 

독일전차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또 있었다. 독일전차은 오버엔지니어링Over Engineering 그 자체였고 품질검사 기준이 너무 까다로웠다. 
타이거전차 한 대에 300,000인시Man Hours가 들고 판터는 약 600,000인시가 든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판터는 겨우 2,000인시만 든다는 주장도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판터를 생산하는 공장의 시설, 인력과 숙력도가 너무 달랐고 표준이 없었다. 
1944년 만공장은 전차생산에 4,483명을 투입했는데 월간 160만인시였다. 만은 매월 판터 140~155대를 생산했고. 판터 후기형 한 대에 최소한 11,000인시가 들었다. 초기 판터 D형은 기술결함이 심각했기 때문에 후기형보다 훨씬 많은 인시가 필요했다. 
1942년 이후 개발된 독일전차는 너무 복잡했고 한 대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시간과 노동력은 소련의 T-34 생산과 비교가 안되었다. 
심지어 군검수관은 니벨룽겐베르케에서 생산한 전차에 대해 용접이 광택이 안나고 표준도색이 아니라는 황당한 이유로 불합격시켰다. 슈페어가 1943년 중반에 쿠르스크작전을 위해 생산과정과 기준을 완화시킨 후에야 상황이 나아졌다. 그런데도 판터 1대를 생산하는데 드는 시간과 인력은 T-34 3대(사진참조)와 맞먹었다. 

 


연합군의 전략폭격도 심각한 지장을 주었다. 1943년 알케트공장은 공장가동을 멈췄었고 만공장은 2번이나 폭격을 받아 판터생산이 잠시 중단되었다. 카셀의 헨셀공장도 영국공군의 폭격을 받아 타이거생산이 줄어들었다. 
1943년 11월, 영국공군의 베를린폭격으로 알케트 베를린공장이 폐허가 되었고 6주 동안 3호 돌격포가 거의 생산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1943년 12월에 크루프 그루존베르크 AG의 4호전차 생산을 중단시키고 4호전차 차체로 신형 야크트팬저Jagdpanzer 4호 돌격포를 생산시켰다. 
구데리안은 알케트에서 3호 돌격포생산을 재개한다며 반대했지만 히틀러는 판터 차체에 8.8cm 주포를 장착한 야크트판터Jagdpanther 생산을 허락했다. 독일군은 전차가 더 필요했는데도 전차대신에 돌격포 변형을 생산하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1943년 3월~6월에 걸친 영국공군의 루르Ruhr공업지대 폭격으로 부품생산이 지연되어 전차생산도 차질이 생겼다. 니벨룽겐베르케는 4호전차의 포탑은 마그데부르크에서, 주포는 뒤셀도르프에서, 엔진은 프리드리히스하펜에서, 다른 부품은 전국각지에서 받았다. 연합군폭격으로 철로수송망이 와해되어 부품이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다. 
폭격 때문에 부품공장도 원자재를 받지 못했다. 

 


1943년, 소련군은 동부전선 기갑부대를 다음과 같이 6개로 나누어 편성했다. 
전차군 – 대규모 기동전목적. 1942년에 5개 전차군을 편성했다가 8월에 심각한 피해를 입고 1과 4전차군을 해산시켰다. 2, 3, 5전차군은 그대로 유지했다. 전차군은 2개 전차군단과 1개 기계화군단, 약 전차 500대로 편성되었지만 전선의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전차군단 – 전차여단 3개와 기계화보병여단 1개로 편성되어 전차군의 일부로 또는 독립기동작전에 투입되었다. 전차군단은 적 전차부대가 아니라 적 보병부대를 주로 공격했다. 1개 군단은 전차대대 6개(T-34 96대, T-70 63대), 기계화보병대대 6개(보병 3,200명)와 오토바이대대 1개로 편성되었다. 
화력지원은 BM-13 다연장로켓발사기 8개가 전부인 근위박격포대대 1개뿐이어서 상당히 부족했다. 

기계화군단 – 기계화여단 3개와 전차여단 1개 또는 전차연대 2개로 편성되어 일선지휘관의 돌파와 추격작전에 투입되었다. 전차연대 5개(170~200대)와 기계화보병대대 9개(6,000명)의 병력이었고 경포병대대 3개(76.2mm 36문)과 박격포 화력지원을 받아 전차군단보다 좋았다. 
기계화군단은 보병수송트럭이 부족해서 전차에 탑승하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1944년 말에 렌드리스Lend-Lease 트럭이 대거 투입되면서 기계화군단 원래의 기동력을 갖추었다. 

전차여단 – 전차대대 2개와 기계화보병대대 1개로 편성되어 소련기동전의 기본부대로 투입되었다. T-34 32대와 T-70 21대(또는 렌드리스전차)를 보유했다. 중전차대대는 소령이 지휘했고 3개 전차중대가 각각 T-34 10대를 보유했다. 
전차여단은 장갑차 3대와 정찰소대의 그럴듯한 정찰능력이 있었지만 화력지원을 받지 못했다. 소련전차여단은 상위전력을 편성하는 기본단위였고 경우에 따라 독립적으로 보병을 지원했다. 1943년부터는 점차 대규모편제로 전력을 극대화시켰다. 

 

독일군이 노획해 사용한 T-70입니다. 경전차이지만 45mm 포를 장착해 독일군 2호전차를 압도했습니다.

전차연대 – 돌파와 보병지원 역할로 중전차를 보유했다. 1943년 1월, 전차연대는 T-34 32대와 T-70 7대 또는 KV전차 21대를 보유했다. 전차연대는 보병이 없었고 대대가 아니라 중대단위로 투입되었다. 

독립전차대대(OTB) - 보병지원용 독립부대로 KV전차 5대, T-34 11대, 렌드리스전차 11대, 경전차 20대 중 하나로 편제되었다. 일부 대대는 화염방사전차나 독일전차를 사용했다. 원래 36대가 완편이었지만 전선에서 오랜 시간 지내다보니 10~20대가 고작이었다. 
1943년부터 점차 해산되었다. 

1943년 1월 1일, 소련군은 전차군 20개, 기계화군단 11개, 전차여단 120개, 전차연대 91개, 독립전차대대 68개, 총 20,600대의 전차를 보유했고 그 중에 7,600대가 T-34나 M3 그랜트였고 2,000대는 KV전차였다. 나머지 11,000대는 T-60과 T-70경전차, 렌드리스 마틸다, 발렌타인, 리와 스튜어트전차였다. 
1942년 말에 소수의 M4A2셔먼이 도착했지만 큰 영향은 미치지 못했다. 소련군은 거의 모든 전차를 독일군과의 전투에 투입했다. 1943년, 극동에는 구형인 T-26과 BT-7경전차 2,500대를, 터키-이란국경에는 수백 대만 배치했다. 
모스크바 등에 배치한 예비전차 2,700대까지 계산하면 거의 14,000대를 최전선에 배치했고 그 중에 약 7~8,000대가 가동 중이었다. 독일은 당시에 1,000대 정도만 가동 중이었기 때문에 동부전선의 전차전력은 1:7로 벌어졌다,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소련전차전력의 30% 정도만 군단이상으로 편제되었고 나머지는 여전히 작은 부대단위로 보병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여단이나 독립대대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전력을 바닥나서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될 수 없었다. 1944년에는 독립전차대대를 점차 해산시키고 군단 휘하의 여단으로 통합시켜 전력을 집중시켰다. 
1943년 초, 소련전차부대는 T-34/76중전차가 주력이었다. V-2 디젤엔진, 경사전면장갑과 76.2mm F-34 주포를 장착했다. 개전초기에는 혁신적인 전차였지만 생산에만 집중하느라 별 다른 개선이 없었다. 
1942년에 육각형 포탑과 약간 더 두터운 장갑을 장착했지만 화력과 승무원 수는 그대로였다. 독일전차와 같은 지휘큐폴라가 없어서 상황판단이 어려웠다. 스탈린은 전자산업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에 5개년 계획에서 중점을 두지 않았고 개전초기에 전자공장을 후방으로 옮기지 못해 소대지휘전차에만 무전기를 탑재했다. 
1943년, 영국이 무전기부품을 대량공급하면서 T-34에 9R 무전기를 탑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전차여단지휘소의 무전기는 겨우 8km 거리만 교신했기 때문에 통신문제는 여전히 심각했다. 

소련군의 KV-1과 T-70경전차는 전력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KV-1전차는 고질적인 변속문제로 다른 전차와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1942년에 5톤을 줄이고 험지주행속도를 13에서 24km로 높인 KV-1S(그림참조)를 도입했지만 방어력이 30%나 줄어들었다. KV-1의 기술한계가 분명해지자 별도의 중전차대대로 편제하고 생산을 중단했다. 
T-70경전차가 중전차의 빈자리를 메웠다. T-70은 독일군 3호전차에도 상대가 안되었지만 대안이 없었다. 화력과 장갑방어력 열세를 숫자로 해결했다. 

 


소련군은 독일군과 달리 반궤도차량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않아 기계화보병부대의 기동력이 전차부대와 동떨어졌다. 렌드리스로 들어온 M2와 M5 반궤도장갑차는 보병수송이 아니라 지휘관과 포견인에 사용되었다. 대신에 보병을 전차 데트에 태워 수송했다. 
1930년대 중반에 ZIS-22와 GAZ-60 반궤도장갑차를 개발했는데, 그 숫자가 1,100대에 불과했고 개전 첫해에 대부분을 잃었다. 1942년, ZIS-42를 대량생산했지만 악천후 주행성능이 너무 안 좋았다. 소련군전차부대는 독일군과 달리 반궤도장갑차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