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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 동부전선 전차전력의 1943년 상황 (6부)

by uesgi2003 2021. 3. 13.

독일군은 에델바이스Edelweiss작전으로 코카서스Caucasus유전지대를 점령하려고 했다. 1942년 10월, A집단군은 마이코프Maikop일대의 파괴된 유전지대 정도만 손에 넣었다. 클라이스트Kliest의 1전차군은 1942년 7월에 코카서스로 진격해 들어갔다(지도참조). 
600대 이상의 전차와 돌격포로 전력이 엉망인 소련 북코카서스전선군을 격파했다. 소련은 9군을 동원해 테레크Terek강을 따라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클라이스트의 진격을 막아냈다. 
클라이스트는 9월 2일에 테레크를 도강하는데 성공했지만 소련군이 보강되고 연료부족으로 그로즈니Grozny유전지대를 85km 앞두고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11월 초, 클라이스트는 마지막으로 필사적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13전차사단이 오즈호니키즈Ordzhonikidze 부근에서 포위되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1전차군은 200km 너비의 전선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서쪽에 3전차군단, 중앙에 3개 보병사단, 동쪽에 40전차군단을 배치했다. 
코카서스의 A집단군 측면과 돈강의 B집단군 측면 사이의 칼미크Kalmyk스텝은 작은 전투단이 방어했다. 클라이스트가 A집단군을 지휘하게 되어 마켄젠Mackensen이 1전차군을 맡았다. 

소련 북코카서스전선군의 북부집단은 마슬렌니코프Maslennikov가 맡았고 9, 37, 44군이 배치되었다. 마슬렌니코프는 독일군이 방어로 전환했다는 것을 알자마자 독일방어선의 취약점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테레크강 북쪽의 헨리히Henrici의 40전차군단이 가장 위험한 상황이었다. 
3전차사단 혼자서 30km 너비의 전선을 책임지고 있었다. 3전차사단 좌측에는 공군장군 펠미Felmy가 지휘하는 여단규모의 병력이 1전차군의 노출된 측면을 방어했다. 원래 전차사단은 공격용으로 방어전용이 아니었지만 클라이스트는 대안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소련이 스탈린그라드에서 B집단군을 위협했다. 
1942년 11월 21일, 독일최고사령부는 클라이스트에게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6군을 구원하게 가장 강력한 23전차사단을 돈집단군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12월 중순, SS장갑척탄병사단 뷔킹Wiking도 돈집단군으로 편제되어 1전차군은 마슬렌니코프의 북부집단을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졌다. 

1942년 초, 코멘코Komenko의 44군이 보병과 전차로 3전차사단 전체를 상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코멘코는 실전경험과 전차가 부족했지만 계속 공격을 퍼부어 독일병력을 줄여 나갔다. 3주 동안의 격전으로, 3전차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2월 한달 동안 1전차군은 5,000명을 잃었고 코멘코의 44군도 8,037명이 포로가 되고 전차 68대를 잃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투경험을 쌓아갔다. 히틀러는 1943년에 코카서스 공세를 이어갈 수 있다고 믿고 40전차군단을 후퇴시켜 전선을 단축시키기로 했다. 
3전차사단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부품부족으로 30대의 전차만 움직였다. 파손된 트랙과 엔진을 교체할 방법이 없었다. 소련군의 포격으로 전차 로드휠의 고무가 부서졌고 주행충격으로 트랙고정핀이 휘거나 부러졌다. 
6전차연대는 3개 중전차대대를 1개로 합쳤다. 전차가 없는 전차병은 보병으로 투입했다. 무전기 배터리가 부족해서 무전교신도 줄였다. 
무엇보다 연료부족이 심각했다. 11월 말에 만슈타인의 돈집단군과 A집단군에 연료를 우선공급했기 때문에 연료보급이 안되었다. 3전차사단 보급부대는 러시아 마차로 전방에 보급해야 할 정도였다. 
3전차사단은 기동방어를 포기하고 중대와 대대규모로 나누어 고정방어를 했다. 12월 말이 되자 1전차군을 후퇴시키지 않으면 궤멸될 위기에 몰렸고 12월 30일, 히틀러는 100km 후방의 쿠마강으로 후퇴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소련군은 코카서스에서 A집단군을 포위해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를 이어 나가려 했다. 소련 남과 남서전선군은 돈집단군을 공격하며 전략거점인 로스토프Rostov를 탈환하려고 했다. 북부집단은 1전차군을 밀어붙여 로스토프 부근에서 전멸시키려 했다. 
흑해집단군은 겨우 전차여단 1개와 몇 개의 독립전차대대를 가지고 독일 17군은 밀어내 쿠반Kuban을 탈환한다는 계획이었다. 코카서스에서 A집단군을 차단하고 궤멸시켜 또 하나의 스탈린그라드를 만들고 싶었다. 
독일군은 위험한 상황을 파악하고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만슬렌니코프는 40전차군단의 좌측을 공격하려고 했다. 코멘코의 9군은 4와 5근위기병군단과 전차를 받았다. 북코카서스전선군은 전차군단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전차부대를 로바노프Lobanov전차집단으로 모아 독일군 방어선을 한번에 돌파해야 했다. 
1943년 1월 1일, 짙은 안개로 덮인 새벽에 44군이 포격을 시작했다. 안개 때문에 부정확했지만 방어선을 단절시키기에는 충분했고 9시부터 전차가 돌격하기 시작했다. 로바노프전차집단은 T-34 46대, 발렌타인 18대, M3 Lee 6대, t-60/70 36대, BA64 장갑차 24를 가지고 있었다. 
코사크기병이 3전차사단의 측면을 돌파하며 포위했다. 3전차사단이 동원할 수 있는 20대로 로바노프의 전차를 막으려 했다. 독일전차는 안개 속에서 이리 저리 움직이며 선봉대의 측면을 노렸다. 

로바노프는 첫날에 전차 17대를 잃었지만 계속 전진했다. 3전차사단은 바로 후퇴하기로 결정하고 남은 전차가 남은 연료를 사용하며 지연전을 펼치기로 했다. 그동안 나머지 병력이 쿠마강으로 후퇴했다. 
3일동안 로마노프의 전차와 5근위기병대를 막았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많은 차량을 파괴했다. 1월 3일에 피에브Piev 부근에서 대대적인 전차전이 벌어졌고, 소련 9와 37군도 1전차군을 공격하면서 독일군 방어선이 급격하게 무너졌다. 
44군이 바로 추격에 나서지 못해 40전차군단은 쿠마강으로 무사히 퇴각했다. 

마슬렌니코프는 다른 군의 다양한 전차부대를 긁어모아 필리포프Filippov전차집단을 편성했다. 총 123대의 전차였다. 1월 7일, 필리포프가 진격에 나섰는데 하필이면 독일 50보병사단이 꼬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퇴각하고 있었다. 쿠라강을 넘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방심하고 있었다.
필리포프의 선봉여단이 아침 안개 속에서 나타나 50보병사단의 122연대를 공격했다. 4시간 만에 독일군 2개 중대를 전멸시켜 급히 만든 독일방어선의 중앙에 구멍이 생겼다. 필리포프는 돌파구를 확장하려고 했지만 보병과 포병지원이 없었다. 
마켄젠은 13전차사단의 전투단과 전차엽병을 급히 보내 필리포프를 상대했다. 1월 9일 오전에 벌어진 전차전에서 필리포프 선봉대는 M3 Lee 12대와 발렌타인 2대를 잃고 패했다. 

1월 10일, 만슬레니코프의 9와 44군은 얼어붙은 쿠마강을 도강하는데 성공했다. 독일군의 방어선이 몇 개의 거점으로 단절되어서 빈틈이 많았던 덕분이었다. 로바노프와 필리포프 전차집단은 몇 개의 기병과 보병여단과 함께 도강했고 그렇지 않아도 부실한 독일방어선은 붕괴직전이었다. 
3전차사단보다 더 열악한 상태인 13전차사단이 소련전차를 막아 섰다가 퇴각했다. 3전차사단은 로바노프 전차집단과 11일에 다시 한번 전차전을 벌인 후에 서쪽으로 퇴각했다. 클라이스트는 소련군이 로스토프를 점령해 후방을 차단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아르마비르Armavir로 퇴각하기로 했다. 소련군이 코카서스를 완전히 탈환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히틀러는 클라이스트가 1전차군은 쿠반으로 이동시켜 코카서스로 다시 들어갈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조건 하에 마지못해 퇴각을 승인했지만 만슈타인과 클라이스트가 1전차군을 돈집단군과 함께 로스토프 방어전에 투입하겠다는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련군은 돌파계획만 있었기 때문에 바로 추격에 나설 수 없었고 전차병은 후방에서 연료를 조달하느라 계속 뒤처졌다. 소련기병군단만 1전차군의 좌측을 계속 압박했다. 
독일군은 추격하는 소련군보다 얼음빙판 도로와 연료부족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수백대의 트럭과 장갑차가 연료부족으로 버려지거나 폭파되었다. 1전차군은 퇴각하면서 차량을 계속 줄여갔다. FAMO가 연료가 바닥난 전차를 견인했고, SS 뷔킹전차는 동사한 시체를 싣고 돈강 너머로 퇴각했다. 
‘전차 안에서 얼어붙은 시체를 꺼내느라 팔을 부러트려야 했다. 그렇지만 뒤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1월 22일, 히틀러는 1전차군 일부를 로스토프로 퇴각시키기로 했다가 2일 후에는 전면퇴각을 승인했다. 대신에 17군을 쿠반 교두보에 투입하기로 했다. 덕분에 1전차군은 쿠반에서 고립되는 대신에 돈바스Donbas의 독일군방어선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2월 7~8일 저녁, 16보병사단의 마지막 전차가 돈강을 건너 로스토프로 들어갔다. 곧바로 공병이 부교를 폭파했다. 클라이스트는 극악한 상황에서 610km를 무사히 퇴각해 150,000명을 구해냈다. 1전차군은 1월에 겨우 1,455명을 잃었지만 군수품 피해가 너무 컸다. 약 600대의 차량을 버렸고 로스토프에는 겨우 40대의 전차만 가지고 들어갔다. 소련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소련전차집단은 독일보병부대를 상대로는 대활약을 했지만 독일전차를 만나면 완전히 반대쪽으로 변했다. 로바노프는 추격하는 동안 T-34 31대, M3 Lee 15대, 발렌타인 10대, 경전차 14대와 471명을 잃었다. 필리포프는 전투에서 30대를 잃고 고장으로 29대를 잃었다. 
두 전차집단은 목적달성 후에 해산되었고 원래의 보병지원임무로 돌아갔다. 소련군은 1전차군을 전멸시키지는 못했어도 쿠반을 제외하고 코카서스 전체를 탈환했다. 

 

(코카서스 퇴각은 이것으로 끝나고, 시간을 앞으로 돌려 스탈린그라드 전투입니다.)

1942년 12월 19일, 스탈린그라드 구원작전이 실패하자, 파울루스Paulus는 6군의 운명을 직감했다. 그는 여전히 201,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군이 보급품공수를 하지 못해 필요량의 1/3만 받고 있었다. 
6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고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지만 1월만 해도 여전히 전차 94대와 돌격포 31대라는 막강한 전차전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부품보급이 단절되어 파손된 차량에서 부품을 빼내 전용했다. 점차 부품이 없어 움직이지 않는 차량이 늘어갔다. 
놀랍게도 12월 30일 기준으로 연료는 30,000리터를 사용할 수 있었고 기동전을 펼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탄약도 폐기된 전투장갑차량의 탄약을 돌려 전차와 돌격포 한 대당 30~40발을 보유했다. 
소련군이 공군활주로를 하나씩 점령했고 공수되는 보급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도 300문의 대전차포와 88mm 대공포는 연료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전차의 침투를 막아내고 있었다. 

 


1943년 1월 1일, 6군은 동서로 53km, 남북으로 35km 너비의 공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의 도심을 제외하면, 6군 대부분이 노출된 야외에 배치되어 있었다. 낮기온은 괜찮았지만 밤에는 영하로 떨어져서 동상환자가 속출했다. 
돈집단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완전히 퇴각했는데도 파울루스는 마치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6군을 그대로 스탈린그라드에 유지했다. 후베Hube의 14전차군단이 남서쪽으로 뻗은 돌출부를 위험스럽게 방어했다. 
후베는 마리노프카Marinovka돌출부에 기계화보병사단 2개와 전차 46대를 배치했다. 파울루스는 서쪽방어를 8전차군단에게 맡기고 14전차사단의 예비전력으로 남겨두었다. 나머지 전차부대는 북쪽에 배치했다. 소련군은 지난 9월부터 이 지역을 계속 공격하고 있었다. 

로코소프스키Rokossovsky의 돈전선군이 6군을 전멸시키는 영광을 맡았고, 남과 남서전전순은 만슈타인의 돈집단군을 상대하기로 했다. 돈전선군은 7개의 혼성군으로 35개 보병사단과 13개 보병여단 281,000명이 있었지만 대부분 오랜 격전으로 대부분의 중대가 겨우 4~60명 수준이었다. 
돈전선군의 전차전력도 대부분 루마니아군 공격에 투입되고 독일구원군을 상대했기 때문에 전차여단 4개, 전차연대 4개와 독립전차대대 1개로 100대가 고작이었다. 돈전선군의 보급상태도 고립된 6군과 다를 것이 없었다. 최전방의 병사들은 굶주리지 않을 정도만 보급을 받았다. 
돈전선군은 6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전력이 아니었고 지연소모전으로 6군을 고사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소련군 포병사령관 보로노프Voronov가 돈전선군을 도와 1월 10일부터 콜초Koltso(올가미)작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30,000명의 추가병력과 대규모 포병부대를 데리고 왔다. 돈전선군에 11포병사단의 300문의 포와 16대의 다연장로켓이 증원되었다.
최고사령부는 독립근위돌파전차연대 10개를 추가로 투입해 KV-1S중전차 110대와 렌드리스 처칠전차 21대가 추가되었다. 
보로노프는 포격으로 독일군의 방어선을 철저히 제압한 후에 보병과 전차를 투입하기로 했다. 21, 24, 65군이 포위망 서쪽을 공격하고 57과 65군이 남쪽에서 지원공격을 할 계획이었다. 4일이면 독일방어선을 완전히 무너트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로코프스키는 1월 1~5일 동안 정찰과 기습정도로만 제한하다가 1월 6일에 갑자기 북쪽과 서쪽에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1월 7일, 소련 65군이 독일 44보병사단을 상대로 보병사단 2개를 투입했고 방어선을 돌파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8군군단이 전차 24대와 돌격포 몇 대를 급히 보내 소련의 진격을 막아보려 했지만 측면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방어선을 안정시키지도 못하고 연료와 탄약만 소비했다. 파울루스는 소련군의 주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너무 성급하게 전차예비병력을 투입하는 오판을 저질렀다. 
6군은 너무 적은 병력으로 지나치게 확장된 전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선을 줄여야만 했다. 히틀러는 6군의 전멸이 눈에 보이는데도 무조건 사수명령을 고집했다. 

1월 10일 오전 8시 5분, 55분간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으며 콜초작전이 시작되었다. 시야가 꽤 맑았기 때문에 소련군 포격은 독일방어선을 제대로 두들겼다. 서쪽 주 공격로에 12km 너비로 500문의 곡사포와 450문의 다연장로켓을 집결시켰는데 그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엄청난 포격이었다. 
포격 후에 16항공군의 기상공격기가 독일 방어선 후방을 정확하게 폭격했다. 9시, 65군의 보병사단 5개, 91전차여단과 전차연대 6개의 111대가 연기를 뿜고 있는 44보병사단의 참호로 달려들었다. 
영국제 처칠은 KV전차보다 느렸지만 방어력이 약간 더 좋았다. 65군 옆에서는 21과 24군이 보병사단 5개와 전차 7대로 독일군의 이동을 막는 지원공격을 했다. 그동안 패전하며 배운 전략이었다. 

44보병사단의 방어선이 절단나고 4개대대가 궤멸되었지만 돌격포와 대전차포가 진격하는 소련전차에 큰 피해를 주었다. 소련군은 보병과 전차가 보조를 맞추는 전술이 서툴렀고 노획한 소려ᅟᅭᆫ제 7.62cm PaK36 대전차포 3문이 KV-1S전차를 하나씩 사냥했다. 
남쪽의 57군은 루마니아 20보병사단을 무너트려 4군군단이 귀중한 대전차포 26문을 버리고 안으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마리노프카 돌출부의 8.8mm 대공포는 21군의 전차 18대 전부 격파했지만 다음 날에는 다른 방어선이 안으로 움츠려들어서 돌출부 측면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후베의 14전차군단은 2일만에 46대의 전차 중 30대, 대전차포 18문 중 11문을 잃었다. 

북서쪽의 24군이 11군군단을 공격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6군은 남은 장갑전투차량과 대전차포를 모두 투입해 전선붕괴를 막았지만 시간문제였다. 
소련군은 처음 3일 동안 26,000명을 잃었고 264대의 전차 중에 135대가 파괴되었다. KV-1S중전차는 거의 3/4가 고장나서 무척 실망스러운 성능을 드러냈다. 그래도 서쪽 방어선은 4와 8군군단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14전차군단이 스탈린그라드로 후퇴하면서 완전히 와해되었다. 독일군도 60대가 넘는 전차와 돌격포를 잃었다. 

1월 15일, 스탈린그라드 방향으로 전선이 크게 축소되었다. 독일군은 필사적으로 피톰니크와 굼라크공군기지를 내주지 않으려고 저항했다. 그렇지만 5일간의 격전이 계속 이어지면서 14전차군단의 전력이 바닥났고 파울루스는 기지를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거의 모든 전차가 격파되거나 연료부족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피톰니크에는 겨우 돌격포 2대가, 굼라크에는 몇 대가 남아 있었다. 전차를 잃은 전차병은 모두 보병으로 투입되었다. 
5알 만에 6군의 1/3이 사상당했고 20,000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소련군의 압박을 막아내고 있었다. 로코소프스키는 독일군을 절반으로 나눈 후에 여러 개의 포위망에 가둬 쉽게 처리하려고 했지만 6군은 스탈린그라드로 계속 퇴각했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100대의 전차으로 보병의 진격을 지원했다. 일부 지역에는 겨우 2~3대의 전차만 투입할 수 있었는데도 굶주림, 추위와 보급부족에 지친 독일군 방어선이 쉽게 무너졌다. 그동안 확실한 방어거점 역할을 하던 대전차포도 겨우 몇 발만 더 쏘면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