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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 동부전선 전차전력의 1943년 상황 (7부)

by uesgi2003 2021. 3. 31.

이야기가 좀 듬성 듬성 진행되는데, 주제가 독일군 전차전력의 전투상황입니다. 그래서 독일과 소련의 전차부대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차대전 동부전선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은 아래 지도로 간단하게 배경을 알아두시면 됩니다. 

 

지금 계속 이어지는 부분이 바로 이 지도입니다. 독일과 소련의 집단군 위치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확인해두면 도움이 될겁니다. 

 

 

1월 16일, 51군 보병이 피톰니트공군기지를 점령했다. 로코소프스키는 이후부터 압도적인 포격으로 좀 더 쉽게 가기로 했다. 돈전선군의 전차 110대는 보병지원 정도에 머물렀다. 
1월 18~21일, 로코소프스키는 공격을 잠시 멈추고 포병을 집결시키고 일선부대를 보충했다. 독일 6군은 완전히 고립되어 그냥 내버려두어도 자멸할 판이었다. 공군의 보급품공수는 매일 86톤이 고작이어서 굶주려 죽는 병사가 나오고 전차는 연료가 없어 고정 방어물이 되었다. 
22일 오전, 로코소프스키는 공격을 재개했고 다음 날 굼라크기지도 점령했다. 
독일공군은 매일 보급품을 떨어트렸고 양이 크게 줄어들었다. 돈전선군은 서두르지 않고 6군을 두들겼고 파울루스는 31일에 항복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은 2월 2일에 완전히 항복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전차사단 3개와 기계화보병사단 3개가 전멸했다. 전차와 돌격포 수백대를 잃었지만 복구할 수 있는 손실이었다. 몇 년 동안 전장을 겪은 5,000명의 귀중한 전차병은 대체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일부 전차장교는 비행기로 탈출해 전차부대 재건의 중심이 되었다. 히틀러도 후베와 보병사단장 4명 등을 직접 선택해 탈출시켰다. 그렇지만 14전차사단의 라트만Lattman, 24전차사단의 렌스키는 포로로 잡혀 독일장교반나치연맹BDO에 협력했다. 16전차사단의 안게른은 2월 2일에 자살했다. 

만슈타인의 돈집단군은 1월초에 급히 퇴각해 간신히 전선을 이었다. 돈집단군의 핵심은 호트Hoth의 4전차군이었지만 57전차군단, 공군야전사단과 루마니아 4군의 패잔병이 전부였다. 
57전차군단은 17과 23전차사단, 16기계화보병사단, 돌격포대대 203이 있었고 SS장갑척탄병사단 뷔킹이 무사히 퇴각해서 합류했다. 
57전차군단은 전차와 돌격포 모두를 합쳐 100대가 안되었다. 4전차군은 스탈린그라드 구원을 포기하고 마니치강을 향해 100km 정도 아래로 물러났고 에레멘코Eremenko의 남부전선군이 추격해왔다. 
돈집단군의 다른 주축은 홀리트Hillidt군집단으로 48전차군단, 17과 29군군단과 미에스Mieth군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약 90대의 전차와 돌격포가 있었고 보병사단 4개와 공군야전사단 2개 일부가 있었다. 홀리트군은 치르Chir강으로 퇴각 중이었고 바투틴Vatutin의 남서전선군의 추격을 받았다. 

돈집단군의 상황이 암울했지만 프랑스에서 재편성된 7전차사단(전차 156대), 중전차대대 502와 503의 타이거전차 29대와 3호 N형 35대가 증원되었다. 
독일군교리에 따르면 증원되는 모든 전력은 한 지역에 집중시켜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이었지만 홀리트와 호트가 동시에 증원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었다. 그는 증원군을 나누어, 타이거는 호트에게, 7전차사단은 홀리트에게 보냈다. 
1월 1일, 첫 번째 타이거전차가 마니치강 북쪽의 철로에 하역되었다. SS뷔킹사단도 철도로 속속 도착했다. 루마니아 4군이 와해되었기 때문에 57전차군단은 넓게 분산되어 동쪽 측면이 노출되어 있었다. 소련전차는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진격할 수 있었다. 
에레멘코는 1942년 11월 19일의 우라누스Uranus작전(지도 참조)에서 입은 피해로 전차전력이 급감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3~400대를 투입할 수 있었다. 13전차군단이 지모프니키Zimovniki방면으로 접근했다. 

 



마침내 독일중전차대대 5가 도착했고 뷔킹사단은 소련보병이 후방의 철로를 끊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원래 23전차사단이 철로 동쪽을 방어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너무 넓게 퍼져 있어서 3근위기계화군단이 침투해 철로를 차단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월 8일 오전 소련보병대대가 오를리프스키이Orlivskiy에 진입했고 독일군은 바로 퇴각해 도시를거의 넘겨주었다. 중전차대대 5가 급히 투입되었지만 이미 지역공병부대가 소련군을 몰아낸 후였다. 중전차대대는 다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귀중한 중전차가 길에서 시간과 연료를 허비했다. 
얼어붙은 길에서 시속 3~4km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귀중한 중전차가 24시간 동안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소련 3근위기계화군단이 본격적으로 진격했다. 전투에 투입된 지 겨우 2주 밖에 안되어서 전력이 충분했지만 보병대대 9개를 수송할 트럭이 부족했다. 독일공군 정찰기가 프롤레타르스캬야Proletarskaya 동쪽 40km에서 소련군을 발견했고 23전차사단에 알렸다. 
23전차사단은 겨우 19대만 움직일 정도로 만신창이 상태였다. 보병이 너무 부족해서 전차병으로 보병 2개 중대를 급히 편성했다. 사단장 보르만Vormann은 소련기계화군단을 막기에는 병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차라리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중전차대대 503의 타이거 중대 2개의 지원을 받았다. 503의 다른 중대는 북쪽으로 보내 17전차사단의 후위를 지원했다. 

1월 5일, 타이거 17대와 3호전차 20대가 동쪽으로 진격했다가 스타브로폴Stavropol마을 근처에서 소련군 선봉대의 거친 저항을 만났다. 이튿날 타이거를 전면에 세우고 3호전차는 마을의 배후로 돌려 다시 공격했다. 
공군도 슈투카 몇 대를 보냈지만 보병과 포병 지원은 거의 없었다. 동부전선에서 타이거전차의 실전능력을 확인하고 새로 편성된 소련기계화군단의 방어력을 테스트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전투였다. 
마을 안의 소련여단은 20~25대의 전차, 76.2mm 포대대, 45mm 대전차포 12문을 가지고 있었다. 76.2mm는 3호 전차 1대를 격파하고 독일보병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타이거전차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타이거는 소련전차 13대와 포 다수를 격파했다. 독일전차가 배후에 나타나자 소련여단은 급히 달아났다. 보급 때문에 퇴각하는 소련군여단을 추격하지 못했다. 전차연대 201은 전차당 포탄 3~4발과 기관총탄 300발이 고작이었고 연료도 140리터 밖에 남지 않아 본대로 간신히 돌아갈 정도였다. 

그동안 다른 소련군병력이 23전차사단의 중앙으로 밀고 들어왔다. 사단본부가 점령당했고 57전차군단의 방어선이 양분되기 직전이었다. 소련여단 추격에서 돌아온 전차를 포함해 타이거로 베셀리Vessely의 소련군을 반격하게 했다. 
1월 9일 오전 9시 30분, 독일군은 타이거 11대와 3호전차 12대로 평원을 가로 질러 반격했다. 길이 얼어붙어 타이거는 1차대전 마크 5 전차와 비슷한 시속 10km로 간신히 나아갔다. 
소련군은 베셀리를 점령하고 24시간 만에 전차, 야포와 대전차포를 보강했고 첫 번째 독일군의 반격을 막으며 보병에서 큰 피해를 입혔다. 사단장이 직접 명령한 두 번째와 세 번째 반격도 무산되었다. 
6시간의 전투에서 타이거가 T-34 8대를 격파했지만 2대가 76.2mm를 맞고 주저 앉았고 나머지도 많은 상처를 입었다. 3호전차도 2대가 격파되고 7대가 손상을 입었다. 타이거 1대는 76.2mm를 11발, 57mm를 14발이나 맞았고 전차병은 무사했지만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베셀리반격은 완전히 실패했고 23전차사단과 중전차대대 503은 더 이상 투입할 전차가 남지 않았다. 기차편으로 교체전차가 도착하자 남은 타이거 2대를 중심으로 비닝Winnig전투단을 편성했다.
1월 11일, 비닝전투단은 베셀리 서쪽의 소련포병대대를 제거했지만 거의 동시에 소련군이 23전차사단의 남쪽으로 침투했다. 비닝은 바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참투한 소련기계화여단을 공격했다.
23전차사단 포병여단과 슈투카 2대의 화력지원을 받았는데도 실패했다. 소련기계화여단은 도시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57전차군단은 마니치Manych강 북부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며칠 동안 남은 전차, 돌격포와 보병이 지연전을 벌이며 퇴각했다. 중전차대대 502는 소련전차 11대를 격파했지만 겨우 타이거 3대만 남았다. 

17전차사단에 이어 23전차사단이 연달아 마니치강 남쪽으로 퇴각했다. 57전차군단은 수비 중이거나 연료가 없는 차량 수백 대를 파괴했다. 퇴각 중에도 3호전타 3대가 길에서 미끄러져 처박혀 그대로 버려졌다. 
소련3근위기계화군단은 28군의 보병과 포병을 증원받아 강건너에 급히 마련된 SS뷔킹의 방어선을 압박했다. 2근위군도 서쪽으로 진격해 16보병사단 방어선을 돌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롤레타르스카야에 떨어지는 포탄이 점점 많아졌다. 
뷔킹은 날이 저물 때까지 프롤레타르스카야를 방어했고 그 덕분에 57전차군단과 전차군 1이 로스토프Rostov로 후퇴할 수 있었다. 뷔킹도 마니치다리를 폭파하고 로스토프로 퇴각했다. 

3근위기계화군단은 독일군을 계속 추격하고, 2근위군은 마니치의 북쪽강변을 따라 계속 서쪽으로 진격하며 로스포트로 퇴각하는 독일군의 배후를 차단하려고 했다. 2근위군은 2근위기계화군단(GMC), 3근위전차군단(GTC), 5GMC로 기갑집단을 편성하고 돈Don강 바타이스크Bataisk 부근 다리를 점령하게 했다.
이제는 A집단군이 코카서스에서 탈출할 통로가 막힐 판이었다. 호트는 17전차사단을 투입해 탈출로를 방어하고 만슈타인에게 발크의 11전차사단을 돈강 남쪽으로 투입해서 위협을 차단해달라고 요청했다. 
1월 25일, 11전차사단은 소련군의 교두보를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소련군은 나중에 독일군전차 120~150대 그리고 보병연대 3~4개의 공격을 받았다고 했지만 11전차사단은 겨우 3~40대의 전차와 기계화보병대대 2개가 고작이었다. 독일군전차 20대를 격파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에는 심각한 피해를 입고 더 이상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소련군은 11전차사단의 전투단 하나에 막혀 일주일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고 호트의 전차부대는 로스토프로 무사히 빠져나갔다. 퇴각 중이던 독일전차를 소련군을 막아내며 큰 피해를 입혔다. 1월 31일, 로스토프 외곽에 도착한 전차와 돌격포는 50대를 넘지 못했다. 
호트가 한달동안 벌인 지연전덕분에 A집단군은 코카서스에서 고립되지 않았지만 4,000명과 많은 장비를 잃었다. 타이거 3개 중대가 최소한 소련전차 39대를 격파하면서 약간의 도움을 주었고 2주만에 타이거 29대 중에 겨우 5대만 움직였다. 
반면에 3호와 4호전차만 무장한 발크의 11전차사단은 추격하는 소련기계화부대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혔다. 

소련군의 기계화전술은 더욱 발전해 소련군 특유의 기동전을 완성했지만 보급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연료와 탄약이 떨어졌고 결국에는 독일군 추격에 발목을 잡혔다. 

호트가 A집단군을 구원하는 동안, 홀리트 파견군Gruppe Hollidt는 바투틴Vatutin의 남서집단군의 로스토프진출을 막아내고 있었다. 로스토프는 만슈타인의 돈집단군과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의 보급로로 러시아남부의 전략도시였다. 
홀리트 파견군은 12월내내 스탈린그라드로 공수하는 공군기지를 방어했다. 12월 24일에 공군기지가 점령당하자 공군은 살스크Slask로 기지를 옮겼다. 1월 초가 되자 홀리트 파견군은 조금씩 도네츠크Donetsk강으로 밀려났다. 
홀리트 파견군의 왼쪽에는 또 다른 혼성부대인 프레터 피코Fretter Pico 파견군이 이탈리아와 대공포부대를 합친 304보병사단만으로 밀레로보 부근을 방어하고 있었다. 크레이시그Kreysing 파견군 6,000명은 밀레로보에 갇혀 소련 17과 18전차군단에게 포위되었다. 
겨우 포병 2개 대대의 지원을 받은 부실한 방어선이었는데도 소련전차군단은 보병군단의 증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덕분에 프레터 피코 파견군은 방어선을 구축할 귀중한 3주를 벌었다. 

12월, 최고사령부는 독일에서 중전차대대 138을 편성하고 기차로 4호 G형 신형 30대와 3호 8대를 보냈다. 1월 4일, 중전차대대 138은 밀레로보의 소련전차군단을 상대했다. 갑자기 나타난 전차부대는 독일군 수비군의 사기를 크게 올렸고 소련의 진격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도네츠Donets강과 로스토프로 퇴각시켜 보급로를 단축시키고 기차로 증원을 받기로 했다. 반면에 저절로 끌려 들어간 바투틴은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운 보급로가 완전히 끊어졌다. 
1월 초, 홀리트 파견군은 타임비야Taymbuya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 북쪽에는 48전차군단이, 중앙에는 17군군단이, 오른쪽에는 미에스Mieth 군군단을 배치했다. 보병이 워낙 부족해서 중앙에는 공군야전사단 2개가 배치되었다. 
대공포부대도 2cm, 3,7cm, 8.8cm 포를 대전차포로 돌려 투입되었고 루마니아 패잔병부대도 있었지만 전력에 거의 도움이 안되었다. 

홀리트의 전차사단 3개 상황도 좋지 않았다. 6전차사단은 전차가 40대 밖에 없었고 7.5cm 장포신 4호 전차는 5대뿐으로 48전차군단의 핵심전력이었다. 17군군단에 편성된 22전차사단은 지난 전투에서 워낙 심각한 피해를 입어서 10대 정도의 전차가 전부인 연대급 전력이었다. 발크의 11전차사단을 예비병력으로 돌려 소련군의 돌파에 대응했다. 11전차사단은 장포신 4호전차 3대를 포함해 32대가 있었다. 여전히 5cm 장포신 3호전차가 주력이었고 4호전차는 소수에 불과했다. 
소 새턴Little Saturn작전성공에 힘을 받은 바투틴은 선택권이 많아졌다. 바투틴은 홀리트에게 4전차군과 3근위군을 집중시켰고, 1근위군은 프레터-피코에게 보냈다. 그는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지만 소련의 보급이 막힌 상태에서 거대한 양동작전을 실행했다. 더구나 전차부대는 6주 동안 계속 악전고투를 벌이면서 전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상태였다. 12월 17~28일 동안 공군기지를 공격했던 전차군단 2개는 거의 궤멸 상태였다. 
최고사령부는 이 전차군단을 후방으로 보내 재편성하지 않고 3근위군에 두고 마찬가지로 엉망이 된 1근위기계화군단과 합쳤다. 독단적인 퇴각으로 스탈린의 분노를 샀던 바다노프Badanov가 혼성전차부대를 맡았는데 3개군단이 겨우 50대의 전차뿐이었고 보병은 거의 없었다. 
포포프Popov의 5전차군은 상황이 훨씬 나아서 전차군단 2개와 기계화군단 1개가 약 20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공격의 선봉이 되기로 했다. 가장 큰 문제는 포포프였다. 그는 주정뱅이였고 지휘관으로는 너무 태만했다. 대대적인 숙정으로 그를 대체할 지휘관이 없었다. 
포포프는 훨씬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홀리트를 조금씩 밀어내는 정도로 만족했다. 전차기동전은 운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위험을 감수한 결정이 중요했다. 독일전차지휘관은 1941~42년 전투에서 그런 능력을 익히고 재현한 반면에 소련군은 아직 그런 지휘관이 거의 없었다. 

홀리트 파견군의 거점은 스탈린그라드로 이어지는 철로의 공군기지 옆이었고 22전차사단과 7, 8공군야전사단 병력이 배치되었다. 바투틴은 바다노프의 혼성기갑군으로 북쪽에서 그리고 8기병군단과 포포프의 전차 일부로 동쪽에서 협공했다. 
독일군 방어선이 워낙 허술했기 때문에 포포프의 5전차군이 공군야전사단을 가볍게 돌파했어야 했지만 방어선을 뒤로 밀어내는 정도에 그쳤다. 남쪽의 2근위군의 1근위보병군단이 돈강을 건너 홀리트의 우측을 위협했고 홀리트는 예비로 남겨두었던 11전차사단을 투입했다. 
홀리트의 좌측에서는 3근위군이 48전차군단을 밀어내고 있었고 23전차군단이 새로 투입되었다. 만슈타인은 7전차사단을 투입했다. 

7전차사단은 전력을 보충해 1월 5일에 도착했다. 3호전차 105대와 4호전차 18대, 마더 3 대전차자주포 18대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완편된 25전차연대와 장갑척탄병대대 4개가 더 증원되었다. 7전차사단의 선봉대가 곧바로 23전차군단을 상대했다. 
마치 서부영화 기병대처럼 위기의 순간에 도착한 전차는 만신창이가 된 6전차사단을 구원하며 눈보라치는 평원에서 소련군전차와 맞섰다. 그렇지만 홀리트는 모든 전차전력을 좌우측에 투입했고 중앙에는 전력이 바닥난 22전차사단만 남았다. 
홀리트는 마침내 퇴각허가를 받아 1월 16~17일 밤에 도네츠강을 건너 새로 방어선을 만들었다. 

만슈타인은 밀레로보에 갇힌 케레이시그 파견군에게도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놀랍게도 산악엽병부대는 소련 18전차군단을 뚫고 탈출해 독일방어선에 합류했다. 1월 18일에는 프레터 피코 파견군도 도네츠강 너머로 퇴각해 홀리트의 좌측을 보강했다. 
홀리트와 프레터 피코 파견군은 바투틴의 도네츠강 도하를 2월 9일까지 막아냈다. 홀리트는 6개 보병사단만으로 방어선을 지키고 6전차사단을 후방으로 돌려 재편성할 여유를 가졌다. 1월 30일, 6전차사단은 64대의 전차와 함께 복귀했다. 
포포프의 5전차군도 보급을 위해 후방으로 빠지면서 전투가 중단되었다. 바투틴은 만슈타인의 전력이 바닥났다고 판단하고 도네츠북부의 좌익을 공격하기로 했다. 1월 29일, 남서전선군은 도네츠강을 건너 돈집단군의 배후로 도는 스카초크Skachok(장애물 넘기)작전을 시작했다. 
과감한 작전이었지만 바투틴은 홀리트 파견군을 묶어두지 못했고 홀리트는 7전차사단을 돌려 소련군의 좌측 침투를 막았다. 만슈타인은 곧바로 호트의 병력 일부를 빼내 홀리트 파견군을 지원하고 다른 병력도 돌려 위기를 수습했다. 
위기가 계속되자 2월 13~14일 로스토프도 포기했다. 홀리트는 미우스Mius강으로 퇴각했고 그곳에 단단한 방어선을 마련했다. 독일군 전차사단의 분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군이 소련의 대대적인 반격을 성공적으로 차단했지만 피해가 상당했다. 1월 중에만, 홀리트 파견군은 전사와 행불 4,808명을 포함해 14,909명을 잃었고 6과 11전차사단은 전차 89대를 잃고 92대를 충원했다. 그 중 9대는 단포신 구형을 수리한 것이었다. 
반면에 바투틴은 포포프의 5전차군을 너무 오랜 동안 전투에 투입해서 로스토프를 탈환하거나 A집단군을 차단하기 전에 전력이 바닥났다. 만슈타인은 제 때에 퇴각해 군전력을 간직했고 바투틴은 로스토프를 탈환해 양쪽 모두에게 위안이 되었다. 


바투틴이 스카초크작전으로 돈집단군을 공격하기 전에, 소련 최고사령부는 보로네즈Voronezh지역에서 B집단군에게 치명타를 입히고 하르코프Kharkov로 진격하려고 했다. 겨울이 끝나기 전에 돈바스Donbas와 하르코프를 탈환할 수 있다면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루마니아군을 상대로 우라누스Uranus작전에서 성공했던 전술을 헝가리 2군과 이탈리아 8군에게 실행하기로 했다. 

 


야니Jany의 헝가리 2군은 3, 4와 7군군단의 총 8개 경보병사단으로 보로네즈 남부의 돈강을 따라 186km를 방어하고 있었다. 소련 보로네즈전선군이 돈강을 너머 헝가리방어선에 교두보를 마련했지만 헝가리군은 5개월 동안 더 이상의 침투를 허용하지 않고 잘 방어하고 있었다. 
헝가리 경보병은 37mm와 47mm 대전차포와 구형 사단포가 전부였기 때문에 평원에서는 소련전차를 상대할 수 없었다. 
B집단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Maximilian von Weichs는 헝가리군을 조금만 지원하면 이 지역을 제대로 방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소련군이 침투한 우리프Uryv지역의 헝가리 4군단에게 공군대공포대대 2개를 보강했다. 그리고 독일보병사단 2개와 헝가리 1기갑사단도 보강했다. 헝가리 2군은 전차 100대와 돌격포 40대의 지원을 받았다. 
그렇지만 1기갑사단의 전차는 38t경전차가 5~60대, 7.5cm 단포신 구형 4호전차가 20대였고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톨디Toldi경전차와 차바Csaba장갑차 중대와 님로드Nimrod 40mm 대공자주포 전차 1개 대대가 대전차포 역할을 했다. 1943년도에는 이미 기갑사단이라고 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헝가리 2군 남쪽에 있던 이탈리아 8군 일부는 돈강을 따라 배치되었다. 이탈리아 산악군단 3개 사단과 다른 보병사단 1개는 비교적 전력이 온전했지만 전차가 전혀 없었고 야포와 대전차포도 거의 없었다. 
바이흐스는 24전차군단으로 이탈리아군 우측을 지원했지만 3호와 4호전차가 겨우 8밖에 없을 정도로 부실했다. 이탈리아 방어선에 배치된 19전차사단과 돌격포중대는 전차 3~40대와 돌격포 50대 이상이 있었다. 
B집단군은 보로네즈전선군의 계획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했지만 독일정보부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헝가리 2군 반대편의 소련 40군은 전차여단 4개와 10포병사단을 증원받았다. 지휘관 모스칼렌코Moskalenko는 1전차군을 지휘했던 베테랑이었고 이제 충분한 전력을 모아두었다. 
더구나 3전차군이 1월 초에 열차편으로 도착했다. B집단군은 소련전차군이 이동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3전차군의 리발코Rybalko는 1941~42년에 카잔전차학교 교관으로 전투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전투교훈을 바로 습득했다. 그는 다른 지휘관과 달리 현장실무를 중시해서 직접 T-34를 운전하며 전차에 대해 파악했다. 
3전차군은 12와 15전차군단이 전부인데다가 493대의 전차 중에 122대가 고장난 상태였다. 전력누수를 메우기 위해 7기병군단이 증원되었다. 

1월 초, 모스크바에서 주코프Zhukov와 바실레프스키Vasilevsky가 와서 작전수립을 도와주었다. 3개 공격군으로 전체 전선을 공격해서 헝가리와 이탈리아군을 궤멸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북부의 40군은 우리이프 교두보를 돌파하고 남부의 3전차군이 B집단군의 허술한 우측을 공격하기로 했다. 18보병집단이 헝가리군 우측을 도강했다. 
1월 12일, 40군이 86전차여단, 보병사단 2개로 교두보에서 5km 잔출하고 헝가리 7경보병사단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사전공격에 성공하자 40군은 이튿날에 대대적인 포격과 함께 보병사단 4개와 더 많은 전차를 투입하며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몇시간 만에 헝가리 7사단은 궤멸되었고 40군은 돌파구를 완전히 확보했다. 독일군은 뒤늦게 전차부대를 투입해 돌파구를 봉쇄하려고 했지만 38t경전차는 T-34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14대를 잃고 퇴각했다. 

40군은 4전차군단과 25근위보병사단을 더 투입해서 헝가리군 중앙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동쪽에서는 18보병사단이 돈강을 건너 헝가리 7군단을 공격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헝가리 12경보병사단이 궤멸되었지만 독일군 보병여단 2개가 돌파구를 간신히 틀어 막았다. 
3전차군도 대대적인 포격과 함께 공격에 나섰다. 15전차군단이 북서진해 질리노Zhilino부근의 24전차군단을 공격했다. 소련전차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총통호위여단 Führerbegleitabteilung과 SS전투단이 전부였다. 
소련전차는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해 배후로 돌았다. 적이 배후로 침투한 것을 안 387보병사단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15전차군단은 첫날에 20km를 돌파하며 24전차군단사령부까지 점령했고 반델Wandel장군이 전사하고 참모 68명이 포로가 되었다가 모두 처형당했다. 

1월 15일, 폰 바이흐스는 독일전차부대와 헝가리 1기갑사단으로 무너지는 7군단을 지원했지만, 소련군이 돈강을 건너고 전차가 허술한 방어선을 돌파하자 헝가리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헝가리 기갑사단은 반격에 나서 18보병사단의 교두보를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 독일 26보병사단이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지만 소련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1월 16일, 반격이 실패하면서 헝가리군 중앙과 우측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독일군 돌격포중대가 소련군 전차 7대를 부수고 천천히 퇴각하면서 이탈리아산악군단의 측면이 노출되었다. 남쪽에서 3전차군이 24전차군단을 완전히 밀어내고 로소슈Rossosh방면으로 진출해 이탈리군 배후를 끊었다. 
독일 7군군단만이 보로네즈에서 버티고 있었고 헝가리 3군단의 패잔병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1월 16~17일, B집단군 방어선 곳곳이 단절되었고 전체가 퇴각 중이었다. 1월 17일, 15전차군단이 40군 선봉대와 알렉세에프카Alekseevka에서 합류해 이탈리아산악군단, 독일군과 헝가리군 일부 부대의 배후를 끊었다. 
12전차군단의 소련전차대대가 로소슈에 난입해 이탈리아군을 궁지에 몰았지만 독일군 마더 3 2대가 도착해 소련군전차를 격파했다. 이제 3전차군은 이탈리아군을 거의 포위했다. 히틀러는 지원군을 보내겠다며 자리를 고수하라고 명령했고 바이흐스는 이탈리아산악군단에게 퇴각하지 못하게 했다. 
이탈리아군은 미친 명령을 무시하고 눈밭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1월 18~27일, 독일군은 계속 퇴각했고 소련군은 천천히 그 뒤를 추격했다. 독일군과 헝가리군은 오스콜Oskol강으로 퇴각해 40군의 추격을 한동안 막아냈다. 히틀러는 중앙집단군에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을 빼내 오스콜 방어선에 투입했지만 소련군의 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탈리아산악군단은 기적처럼 포위망을 1월 29일에 탈출했지만 30,000명을 잃고 3개 사단이 완전히 궤멸된 상태였다. 남쪽에서는 24전차군단이 궤멸해 도네츠강으로 퇴각했다. 24전차군단은 겨우 2,500명으로 줄어들었고 27전차사단과 385보병사단은 곧바로 해산되었다. 헝가리군도 100,000명을 잃었다. 
소련 3전차군과 40군은 이탈리아 8군과 헝가리 2군을 와해시키고 B집단군의 방어선에 190km의 거대한 통로를 만들었다. 바이흐스는 반격은 고사하고 오스콜강 방어선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3전차군은 너무 늘어진 보급로 때문에 탄약과 연료가 부족했지만 무인지경으로 진격했다. 독일전차나 장갑차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B집단군은 더 이상 전차가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