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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영국

바이킹 (2부) - 바이킹에 대한 오해 8가지

by uesgi2003 2021. 7. 6.

넷플릭스 사극 라스트 킹덤과 바이킹스를 보다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서 간단한 자료를 정리 중입니다. 

영국 역사학자 야니나 라미레스https://www.janinaramirez.co.uk/의 자료를 인용했는데, 언제나 반대 시각과 자료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이킹에 대한 제 지식이 부족하기때문에 용어와 설명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재미로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바이킹은 뿔투구를 쓰지 않았다. 바이킹에 대한 오해 8가지 

바이킹하면 무성한 수염에 이성을 잃고 난폭하게 주변의 모든 사람을 가뿐하게 제압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난폭했고 정말로 뿔투구를 썼을까? 우리가 가진 지식이 실제와 정반대라는 것을 알면 놀랄 것이다. 

바이킹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바이킹 드라마와 영화 때문에, 뿔투구를 쓰고 상륙하는 곳마다 잔인하게 정복하는 전투력 최강의 민족이라고 믿고 있다. 
넷플릭스 라스트 킹덤 개봉에 앞서 영국 역사학자 야니나 라미레스Janina Ramirez가 바이킹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8가지를 설명한다. 

1. 바이킹은 뿔투구를 착용했다. 
머리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자. 바이킹이 뿔투구를 착용했다는 자료가 없으며 고고학발굴에서도 나온 적이 없다. 투구를 썼지만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단순한 투구였다. 적 전사가 곤봉, 칼이나 도끼로 당신을 내리치는데 머리에 뿔을 단다고 해서 도움이 되겠는가. 
서턴 후Sutton Hoo과 벤델Vendel시대의 투구를 보면 뿔이 튀어나온 투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부러진 새부리 모양이고 바이킹 전사와 상인은 뿔투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바이킹의 뿔투구는 19세기부터 등장했는데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가 노르드사가의 인물을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 리벨룽의 반지The Ring Cycle가 본격적인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의상디자이너 칼 에밀 되플러Carl Emil Doepler (1824–1905)가 1870년대에 바이킹 등장인물용으로 뿔투구를 만들었고 많은 만화가, 영화감독과 화가가 이런 상상을 재생산했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바이킹스 시즌 6에서 뿔투구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바이킹 역사학자들이 많이 화를 내더군요.

다시 한 번, 이런 투구는 없었으니까 기념품으로 사지 말랍니다. 

 

참고로 바이킹의 투구와 투구 발전사입니다. 

 



2. 바이킹은 특정 집단을 말한다.
바이킹이라는 단어는 아이슬란드 고어 ‘Viking-r(작은 만 거주족)’에서 유래되었다. 노르웨이 비켄Viken이라는 상업지역으로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원거리 교역을 벌였기 때문에 이런 단어가 생겼을 것이다. 바이킹은 점차 ‘해상습격, 해상원정’으로 변했고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개인이나 집단이 a-Viking하러 가곤 했는데 더운 여름에 정착지를 떠나 롱보트로 여러 지역을 돌며 교역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런 책이름이 있군요. 역시 공부를 해야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는 바이킹이라는 단어를 특정 민족에 사용하지 않고, 북쪽출신의 사람들인 노르드Norse 인이나 이교도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기독교에서 바이킹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바이킹 단어 하나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스칸디나비아 전체를 말하고 있다. 
이 지역은 모두 다양한 지도자가 있었고 서로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지형도 매우 다양했다. 특히 노르웨이 산악지대와 같이 더 북쪽은 악천후 때문에 농사가 불가능했지만 덴마크 평원과 같은 남쪽은 훨씬 비옥했다. 스칸디나비아 지도자가 가끔씩 병력을 연합해 원정을 시도했었지만 북유럽 전체를 바이킹이라고 부르면 안된다.



3. 바이킹은 엄청나게 난폭했다.
바이킹은 무기력한 종교시설을 자주 약탈해서 역사의 악명을 얻었다. 당연히 기독교문서에서 최악으로 기록될 수 밖에 없었다. 요크의 알퀸Alcuin은 주교 힉볼드Higbald에게 “영국에서 이교도에게 저희가 당한 공포는 유례가 없습니다… 이교도들은 하나님의 성소를 멸시하고, 제단 주위에 성도들의 피를 흘리고, 희망의 집을 버리고 거리에서 배설물처럼 성도들의 몸을 짓밟았다"는 편지를 보냈다. 

 

알퀸은 8세기 말 최고의 신학자, 철학자, 시인으로 샤를마뉴의 초대를 받아 카롤링거제국에서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바이킹이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렸다는 증거가 있다. 뼈에 무기가 박힌 해골이 많이 발견되었다. 노스 하트퍼드셔North Hertfordshire박물관에는 바이킹 창이 목에 박힌 해골이 있다. 그렇지만 바이킹이 분명히 전쟁의 늑대로 명성을 얻었지만 정착한 4개 대륙에서 농사와 교역으로 원주민과 평화롭게 공존한 것도 사실이다. 

 


그 시대는 폭력의 시대였고 다른 민족은 바이킹의 침공보다 훨씬 잔인한 짓을 벌였다. 예를들어 샤를마뉴Charlemagne황제는 작센Saxony에서 인종학살을 자행했다. 
782년 베르덴Verden학살에서, 샤를마뉴군은 동맹군이 넘겨준 작센인 4,500명 이상을 죽였다. 기독교 역사기록관은 샤를마뉴의 행동을 미화하며 이교도를 처벌해 교회의 아버지라고 강조했고 그는 역사의 영웅으로 남았다. 

 

샤를마뉴의 인종학살 그림입니다. 



4. 바이킹은 마구 약탈하고 떠났다.
스칸디나비아의 기록과 유물을 보면, 바이킹은 상륙하는 지역을 약탈하고 귀금속을 본토로 가져왔다. 그렇지만 많은 바이킹이 상륙지에 정착했다. 

바이킹 정착지 중 최초이자 최대규모인 더블린Dublin은 841년에 만들어졌다. 더블린은 큰 항구와주조소가 있는 산업도시로 성장했고 최초의 아일랜드 동전이 생산되었다. 더블린뿐만 아니라 요크York에서는 앵글로-색슨 도시는 강 하구로 이동하고 바이킹이 요르비크Jorvik(그림 참조)라는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다. 아이슬란드는 874년에 잉골프 아르나르손Ingólfr Arnanson(그림 참조)의 바이킹이 정착했다. 

 


노르망디Normandy도 무질서에서 평화로운 정착지로 변모한 바이킹 정착지다. 북부민족을 의미하는 노르만족은 단순왕 샤를 3세Charles the Simple의 허락을 받고 정착했다. 샤를왕은 평화로운 정착지를 마련해서 바이킹의 침공을 막으려 했고 심지어 노르웨이군벌 롤로Rollo를 사위로 받아들였다. 바이킹 정착민은 프랑스어와 문화를 흡수해 새로운 정복자가 되었다. 

 

맞습니다. 바이킹스의 바로 그 롤로입니다. 

인생역전 후에 노르망디공이 되었고 후손이 영국을 정복하면서 유럽 귀족가문의 선조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참고로 바이킹은 저 멀리 비잔틴제국까지 건너가서 황제의 친위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바랑기아 친위대Varangian Guards라고 불렀습니다. 

바이킹스에서는 비잔틴제국 원정을 계획만 하다가 러시아공국의 내분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죠. 

 


5. 바이킹은 무신론의 이교도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지만 바이킹의 경우에는 기독교인이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바이킹종교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고 단순히 무신론자나 이교도로 묘사한 기독교 기록이 많다. 고고학과 스칸디나비아 유물과 자료를 분석해 보면 정 반대였다. 

바이킹종교는 잘 정리된 서사를 바탕으로 계층구조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렇지만 성서는 없고 구술로 전해지는 신화였다. 

바이킹은 사원에서 예배를 보지 않고 고대 켈트족처럼 성스러운 숲이나 강을 섬겼다. 친족의 어른이 사제가 되어 종교행사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제직은 왕이 가지는 명예 중 하나였으며 물건, 동물이나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바이킹은 미드가르드Midgard라는 인간세계와 다른 영적세계를 구분하는 우주론을 가졌다. 신들은 아스가르드Asgard에 거주하고 신성한 나무 위그드라실Ysgadrill(Yggdrasil)이 신, 거인과 망자의 세계에 뿌리를 뻗고 있었다. 최소 6개의 세계가 있었고 전사만을 위한 특별공간인 발할라Valhalla가 있었다. 

 

 

게임에서의 발할라입니다. 



6. 바이킹은 무지하고 문맹의 야만인이다. 
바이킹은 무지하거나 문맹인 야만인이 아니었고 그 당시 기독교 기록자들이 그렇게 믿었을 뿐이다. 나중의 바이킹 사가처럼 긴 글을 적지 않았다고 해도, 상징주의로 가득차고 복잡한 룬Rune문자를 만들었다. 룬 철자는 모두 한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f 룬은 페오feoh라고 부르고 재산 또는 가축을 의미했다. 물물교환 사회에서는 가축가죽이 부의 단위가 되었다. 

 


룬은 영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어서 어떤 룬은 특정 신이나 여신과 관련이 있었다. 룬 스톤은 복잡한 설명과 개인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빗이나 무기와 같은 개인 소지품에도 룬이 새겨져 있다. 

바이킹은 문맹의 야만인이 아니라 세계최고의 해양공학자이자 탐험가였다. 선사시대의 조각과 선상열석Stone Ship(무덤 사진 참조)을 보면 선사시대 스칸디나비아 사회와 종교에서 선박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다. 9세기에 들어서면서, 험악한 북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최첨단 선박을 개발했다. 당시 어떤 민족보다 훨씬 멀리 탐험했고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항해에 나섰다.

 



7. 바이킹은 여성을 학대했다.
바이킹사회는 주로 야를Jarl이 통치했고 그 중에서 왕이 나왔다. 군사중심사회로 무력이 우선이었지만 현명하고 지식있는 남성과 여성도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여성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성이 외부로 나가면 부동산과 부의 열쇠를 관리했다. 일부는 군사지도자로 성장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신화에서 방패처녀를 의미하는 스캴드메르Shield-maidens가 자주 등장한다. 여성은 존경을 받았고 유명한 오세베르크Oseberg 선박에 2명의 여성이 매장되어 있었다. 
가장 숭배되는 신 중 하나인 프레이야Freyja는 성, 미, 금과 죽음을 관장하는 여신이고 고양이 2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멧돼지 힐디비니Hildisvini와 함께 다닌다. 

 

방패처녀하면 바이킹스의 바로 이 분, 라게르타가 떠오르죠. 좀 과한 전투력이기는 했습니다만.

 

80대와 20대로 추정되는 여성 2명이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젊은 여성의 쇄골이 부러져 있어서 인신공양으로 추측했는데 이후 조사에서 그렇지 않은 것이 밝혀졌습니다. 

 

게임에 등장하는 프레이야입니다. 

여성무덤에서 지팡이가 많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바이킹사회에서 영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독교사회의 여성보다 훨씬 강한 법적권리를 가졌고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거나 태만하면 이혼할 수 있었다. 



8. 바이킹은 수염투성이에 더러웠다.
바이킹 남성과 여성 모두 외모에 상당히 신경썼다. 족집게, 빗과 면도칼이 많이 발견되었고 외모에 많은 시간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둡고 더러운 움막에서 살지 않았고 서사시 베오울프Beowulf에 나오는 헤롯Heorot처럼 크고 화려한 홀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홀에서 축제를 벌이고 보물을 치장하고 무술을 뽐냈다. 

바이킹은 좋은 식사를 했는데 해안부근에 정착지를 마련했기 때문에 생선을 많이 먹었다. 바이킹화장실 발굴에서 큰 사슴, 곰, 새, 연어와 송어를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