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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대북방전쟁

표트르의 꿈이 좌절된 프루스원정 (2부)

by uesgi2003 2021. 10. 25.

프루스전투는 전사에서 숨겨진 한 장면이지만,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의 당시 그리고 현대로 이어지는 모든 장면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리더의 자질과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선이 미래를 향한 지도자, 지금 당장에 못박힌 지도자는 위기와 기회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보입니다. 당시에는 국민이 선택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선택하고 버릴 수 있죠. 국민에게 맞는 정치수준이라는 말이 진리입니다.  

 

표트르대제 기간에 합병한 영토(좌우 보라색)는 에게? 할 수 있지만 대제라고 추앙하는 이유가 다 있습니다. 

과거와 전통에 얽매인 은둔왕국을 대대적으로 개혁해 러시아제국의 토대를 단단하게 구축했습니다. 

표트르 이전에는 크림반도의 타타르 칸이 생각날 때마다(?) 우크라이나 일대를 마음대로 약탈할 정도로 모든 것이 허술한 왕국이었습니다. 표트르의 통치기간(1682년-1721년)동안 북유럽 강대국 스웨덴을 굴복시켰고 오스만제국도 공포에 떨게 할 정도로 변신했습니다. 

 

표트르는 바다를 본 적도 없는데 러시아의 미래는 바다와 대양해군에 있다고 결정하고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대북방전쟁을 벌였고 이번 이야기의 주제인 오스만제국에게도 도전을 했습니다. 

심지어 귀족과 자제를 서유럽순방 대사절단에 강제로 차출해 18개월동안 온갖 기술과 문화를 직접 배우게 했습니다. 자신도 황제신분을 숨기고 네덜란드 등에서 조선술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능력있는 외국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초빙해서 중용했습니다. 

간단하게 표트르대제는 엄청난 호기심, 열정, 의지를 가진 보기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러시아 최초의 현대식 군대와 대양함대가 탄생했고 (외국인인) 예카테리나여제의 황금기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표트르의 계획은 전적으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가 중심이었다. 이 지역은 옛 소련남부 그리고 현재 루마니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15~16세기, 오스만제국의 통치를 받으며 연공을 납부하는 대신에 자치권과 보호를 약속받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스만은 지역총독을 해임하고 임명하기 시작했다. 불안해진 기독교계 귀족은 다른 보호책을 찾았다. 알렉세이Alexis차르 시절에 오스만대신에 러시아의 보호를 받겠다며 제안했지만 러시아는 폴란드와의 갈등때문에 여력이 없었다.
1711년, 콘스탄틴 브란코베아누Constantine Brancovo가 왈라키아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전임자를 독살할 정도로 권모술수에 능했다. 그는 20년 동안 자리를 보존하면서 부와 군대를 모았다. 

 

 

술탄에게는 지역 귀족치고 너무 부유하고 강력했기 때문에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브란코베아누도 불안한 흐름을 알아채고 표트르와 비밀조약을 맺었다. 러시아가 오스만에게 선전포고하면 왈라키아군 30,000명을 합류시키고 표트르가 러시아군의 군수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표트르는 왈라키아독립과 브란코베아누 가문의 권리를 보장하고 브란코베아누에게 성앤드류 기사단Order of St. Andrew기사작위를 주었다.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병사들인데, 프루스전투 당시보다 약 50~100년 후의 모습입니다. 

왈라키아는 전세계인이 다아는 드라큘라백작, 정확하게는 블라드 3세 드라쿨라의 고향입니다. 


몰다비아는 왈라키아보다 작고 약했으며 지도자가 자주 바뀌었다. 1711년 당시, 디미트리에 칸테미르Demetrius Cantemir는 술탄이 임명한 지 겨우 1년도 안되었고 브란코베아누와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도 오스만 분위기가 심상치않게 돌아가자 표트르와 비밀협상에 나섰고 병력 10,000명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신에 독립, 통치권리와 연공면제를 보장받았다. 
몰다비아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환영했다. 귀족들은 칸테미르에게 ‘당신이 오스만 편을 들었다면 당신을 버리고 차르에게 항복할 생각이었소’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오스만군이 진격 중이었고 몰다비아가 러시아로 이탈했다는 정보가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타타르 기병과 보병, 몰다비아 기병의 모습입니다. 

러시아본대를 지휘하는 쉐레메테프에게 전령을 보내 서둘러달라고 요청했다. 선봉대 4,000명이라도 보내서 오스만군의 보복을 막아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표트르는 그에게 최대한 서두르라고 명령했었고, 5월 15일까지 다뉴브강을 건너기로 했다. 
표트르는 러시아군에게 현지에서 징발하는 모든 물품에 대해 가격을 지불하고, 약탈하면 사형시키겠다고 경고했다. 
칸테미르가 러시아진영에 참전한다고 선포하고 러시아군이 나타나자 전국에서 오스만인을 살해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프루스강 동쪽 강변을 따라 계속 남진해서 다뉴브강 교차점에서 오스만군의 진격을 차단한다는 계획이었다. 예정보다 2주 늦은 5월 30일, 러시아군이 드니에스테르Dniester에 도착하자, 칸테미르는 몰다비아수도 이아시Jassy로 진격해달라고 간청했다. 
쉐레메테프는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 6월 5일에 이아시로 입성했고 표트르에게는 더운 날씨에 스텝을 강행군하느라 지쳐서 휴식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타타르기병이 따라다니며 초원을 불태워 가축이 먹을 마초도 부족했다. 
그리고 다뉴브강 교차지점까지 가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기 때문에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찾으려고 했다.  

표트르는 몹시 화를 내며 오스만군이 접근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비난했다. 아들의 결혼계약 등으로 뒤에 처져 있던 표트르군은 6월 24일에 프루스강에 도착했고 표트르는 이아시로 가서 칸테미르를 만났다. 
이아시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오스만군 대재상의 사절이 비공식적으로 두 차례 방문했다. 대재상은 술탄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전장에 나왔고 러시아함대가 흑해로 진출할까봐 두려워하는 기색이 한 눈에 보였다.
표트르는 사절의 제안을 거부했다. 적의 총사령관이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까지 확인했기 때문에 승리를 확신했다. 칸테미르를 러시아진영으로 데려가서 폴타바승전 2주년을 축하했다. 

표트르와 러시아진영의 흥겨운 분위기와 정반대로 실제 상황은 아주 안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재상은 다뉴브강을 건넜고 표트르가 제안을 거절하자 200,000명과 함께 계속 북진했다. 그리고 몰다비아보다 훨씬 중요한 왈라키아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브란코베아누는 오스만군이 생각보다 빨리 진격하자 행동을 주저했고 신하들도 러시아군이 다뉴브강을 건널 때까지 아무런 의사도 밝히지 말자고 조언했다. 
왈라키아의 이탈을 보고받은 대재상은 브란코베아누의 체포를 명령했고 브란코베아누는 표트르의 재촉편지가 모욕적이라는 황당한 이유를 들며 오스만군에 충성을 맹세했다. 러시아와의 비밀조약을 어기고 표트르의 자금으로 모아둔 군수품을 오스만군에게 넘겼다. 몰다비아 군수품만으로 장기전을 펼치기에는 양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표트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프루스강 하류에 오스만군이 병참기지를 마련해두었다고 들었다. 오스만군이 프루스강 동쪽 강변으로 북진하는 동안 서쪽강변으로 남진하기로 했다. 작전이 성공하면 오스만군의 군수품을 손에 넣고 보급선을 끊어버릴 수 있었다. 
표트르는 더 나아가 기병대 전체병력 12,000명을 먼저 보내 오스만군의 배후에 남겨진 보급품창고를 노획하거나 불태우게 했다. 6월 27일, 기병대가 출발하고 3일 후에 보병이 프루스강을 건너 3개 대열로 남진했다. 
야누스Janus대열이 가장 먼저 오스만군과 만났다. 6월 8일, 양쪽 강변에 있던 두 군대가 서로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근접했고 보고를 받은 대재상은 너무 놀라서 바로 퇴각하려고 했다. 
오스만군과 함께 하던 스웨덴군 군사고문은 ‘대재상은 적을 본 적이 한 번도 없고 워낙 겁쟁이였기 때문에 바로 패배감에 휩싸였다’고 기록했다. 

 


타타르 칸, 예니체리사령관, 스웨덴군사고문이 필사적으로 대재상을 설득했고 이튿날부터 다시 북진했다. 오스만군 공병이 다리를 놓아 언제라도 러시아군쪽으로 넘어갈 준비를 했다. 표트르는 오스만군이 강을 건너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야누스에게 후퇴해 본대와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표트르는 스타닐레스티Stanilesti 남쪽의 습지대 뒤에 자리를 잡았고 야누스군이 합류했지만 쉴 여유가 없었다. 바로 다음 날인 일요일, 오스만군이 야누스군을 바짝 추격해 공격을 퍼부었다. 
칸테미르의 몰다비아군은 생각보다 잘 버텨주었고 러시아군도 대형을 유지했다. 뒤처진 레프닌Repnin군에게 서둘러 합류하라고 명령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타타르기병이 레프닌군을 방해하며 길목을 막았다. 

오스만군의 대대적인 공격, 레프닌군의 빈 구멍, 부족한 군수품을 두고 작전회의가 열렸다. 퇴각하는 수 밖에 없었다. 스타닐레스티의 레프닌군을 향해 밤새 퇴각했는데 지옥과 같았다. 
오스만군이 추격하면서 후위를 계속 공격했다. 타타르기병은 러시아군 마차대열 중간에 난입했고 얼마 안되는 군수품을 모두 빼앗기거나 불탔다. 러시아보병은 굶주리고 지쳤다. 사각대형을 유지하며 강쪽으로 천천히 이동해 한쪽이 강물을 마시는 동안 다른 한쪽이 타타르기병을 막았다. 
7월 9일 월요일 늦은 오후, 러시아보병 전체가 스타닐레스티에 집결해 얕은 참호를 팠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드디어 오스만군의 보병대가 도착했고 예니체리 정예병이 러시아군진영을 공격했다. 

 


러시아 정예근위대를 중심으로 예니체리에 집중사격을 퍼부어 첫 번째 공격을 막아냈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오스만군은 러시아진영을 완전히 포위하는 방벽을 쌓아 올렸다. 
밤이 되자 대포 300문도 도착해 러시아진영에게 포문을 열었다. 타타르기병. 카를이 지원한 폴란드와 코사크기병 수천 명이 강 반대편을 경비했고 러시아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오스만군은 보병 120,000명, 기병 80,000명의 엄청난 전력이었고 표트르는 보병 38,000명이 고작이었다. 기병은 남쪽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러시아군은 강을 등진 상태로 오스만군 대포 300문의 포화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무엇보다 음식과 물이 너무 부족했다. 식수를 얻으려고 강으로 병사를 보내면 반대편의 타타르기병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진영 가운데의 얕은 구덩이에 예카테리나와 시녀가 몸을 숨겼다. 마차를 뒤집어 포탄을 막아내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지만 시녀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표트르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주변은 오스만군이 펼쳐놓은 수천 개의 화롯불이 눈이 미치는 곳까지 퍼져있었다. 날이 밝아 오스만군이 다시 공격하면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목숨을 건진다고 해도 쇠창살에 갇혀 콘스탄티노플 거리를 끌려 다닐 신세였다. 20년 동안의 엄청난 노력이 단 하루 만에 무너질 판이었다. 
그도 카를처럼 너무 자만했고 적의 영토에 너무 깊숙이 들어왔다. 아니 카를의 상황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스웨덴군은 포위되지 않았고 카를은 탈출할 수 있었다. 지금은 오스만군이 모든 것을 장악했다. 심지어 황후까지 포로가 될 판이었다. 
포로가 되지 않고 풀려나려면 영토를 얼마나 내주고 귀중품을 얼마나 지불해야 할까?

표트르는 몰다비아군에게 예카테리나와 함께 자신을 헝가리국경까지 후송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더라도 몰다비아전역은 이미 타타르기병이 들끓고 있었다. 
표트르가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데 당시 차르는 러시아 그 자체였다. 군대를 잃더라도 차르는 절대로 포로가 될 수 없었다. 군대는 다시 징집할 수 있지만 차르는 대체할 수 없었다. 
10일인 화요일, 오스만군의 대포가 다시 포문을 열었고 러시아군은 최후를 기다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니체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표트르는 궁여지책으로 돌격을 명령했고 쇠약해진 러시아군 수천 명이 달려나가 오스만군의 첫 번째 참호를 무너트리면 큰 피해를 입혔다. 
잡은 포로에게서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전날 전투에서 예니체리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더 이상 전면에 나서려 하지 않았았다. 표트르는 협상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표트르는 대재상의 제안을 알아볼 전령을 보내려했다. 당시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쉐레메테프는 비웃음만 살 뿐이라고 조언했다. 오스만군은 전면항복을 원할 것이 분명했다. 작전회의에 함께 있었던 예카테리나는 남편의 뜻을 지지했고 쉐레메테프는 러시아군 사령관자격으로 협상초안을 만들었다. 
표트르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카를이 술탄의 손님이었고 오스만제국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요구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힘들게 점령한 아조프를 반환하고 타곤로그요새를 허물고 20년간 조금씩 늘려간 모든 영토를 다 내주어야 할 것으로 예상했다. 북쪽에서는 상페테르부르크 이외의 모든 지역을 다 포기할 각오였다. 
카를이 스웨덴으로 귀국하고 스타니슬라오Stanislaus를 폴란드왕으로 인정하고 폴란드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될 수 있었다. 
표트르는 대재상과 다른 장군들에게 뇌물로 줄 150,000루블을 준비했다. 

러시아사절이 백기를 들고 오스만군진영에 도착하자 대재상과 모든 병사가 반갑게 환영했다. 러시아군 내부의 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예니체리는 불만이 가득했고 신성로마제국이 군대를 일으켜 선전포고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표트르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러시아기병대(왼쪽의 붉은색 화살표)가 브라일라Braila를 점령하고 오스만군의 병참기지를 대부분 불태웠다. 스웨덴군사고문과 타타르 칸의 종용에 못이겨 마지못해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던 중에 너무나도 반가운 러시아사절이 나타난 것이었다. 

 


대재상은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승자가 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포격을 즉시 멈추고 협상에 돌입했다. 밤새 이어진 협상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자 표트르는 포로를 제외한 모든 것을 수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협상이 결렬되면 전멸을 각오하고 총돌격으로 탈출할 생각이었다. 

대재상 발타지는 러시아군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놀라 조건을 크게 완화시켰다. 러시아는 1696년과 1700년 조약에서 얻은 모든 것을 포기한다. 아조프와 타곤로그를 반환하고 흑해함대와 드니에페르강 하류의 요새를 해체한다. 러시아군은 폴란드에서 철수하고 콘스탄티노플에 대사를 주재시킬 외교권리를 포기한다. 카를 12세의 귀국을 보장하고 스웨덴과의 평화조약에 최선을 다한다. 오스만군은 러시아군이 러시아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표트르는 믿을 수 없었다. 남부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너무나도 부드러운 조건이었다. 카를의 귀국 외에는 스웨덴과 발트해에 대해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표트르는 대재상이 변덕을 부리기 전에 협상을 끝내고 싶었다. 러시아 부재상과 총사령관의 아들을 인질로 넘겨주고 7월 12일에 평화협상에 서명했다 
러시아군은 무기와 군기를 그대로 가지고 프루스진영을 떠났다. 

스웨덴군사고문인 포니아토프스키Poniatowski는 협상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러시아사절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령을 불러 벤데르Bender에 있는 카를에게 편지를 보냈다. 전령은 단 하룻만에 카를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카를은 한밤중에 말을 꺼내 80km 떨어진 프루스로 달려갔고 17시간 말을 달려 13일 오후 3시에 오스만군의 진영에 접근했다. 어설픈 러시아군 방어진지, 사기를 잃은 러시아군과 주변을 에워싼 타타르기병, 러시아진영을 노리는 오스만군 포대를 직접 보았고 러시아군이 탈출하지 않게 잘 틀어막기만 해도 며칠이면 저절로 끝날 전투라고 생각했다. 

카를은 시간을 돌려 대재상의 초대를 거부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협상을 막으려는 타타르 칸에 자신의 목소리를 더하면 완전히 다른 결론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통역관과 포니아토프스키를 대동하고 거칠게 대재상의 텐트로 난입했다. 
발타지에게 다 내보내고 밀담을 나누자고 말했다. 조용히 관습용 커피를 마신 후에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왜 러시아군을 돌려보냈는 지를 물었다. 
‘오스만을 위해 충분한 승리를 거뒀소. 간청하는 적을 처벌하는 것은 모하메드의 법률에 어긋납니다.’
다시 술탄의 뜻도 그런 지를 물었다. 
‘내가 총사령관이고 필요해서 평화조약을 맺었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카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안을 했다. 자신은 조약에 합의하지 않았으니까 약간의 군대와 대포를 빌려주면 러시아군을 추격해서 완승을 거두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발타지는 기독교인이 이슬람군을 이끌 수 없다며 거절했다. 
카를은 좌절했고 발타지와 철천지 원수가 되어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다. 대재상은 스웨덴군의 생활비를 끊고 상점의 물품판매도 금지시키고 왕의 편지를 검열했다. 
카를은 술탄에게 발타지의 행동에 대해 항의해서 보복했다. 대재상이 막대한 뇌물을 받고 차르와 러시아군을 풀어주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뇌물이야기는 러시아에서도 퍼졌다. 예카테리나가 사절을 통해 자신의 보석을 포함한 막대한 뇌물을 전달해서 차르를 구해냈다는 소문이었다. 
발타지가 150,000루블을 받았다고 하는데 차르와 러시아군을 관대하게 풀어줄 정도로 대단한 액수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는 전쟁경험이 없었고 정예군대가 전투를 거부했고 오스트리아의 움직임이 두려워서 서둘러 협상을 끝냈을 수 있다. 그리고 광적인 타타르 칸만으로도 힘겨운데 카를 12세까지 달려들면 협상이 난항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차르를 포로로 잡으면 오스만제국은 유럽강대국의 국왕 2명을 술탄의 손님으로 데리고 있어야 했다. 다른 유럽국가의 반응이 심상치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전쟁을 시작한 목표를 모두 이뤘다. 빼앗긴 영토를 모두 되찾았고 러시아가 오스만영토를 더 이상 위협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발타지는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했다. 

엄격한 의미에서 프루스전투는 확실한 승자와 패자가 있는데 아무도 만족하지 못한 이상한 전투였다. 표트르와 카를은 모두 패자였고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자치정부도 패자였다. 몰다비아칸테미르는 영토를 잃었고 왈라키아 브란코베아누는 머리를 잃었다. 
러시아사절은 칸테미르를 예카테리나 마차에 숨기고 전투 첫날에 도망쳤다고 말했다. 대재상은 거들먹거리며 ‘더 이상 언급하지 맙시다. 겁쟁이 하나 때문에 두 제국이 전쟁을 이어갈 필요가 없소. 그놈은 마땅한 처벌을 받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칸테미르는 러시아군과 퇴각하던 중에 가족을 챙기고 몰다비아귀족 24명과 함께 러시아로 피신했다. 표르트는 러시아공의 신분과 하르포크Kharkov 부근에 큰 영지를 주었다. 아들이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주재 러시아대사가 되었다. 
대재상은 타타르 칸에게 몰다비아를 마음껏 약탈해도 좋다는 허락을 했고 몰다비아는 큰 피해를 입었다. 
브란코베아누는 진영을 바꾸며 당장의 보복을 모면했지만 오스만제국은 그를 절대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막대한 자금을 서유럽으로 빼돌려 피신처를 마련해두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다가 1714년 봄에 체포되어 61번째 생일에 두 아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심지어 술탄도 불만을 표시한 협상결과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안전해진 표트르는 온갖 핑계를 대며 아조프와 타곤로그요새를 포기하지 않고 오스만의 항의가 있을 때마다 조금씩 성벽을 해체했다. 
그리고 대재상이 교체되자 요새를 내주었는데 그나마도 알뜰하게 돈을 받았다. 가져가기 곤란한 대포, 화약, 군수품 뿐만 아니라 선박 4척까지 모두 제 값을 쳐서 팔았다. 선박 4척은 항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썩은 상태였다. 
그리고 술탄은 러시아에 놀아난 대재상을 경질하고 술래이만 파샤를 새로 임명했는데 러시아군이 여전히 폴란드에 주둔하자 1712년 12월 10일에 조약이행을 요구하며 다시 선전포고했다. 이번에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도움일 받아 실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무마했다. 

술탄 아흐메드 3세는 1713년 4월, 4번째로 선전포고했고 스웨덴의 조언을 받아 러시아에게 훨씬 강력한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우크라이나 전체를 오스만에게 양도하고 상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한 북방의 새로운 영토를 모두 스웨덴에게 반환하라는 요구였다. 
표트르는 새로운 사절을 보내 협상하면서 시간을 끌었고 술탄의 흥분은 자연스럽게 옅어져갔다. 그는 러시아를 침공할 필요가 없다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카를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의심했다. 카를은 오스만을 떠나라는 압박을 받았다. 

프루스전투는 실패가 분명했지만 러시아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러시아차르가 발칸반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고 러시아보병이 다뉴브강 50km 이내까지 진출했고 러시아기병은 다뉴브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발칸반도 기독교인에게 해방자로 인식되었고 동방정교의 수호자가 되었다. 
표트르의 흑해진출 꿈은 예카테리나여제에게 이어져서 크림반도를 정복하고 돈강을 열었으며 케르치Kerch해협을 관통해 흑해에 진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