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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1차대전

1차대전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11가지

by uesgi2003 2022. 11. 14.

한동안 1차대전 이야기를 정리할 생각입니다.

 

1. BBC의 정식출간된 자료이어서 카더라와 달리 신빙성이 높지만, 역사가와 저자에 따라 의견이 상반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여러분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2. 리뷰를 싫어해서 어색한 문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1차대전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11명의 유명한 역사가가 지난 1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오해를 제대로 설명해주었다.

 

1.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암살과 상관없이 원래 예정되어 있었다. 

사실이 아님. 크리스토퍼 클라크Christopher Clark

 

암살은 오스트리아 정부에게 9/11과 같은 순간이었다. 정치판도를 뒤집어서 전쟁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암살이전의 기록을 보면, 오스트리아는 발칸Balkan위기에 대해 외교해결을 원했지만 암살 이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대공Archduke은 국내에서 인기있는 인물이 아니었는데도 암살당했다는 소식에 온국민이 분노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왕정과 합스부르크Habsburg 국가를 공격한 것이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대공은 죽어가며 아내와 아이들을 걱정하는 말을 해서 국민의 정서를 자극했다. 

 

재미있게도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발칸반도의 평화적 해결을 가장 강하게 원했던 사람이고 참모부의 매파인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Conrad von Hötzendorf원수를 해임하려고 했다. 암살범은 대공을 죽여서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전쟁위험인물을 제거할 유일한 기회를 날렸다. 

 

일부는 어떻게 되었든 전쟁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당시 유럽의 동맹체계만 따진 운명론적 관점일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동맹체제가 느슨했고 대안이 많았다. 동맹국가 간에 불신이 팽배했는데, 예를 들면 1914년 여름 영국은 러시아 대신에 독일을 동맹 대안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유럽이 암살위기를 모면했다면 동맹체제가 해체되었을 수 있고 역사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2. 1914년 영국은 전쟁을 원했다.

사실이 아님, 카트리오나 펜넬Catriona Pennell

 

1차대전에서 가장 일반적인 오해 중 하나는, 1914년 8월에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국민이 열렬하게 환영했다는 것이다. 군중이 버킹엄Buckingham궁 앞에서 국기를 흔들거나 모병소 앞에서 웃으며 줄서있는 남성들의 흑백사진 때문에, 자세한 배경을 알아보지 않고 오해할 수 있다. 

 

 

종전 후에 이런 오해가 생겨났는데, 1914년 재무상을 지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와 같은 전시 정치가의 회고록이 주요 원인이다. 그는 전쟁 20년 후에 유례없는 지지가 있었다고 그 때 당시를 회고했다. 

영국정치가는 중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반면에 대중이 대독일 참전을 요구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역사가 과거의 기록이기는 해도 미래로 이어지기 때문에, 역사가인 우리는 최대한 정확하게 파악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당시가 아니라 나중에 만들어진 가정을 비판없이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전쟁발발에 대한 지역과 국가적 반응을 연구조사했는데, 영국과 아일랜드 4천만 명이 열광했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당연히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반응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감정도 변했다. 1차대전이 터지면서 많은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급변한 상황을 파악하느라 2주간 혼란에 휩싸였다. 

 

9월 초가 되자, 사람들은 끝이 안보이는 전장 속에 있게 되었고 영국의 참전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더라도 전쟁을 염원하지 않았다. 

 

3. 러시아는 참전 이전에 병력을 비밀리에 동원시켰다.

사실이 아님, 앤서니 헤이우드Anthony Heywood

 

1914년 7월 31일, 러시아가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7월 18일, 러시아제국은 전쟁동원령을 발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세르비아 선전포고 3일 후, 독일의 대러시아 선전포고 하루 전이었다. 

 

 

그렇지만 전간기간interwar period의 많은 역사가들은 러시아가 실제로는 며칠 전부터 비밀리에 동원령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사실이라면 전쟁책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다면 독일은 참전할 수 밖에 없었고 독일은 전쟁발발에 일차적인 책임이 없을 수 있다. 

 

실제로 그랬을까? 나는 러시아 문서기록을 뒤졌고 7월 31일 이전에는 동원령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러시아가 병력동원을 원활하게 하려는 비밀조치인 전쟁준비 기간은 존재했다. 

 

예를 들어, 여름훈련이 끝나자 각 부대에 병력수송계획을 전달했고 훈련이 강화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체만으로 동원령이라고 할 수 없었고 러시아가 전쟁을 결정했다는 증거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지역간 대규모 병력이동도 없었고 철도를 징발하지도 않았다. 러시아기록을 보면 31일 이전에 총동원령의 핵심작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프랑스, 독일과 다른 국가는 여름훈련이 끝나고 병력이 이동하는 것을 동원령으로 해석했을 수 있다. 그리고 1914년 독일 지휘부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하는데, 자료증거를 보면 그런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4. 영국과 독일군은 최전선에서 축구경기를 했다.

사실이 아님. 댄 스노우

 

영국과 독일군이 1914년 크리스마스에 최전선에서 축구경기를 벌였다는 오해가 멀리 퍼져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병사들이 파편과 기관총탄으로 뒤덮인 전장에서 스포츠를 즐기다니. 안타깝게도 그런 경기가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휴전이 길어지면 축구경기를 벌인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리고 참호 뒤에서는 병사들이 공을 차는 경우가 많았지만 영국과 독일군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인류애를 자극시키려는 이야기일 뿐이다. 

 

축구는 노동자의 스포츠이며, 엘리트 지도층의 노동자 착취라는 1차대전의 성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휴전Christmas truce이야기를 훨씬 많이 알고 있다. 당시에는 별의 별 일이 다 벌어졌고 인류애를 확인하는 증거가 되었다. 

 

 

5. 1차대전은 최악의 전쟁이었다.

사실이 아님. 맥스 헤이스팅스Max Hastings

 

100년이나 지났다. 산술적으로 말하면 영국은 다른 어떤 전쟁보다 많은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사실처럼 느껴지지만 역사상 최악의 전장은 아니었다. 17세기 30년전쟁Thirty Years’ War의 삶을 살거나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에 참가했다면, 솜므Somme와 파스샹달Passchendaele(사진참조)이 최악의 전장이라는 주장에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그리고 2차대전에서 훨씬 안 좋은 일이 벌어졌는데 동부전선의 소련이 겪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고통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1차대전를 주제로 쓴 시 때문에 오해가 심해졌다. 한 번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시민병사가 전장의 비극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유례없는 전쟁이라는 인상이 남았다. 

 

1차대전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전쟁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전쟁은 다 같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6. 서부전선에서는 기관총이 가장 치명적인 무기였다. 

사실이 아님, 데이비드 올루소가David Olusoga

 

영국에서는 보병이 참호를 기어 올라가 밀집대형으로 독일군의 기관총에 달려드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기관총의 학살이 연상된다. 그렇지만 서부전선에서는 의외로 포격이 더 많은 목숨을 빼앗았다.

 

 

현대전에서 대부분의 병사는 소화기(총검포함)에 목숨을 잃는다. 소화기는 지상전의 핵심이고 기관총의 등장으로 총탄이 포탄을 압도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1915~1918년의 서부전선에서는, 야포가 전장을 지배했다. 영국군 피해자 10명 중 7명이 포격이었고 프랑스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어떤 군대도 포병의 지배를 예상하지 못했다. 기동전을 준비했다가 1914년 말에 서부전선이 고착화되자, 포병과 고폭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다. 이전에는 공성용 특수무기로 여겨졌던 곡사포와 박격포를 대량생산하고 구경도 크게 키웠다. 

 

 

프랑스와 독일 모두 초대형 열차포를 투입했습니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솜므공세 첫날, 기관총 세례에 쓰러진 전사자가 너무 많고 충격적이라 우리의 무의식 속에 새겨져서 그럴 것이다. 

반면에 포격 피해는 매일 점진적으로 쌓여갔다. 꼭 공격에 나서다가 맞는 것도 아니고 참호에 틀어박혀 아침식사를 하던 중일 수도 있었다. 전선에서 몇 km 후방에 있다가 포격을 맞을 수도 있었다. 

 

 

처칠이 제대로 설명했다. 1916년 5월 의사당에서, 그는 “우리가 이러는 동안, 저녁을 먹거나 침대에 드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24시간 마다 1,000명에 가까운 영국병사가 살덩어리로 쓰러지고 있습니다.”

 

7. 공황상태에 빠진 병사는 대부분 즉결처분했다. 

사실이 아님, 피오나 레이드Fiona Reid

 

공포와 공황상태에 빠진 젊은 병사를 군법회부해 겁쟁이로 낙인찍고 전우들이 처형하는 장면을 떠올리는데 사실일까? 

 

전쟁 중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대전 중 3,080명이 군법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중에 346명이 실제로 처형당했는데 266명은 탈영이고 18명만이 비겁한 행동 죄목이었다. 

 

공황에 빠진Shell-shocked  병사의 처리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다. 1914년 9월 몬스Mons전투 이후, 군병원은 치열한 전투가 신경쇠약의 주요 원인이라고 밝혔다. 전쟁청War Office도 정신문제를 겪는 병사들은 일반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왼쪽 사진은 웃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치료를 받는 중입니다. 

 

결국 공황에 빠진 병사를 전장, 병원, 고향에서 치료했다. 그렇지만 전쟁청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정신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약 80,000명이 심리적상해로 기록되었고 1921년에는 65,000명이 공황장애와 신경쇠약으로 연금을 받았다. 

 

공황에 빠진 병사 대부분이 분명히 처형되지 않았다. 처형된 병사들 중에 공황장애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비겁한 행동이나 탈영으로 처형된 병사들까지 심리적상해로 분류해서는 안된다. 

 

심각한 후유증을 겪는 병사는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사기를 꺾기 때문에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그렇지만 이전에 용감했던 병사는 동정을 받았고 처벌보다는 치료대상이었다. 

 

처형소문보다 더 끔찍한 사실은 병사들이 정신병동에 수감된다는 공포에 살았고 전후에 약간의 연금만으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8. 민간인 피해가 거의 없었다.

사실이 아님. 헤더 존스Heather Jones

 

병사들을 민간인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했기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오해가 퍼졌다. 병사가 조국을 위해 희생하고 전투를 벌일 귀중한 자원이었고, 당시에 유럽중앙과 동부에서는 남성우월주의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민간인 피해는 그 지역에서 발생했다. 

1차대전 민간인 피해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독일에서 약 50만 명이 영양실조로 사망했고 아르메니아Armenia에서는 오스만제국의 인종청소로 100만 명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독일군은 1914년 벨기에와 프랑스북부를 침공하면서 민간인 6,500명을 처형했고 이중에는 여성과 아이도 있었다. 러시아제국은 국경선 부근의 유대인을 추방했는데 그 피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영화 지붕위의 바이올린을 보시길.

 

동맹국Central Powers은 세르비아를 점령하고 민간인을 대대적으로 처형했고 연합국Allied Powers은 지중해를 봉쇄해서 오스만제국의 많은 시민이 아사했다. 바르샤바, 브뤼셀, 벨그라드, 브카레스트, 바그다드, 조지아Georgia의 트빌리시Tbilisi 등이 점령당했고 벨기에에서는 저항하던 시민이 처형당했다. 

 

 

바다에서도 수많은 민간이 피해가 발생했다. 루시타니아Lusitania가 침몰해 1,200명이 죽는 일도 있었는데 전쟁이 계속되면서 선박격침이 자주 일어났다. 

 

 

공중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런던동부의 학교에 있다가, 독일 카를스루에Karlsruhe에서는 서커스를 보다가 공중폭격으로 아이들이 죽었다. 

 

1차대전에서도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지만 우리는 병사들만 기억할 뿐이다. 

 

9. 미국의 참전이 너무 늦었다.

사실이 아님. 닉 로이드Nick Lloyd

 

유럽중심의 사관으로 보면 미국의 역할을 폄하하기 마련이다. 미국이 너무 늦게 참전했다고 말한다. 미국은 1918년 여름에야 제대로된 병력을 전장에 투입했는데 그나마도 결정적이지 않았다. 

 

미군은 미숙하고 어설픈데다가 병참지원이 부족했다. 1918년 9월, 생미이엘St Mihiel과 뫼즈-아르곤Meuse-Argonne 대공세에 나섰는데 두 공세 모두 엉망인 전술, 심각한 피해와 기회상실이 드러나 영국군의 효과적인 연합작전과 대조를 보였다. 그래서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을 폄하하게 되었다. 

 

 

미군은 뫼즈-아라곤 대공세에서만 12만명 이상이 사상당했습니다.

독일 잠수함의 무차별공격때문에 미군이 참전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독일이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해 멕시코(미국남부 영토회복)를 자극한 것도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1917년 4월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대통령이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공격 선언에 대응해 참전을 결정했고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미국산업은 3년 동안 연합군을 지원해왔고 미육군과 해군의 공식참전으로 전선붕괴를 막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1918년 늦여름과 가을에 독일군을 전선 너머로 밀어낼 수 있었다.

 

미군은 영국과 프랑스군에 비해 훈련과 화력이 부족했어도 전장에서 곧바로 경험을 학습했다. 독일지휘부는 미국 때문에 가능한 한 평화협상에 나서기로 결정했고 시간이 갈수록 압도적인 전력의 미군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독일이 1917년이나 1918년에 승리를 거두었을 수 있다. 

 

10. 처음부터 독일의 패전이 결정되어 있었다.

사실이 아님, 데이비드 스티븐슨David Stevenson

 

최근에는 연합국의 경제력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동맹국이 승리할 가능성이 아예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지만 독일이 바로 전쟁에 승리할 수는 없었더라도 연합국을 곤란에 빠트려 협상장으로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1917년, 실제로 연합국은 엉망인 상태였다. 러시아는 혁명의 불길에 휩싸여 전선을 이탈했고, 1917년 4월의 프랑스대공세가 실패하자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명령에 불복종했다.

 

영국은 1917년 초에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었고 미국에서 얼마나 더 군수품과 생필품을 수입할 수 있을지를 몰랐다. 1916년 봄, 독일은 영국보다 2배나 많은 잠수함을 보유해, 영국해군성Admiralty은 독일 U보트에 대책없이 당했고 선박피해가 너무나도 심각했다.

 

1917년, 베를린은 무제한 잠수함전쟁을 벌여 연합국의 상황을 이용하지 못하는 최대의 패착을 두었다. 

 

독일은 연합국과 중립국을 가리지 않고 상선과 여객선 모두를 공격하는 무제한 잠수함전쟁에 돌입했다. 이전에도 같은 작전을 벌인 적이 있지만 국제법과 미국의 항의로 중단했었다. 

 

1917년에 다시 무제한 작전에 돌입했는데,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곧바로 구축함 35척을 보내 대서양항로를 보호했고 독일이 바라던 영국의 고립과 궤멸은 완전히 꿈이 되었다.

 

 

11. 병사-시인이 1차대전을 제대로 묘사했다.

사실이 아님. 데이비드 레이놀즈David Reynolds

 

시그프리드 서순Siegfried Sassoon과 윌프레드 오웬Wilfred Owen같은 병사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렸다. 오웬은 영문학에서 세익스피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배우는 저자라고 한다. 이런 작품을 통해 무모한 장군의 맹목적인 지시에 따라 학살당하는 장면을 기억한다. 

 

그렇지만 1914~18년 기간 동안 1차대전에 대한 시를 쓴 사람은 2,200명이 넘는다. 이 중에서 25%가 여성이고 80%는 민간인이었다. 병사-시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더구나 서순과 오웬같은 작가는 일반적인 병사와 거리가 멀다. 

 

1960년대의 반전 반핵정신이 더해지면서 병사-시인이 진정한 전쟁의 대변자로 자리잡았다. 실제로 1차대전 시를 제대로 연구한 것은 지난 30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병사-시인은 전부 또는 늘 반전주의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오웬은 전쟁의 고통뿐만 아니라 희열을 알고 있었다. 그는 기관총으로 독일군을 쓸어 버려서 훈장도 받았다. 가족이 오웬 전기를 출간할 때에 숨기려고 했던 부분이다. 

 

오웬의 작품도 상반된 감정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프로이센보다 수명이 길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 반독일정서를 그대로 보여준다, 결국에는 오웬도 전쟁을 혐오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