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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1차대전

참호전술: 1차 세계대전 참호에서는 어떻게 전쟁이 벌어졌을까?

by uesgi2003 2024. 1. 7.

 

리아논 데이비스
BBC 히스토리 매거진 섹션 편집자

 

 

 

 

 

참호전술: 1차 세계대전 참호에서는 어떻게 전쟁이 벌어졌을까?
군사 전략가들은 참호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새로운 전술과 무시무시한 신무기를 개발해야 했다.

1915년 5월 알렉스 톰슨일병이 이프레Ypres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생존을 위한 전투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곧바로 독일군의 반격에 투입되었는데, 양측은 '60번 고지'으로만 알려진 작은 언덕을 장악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밤 10시, 비교적 안전한 참호를 벗어나 소총을 들고 언덕 위로 돌격했고 톰슨은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5~10m 정도 전진했지만, 일부 대원들은 참호를 넘는 순간에 전사했다. 독일군 참호를 향해 계속 전진하는 것이 전술의 전부였다.”

피바다가 펼쳐졌다. "독일군에게는 파이고기와 같았다. 거의 모든 사람이 철조망에 갇혀 있었다... 독일군은 건초를 자르듯 우리를 자르고 있었다. 빠르고 연속적인 기관총 사격과 파편이 터져 나왔다. 다음에는 누가 총에 맞을지 궁금했는데 내가 총에 맞았다."

톰슨은 참호 안으로 기어들어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의 동료들 중 상당수는 운이 좋지 않았다. 이후 2년 동안 연합군은 그 작은 언덕 하나를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은 왜 그렇게 많이 벌어졌을까?
참호전에서 수백만 명이 전사했지만 참호전은 제1차 세계대전, 특히 서부전선에서 결정적인 전략 중 하나였다. 참호전은 새로운 전략이 아니었고 이미 수세기 동안 병사들이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땅 속에 숨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 전략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884년에 기관총이 등장하고 19세기 후반부터 포병이 꾸준히 업그레이드되는 등 군사기술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1914년에는 치명적인 무기와 맞닥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병사들이 전장에 투입되었고, 결국 더 많은 병사들을 보호해야 했다.

1914년 9월, 양측 모두 같은 자리에서 학살당하지 않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방어할 수 있는 참호를 파기 시작했고, 곧 프랑스 북부에서 스위스 알프스까지 지하 통로가 뻗어 나갔다.

일반적으로 참호전을 떠올리면 양측이 적에게 엄청난 포격을 퍼붓고, 그 사이로 철조망이 얽히고 분화구로 뒤덮인 지옥같은 땅을 뚫고 돌진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연상될텐데, 지나친 일반화다.

우선, 전쟁 초기만 해도 무인지대 대부분은 포탄구멍이 전부인, 아무것도 없는 버려진 농지였던 경우가 많았다. 전쟁 초기에는 양측 모두 포병전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의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참호는 방어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강력한 군사시설로 성장했다. 종종 어둠 속에서 작업하는 병사들은 여러 개의 참호를 평행하게 파서 전선에서 뒤로 뻗어 나가고 통신참호 연결망이 되었다. 1918년에 구축된 일부 독일군의 참호체계는 2km 이상 뻗어 있었을 정도로 미로와도 같았다.

제1차 세계대전 참호전에는 어떤 무기가 사용되었나?
참호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기관총 매설물이나 필박스Pillbox라고 불리는 콘크리트 방어시설로 보호되었다. 그리고 포격공격이 있을 때 병사들이 대피하고 포격이 멈출 때까지 기다릴 수 있도록 특정 지역의 참호를 깊게 팠다. 

그렇지만 재래식 무기만이 위협은 아니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적을 굴복시키기 위해 화학전으로 전환했다. 1915년 2차 이프레전투에서 독가스가 처음 사용되었고 '파인애플과 후추' 냄새를 풍기는 황록색 구름이 연합군 참호를 향해 떠올랐다. 독일군이 살포한 염소가스로, 수천 명의 병사들이 숨을 헐떡이며 기침을 했고 수많은 병사가 호흡곤란 증상을 보였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연합군도 무기고에 독가스를 추가했고, 주로 포탄에 독성가스 혼합물을 주입했다. 가장 치명적인 독가스 중 하나는 염소가스보다 몇 배 더 강력한 무색 포스겐phosgene가스였지만, '가스의 왕'은 겨자(머스타드)mustard가스였습니다. 병사가 겨자가스를 직접 흡입하면 폐와 목은 물론 눈, 코, 입까지 공격하여 실명하거나 사망에 이를 수도 있었다. 방독면을 쓰고 있더라도 겨자가스는 군복에 스며들어 온몸에 고름으로 가득 찬 물집이 생기는 등 무척 위험했다.

 



무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수백만 명의 병사들이 전장에서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다. 전투가 멈춘 후 들것을 든 병사들이 전장을 누볐고, 부상자들은 몇 km 떨어진 사상자 처리소(주로 천막으로 설치된)나 버려진 건물의 임시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많은 병사들이 신체적 부상뿐만 아니라 두통과 떨림부터 부분 마비까지 다양한 증상을 보이는 '포격증후군Shell Shock'이라는 질환에 걸렸다. 일부 의사들은 포격증후군환자들이 전선을 피하기 위해 증상을 꾸며낸다고 믿으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다. 치료법은 환자에게 따뜻한 식사와 따뜻한 침대를 제공하는 것부터 대화요법을 제공하거나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까지 다양했다.

참호 안에서의 1차 세계대전 교착상태는 어떻게 끝났을까?
4년간의 전투 끝에 1918년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연합군은 솜Somme전투에서 피비린내 나는 교훈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획기적인 새 전술을 개발하여 훈련교범에 반영했다. 1917년 영국군이 서부전선 전체에서 최초로 완전히 성공한 전투인 메시네Messines전투와 같은 중요한 돌파구를 마련한 것도 이 덕분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전술은 기관총에 대항할 수 있는 전차와 같은 신기술과 결합되어 1918년 '전면전all-arms warfare'의 기반이 되었고 교착상태가 끝났다. 연합군은 100여 일 만에 마침내 독일군의 참호를 돌파했다.

적진진입: 참호습격
양측 모두 대담한 참호습격에 나섰고, 성공의 정도가 달랐다. 

연합군은 적 참호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적의 방어선 안으로 잠입해서 포로 한두 명을 생포하고 돌아오는 대담한 작전을 수행했다.

일부는 발각을 피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수행되는 소규모 작전이었는데, 병사들은 보통 참호를 파는 데 사용되는 삽의 손잡이를 무시무시한 스파이크나 중금속 머리로 개조한 칼이나 트렌치 클럽과 같은 무소음 무기로 무장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소총을 남겨두고 와서 총을 쏘는 실수를 하지 않았고, 실제로 장교만이 총기나 밀스Mills폭탄이라는 작은 수류탄을 지참했다. 

 

 



중대 전체가 투입되어야 할 정도로 큰 규모의 참호 습격도 있었다. 주로 낮에 이루어졌으며, 병사들은 적군이 참호의 일부에 고립되어 지원병력의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봉쇄Box포격(특정 지역을 겨냥한 포격)을 가했다. 

이 경우에는 병사들이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했지만, 병사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 장비 대부분을 참호에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