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여름, 제12 무장친위대 히틀러유겐트(SS Hitlerjugend) 기갑사단이 강력한 연합군의 공세에 맞서다.
노르망디에서의 결정적이면서도 끔찍한 전투가 몇 시간 밖에 안남은 지금, 제25 SS 기갑척탄병(Panzergrenadier) 연대의 몇 안되는 고참병들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변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10대의 신병들이 제 역할을 해주어야만 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신병은 반가운 존재였지만 너무 어렸다. 1대대의 경우 65%가 18살도 안된 어린애들이었다. 3%만이 25세를 넘겼는데 그것도 하사관이나 위관들이었다. 제12 SS 히틀러 유겐트 사단은 벨기에 안트워프(Antwerp)에서 편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25연대는 제1 SS 기갑사단(Panzer Division), 국방군 그리고 공군(Luftwaffe)에서 차출된 고참병사들이 많은 편이었다.
그림 설명: 팔레스 포켓에서 융단폭격에 걸린 기갑 교도사단. 클릭하면 많이 커집니다.
(우에스기 왈: 여기에서 SS 기갑사단은 뭐고 국방군은 뭐야 하는 분이 있을 텐데, 대전 당시의 독일육군은 무장친위대-Waffen SS와 독일국방군으로 나눌 수 있다. 독일국방군은 히틀러와 당이 아닌 독일국가와 국민에게 충성하는 전통적인 육군이고, 무장친위대는 히틀러를 비롯한 나찌 당-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무력시위를 담당하던 무장호위단체로 출발했다가 정규군대로까지 진화한 육군이다.
히틀러의 친위부대이니 종교전쟁에서의 광신도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성격을 보이며 훈련과 무기를 최우선으로 보급받은 정예부대다. 전후 국방군은 전쟁포로로서의 대우를 받은 반면에 무장친위대는 범죄자 취급을 받았으며 지금도 일본과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범죄자로 낙인찍혀 있다. 대전 당시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호감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고, 우리나라도 일부 몰지각한 출판사의 영향으로 무장친위대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군인으로서의 전투력과 의지는 높이 살만 하지만 군인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무자비함과 극단성은 범죄자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히틀러유겐트 소년병들의 처절한 전투에 대해 잘 기억하시고 가장 마지막 반전을 꼭 확인하시길. )
독일 무장친위대 정규 사단급 부대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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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설명: 2차대전 당시 독일 무장친위대와 독일국방군의 계급체계
가장 상위의 계급장은 히틀러의 것이다.
일본자료여서 상급조장(주임원사), 조장(상사), 하급조장(중사), 군조(중사), 오장(하사), 평장(병장)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그리고 절대로 중요한 것 아니니까 외우지 마세요. 이런 것 외우고 자랑하는 초마이크로쫀쫀이 역사스토커들이 있는데, 이거 외울 시간이면 차라리 팔굽혀펴기하시고 창밖을 보면서 커피 한 잔 마시세요.
25연대의 대부분 병력은 히틀러 청년지도자 양성학교(Hitler Youth) 학생들이었는데 16살짜리 어린애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한 고참병사는 “저 너머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어린 척탄병들은 웃음을 띄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도 없이 확신이 가득했고 타고난 병사처럼 보였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이 어린애들이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라고 회상했다.
그림 설명: 4호 전차 앞에 선 소년병들
6월 6일 연합군의 상륙이 처음 보고된 지 16시간 만에, 쿠르트 마이어(Kurt Meyer) 대령은 연합군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렇지만 독일 사령부는 연합군이 교란작전으로 상륙한 것인지, 정식작전이라면 그 규모가 얼마인지를 전혀 알 지 못했기 때문에 기갑사단의 반격은 그만큼 늦어졌다. 결국 파리에 주둔해 있던 12사단의 제25 연대가 가장 먼저 작전지역에 도착한다.
1944년 6월 6일 오후 5시, 225대의 전차와 돌격포, 658대의 장갑차, 2,000대의 차량 그리고 20,540명의 사단병력이 3개의 경로를 따라 이동한다. 헬무트 포크(Helmut Pock) 상사는 소년병들을 전선으로 데리고 가면서 “이제 토미(영국군)에게 한 방 먹여줄거다”라고 농담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사기는 높았는데, 많은 소년병들이 긴장감 때문에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우에스기 왈: 위와 같은 전력이 독일군의 평균전력이라고 절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히틀러유겐트는 가장 먼저 보급을 받는 무장친위대였고 보통 독일국가명이나 히틀러의 이름이 들어가는 사단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데다가 후방에서 편재되어 전투를 한 번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막대한 전력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만신창이로 두들겨맞고 있던 동부전선의 국방군 사단같은 경우에는 사단 병력이 8,000명도 넘지 못하는 사단이 많았다.)
4호 중(中)전차를 몰던 포크는 병목지점에서 속도가 크게 늦어졌고, 천천히 전진하는 동안 전차병들을 응원하는 보병들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전선에 가까워지면서 병사들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연합군의 폭격전투기의 공습을 받은 수 많은 차량들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습으로 인한 손실이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지만 잔해가 길 곳곳을 막고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많이 지체된 사단의 전진속도를 더욱 늦어졌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겨우 3분의 1 정도의 병력만이 캉(Caen)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결지에 도착한 마이어는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716 보병사단 사령부를 찾으려고 했지만 모든 통신이 단절된 상태여서 아무도 사령부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불붙은 트럭들 사이를 간신히 빠져나와 연대로 돌아가면서 “캉은 전역이 불타고 있었다.”라고 회상한다.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거의 10개의 연합군 사단병력이 7개의, 그러나 이미 조각나서 전력이 크게 약화된 독일 사단을 공격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한시가 급한 상황에 병력도 제대로 집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병력이 도착하는 대로 마구잡이로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참상에도 마이어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아침이면 저놈의 작은 물고기들을 바다에 다시 처넣을 수 있을 거다.”
연합군 측에서는, 제3 영국군 사단이 21 기갑사단의 반격으로 생긴 제3 캐나다군 사단과의 틈을 메우라는 명령은 받는다. 이와 동시에 3 캐나다군 사단은 카르피케(Carpique) 공항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대서양 방어를 명령받은 B집단군(Army Group)은 이제 제12 SS 사단의 전투단(Kampfgruppe)과 21 기갑사단의 일부만 긁어모아 연합군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도록 반격할 계획이었다. 마이어에게는 3개 기갑척탄병 대대, 2개 전차중대 그리고 약간의 야포를 가지고 있었는데, 제21 기갑사단이 자신의 오른쪽을 담당할 것이라고 들었다. 아르덴 수도원의 종탑에서 캐나다군의 전진을 지켜보던 마이어는 성공적으로 반격할 기회를 찾아냈다. 6월 7일 오전 10시, 제2 대대의 4호전차 50대가 도착해서 자리를 잡았지만 가장 강력한 5호전차 팬저 대대는 연료문제 때문에 오른(Orne) 강 동쪽에서 출발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림 설명: 캉 공방전. 클릭하면 커집니다.
캐나다군은 줄을 지어 계속 전진했다. 프랑크빌(Franqueville)의 남쪽 산등성이에 도착한 캐나다군의 선두전차가 전진준비를 막 끝낸 마이어의 전차중대를 발견하는 순간, 마이어가 소년병들에게 전투명령을 내렸다.
제12 SS 사단이 선제공격에 나서면서 그르릉거리는 엔진과 덜컥거리는 트랙소리가 울려퍼졌다. 한 독일군 병사는 “프랑크빌 주변이 쿵소리와 번쩍이는 섬광으로 가득했다. 선두전차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승무원이 탈출하는 모습을 봤다. 다른 전차들도 산산조각이 났다. 한 대의 4호전차가 갑자기 멈추더니 포신에서 불을 뿜었다”라고 회상한다. 마이어의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캐나다군은 오티(Autie)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이어의 3대대는 끈질기게 뒤를 쫓아 한 번의 공격으로 오티와 프랑크빌을 제압했다. 다음 목표는 북쪽으로 1km 떨어진 뷔롱(Buron)이다. 마이어는 “적은 완전히 기습당한 것으로 보인다. 대전차포가 단 한 발도 발사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이어의 전차부대는 굉음을 내며 뷔롱으로 향했을 때에는 캐나다군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캐나다군의 대전차포가 4~5대의 전차를 파괴시켰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히틀러유겐트의 미숙한 기동이 그대로 드러났다. 한스 펜(Hans Fenn)의 전차도 한 방 맞았다. 그는 “포탄이 전차장의 다리를 잘라버렸는데, 나중에 그가 전차에서 빠져나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철갑탄을 맞은 전차에서 불길이 솟았다. 전차를 잃은 나는…. 3도 화살을 입은 채로 걸어서 귀대를 했는데, 전선으로 가던 전우들이 마치 유령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라고 회상한다. 기갑척탄병 부대는 뷔롱까지 전진했지만 캐나다군의 반격에 곧바로 밀려났다.
마이어는 공세가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캐나다군은 기습을 당한 충격에서 벗어나 독일군의 진격로에 엄청난 포격을 퍼부었다. 마이어는 전차병들에게 다시 공격을 재개할 것을 명령하고, 제1, 2 대대가 캄브(Cambes) 근처까지 전진시킨다. 에밀 베르너는 “캄브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마을은 평상시처럼 보였는데, 우리가 외곽에 접근하자 마자 적의 사격이 쏟아지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라고 기억한다. 두 명이 즉사했지만 전차병은 적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몰랐다. 전방에 어떤 적이 있는 지를 모르고 지원부대와 연락도 안되었기 때문에, 대대장은 방어태세로 전환한다. 한시가 급한데도 제21 기갑 사단이 전혀 전진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대의 우측이 그대로 연합군의 전차부대에 노출된 것을 안 마이어는 경악했다.
적의 맹렬한 반격을 받은 12연대의 소년병들은 전혀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중대장은 말을 안듣는 소년병 때문에 거꾸로 애를 먹었는데 “모두 바다까지 진격하고 싶어했다. 그 녀석들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후퇴하라는 명령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한참 후에나 후퇴할 수 있었다”라고 회상한다. 그 날 저녁, 제26 SS 기갑척탄병 연대가 도착해서 퓌토(Putot)로 진격해 들어갔지만 제7 캐나다군 여단의 반격을 받고 물러났다. 독일군도 연합군도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한 채 마을을 사이에 두고 소모전을 펼치게 되었다.
6월 8일 드디어 팬저전차 중대가 모습을 나타내자, 마이어는 라츠(Rots)의 마을에 대한 야간공격을 직접 지휘한다. 그러나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혼전 끝에, 독일군은 6대의 전차를 잃고 후퇴한다. 독일군의 의지와 용기는 연합군보다 훨씬 강했지만 병력을 모으지 못하고 순차적으로 투입할 수 밖에 없었기에 손 안에 든 기회를 확실히 잡지 못한다.
사진 설명: 팬저 마이어라는 별명을 가진 쿠르트 마이어. 패주하는 독일군을 막아서서 나를 버릴 것인가라는 호소 한 번으로 전선을 복구시키는 장면으로 전설이 되었다.
연합군을 바다로 몰아내기 위해, 독일군은 6월 10일에 제12 SS, 제21 기갑과 교도 기갑(Panzer Lehr)사단을 모두 동원한 대규모 공격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공격을 시작하기 직전에 연합군이 먼저 기선을 잡고 교도 기갑사단의 왼쪽을 찌른다.
양쪽에서 계속 병력을 투입해 서로에게 반격에 나서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사상자만 늘어간다. 6월 16일, 캉의 남서쪽 27km 지점에 있던 제12 사단 사령부가 함포사격을 받아 프리츠 비트(Fritz Witt) 준장과 다른 영관장교가 모두 사망하고 마이어가 사단장으로 승진한다. 연합군의 공세로 캉 수비선이 점차 좁혀 들면서 제12 사단은 이제 캉의 북쪽과 서쪽에 병력을 나누어 방어에 나서게 되는데 북쪽에서는 별 도움이 안되는 제16 독일공군 야전 사단이 합류했고, 서쪽에서는 제26 SS 기갑척탄병 연대의 제1 대대가 15대의 전차와 함께 12사단을 도와 카르피케 공항을 방어하고 있었다.
영국군 제21 집단군 사령관인 버나드 로 몽고메리(Sir Bernard Law Montgomery) 장군은 독일군을 캉에서 한꺼번에 몰아내기 위한 대공세를 펼치기 시작한다. 캉을 수복하면 독일군 기갑병력의 대부분이 연합군의 선봉부대의 동쪽으로 몰려나 서쪽의 미군이 서쪽에서 돌파할 기회가 생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첫 번째 작전이 6월 26일에 시작된 엡솜(Epsom) 작전으로 카르피케 공항 남쪽의 112고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마이어의 소년병들은 참호에 틀어박혀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지만 700문의 야포지원을 등에 엎은 3개 사단과 2개 기갑여단의 공격 앞에서는 방어선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어떤 독일군은 엄청난 포화를 피해 땅에 엎드렸다가 일어나니 주변이 온통 수류탄을 던져대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이었다고 할 정도로 혼전이 벌어졌고 영국군은 제12 사단 소년병들의 광적인 반격을 막아내며 남쪽으로 천천히 전선을 밀고 내려왔다.
독일군은 이제 마지막 남은 예비부대를 투입해 연합군을 막아내려고 하지만, 6월 27일 영국군의 진격이 다시 시작된다. 영연방 병사들은 28일에 112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독일군의 광적인 저항이 계속되면서 3km 정도의 폭으로 7km 정도만 간신히 뚫은 연합군의 진출로는 독일군의 반격을 받게 되면 후방이 단절될 위험이 있었다.
이런 기회를 알고 있는 독일군은 29일 늦은 오후에 제12 SS 사단을 포함한 6개 기갑사단의 잔여병력을 동원해 반격에 나서지만 영국군 역시 물러나지 않고 버텨냈다. 반격을 지휘했던 파울 하우저(Paul Hausser) 장군은 “해협에 있던 전함의 엄청난 포화와 영국군의 야포가 아군의 집결지를 때려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병의 근접지원을 받지 못한 독일군 전차들은 근거리에서 노리는 보병의 대전차 무기에 하나 둘씩 파괴되었다.
그림 설명: 함포를 맞은 3호 돌격포. 전함의 함포를 맞아 티이거가 뒤집힌 사진도 있다.
독일군의 반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몽고메리는 다시 공세를 퍼붓는다. 7월 4일, 제3 캐나다군 사단이 카르피에를 공격한다. 독일군의 포에 심각한 손실을 입었지만 밤이 되자 마을의 북쪽에 진입하는데 성공했고 예비병력이 없었던 독일군은 반격에는 나서지 못한채 가까스로 더 이상의 전진만 허용하지 않는다.
캉 수복을 연합군 지휘관 사이의 자존심문제로 생각한 몽고메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로 한다. 영국군 1군단을 상대로 캉을 지키고 있던 히틀러유겐트 사단에게 4일 동안 2,600톤의 폭탄을 퍼부어 캉의 수비선을 산산조각낸 것이다. 보충병은 고사하고 탄약도 보급을 못받던 사단병력의 사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럼에도 후퇴하지 않고 처절한 방어를 하기로 결심했던 마이어도 7월 8일 결국 전멸의 위기에 몰린 소년병들에게 방어진지를 버리고 탈출할 것을 명령한다. 7월 9일 영국군은 캉을 수복하고 12사단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12사단이 반격에 나섰을 때의 150대 전차 중 겨우 65대만 남았고 병력은 60%이상이 사라졌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며칠 밖에 안된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년병들이 베테랑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현장에서 생사를 오갔지만, 모국의 SS 신문은 “수천대의 전투기, 우르릉거리는 포화, 무지막지한 전차공격이 그들에게 쏟아졌다. 지축이 흔들렸고 지옥이 열렸다. 그렇지만 용기에게는 신념이라는 친구가 있다. 피로 얼룩지고 흙먼지로 더럽혀졌고 전투로 숨차 올랐지만 참호에서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젊은이들이 영국-미국인이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라고 왜곡해서 찬양했다(글 마지막의 동영상 참조).
그림 설명: 일본만화의 한 장면. 실제 사진이나 동영상보다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어서 스캔했다. 만화에 대한 설명은 다음 그림을 참조하기 바란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영국군이 6월 30일에 이유도 없이 철수한 112고지를 되찾은 독일군은 캉 뒤쪽의 오돈계곡(Odon)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독일군 기갑부대가 다시 미군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하자, 영국군은 112고지와 부근 마을을 다시 점령하기로 결정한다.
7월 10일 주피터(Jupiter) 작전이 개시된다. 12 SS 사단의 일부 병력이 여전히 오른 강과 에레트빌(Eterville) 사이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은 연합군에게 방어선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한 젊은 병사는 자신의 일기에 영국군과의 조우를 “0630시에서 0800시까지 다시 한 번 기관총 세례가 있더니 토미(Tommy 영국군)가 몰려왔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막았지만 이길 수 없는 전투를 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 살아남은 전우들이 뒤로 물러나자고 했을 때에는 이미 포위된 상태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 날, 12사단은 전선에서 물러나 팔레스(Falaise) 북쪽 30km 지점에 있는 포타이니(Potigny)에서 재정비를 받게 된다.
이 휴식도 오래가지 못했다. 영국군의 다음 작전인 굳우드(GoodWood)가 캉 동쪽에서 7월 18일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공격이 시작되자 마자, 12사단은 적의 공세를 막도록 투입된다. 영국 제2군 정보부는 “제12 SS는 예비군 수준으로 전투준비가 안되어있으며 겉모습만 12사단의 모습일 뿐이다”라고 기록했다. 50대의 전차만 보유한 12사단은 크라우제(Krause) 전투단과 발드뮐러(Waldmuller) 전투단으로 나뉘어 캉 남부 전선의 핵심전력이 되었을 정도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도시 부근에 쉴새없이 몰아친 공격으로 독일군의 전력은 급속하게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합군이 하늘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을 받을 수도, 구원을 받을 수도 없었다. 굳우드 작전 바로 다음에 코브라(Cobra) 작전이 시작되어 미군이 서쪽을 돌파했고 독일군은 패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림 설명: 팔레스 포켓. 히틀러가 뒤늦게 반격을 가한다고 병력을 맹목적으로 밀어넣다가 포위되어 20만명의 독일군이 죽거나 포로가 된다.
코브라 작전 다음의 블루코트(Bluecoat) 작전개시와 함께, 영국 제2군이 공세에 나선다. 8월 8일,다시 토탈라이즈(Totalize) 작전에서 캐나다 제1군이 선봉에 선다. 연속적으로 펼쳐진 지역은 모두 12사단이 투입된 곳인데, 이 작전에서는 사전 제압포격없이 야간에 장갑차와 트럭에 탑승한 보병들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간 후에 수비병을 공격하는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적용했다. 연합군의 공격은 계획대로 진행되었지만 독일군이 그나마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이어의 결연한 의지덕분이었다.
마이어는 나중에 폭격이 끝난 직후 정찰에 나서 “캉에서 팔레스까지, 제89 보병사단의 잔해가 끝없이 펼쳐졌다. 공포에 질린 패잔병들이 달아나고 있었는데,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무슨 일이던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도로 정가운데 서서 그들이 달아나면 나 혼자서 여기를 지켜야 한다고 고함쳤다. 길 한가운데에서 호소하는 사단장을 보자, 그들은 멈춰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제 위치로 돌아갔다”라고 회상한다.
패잔병들이 돌아간 자리로 전차와 대전차 포를 보내 지원하게 만든 후에, 두 개의 전투단에게 마을 북쪽에서 반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림 설명: 패주하는 부하들을 돌려세우는 전설적인 장면. 히틀러가 바라던 무장친위대 지휘관의 모습이다. 그런데 내가 별 걸 다 가지고 있다 ㅡ.ㅡ 일본의 유명한 전쟁극화가 小林源文씨의 만화 Panzergrenadier의 한 장면이다. 소제목은 제9장 팔레스라는 지옥이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일본에 가서도 이런 책이나 사러 돌아다니니 안사람이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
연합군의 계속되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대전차 포는 캐나다군의 전진을 막아냈다. 이후 2일 동안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필사적인 방어를 펼친데다가 간헐적으로 반격도 시도했었기때문에 12사단은 이제 전투단 수준으로 약화되어버렸다. 연합군은 폭격으로 진격로를 열려고 했지만 나포한 정찰차량에서 나온 정보덕분에 마이어는 병력을 제시간에 뒤로 물린다. 8월 14~16일에 걸쳐, 500명 정도의 기갑척탄병과 15대의 전차가 제3 캐나다군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팔레즈의 북동쪽에 있는 159 고지를 지켜낸다. 결국 제2 캐나다군 사단이 포격과 공중폭격의 지원을 받아 서쪽 방어선을 무너뜨리자 독일군은 고지를 내주고 만다.
팔레즈에는 12사단의 60명 정도의 소년병이 배치되었을 뿐인데도 무려 3일을 버텨냈지만, 팔레즈가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영국군과 미군의 큰 협공작전이 겨우 20km만 남겨두고 완성되었으며 그 안에 19개 사단이 갇혀 공중폭격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에게는 단 하나의 탈출로만이 남겨졌는데, 탈출로의 북쪽 전선은 만신창이가 된 12사단의 잔여 병력에게 맡겨졌다. 그들의 임무는 독일 제7군의 패잔병들이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버텨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한 히틀러의 단 한치의 땅도 포기하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19개 사단 중 절반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나마 2일 동안 연합군의 막대한 물량공세를 받아낸 12사단덕분에 절반이라도 탈출할 수 있었다. 철수가 완료되자, 마이어는 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 농부의 도움을 받아 디브(Dives) 강을 건넌다. 8월 22일, B 집단군은 제12 SS 기갑사단이 10대의 전차, 300명의 보병 그리고 단 한 문의 야포도 없이 탈출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사실상 12사단은 노르망디에서 전멸한 것이다.
사진 설명: 히틀러유겐트 포로 사진 중에 가장 유명한 사진. 치열한 전투와 그들의 꺾일 줄 모르는 용기가 드러나는 사진이어서 유명하다.
히틀러유겐트뿐만 아니라 1944년의 다른 독일 국방군이나 친위대도 모두 필사적인 방어와 반격을 펼쳤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12사단의 무장수준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훈련을 제대로 받을 시간이 없었고, 다른 독일군 사단병력과 같이 작전 중에 포수, 공병대, 취사병, 심지어 사령부 사무병까지 기갑척탄병으로 곳곳에서 전투를 벌일 정도로 압박을 받았다. 그렇지만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노동자당이라는 이름에 바친 소년병들의 한결 같은 희생정신은 12사단만이 가지고 있었던 특징이었다. 12사단으로 징집되거나 자원한 소년병들은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에밀 더(Emil Durr) 하사가 캐나다군의 화염방사 전차를 향해 3번이나 돌격한 끝에 파괴하고 목숨을 잃어 철십자 훈장을 받은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임무를 다하려는 헌신, 작전 중의 용기, 그리고 굳건한 신념은 군인이라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지만, 잔인한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반격작전 중, 여러 건의 포로와 시민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소년병들은 6월 7일~16일의 기간 동안, 64명의 영국군과 캐나다군 포로를 죽여 악명을 얻었다. 마이어는 포로가 된 후에 뷔롱, 오티, 아른덴 수도원에서의 포로 학살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된다.
노르망디 이후에도 히틀러유겐트는 계속 전투에 참가한다. 제12 SS 기갑사단은 재편성되어 6개월 후에 진행되는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인 아르덴느 전투에 투입되지만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다. 앞서 많은 선배들이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 소년단이라는 깃발아래 징집된 소년병들은 선배들이 가졌던 이상주의를 계속 이어간다. 죽은 소년병에게서 나온 편지는 사단의 다른 소년병들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다. “공격 몇 시간 앞서 이 편지를 쓴다. 모두들 다음 전투를 기대하고 있어. 일부는 삶을 최우선으로 여기겠지만 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야. 우리가 공격을 하고 적을 국토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이건 성스러운 임무야. 내 머리 위로 V1 로켓과 야포의 굉음이 울려퍼지고 있다. 바로 전쟁의 목소리가.” 편지봉투의 뒷면에는 “룻(여동생의 이름)! 룻! 룻! 우리가 전진한다!”라고 쓰여있었다
Military History의 John Latimer 기사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반전의 히틀러유겐트 포로 사진
초기에는 그래도 16~18살이었습니다만, 그나마 소진하고 나니 갓 10살을 넘긴 애들까지 동원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T.T 참조 동영상을 보셔도 히틀러 개**가 소년병들 세워놓고 베를린 방어를 부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지도자 하나 잘못 만나면 3대가 세상을 떠납니다.
아래의 참조 동영상 중 첫 번째는 히틀러유겐트에 대한 독일내 홍보자료로 왜곡이 심한 영상을 보여줍니다.
다음 동영상은 패전직전의 베를린 모습으로 이제는 소년병이 아니라 여자와 노인까지 동원해서 판저파우스트 하나만 주고 지키라는 황당한 장면도 나옵니다. 이 당시 히틀러유겐트의 나이를 잘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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