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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러시아 불곰 vs. 욱일승천 - 2차대전 최후의 전투

by uesgi2003 2011. 1. 12.


(이번 내용은 인터뷰형식으로, 화자의 생각을 논평하지 않고 옮겨야 하는 인터뷰이기 때문에, 중국과 북한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던가, 연합군의 거듭된 재촉으로 만주에 군대를 보냈다던가 하는 내용의 진실은 안드로메다 성인들이나 알 내용입니다. 당시 참전용사를 통해 이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참조만 하시기 바랍니다.)

 

쿠를란트(Courland) 작전에서 소환된 마크무트 가레예프(Makhmut Gareyev), 만주벌판에서 새로운 적을 만난다.

 

 

1945 5월 베를린에서는 이미 2차대전이 끝났지만, 극동에서는, 9월 일본군이 미국, 영연방과 소련에 항복하기까지 전쟁이 계속되었다. 소련은 1945 8 8일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후에 적군(Red Army)의 제1, 2 극동 전선군과 자바이칼스키(Zabaikalsky) 전선군, 몽골 인민혁명군, 태평양 함대, 소비에트 아무르 함대를 동원해 일본이 점령한 만주를 공격한다.

만주작전에 참전했던 마크무트 가레예프 장군(전쟁당시는 영관급, 인터뷰 당시는 러시아 군사과학 연구원장)와의 인터뷰를 통해 초대해 2차대전의 마지막 지상전이었던 그 전투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밝힌다.

 

그림 설명: 천황의 항복선언 후 관동군 약 690,000명의 일본군이 항복한다. 소련과의 전투 중 120,000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당한다.

 

Military History(MH): 지금 생각해보면, 1945년에 소련이 일본과의 조약을 깨고 서방을 도울 필요가 있었습니까?

 

가레예프: 1930년대 후반부터 USSR의 모든 전략계획은 서쪽은 독일, 동쪽은 일본과의 두 전선에서 전쟁준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의 정책, 외교와 군사행위는 두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하지 않고 한 번에 하나씩 전쟁을 하는데 집중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력으로 일본을 굴복시키는 것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1905년에 일본에게 당했던 패배를 국민들은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기성세대는 치욕스러운 기억을 지우기 위해 수십 년을 기다려왔습니다. 일본은 국제법을 어기고 사할린, 쿠릴열도와 다른 섬들을 차지했습니다. 소련내전을 틈타 그들은 극동지역을 차지하고 제 땅인 것처럼 굴었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합군은 USSR에게 일본을 상대로 참전할 것을 요구했지만 조세프 스탈린은 애매한 대답만 하다가 테헤란 회의에서 참전약속을 합니다.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이 독일에게 승전하면 2~3개월 후에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확약을 하면서 다시 이 문제가 급부상하죠. 그는 3개월 후에 자신이 한 말을 지키게 됩니다. 유럽에서의 전쟁은 5 9일에 끝나고, 일본과의 전쟁이 8 9일에 시작됩니다.

 

그림 설명: 연합군의 상륙을 대비한 본토방어 훈련. 여성과 노인들이 죽창씩이나 들고 있다. 궁지에 몰린 독일은 그래도 판저파우스트라는 초강력 무기라도 하나씩 쥐어줬지만, 일본은 오끼나와에서의 옥쇄와 같은 미친 짓을 포기하지 않는다.

본토상륙 후, 양쪽에서 예상되는 엄청난 희생에 놀란 미군은 원폭을 선택하게 된다.

 

8 9일의 개전 직전 한 달 동안, 일본은 우리에게 중립을 지키는 조건으로 남부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반환하겠다고 합니다. 단 한 명의 생명도 잃지 않고 영토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스탈린은 일본의 탐나는 제안보다 약속을 지키기로 결정합니다.

소련이 1939년 일본과 맺은 불가침조약을 위반했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USSR 1945 4월에 이 조약을 취소하겠다고 이미 밝혔기 때문에 전혀 위반하지 않았죠. 그리고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은 미국이 자국의 영토에 상륙한 후에도 전쟁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들은 광동주둔군에 합류해서 긴 세월을 또 전쟁을 벌였을 것입니다. 도쿄는 이런 계획을 염두에 두고 만주를 교두보로 삼을 생각이었습니다. 만주라는 교두보는 미국뿐만 아니라 극동의 자국영토에도 중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소련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USSR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1년 이상 전쟁이 더 지속되어서 1백만 명 이상의 미국병사가 희생될 수 있다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미국이 8 6일 히로시마에, 8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는데도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잖아요.

 

MH: 만주작전을 위해 어떤 사전준비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언제부터 준비를 한 거죠?

 

가레예프: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Aleksandr Vasilevsk)원수의 참모장 알렉세이 안토노프(Aleksei Antonov) 장군이 만주작전을 기안했는데 일본군은 전혀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전임지휘관이 부상당하자, 동 프러시아의 나찌에게 더 강력한 압박을 가하고 일본과의 전투를 위한 병력을 빼는 한 편 전투경험을 쌓기 위해 바실레프스키 원수가 제3 벨로루시전선군에 임명됩니다. 1944 9월 핀란드가 항복하면서 군대를 동쪽으로 배치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동부에 있다가 서부로 이동된 사단들만 원상복귀된거죠. 일부는 카렐리안 전선에서, 일부는 헝가리에서 뺀 것인데 일본과 우리나라 국민은 승리를 앞두고 귀향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철도역에서 꽃과 음악으로 성대한 환영을 받았지만, 전차와 같은 군수물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들도 위장을 하고 이동한 것입니다. 적이나 일반인은 전혀 알 수가 없었죠. 트럭은 위장막으로 덮었고 병사들은 절대로 나오지 못했으니까요.

 

 

MH: 만주작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가레예프: 큰 피해없이 만주군을 괴멸시키려면 기습공격이 최선이었죠. 그런데 1945 4월에 이미 조약취소를 선포했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일본군 정보망에 걸리지 않고 대규모 부대를 서부에서 옮겨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적도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된 정보와 속임수로 그들이 오판하게 만들었습니다.

 

MH: 당신은 극동에 임명되기 전에 서부에서 독일과 싸웠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전투를 위한 명령을 받았을 때에 당신이나 다른 소련 부대의 느낌은 어땠습니까?

 

가레예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세대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잠깐 이야기를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1941 6 22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 저는 타쉬켄트 군사학교의 학생이었습니다. 우리는 연병장에서 교장의 연설을 듣고 있었을 때에, 옆에 있던 학생 하나가 그러더군요. “여기서 공부하는 동안에 전쟁은 끝날거야. 카산(Khasan 1938)이나 칼킨 골(Khalkin Gol 1939)때 처럼 말이야. 우리는 싸울 기회도 없겠지.” 그는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22살이던 1945년이 소령을 달았습니다. 일본과의 전쟁소식을 듣고는 너무 신났죠. 중년 이후의 나이먹은 사람들에게 일본과의 복수전이 당연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미 4년이나 힘든 전투를 치뤄왔고, 심지어 8년씩이나 군대에 있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전쟁 전에도 복무기간이 끝났다고 해서 모두 해제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겠죠. 저는 미혼이었으니까 생각이 달랐습니다.

또 다른 일이 생각나는군요.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에 연대장인 기요르기 구브킨(Gyorgi Gubkin)이 수류탄 투척에 대해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들 절대로 땅이 평평했던 쾨니히스베르쿠(Konigsberg)에서처럼 던져서는 안돼. 만주는 언덕이 많다고. 위로 던지게 되면 너희들 발 밑에서 터질 거다. 안전핀을 뽑으면 손목을 두 번 비튼 다음에 던져라.” 교육이 끝난 후에 질문을 받았는데, 45살 먹은 사람이 언제 동원이 해제되는지 물었습니다. 그게 궁금했던 사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MH: 동원명령이 내려졌을 때의 상황이 어땠습니까?

 

가레예프: 1945 4 11,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했을 때에 저는 5군 사령부의 작전과에 있었습니다. 우리부대는 동 프러시아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죠. 쾨니히스베르크를 공격했던 28군은 베를린에 투입되었고 다른 부대는 남쪽에 투입되었습니다. 우리 부대 중 일부는 기차를 탔는데,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치열한 전투를 끝낸 직후라 너무 피곤했는데, 베를린과 프라하 방향의 지도를 붙여놓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그곳으로 투입되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로 향하더군요. 5군 참모대는 5 2일에 이미 수도에 들어가 있었고 그날 저녁에 베를린이 함락된 것을 축하하는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터키와 전쟁을 벌인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볼가 강을 건너면서 목적지를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그 정도로 모든 정보가 비밀에 붙여 져있었던 것입니다.

 

MH: 야간에만 이동했습니까?

 

가레예프: 아닙니다. 24시간 이동했고 밤에만 휴식을 취했습니다. 기차가 아닌 트럭으로만 이동했습니다. 지휘관 중에서도 몇 사람만 목적지를 알고 있었죠. 워낙 계획이 잘 진행되어서 스탈린도 지휘관에게 전권을 맡기고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MH: 선전포고를 한 후에 어떤 공격계획이 있었습니까?

 

가레예프: 일본군은 만주국경에 매우 강력한 교두보를 설치해두었습니다. 참모부는 3일 동안 포화를 퍼부어서 교두보를 파괴하기로 했습니다. 장애물을 처리하는데 최소한 이틀의 포격이 필요했지만 니콜라이 크릴로프(Nicolai Krylov)는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제압포격도 하지 말고 바로 공격하자고 제안합니다. 전진배치된 부대로 기습공격하자는 그의 제안이 승인됩니다.

8 9일 새벽 1, 카바로프스크(Khabarovsk)에 비가 많이 왔는데 국경을 넘어 일본군 토치카를 장악했습니다. 아직 전투가 없었던 때라 토치카를 비우고 500미터 정도 떨어진 목재 가옥에서 잠을 자고 있었더군요. 그들이 깨어나서 달려나올 때는 이미 토치카는 우리 손에 있었죠.

 

그림 설명: 중국 주둔 당시의 일본군. 워낙 악행을 저질러서 용서가 안되는 부대 중 하나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안드레이 슈르신(Andrei Shurshin)이 우리 부대의 사기를 높여주겠다고 10분 정도 포격을 해줬는데, 일본군이 토치카 밖으로 빠져 나오더군요. 전쟁이 끝나고 국경을 넘어 사령부로 보고를 하러 갈 때까지도 일본군이 토치카에 틀어박혀 사격을 하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크릴로프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핀란트 전투 때와 같이 방어선을 하나씩 제압해야 했을 겁니다. 아마도 토치카들을 상대로 6개월 이상 전투를 더 했겠죠. 현명한 사령부덕분에 우리는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1,000,000명의 광동군 중에서 690,000명 정도를 포로로 잡았는데, 우리는 만주작전 동안 12,000명의 병사만 잃었을 뿐입니다.

 

MH: 서방의 역사책에서는 원폭 이후에 관동군의 사기가 워낙 떨어져서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레예프: 일부 일본군은 그 후에도 6개월 동안이나 토치카에 틀어박혀 저항을 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식량과 탄약이 충분했습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그들은 계속 전투를 벌였습니다. 우리가 만주에서 그전과 같은 식의 전술을 펼쳤다면 원폭과 상관없이 전투는 오랫동안 계속 되었을 겁니다. 일본군의 저항의지는 대단했고 워낙 미친 듯이 싸우니까요.

8 15~18일 동안 중국 네낭의 북서쪽에서 포위되었던 84기병사단을 구출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때 다시 한 번 기지를 발휘했죠. 계획된 대로 목표지에 낙하병들을 투입하지 않고 아예 일본군의 배후에 대규모 공수착륙을 했습니다. 당연히 당황한 일본군은 괴멸되어 버렸죠.

그리고 트란스바이칼(Transbaikal) 전선에 제헤(Jehe)라는 요새가 있었죠. 50만 명의 시민이 사는 돌로 만들어진 도시에 있었는데, 거기를 공격하려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양쪽 모두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었습니다. 사령관인 이사 플리예프(Issa Pliyev)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 것 같습니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생각과 행동을 해냈죠. 그는 7~8명의 병사를 3대의 짚차에 태우고서는 정문으로 지나 사령부로 달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좀 있으면 폭격기가 너희를 폭격할 거다. 죽고 싶지 않으면 항복해라라고 하면서 한 시간 반 정도를 실랑이하더니 25,000명이나 되는 수비대 전체가 겨우 장군 한 명과 7명의 병사에게 항복을 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재치입니까!

 

MH: 8 14일에도 전투가 끝나지 않았죠? 결국 히로히토 천황이 전투중단 명령을 내렸습니다.

 

게레예프: . 그가 명령했지만 관동군 전부가 그 명령을 수신한 것은 아닙니다.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모두 복종한 것도 아니고요. 미국이나 중국군에게는 항복하되 소련군과는 계속 싸우라는 무언의 명령도 있었죠. 우리가 한국, 만주와 다른 중국지역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우리 뜻대로 되었습니다.

 

MH: 미국과 소련이 일본을 상대로 전략계획에서는 협력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단이나 연대 차원에서의 전술계획과 군사작전은 어땠습니까?

 

게레예프 : 저는 그런 정보까지 알지는 못합니다만 5군 사령부에서 복무하면서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상호합의에 따라 미국인이 아더(뤼순의 별칭) 항이나 다롄 항에 가서는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인 한국의 38선 아래에만 주둔하게 되어 있었죠. 25군의 중대가 서울 북부지역에 주둔하면서 미군이 오기를 2일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러고는 38선 이북으로 철수했죠. 그렇지만 35군이 아더 항에 접근했을 경우에는 미군이 고속상륙정을 몰고 상륙하려고 해서 하늘로 공포탄을 쏘면서 저지했습니다. 합의가 대체적으로 지켜졌지만 워싱턴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위반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일본을 함께 점령하기로 되어 있어서 한 두 개의 여단을 베를린에서와 같이 도쿄로 보낼 예정이었죠. 일본주둔을 위해 35군이 훈련을 받은 후에 홋카이도로 출발하기로 되었었지만 결국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고집불통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백악관에 영향을 발휘해서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련이 일본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미국은 소련 영토에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를 건설하고 싶어했는데, 그들이 쿠릴열도나 다른 지역에 일단 들어오면 좀처럼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요청을 거절했죠. 종전 후의 외교정책이 많이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MH: 중국인들은 적군을 어떻게 반겼습니까?

 

게레예프: 완전히 다른 얘기군요. 벨로루시를 빼고, 한국과 중국처럼 환대를 받은 곳이 없습니다. 만주작전에서 좋은 기억이 너무나도 많은데, 여기 문서도 있습니다. 일본 5군의 정찰대는 광동군 사령관인 오쓰조 야마다(Otsuzo Yamada)에게 소련군이 계속 증강되고 있다는 보고를 합니다. 그 규모를 파악한 사령관은 미친 놈이나 이런 우기에 공격을 한다라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8월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죠. 그렇지만 우리는 가장 곤란한 시기에 공격을 결정했고 적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모든 것이 진흙에 갇히면서 보급도 안되었죠. 제가 직접 겪은 것인데 북한, 넨낭, 길린, 동화에서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반겼습니다. 진흙에 빠진 전차를 그들이 직접 나서서 꺼내주기도 했죠. 우리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일본군이 하루 빨리 사라지기만을 바랬으니까요. 일본군은 중국인을 너무 잔인하게 대했습니다. 일본군 포로를 소련으로 데려와서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했다는 비난도 있습니다. 저는 북부만주의 전쟁포로 수용소를 통제했습니다. 우리 부대는 1945년에 떠날 예정이었지만 몇 개월 더 주둔하게 되었죠. 첫 번째 수용소가 중국인에게 인도되자, 일본군의 모든 식량을 빼앗아버리더군요. 어떤 중국군은 지나가면서 눈에 보이는 포로를 쏴버리는 것이 임무로 알더군요.

 

MH: 일본군을 쏜다고요?

 

게레예프: . 몇몇 기자들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우리를 비난했습니다만, 690,000명이나 되는 포로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을 일본으로 보낼 방법이 없었고 많은 지역에 지뢰가 매설된 상태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중국인들 손에 넘겨줄 수도 없었고요. 그들은 데리고 가달라고 애원하더군요.

 

MH: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이나 공산당과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게레예프: 상당히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장개석 정부와 아더 항과 중국철도 사용에 대한 합의를 해두었습니다. 공산당을 상당히 반발하더군요. 저는 북동지역의 군사회의 의장인 자오장과 만났었는데 그는 굉장히 화를 내더군요.

 

MH: 그렇다면 소련은 왜 장개석이 아닌 마오쩌둥을 도운 것입니까?

 

게레예프: 모든 개전합의는 장개석과 합의된 것이지만 반드시 지켜야 하는 조건 하나가 있었죠. 국민당도 공산당도 소련군이 주둔한 지역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장개석과의 합의에 따라 우리는 1945년 말에 만주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 지역을 모두 공산당이 접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산당에게 넘겨준 것이 아니라 장개석도 힘이 없으니 바라만 볼 수 밖에요. 그는 스탈린에게 철수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는데 그게 중국 공산당과 충돌을 일으켰죠. 공산당과의 종전 후 관계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니까 별도로 얘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Military History Victor Litovkin의 기사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아래는 만주전쟁 당시의 두 군대의 전차비교입니다.

앞의 기사에서도 올렸지만 참담한 일본군 기갑부대의 실상이 한 눈에 보입니다.

 

 

먼저 일본군의 주력전차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소련의 주력전차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그리고 노일전쟁 동영상입니다. 멋진(?) 러시아 군가도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