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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왕이 되려고 한 사나이

by uesgi2003 2012. 8. 30.


여러분에게 반드시 소개하고 싶었던 두 인물, 표트르 대제와 예카트리나 여제의 책이 안타깝게도 상당히 지연되거나 아예 진행이 안될 수 있겠습니다. 랜덤하우스에서 연락이 없어서 전문 에이전시와 상담을 했는데 원래 느리거나 응답이 없다는군요. 예카트리나 여제는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도 6개월 전에 문의를 했었는데 지금까지 응답이 없다고 하니 상당히 황당한 상황입니다. 


두 인물, 특히 표트르 대제는 리더십을 배우고 싶은 분들에게 가장 좋은 교본이고 역사와 전사 인물이라면 그나마 좀 아는 척 하는 제가 가장 감동받았던 인물인데 여러분이 한글로 읽으실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중남미에 사병을 이끌고 가서 왕이 되려고 했던 한 미국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제국주의의 모험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의외의 인물이었군요. 어떻게 보면 시대를 잘못 만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분야를 잘못 선택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학문쪽으로 나갔다면 좋은 이름을 남겼을겁니다.

왕이 되려고 한 사나이


사병을 이끌고 외국을 침략해 자신의 국가를 세웠던 인물치고는, 윌리암 워커(William Walker)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158cm의 키에 55kg의 체중, 갸날픈 뼈대, 듬성듬섬한 머리를 보면 연약하고 책상물림 정도로 생각하기 쉬웠다. 워커가 전투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같은 시대의 어떤 사람이 기록했듯이 '겉모습만 보고 워커씨를 판단했다면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그가 말을 하는 순간부터 당신은 주목하게 될 것이고, 그가 말을 이어가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겉모습과 너무 다른 카리스마를 가졌던 윌리암 워커는 185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모험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그림 설명: 클릭하면 상당히 커지고 IE에서 설명이 제대로 연결됩니다.

윌리암 워커의 실제 모습입니다. 겉모습으로는 학자나 정치가 스타일입니다. 시저도 그랬고 히데요시와 나폴레옹도 그랬듯이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되지만요.

 

1824년 네쉬빌에서 태어난 그는 천재였다. 14살에 네쉬빌 대학을 수석졸업한 후에 하인델베르크, 에딘버러와 파리의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19살의 나이에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의사학위를 땄다. 워커는 필라델피아에서 개원을 했지만 바로 싫증을 내고 뉴 올리온즈로 가서 법학을 공부했다. 변호사 일도 질리자 합작회사를 차렸고 월트 위트만(Walt Whitman)이라는 재능넘치는 시인을 고용했다. 

워커는 한 곳에서 한 가지 일을 하기에는 싫증을 빨리 느꼈고 약혼녀가 콜레라로 죽자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1849년 당시는 황금광 시대가 한창일 때여서, 모험가, 광부, 도박꾼, 폭력배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고 워커에게는 딱 맞는 장소였다. 그는 신문사에서 잠시 일한 후에 변호업을 시작했다. 


1853년, 워커는 자신의 공화국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멕시코로 들어갔다. 워커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상당한 배경이 있었다. 미국은 독립한 지 60년 밖에 안되었고 전국이 젊은 기운으로 넘치고 있었다. 영국과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뤘고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이기고 나니 무한한 자만감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국민은 영토확장을 권리가 아니라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존 오설리반이라는 언론인이 '천명-하늘이 내려준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정당성까지 띄게 되었다. 

미국은 멕시코에게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합병했고 프랑스에게서는 루이지애나 지역을 구입했다. 더 멀리 하와이, 푸에르토리코, 필리핀과 쿠바를 합병했고 영국과 협정을 통해 중미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지만 미국인들에게는 그냥 서류의 문자일 뿐이었다. 중미로 떠나는 모험가들에게는 방해꾼(Filibuster)이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Filibuster라는 단어는 장황하게 말을 이어가며 회의를 망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원래는 약탈자 또는 해적을 의미하다가, 사병을 조직해 평화로운 국가에 난입하는 미국인들에게 사용되었었다. 이들 중 일부는 획득한 영토를 미국에 합병시키려했고 영토를 확장시키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미국남부 지역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다른 방해꾼들은 무력으로 자신의 왕국을 만들려는 욕심이었다. 


윌리암 워커는 이미 자신을 대표적인 모험가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1853~60년 기간 동안 대단한 원정에 나섰다. 먼저 그는 멕시코 소노라스의 과이마스(Guaymas) 항구도시로 가서 멕시코 정부에게 미국 식민지로 인정해달라는 황당한 청원을 냈다. 그 대가로 멕시코 정부가 힘들어하는 아파치 인디어들을 몰아내겠다는 조건이었다. 그 지역은 은 매장량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지역이라 당연히 거절당했다. 더 황당한 일은 워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떠나오기 전부터 소노라(Sonora) 공화국 채권을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워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무기를 사들이고 모병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노라의 땅문서를 내세우며 지원병을 모집했고 침략에 나설 충분한 자금을 끌어들였다. 지원병 대부분은 남부인으로 멕시코 전쟁에 참전했거나 금광에 실패한 모험가들로 또 다른 모험이 필요했던 사람들이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1853년 10월, 미국지역사령관인 히치콕이 무기를 실은 배를 몰수했지만, 연방법원은 워커의 계획에 동조해 나포된 배를 풀어주었다. 그 동안 워커 일행은 멕시코  바하(Baja) 캘리포니아로 가서 무기와 충원병력을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3일, 50명의 지원병으로 구성된 '제1 독립대대'를 이끌고 라 빠쓰(La Paz) 도시를 점령하고 남부 캘리포니아(Lower California, 바하 캘리포니아의 미국식 이름) 깃발을 걸었다. 워커는 반도 전체를 '지유로운 독립주권국가'로 선언하고 자신을 대통령으로 임명한 후에 멕시코에 대한 일체의 연합을 거부했다. 더 나아가 루이지아나 법을 그대로 채택하고 노예제도도 도입했다. 


(우에스기 왈: 어떻게 된 나라가 겨우 50명의 병력에게 주 전체를 빼앗기는지 이해가 안될텐데, 당시 멕시코 상황이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t__nil_loginbox=blog_btn 에서 멕시코 이야기를 정리해 두었으니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라 빠쓰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샌프란시스코에는 지원병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깃발이 걸리고 지역신문은 위대한 승리를 축하하는 기사로 넘쳤다. 워커의 법률 파트너였던 헨리 왓킨스(Henry Watkins)는 230명의 지원병을 데리고 워커에게 갔다. 

워커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수도를 엔세나다(Ensenada)로 옮긴 후에 내각을 구성하고 외부와 무역을 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미국 국민들에게 남부 캘리포니아의 자원을 개발하고 사회체계가 제 자리를 잡게 하려면 당분간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편지를 썼다. 

멕시코군이 반격에 나섰지만 워커를 몰아내지 못했다. 혼란을 틈타 포로로 잡혀있던 멕시코 주지사가 군수품이 실린 배를 가지고 달아났다. 3일 후에 왓킨스가 새 병력과 함께 도착했지만 식량이 부족했다. 300명으로 불어난 병력을 먹이기 위해 매일 약탈하러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기대와 다른 모습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탈영하기 시작했다. 


새해가 되자 워커는 소노라 정복에 나섰는데 식량확보를 위해 주변 목장을 약탈했고 '소노라를 합병 중이며 국가명을 소노라 공화국으로 바꿀 것이며 자신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공표를 했다. 1854년 알타 캘리포니아 신문은 '차라리 멕시코 전체를 합병하는게 더 쉬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더 이상 공표하지 않아도 되었을테니까'라고 비판했다. 

병사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서, 워커의 충성맹세를 무려 50명이나 거부했을 정도까지 악화되었다. 50명이 무기를 들고 군대를 떠날 때에는 워커가 나서서 친위부대(최초의 50명)가 그들에게 총을 쏘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남은 130명만으로 소노라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병이 들고 도적이 습격하고 탈영이 이어지자 워커는 두 명을 총살하고 다른 두 명은 채찍형을 내렸다. 원래 워커의 부대는 군대가 아니라 탐험대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에 엄격한 군율이 지켜지지 않았고 워커의 처형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통제불능 상태가 되자 워커는 원정을 포기하고 귀환했다. 


산 빈쎈떼(San Vincente)에 도착한 그는, 지역 도적떼가 이미 수비대 20명을 죽이고 이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멸 위기에 몰린 워커는 미국 국경까지 간신히 도망쳐서 30세가 되는 생일 날에 샌 디에고에 있는 미국 군부대에 항복했다. 워커 일행을 잡은 미군은 사면요청을 받아들여 샌 프란시스코까지 갈 수 있게 허락했는데, 거기에서도 연방법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워커는 미국의 중립을 위반한 죄로 기소되었지만 유창한 연설로 미국의 영토확장 권리를 주장해 무죄로 풀려났다. 

캘리포니아에 머무는 동안 변호사 업무를 잠시 한 워커는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을 믿고 니카라과(Nicaragua)로 눈길을 돌렸다. 


19세기 중반만 해도 보스톤에서 캘리포니아로 편지를 보내려면 6개월 정도 걸렸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지가 문제였다. 멕시코 해협, 파나마 해협, 니카라과 해협을 관통하는 것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뉴욕의 철도와 운송 재벌인 코넬리우스 밴더빌트는 니카라과를 태평양과 캐리브해를 연결할 수 있는 운송로로 보고 운하를 팔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다. 그러나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그는 양쪽 바다를 증기선이나 마차로 이동시켜주는 환승 회사를 설립했다. 1851년에 설립된 환승 회사는 매년 10,000명 이상의 승객을 운송하며 수익을 냈고 많은 미국인들은 니카라과에 막연한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 윌리암 워커도 '자연이 다해주어서 사람을 할 일이 거의 없는' 나라로 표현하며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니카라과는 내전에 가까운 분쟁에 몇 년 동안 계속 휩싸인 상태였는데, 그라나다(Granada) 지역의 귀족 보수파(입법주의자)와 레온(Leon) 지역의 엘리트 자유파(민주주의자) 간의 충돌이 주요 원인이었다. 약세에 있었던 자유파는 워커를 초대해 힘을 보태줄 것을 요청했다. 워커는 57명의 지원병을 모아 1855년 5월 4일에 니카라과로 향했다. 워커는 자신의 부대를 '일상생활에 싫증이 난 강한 의지의 사나이들'로 묘사하고 있었지만 역사학자 로렌스 그린은 '샌프란스시코에서 자경단을 피해 도망치거나 뉴올리온즈의 천민이거나 다른 지역의 불량배'라고 단정했다. 

워커가 니카라과에 도착하자 200명 정도의 자유파가 부대에 합류했다. 워커는 미국인들만 따로 추려서 미국 팔랑스(Phanlanx)라는 이름을 붙였다. 

6월 29일, 워커는 보수파의 요충지인 리바스(Rivas)를 공격했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자 니카라과 부대는 바로 도망쳤고 팔랑스만이 도시에 난입했다. 좁은 시내에서 압도적인 보수파의 공격에 밀려 워커는 벽돌집에 몸을 피했다. 

5명의 부상자를 뒤에 남기고 탈출한 워커는 코스타리카 배를 빌려 부하들을 소개시켰다. 첫 번째 전투에서 용감하게 전투를 벌였더라도 군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던 워커는 부대 지휘관으로서는 낙제점이었다. 그는 전략전술도 없었고 일체의 정찰도 하지 않아 적의 위치나 규모에 대해 알지 못한 채로 전투에 뛰어 들어 11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해 35명만이 남았다. 그리고 부상자를 적에게 넘겨줘서 그대로 죽게 만들었다. 

 

그림 설명: 무모하게 시가전에 난입한 워커 일행을 니카라과 보수파가 공격하고 있습니다. 워커는 이 전투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지만 절대로 실천에 옮기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기가 죽지 않은 워커는 증기선을 빌려타고 그라나다로 쳐들어갔다. 이번에는 전술도 미리 세우고 정찰도 했다. 기습을 당한 보수파는 항복을 했고 워커는 자신을 공화국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후에 꼭두각시 대통령을 세운 후에 보수파 사령관을 '내란' 혐의로 처형했다. 


워커의 추종자가 '1856년 3월까지 공화국 전체는 평화로웠다'고 기록했듯이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폭풍전야에 불과했다. 워커의 탐욕을 염려한 인접국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워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워커는 선제공격을 시도했지만 산따 로사(Santa Rosa)에서 패배했고 코스타리카군은 니카라과 국경을 넘어 리바스를 점령했다. 이전의 교훈을 잊어버린 워커는 니카라과군에게 전면공격을 퍼부었고 궤멸당했다. 

이번에는 운이 그를 도왔다. 코스타리카군 진영에 콜레라가 발생해 그들은 워커를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병사들이 가져간 콜레라는 코스타리카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워커가 죽음 직전까지 몰려 있는 동안, 워커의 니카라과 정복 이야기가 뒤늦게 미국에 전해졌고 수 백병의 지원병이 워커 장군의 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니카라과 땅에 내렸다. 


그림 설명: 워커의 국기입니다. 위는 니카라과 국기이고 아래는 소노라스 공화국 국기입니다.

 

 

워커는 군사재능도 심각한 낙제점이었지만 통치자로서의 자질은 더욱 심각했다. 그는 국민에게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못했고 단순한 점령지로만 생각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을 사살했다. 유적이 많은 그라나다에서 퇴각할 때에는, 심지어 미국의 정의가 기억되는 성지로 만들라며 도시를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하들은 2주에 걸쳐서 불을 지르며 도시를 파괴했고 '여기에 그라나다가 있었다'라는 표식만 남겼다. 


워커의 악행은 온두라스, 엘 살바도르, 과테말라의 개입을 불렀고 연합군이 레온을 점령하는 동안 코스타리카도 다시 공격해왔다. 꼭두각시 대통령은 워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며 도망쳤고, 워커가 대통령직에 오르며, 스페인어대신에 영어를 국어로 선포하고 노예제도를 도입했다. 미국의 영토확장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는 워커 행정부를 바로 승인했다. 

 

그림 설명: 워커가 짧은 생애동안 벌인 모험극 경로입니다. 제 블로그의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워커는 다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전쟁을 하려면 밴더빌트가 니카라과에 세운 환승회사와 증기선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회사를 몰수하면서 미국의 재벌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밴더빌트는 피어스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어 워커 행정부 승인을 취소하고 연합군을 지지하게 만들었고 코스타리카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비밀요원을 파견해 니카라과에 반란을 일으켰다. 


밴더빌트의 비밀요원은 코스타리카군과 협력해, 총 한 방 쏘지 않고도 워커의 증기선과 요새를 장악해 워커를 고립시켰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워커는 리바스로 들어갔고, 연합군과 밴더빌트의 미국용병부대는 6개월 동안 그를 도시에서 나오지 못하게 포위했다. 

미국정부가 중재에 나서, 워커와 장교는 파나마로 탈출할 수 있게 하고 사병들은 원하면 니카라과에 남을 수 있게 했다. 이렇게 워커의 니카라과 정복은 막을 내렸다. 한 동안은.


뉴욕으로 돌아온 워커는 다시 한 번 중립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지만 이번에도 무죄로 풀려났고 바로 니카라과 재침공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방해꾼은 대중에게 인기가 높았고 특히 워커는 방해꾼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의 시가 출판되고 연극이 상연되기도 했다. 워커는 '니카라과 전쟁'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확신에 가득찬 워커는 지원병을 다시 모아 1857년 11월 코스타리카 해안의 뿐따 아레나스(Punta Arenas)에 상륙했지만 미국 프리킷함이 다가와 워커를 체포하고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뉴올리온즈에서 봄을 보낸 워커는 세 번째로 중립법 위반 기소를 당했지만 이번에도 무죄로 풀려났다. 다시 지원병을 모아 출항했지만 산호초에 좌초되었고 영국 함선이 구출해줬다. 

 

그림 설명: 워커의 성공을 연극무대에 올린 광고입니다.

 

온두라스 해안에 내린 91명의 워커 일행은 1859년 8월 6일 뜨루히요(Trujillo)를 점령한 후에 니카라과로 전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온두라스군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한 워커 일행은 31명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도 거의가 부상을 당했다. 열대병이 번지면서 워커 일행의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해안에 있던 영국함대는 미국에서 오는 지원병을 모두 돌려보냈다. 영국 전함 HMS 이카루스(Icarus)는 워커에게 신변보장을 약속하며 배에 오를 것을 권했고 항해도중에 워커와 장교를 온두라스군에게 넘겼다. 장교 루들러(Rudler)는 광산노역 4년을, 워커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1860년 9월 12일, 온두라스 병사들이 워커를 감방에서 끌고나와 워커의 지칠줄 모르던 탐욕에 마침표를 찍었다. 당시 나이 36세였다. 나머지 병사들은 온두라스 베이 제도에 보내졌고 처음 출발했던 91명 중에 12명만이 본국에 돌아갈 수 있었다. 

천명을 받들었던 방해꾼의 열기는 워커의 죽음과 함께 열기를 잃어갔다. 남부가 연방에서 탈퇴하면서 해외영토는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워커의 초인적인 의지와 달리, 그의 군사재능은 보잘 것 없었고 그나마 운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극히 짧은 기간도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그의 실패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윌리암 워커의 탐험에 대한 영화가 있습니다.

전체 영화가 그대로 올라가 있군요. 안타깝게 자막이 없으니까... 그 정도는 다들 알아서 들으실 겁니다. 

그런데 역시 예상했던대로 첫 나레이션부터 조작이군요. '미국 원정대가 멕시코의 독재를 끝내기 위해 갔다???' 


제 이야기를 읽으신 분은 이런 조작은 비웃을 수 있겠죠? 

http://www.youtube.com/watch?v=6tS20n2dZ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