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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시크교도를 향한 영국군의 총검 - 1차 시크교도 전쟁

by uesgi2003 2012. 9. 16.


어제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를 봤습니다. 일주일에 4편의 영화를 봤군요.

이웃집사람, 더 레이디, 광해, 피에타까지... 백수이니까 당연히 시간이 많은 것을 아실테고, '백수가 돈 많네'하실텐데 여기에서 이웃집사람만 조조 표 값을 낸 것이고 나머지 영화는 모두 초대권이나 시사회였습니다. 

요즘 대한극장에서는 거의 1+1에 가까운 프로모션을 하고 있어서 큰 부담이 없습니다. CGV 등의 대형체인점은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상당히 붐비는데, 대한극장은 평일 저녁은 말할 것도 없고 주말에도 극히 일부 인기영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한산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싫어했습니다. 제가 고어물을 좋아하더라도 괴물이나 귀신의 고어물이지 현실의 잔인한 고어물, 예를 들어 마터스나 세르비안필름과 같은 영화는 관심도 안가집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현실에서 가하는 가학적 고어는 기분이 더러워지기 때문이죠.

김기덕 감독의 이전 영화에는 그런 면이 많았습니다. 별로 편하지 않은 스토리인데다가 클라이막스로 가면 정말 불편한 장면이 나옵니다.


피에타는 상당히 순화시켜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봤습니다. 그런데 상영관에 4~60대 중노년층이 거의 90% 이상이더군요.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된 동년배 부부에게 '워낙 그런 감독이니까 어떤 장면이 나와도 놀라지 말라'는 당부를 했는데, 그 부부에게는 경악할, 제 부부에게는 꽤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특히 제가 잘아는 중구 을지로 금속가공 하우스가 나오니 더욱 실감나더군요.

무엇보다 누군가에게는 하루 술값도 안되는 돈이, 누군가에게는 팔다리를 자르고 몸을 팔아야 하는 돈이라는 것이 가슴을 무겁게 만듭니다. 죄에 대한 용서와 구원 그리고 회개에 대한 영화였지만 제게는 '이 정도 어려움가지고 죽는 소리하지 말자'는 깨우침을 주는 영화였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근대 이야기를 올려달라는 분의 요청을 받아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제1 차 시크교도 전쟁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영국군 그리고 인도의 역사는 우리나라에서 상당히 인기가 없어서 제대로 정리된 자료를 찾기 힘든데 이번 기회에 인도의 주요 전사 중 하나인 1846년 2월 10일의 소브라온(Sobraon) 전투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이번에도 제 자료보다는 웹에 있는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IE에서 그림과 설명이 제대로 연결됩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시크교도를 향한 영국군의 총검


 

포성이 울리고 콘그리브(Congreve) 로켓이 펀잡(Punjab) 아침 하늘을 갈랐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인도 주둔 영국군은 모두 총검을 잘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66세의 휴 "패디" 고프(Gough) 경은 구식의 총검 백병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시크교도가 강 건너에 배치해 놓은 48문의 대포부터 어떻게 나올 것인지 지켜봐야했다. (휴 고프는 영국의 아시아 주요 전쟁의 지휘관으로 아편전쟁도 지휘해 광동을 점령했습니다. 1843년부터 인도주둔 영국군을 지휘했습니다.)

 

그림 설명: 콘그리브라는 사람이 발명한 로켓입니다. 정확성이나 파괴력은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대량으로 사용되었을 때에는 적에게 주는 정신적인 부담은 상당히 컸다고 합니다.

 

오전 7시 30분, 고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소리를 질러대는 펀잡 군대와 계속 포화를 퍼붓는 대포를 향해 돌격명령이 떨어졌다. 영국군 포는 이제 겨우 4발씩 밖에 남지 않았다. 고프의 군대는 참호에서 기다리는 시크교도 부대, 칼사(Khalsa)보다 숫자가 훨씬 적었다. 고프 장군은 단호한 표정으로 "신이여 도와주소서! 놈들을 총검으로 처리해라!"라며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인도의 워털루라고 불리는 소브라온 전투는 본격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 


 

18세기 말~19세기 초,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 대륙의 절반 정도를 점령했다. 그러나 인더스 강의 큰 지류가 관통하는 펀잡 지역의 북서쪽 국경에는 영국의 침투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한 인물이 강력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는 란지트 싱(Ranjit Singh)으로, 펀잡 지역을 하나의 강력한 중앙정부로 합친 뛰어난 시크교도 왕이었다. 

시크교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신앙을 결합한 교리를 믿는 신앙신깊은 전사들이었다. 1600년대, 인도의 무굴황제의 처형 위협을 받은 로빈드(Gobind) 구루(guru)는 칼사(순수의 의미)라는 시크 결사단을 만들었다. 몇 백년이 지나면서, 시크교도들이 펀잡의 지배계층이 되었고 란지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림 설명: 오른쪽의 말탄 사람이 펀잡의 위대한 지도자 란지트 싱입니다.

 

란지트 싱은 칼사의 조직과 문화를 바꿔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원정 참전용사를 비롯한 유럽용병을 고용해 칼사를 유럽식으로 훈련시켰다. 란지트가 물러나기 전까지, 시크군대는 50,000명을 넘어섰고 대포와 같은 신식무기로 무장해 아프가니스탄부터 티벳까지 원정을 했었다. 현대식 군대가 시크의 영토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수트레지(Sutlej) 강을 독립 펀잡과 동인도 회사의 국경으로 하자는 1809년 조약을 맺었지만, 영국의 걱정은 날로 심해졌다. 

 

그림 설명: 수투레지 강은 붉은 원 지역입니다. 펀잡 지역이 어디에 있는 지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1839년, 폭음을 거듭하던 란지트 싱이 사망했고 펀잡의 시크왕국은 급격하게 힘을 잃어갔다. 후계자는 안타깝게도 선왕의 정치와 군사재능대신에 왕의 폭정만을 물려받았고 왕위를 노리는 왕족끼리 서로를 암살하며 격렬한 내전이 벌어졌고 칼사의 유럽장교들이 결국 펀잡을 떠나는 지경이 되었다. 

 

5년 간의 심각한 분열 끝에 란지트 싱의 7살짜리 아딜 달리프 싱(Dalip Singh)이 왕위에 올랐다. 달리프의 권력은 바로 어머니 마하라니 진단(Maharani Jindan)에게 넘어갔는데 그녀는 정치재능은 상당한데 사생활에 상당히 문제가 많은 여자로 유명했다. 결국 칼사의 일반 병사 대표협의체가 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지경이 되었다. 칼사의 군 정책은 모든 것이 영국에 대한 증오로 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이 북쪽으로 침투하지 못하는 것처럼, 시크교도도 영국때문에 남쪽의 기름진 땅으로 확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인도 회사가 기회만 있으면 펀잡으로 진출하려고 했고 1843년 인더스 계곡의 땅을 합병하면서 시크교도 사이에서는 펀잡이 다음 목표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칼사 대표협의체는 수트레지 강을 건너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1844~45년 기간 내내 영국과 시크교도 사이에는 긴장감이 계속 흘러넘쳤다. 마하라니 진단은 칼사에 점점 위축되었고 이미 재정이 바닥난 중앙정부는 병사 대표협의체에 뒷돈을 줄 여유가 없었다. 1845년, 칼사가 공개적으로 진단의 오빠인 수상을 죽이자 진단은 자신과 아들을 살리기 위해 칼사를 없애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는 조금씩 전쟁을 유도하면서 영국 편으로 붙었다. 새로 수상에 지명된 진단의 연인 랄 싱과 칼사의 지휘관 테지 싱도 이 계획의 공범자였다. 

 

그림 설명: 영국에게 펀잡을 내준 3인의 공범 중 하나인 랄 싱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델리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비둘기파가 전쟁과 펀잡을 원하는 매파를 진정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1845년 헨리 하딩지(Henry Hardinge)가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자, 그는 시크교도와의 평화를 선택했지만 시크군은 이미 전쟁을 선택한 상태였다. 하딩지가 칼사를 자극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배려가 거꾸로 시크군에게 무방비로 국경을 내주는 결과가 되었다. 


1845년 12월 중순, 칼사는 수트레지강을 건너 동인도 회사의 영토에 들어왔다. 최소한 50,000명 이상의 시크군에 15,000명의 영국군과 세포이군(인도 현지군)이 전부였다. 하딩지는 말을 몰아 휴 고프가 병력을 모으고 있던 수프레지강으로 달려갔다. 랄 싱과 테지 싱이 교묘하게 시크군의 작전을 최대한 방해해서 12월 18일 무드키(Mudki)와 12월 21~22일 페로제샤(Ferozeshah)에서 영국군이 불가능한 전투에서 이길 수 있게 도왔다. 칼사는 사브라온 마을 근처로 후퇴해 동계 숙영지를 만들었다. 

1월에 간간히 전투가 벌어졌지만, 시크군의 주력은 소브라온에 머물렀고 고프도 가까운 곳에 캠프를 차리고 델리에 지원군과 대포지원을 요청했다. 테지 싱은 페샤와르(Peshawar) 국경도시의 태수로 있었기 때문에 부자였고 정부에서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계략을 모르고 있던 영국군은 그를 시크군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수트레지 남쪽 강변의 시크군 보병진영은 상당히 높은 3중 방벽과 참호로 보호되고 있었다. 강에는 북쪽 강변의 기병과 포대를 연결하는 좁은 임시가교가 놓여졌다. 경기병대는 동쪽 몇 km 떨어진 하라키(Hariki) 여울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보병과의 공조가 불가능한 배치였다. 랄 싱은 일부러 시크 기병대를 여기에 배치시켰고 소브라온에서도 영국군에게 유리한 몇 가지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고프는 아일랜드 출신의 역전의 지휘관으로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스페인 전투에 참전했었다. 1840년대 초반, 그는 중국 원정군을 지휘했었고 1843년에는 인도 괄리오르(Gwakior) 마라싸(Maratha)군을 격파했었다. 그는 전장에서 수비에 치중하는 군대를 상대할 때에는 총검을 앞세운 전면공격이 승리의 열쇠라고 믿고 있었고 이 믿음은 1차대전 솜므(Somme) 전투까지 후배 지휘관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그는 전술이나 조직운영 기술은 거의 알지 못했지만 어땠든 전투에서는 늘 승리를 거뒀다.

 

 

소브라온의 시크군 진영에는 30,000명 정도의 보병과 67문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고 영국군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수트레지에 배치된 동인도 회사의 병력은, 영국군, 구르카 병사와 벵갈 세포이 연대를 모두 합쳐서 16,000명 정도였다. 하딩지는 고프에게 중포가 델리에서 도착하면 공격을 하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2월 첫 주에 대포가 도착하면서 고프는 일전을 치를 준비가 되었다.

 

그림 설명: 스캔이 귀찮아서 웹의 자료를 가져왔더니 제 설명과 약간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도 거의 맞아떨어지니까 이 지도를 참조해주십시오.

오른쪽 구석의 붉은 원이, 공범 지휘관들이 일부러 기병대를 떼어 놓은 장소입니다.

 

소브라온 전투에서의 전술은 아주 간단했다. 그는 3개 보병 사단과 1개 기병 여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크교도에게 예비포격을 한 후에 해리 스미스 중장과 월터 길버트 중장의 사단이 우익과 중앙에서 기만공격을 하고 로버트 딕 중장의 좌익 사단이 시크군의 우측에 전면공격을 가해 칼사의 방어막을 무력화시키고 그대로 적을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찰스 큐어톤의 기병 여단은 하리키에 있는 시크 기병대를 견제하게 했다.

 

 

시크군 진영도 영국군의 공격에 대비해 상당히 두터워졌다. 2월 첫 주 동안, 시르다르 샴 싱 아타리왈라(Attariwala)라는 유명한 장군이 합류하면서 시크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다. 테지 싱은 어리석게도 샴에게 배반계획을 누설하고 동참할 것을 권했는데, 샴은 크게 화를 내며 전장을 떠나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죽겠다며 시크교 성서에 맹세를 했다. 시크군은 샴의 지휘아래 뭉쳤고 테지는 작전계획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그림 설명: 방벽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지휘관들의 배반으로 압도적인 병력이 유리한 위치에서 전투를 벌였는데도 참패를 하게 됩니다.

깃발을 꽂고 있는 사람은 버나드 맥캐비(Bernard McCabe) 하사로 기수가 총에 맞고 쓰러지자 연대기를 들고 앞장 서서 방벽 위에 꽂아 영국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습니다.

 

방벽에는 33개 보병대대가 배치되었고 샴 싱은 직접 시크의 좌익을 지휘했다. 중앙은 메흐타브 싱과 굴랍 싱 굽타가 지휘를 했고 칼사의 정예군인 근위여단과 유럽용병이 훈련시킨 프랑스여단이 배치되었다. 모래지역이어서 방벽이 가장 부실했던 우익에는 비정규군을 배치했다. 67문의 대포는 전선을 따라 넓게 배치되었다.

 

 

고프는 1846년 2월 10일 오전을 결전의 시간을 잡고 병력을 전진배치시키며 시크군의 감초소를 모두 제압했다. 영국군 포대는 몇 km의 전선에 걸쳐 분산되었는데, 로켓과 공성포는 좌익에 주로 배치하고 18파운드 중포는 중앙에 배치시켰다. 원래는 새벽에 포격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안개가 오전 6시 30분까지 걷히지 않아 지연되었다.

해가 떠오르면서 안개가 걷히자 텐트에서 나온 시크군은 전투대열의 레드코트를 볼 수 있었다. 안개가 걷히자 마자 양쪽은 중포를 동원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계산 착오로 시크군 방벽에 직격탄을 퍼붓기에는 멀리 떨어진 곳에 대포를 배치했고 2시간 정도의 효과가 거의 없는 포격을 하고 얻은 것은 탄약낭비뿐이었다.

고프는 그렇지 않아도 보병의 전면공격을 하고 싶던 차에 포대의 탄약이 부족하다는 보고가 반가웠다. 워털루에서 한 손을 잃은 역전의 용사 하딩지는 고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딩지 인도총독은 고프에게 전령을 보내 '승리할 확신이 없다면 공격을 취소해도 좋다'는 제안을 했다.

 

그림 설명: 인도의 벵갈 세포이 병사입니다. 인도의 정치, 문화 배경이 워낙 복잡해서 현지인 부대가 영국군 못지 않게 같은 인도인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령이었던 리차드 벤슨 중령은 고프에게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하면 공격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고프는 몹시 화를 내며 '뭐라고? 작전이 개시된 후에 군대를 물리라고? 나는 승리를 확신한다. 절대로 물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말을 몰아 조카인 존 블룸필드 고프 중령에게 작전대로 전투를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시크군 우익에 대해 선봉에 서는 명예는 제7 여단이 가져갔다. 여단장 루이스 로버트 스테이시(Stacey)는 마른 하천바닥에 부대를 대기시켜둔 상태였다. 7여단 측면에는 견인포 2문이 배치되었다.

오전 9시가 넘자, 수 백명의 병사가 브라운 베스(Brown Bess) 소총에 긴 총검을 끼웠다. 적의 방벽과 참호를 넘기 전에는 절대로 발사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들은 약 800m의 개활지를 건너 시크군의 방벽에 접근해야했다.

시크교도의 포수 한 명은 영국군의 공격에 대해 '우리가 공격할 때에는 전통적인 전투함성을 지르며 소총을 발사하는데, 영국군은 완전히 침묵을 지키며 접근했다. 그들은 마치 악마처럼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 같았다.'라고 기록했다.

 

가장 바깥으로 전진하던 제10 연대의 피해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 시크군의 포의 사각이 맞지 않아 포도탄이 영국군의 머리 위로 넘어갔고 방벽에 도착한 7여단은 잠시 숨을 고른 후에 5m 높이의 방벽을 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총검으로 시크군 우익의 포병들을 찌르고 머리를 숙여 그들의 장검을 피했다. 우익 포대는 10분 만에 진압되었다. '누가 그런 악마들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총검을 앞세우고 돌격하는...'라고 시크병사의 기록은 계속된다.

시크군 우익 중앙을 공격하던 제53 스롭셔(Shropshire) 연대에는 강 건너의 포대의 맹렬한 포격이 쏟아졌다. 비정규군 기병대가 방벽 틈에서 쏟아져 나와 곤경에 처한 연대를 포위하려고 했지만 견인포의 직격탄에 맞아 전멸했다. 적의 반격에 자극을 받은 연대는 달려나가 방벽에 매달렸다.

포대를 진압한 10연대는 우측에서 시크병사들의 사격을 집중사격을 받았고 곤경에 처한 모습을 멀리서 본 딕 장군은 제6 여단에게 지원명령을 내렸다. 그는 직후에 포도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그림 설명: 전에도 설명했듯이 외국은 이런 워게임을 좋아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하던 그런 장난감 병정 놀이인데, 전사를 배운 성인이 작정하고 하는 취미라 규모나 정확도가 상당합니다.

 

7여단과 6여단이 방벽 안에서 대열을 정비하는 동안, 시크군 중앙의 정규군이 반격대형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숫자에 밀린 7여단은 치열한 백병전 속에서 서서히 밀려났고 제5 여단이 지원을 왔지만 효과가 없었다.

시크군의 반격에 영국군 좌익이 무너질 위험에 처하자 하딩지는 월터 길버트 중장에게 예정된 중앙의 기만공격을 서두르라고 명령하고 고프도 동시에 우익에게 바로 기만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길버트의 제2 사단은 시크군의 사격을 맞으며 전진했다. 시크군 중앙은 가장 큰 방벽 뒤에 정예군이 배치된 곳이었다. 제3 여단은 시크군의 사격과 포화에 두 번이나 물러났다. 다른 여단도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포도탄이 대열 속에서 터지며 병사들의 몸이 산산조각났고 팔다리가 하늘을 날아다녔다. 여단장 맥크라렌은 총탄에 맞아 오른쪽 무릎이 박살났다. 길버트 장군이 혼란을 수습하려고 나섰다가 그도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방벽이 너무 높아 사다리없이는 올라갈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물러서서 대열을 정비해야 했다. 그 동안 시크군이 방벽에서 뛰어내려와 부상당한 병사들을 마구 죽였지만 100m 밖에 있던 전우들은 지켜보고만 있었다.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의 사기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분노에 찬 병사들은 어깨 위로 전우를 올려세우며 방벽에 있던 시크병사들을 총검으로 찔렀다. 세 번째 공격만에 방벽을 점령했고 여기에서 여단장 테일러가 전사했다.

 

그 동안 시크군 좌익을 맡은 스미스 장군의 제1 사단도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다. 제1 여단의 공격은 무산되었고 여단장이 부상을 당했다. 제2 여단이 후퇴하는 전우들 틈으로 전진했지만 방벽에 막혀 여단장이 전사했다. 10분 만에 중위계급 이상의 모든 장교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패잔병을 모아 더 오른쪽 방벽에 두 번째 공격을 했다. 30분의 치열한 백병전 끝에 1 사단은 시크군을 두 번째 방벽 안으로 밀어넣는데 성공했다.

샴 싱은 부하들을 이끌고 스미스 사단에 맞섰다. 좌익이 밀리기 시작하자 그는 타지 싱에게 부대의 정비를 맡아달라고 전령을 보냈다. 하는 일 없이 오전을 보낸 타지는 전령이 샴 싱의 곤란한 상황을 전하자, 자신이 직접 나서 좌익을 보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는 몇 명의 측근장교를 모아 북쪽 강 건너로 바로 달아났다.

중앙과 좌익에 대한 영국군의 공격이 마침내 먹혀들면서 우익의 반격도 위축되었고 결국 두 번째 방벽 안으로 후퇴했다. 영국군은 폭약을 설치해 두 번째 방벽에 큰 구멍을 냈고 기병이 선봉에 서서 돌격해 들어갔다.

 

 

제3 경용기병이 일렬로 시크군의 두 번째 방벽을 통과하는 동안 제8과 9 벵갈 비정규 기병대가 지원에 나섰다. 시크군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영국 용기병이 두 번째 방벽 안으로 들어섰고 참호를 뛰어넘으며 시크군 대열을 베어 넘겼다.

적시에 돌격한 기병대 덕분에 승기를 잡은 영국군은 시크군을 세 번째 방벽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 안에서 영국군 3개 사단의 일제사격 세례를 받았고 견인포가 방벽 틈 안으로 직격탄을 날려 시크군의 대열을 찢어 놓았다. 샴 싱은 절망적인 반격에 나서다가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잠시 분투하던 시크군은 좁은 다리로 몰려들었다. 무게를 못이긴 다리가 무너졌고 수 천 명이 불어난 수트레지 강물에 목숨을 잃었다. 오후가 되자, 강력했던 칼사의 군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림 설명: 시크군을 유린하고 있는 영국 기병대입니다. 실제로는 이런 개활지를 건넌 것이 아니라 방벽 틈을 따라 일렬로 돌격했고 강건너 포대까지는 못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병대의 활약으로 시크군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는데, 이를 막아야 했던 시크군의 기병대는 전투와 상관없는 곳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채로 대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시크군의 기병대가 영국군 보병대의 측면이나 배후를 향해 투입되었다면 전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이미 설명했듯이 영국의 힘을 빌어 칼사를 무력화시키려던 일부 지휘관들의 배반때문입니다.

 

시크군의 피해는 10,000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샴 싱을 비롯한 많은 시크 지휘관이 전사했다. 고프의 영국군은 320명이 죽고 2,063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약 1/7이 사상한 적지않은 피해였다.

1주일 후에, 하딩지는 시크교도와 평화조약을 맺었고 마하라니 진단은 영국 보호형 아래에서 펀잡을 통치하다가 1848~49년의 두 번째 시크교도 전쟁 후에 펀잡을 영국에 완전히 내주게 된다.

 

고프는 전술부족과 심각한 피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찰스 네피어(Charles Napier)로 교체되었지만 1차 전쟁에서 남작에, 2차 전쟁 후에는 자작이 되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 1855년에 왕립 근위 기병대 대령에 임명되었다가 1862년에는 야전군 원수에 올랐다.

소브라온 전투 이후 영국의 북서쪽 국경은 안전해졌고 북부 인디아는 12년 후에 일어난 세포이의 난으로 피폐해졌다. 그 영향을 생각하면 소브라운 전투를 인도판 워털루라고 부르는데 이견이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