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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농부들의 전쟁 - 2차 보어전쟁

by uesgi2003 2012. 9. 26.


이번 주말이면 추석연휴시작이고 제 블로그 오시는 분들도 한가하겠군요.

대학 때에 가장 싫었던 명절이 추석이었습니다. 아버님 고향이 황해도라 친척이 아예 없었고, 어머님 친척은 서울 삼선교 한 동네에 거의 사셔서 반나절이면 모이는 것이 끝이었죠. 

대학 친구들은 모두 고향내려갔고, 결국 심심해서 도서관을 가면 경비원 아저씨가 나중에 와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죠. "왠만하면 집에 가지! 나도 집에 일찍 들어가게"


그 때에는 지방에 고향을 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웠는데, 사회인이 되고 나니 서울이 고향이라는 것이 너무 좋더군요. 부산까지 15시간, 강릉까지 9시간 도로에서 먹고 자고 싸고(?)하는 고생을 오며 가며 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집에서 퍼질러 잘 수 있었으니까요. 처가도 미아리라 부모님께 들렸다가 오후에 지하철 3정거장만 타면 그만이었습니다. 저녁먹고 어르신들 술자리 벌어지면 저는 근처 만화방이나 심야영화로 슬그머니 도망갔었죠.


추석명절이 어느 세대까지 이어질까요? 서울이 고향인 사람들이 워낙 많이 늘었고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영향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도 점차 줄고 있어서 추석과 같은 민족명절이 얼마나 계속 갈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부모님이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은 고향갈 일이 딱히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친척이나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는 정도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이번 추석에는 간첩이라는 영화는 피하시기 바랍니다. 모 평론가의 평처럼 웃음도 없고 액션도 허술한 절대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영화입니다. 1년에 영화 한 편 보기 힘든 분이라면 보실만 하겠지만, 평소에 영화를 즐기는 분이라면 상당히 불편하고 유치한 이야기 전개에 실망할 겁니다. 감독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오늘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보어전쟁 이야기입니다. 대규모 전쟁은 아니었지만 당시 강대국이었던 영국이 농부들에게 참패를 당했었고 2차전도 많은 고생을 했던 전쟁입니다.   


농부들의 전쟁 - 2차 보어전쟁 1899-1902

 

전설적인 영국군 지휘관, 프레드릭 슬레이 로버트 경(그림 참조)은 3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보어 연맹의 수도였던 프레토리아(Pretoria) 광장에 들어서면서 영국에게는 남아프리카 전쟁이 끝난 것 처럼 보였다. 그 때가 1900년 6월 5일 오후 2시 15분이었다. 그들은 34일 만에 트란스바알(Transvaal) 황무지 500km를 횡단했고 보어인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1주일 전에 영국군인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와 황금광산을 공격하자 다음 목표가 된 프레토리아 시민들은 모두 달아났고 로버트는 수도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로버트 옆에는 호라티오 허버트 키치너가 나란히 말을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영국의 제국주의 확장전쟁에서 명성이 높았는데, 로버트는 1857년 인도 반란의 전공으로 빅토리아 훈장을 받았고 키치너는 수단의 카르툼(Khartoum) 탈환에서 막 돌아왔다. 67세의 로버트는 백발이었고 구렛나루가 무성한 키치너는 20살이나 더 젊었다. 두 사람은 영국 제국주의의 과거와 미래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19년 전에 있었던 보어 1차 전쟁에서 영국은 모욕을 당했었다. 조지 콜리(George Colley)가 마후바(Majuba) 고지에서 당한 패배는 창피스러운 일이었다. 후퇴하던 콜리를 저격병의 총탄이 뚫고 지나갔고 며칠 후에 영국은 휴전을 제안했다. 

이제 로버트는 마후바에 잠시 꽂힌 적이 있었던 오래된 영국 국기를 프레토리아에 게양하면서 콜리의 역사적인 패전을 지우고 자신의 승리를 기록하려고 했다. 이제 보어인이 항복해오기 만을 기다리기만 해면 되었다. 

 

(우에스기 왈: 명성만큼 영국 육군이 강하지도 못했지만 더 우수한 소총과 대포로 무장한 보어인을 무시했기 때문에 1차전은 영국 역사에 남는 치욕적인 전쟁이었습니다. 특히 1881년 2월 27일의 마후바 고지 전투는 치욕 중의 치욕이었습니다.

콜리 장군은 전략적인 가치가 없는 마후바 고지를 점령했는데, 보어군에게 영국군의 위용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골농부인 보어인을 무시했기 때문에 대포도 가져가지 않았고 부하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참호도 파지 않았습니다.

콜리의 장담과 달리, 보어군은 새벽 4시 30분에 450명 정도의 코만도가 고지를 공격했습니다. 보어군의 접근을 보고 받은 콜리는 여전히 그들을 무시하면서 방관했는데, 뛰어난 사격수인 보어군은 백병전을 피하고 원거리에서 1대1 사격전을 펼칩니다. 신병이 많았던 영국군은 고지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그제서야 후퇴명령을 내리던 콜리는 저격수에게 죽습니다.

이제 반대 입장이 되어 영국군은 엄폐물이 없는 고지를 뛰어 내려가고 보어군은 고지 위에서 조준사격으로 영국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힙니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던 영국군은 92명 전사, 134명 부상, 59명이 포로로 잡혔고 보어군은 겨우 1명 전사, 5명 부상이 피해의 전부인데다가 고지공격에 나선 보어군 대부분이 소년병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영국에게 더 큰 모욕을 안겨주었습니다.)


2일 후, 보어군 지휘관 크리스티안 드 베트(Christiaan de Wet, 사진참조)가 나타났지만 항복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의 게릴라 부대는 루드왈(Roodewal) 철로에 있던 영국군을 700명 이상 죽이고 전쟁기간 중 가장 많은 군수품을 노획했다. 더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의 막대한 양이었다. 

이 기습으로 시작된 드 베트와 키치너의 숨바꼭질은 2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20세기 게릴라 전술에 대한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뉴욕 타임즈 파견기자는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 꼭 있고 싶다. 게릴라 전에서 드 베트가 죽지 않는다면, 키치너를 포함한 모든 장교들은 살아 있는 그를 만나고 싶을 것이다"라고 썼다. 

드 베트는 "로버트 경이라면 3년은 걸려야 나를 잡을 수 있겠지. 키치너에게는 3달 만에 잡아보라고 하고 싶군"이라고 친구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후, 두 사람은 기자의 바램처럼 같은 장소에 있게 되었고, 드 베트가 키치너를 포로로 잡을 뻔한 사건이 터졌다. 키치너는 12,000명의 병력과 함께, 프레토리아에 들어가는 철도를 끊어 병참선을 봉쇄하려는 보어군을 기습했다. 영국군과 보어군 사이에는 철로를 두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는데, 영국군 쪽에서 온 기차가 실수로 보어군 점령지를 통과하게 되었다. 보어군은 기차에 총탄을 퍼부어 정차시켰지만 보어병사들은 바로 돌격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주저했다. 

기차에 타고 있던 키치너는 말을 타고 어둠을 틈타 달아날 수 있었고 영국은 또 한 번의 모욕을 운좋게 피할 수 있었다. 


45세의 나이로 가장 유능한 보어 지휘관으로 알려진 드 베트는 오렌지 자치주(Orange Free State)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평생동안 싸웠는데, 1865년 당시 11살 이었던 드 웨트는 바소토(Basotho) 부족과의 전쟁에서 아버지를 따라 참전했었다.  

16년 후, 드 베트는 마후바 고지 공격에 참전했는데, 키치너는 "드 베트와 병사 1/3을 바꾸자고 해도 바꾸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림 설명: 2차 전쟁 당시의 남아프리카 영토 상황입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IE에서 그림과 설명이 제대로 연결됩니다.


남아프리카로 알려진 이 지역은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 알려진 네덜란드 정착민 후손들이 자리잡은 곳이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유럽과 향신료 공급처인 인도를 오가는 배들의 중간 기착항이 필요했고 1652년에 케이프 타운을 만들었다. 영국 선박도 즐겨 이용하는 항구였지만 계속 네덜란드의 영토였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직전에 보다 확실한 제해권이 필요했던 영국은 이 지역을 점령했고 식민지는 도시 중심의 영국인과 농촌 중심의 토착민으로 갈라졌다. 토착민은 스스로를 이주 농부(Wandering Farmers)라고 부르다가 보어(Boer)인으로 줄여불렀다.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피가 섞인 보어인은 무정부주의로 유명했고 평소에 사냥을 즐겼기 때문에 사격, 추격, 승마기술이 뛰어난 전사들이었다. 

케이프 콜로니(Cape Colony) 지역의 아프리카 원주민 부족을 상대하기 위해, 16~60세의 남성은 언제라도 군복무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위기 시에는 자신의 말, 소총, 탄약과 8일치의 식량을 가지고 군대에 합류했다. 이처럼 뛰어난 기동력을 갖춘 병사들이 드 웨트의 게릴라가 되었다. 

 

1830년대 중반, 영국의 통치에 질려버린 보어인은 케이프 콜로니를 버리고 그레이트 트렉(Great Trek)이라는 곳에 정착했다. 12,000명 정도의 보어인은 영국에게서 간섭받지 않는 농장지대를 찾아 북동쪽으로 이동했고 어쩔 수 없이 원주민과 충돌하게 되었다. 보어, 바소토, 줄루(Zulu)족 간의 충돌은 수 천 명의 희생자가 생길 정도로 잔인했다. 

10년 정도가 지나자, 보어인은 자신의 농장을 확보하게 되었고 오렌지 자치주와 트란스바알 독립공화국을 세웠다. 

1870년대에 이 지역에서 다이아몬드와 황금이 발견되면서 영국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몇 년에 걸쳐 정치협상을 하기도 했지만 황금과 보석은 지금의 기름과도 같아서 영국은 두 번에 걸쳐 보어 공화국을 공격했다. 


그림 설명: 게릴라의 기원은 나폴레옹전쟁 당시 스페인 민족의 투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Guerilla라는 스페인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코만도(특수부대)의 기원은 보어인인데 군복도 없는 차림으로 정규군울 상대로 파괴와 기습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보어인은 영국이 크리미아 전쟁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유럽식 군대였지만, 상비군이 없던 보어군은 히트앤드런 위주의 게릴라 전술을 즐겼다. 보어인은 지휘관을 선출했고 군복무는 무급이었다. 부대는 지역색이 강했고 병사들을 위한 훈련은 따로 준비되지 않았다. 이들은 작전개시일에 뭉쳤다가 전투가 끝나면 부대는 해산되었고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군대조직은 허술했지만 줄루 전쟁 이전부터 계속 이어온 최고의 조직이었다. 로버트와 키치너가 프레토리아를 점령했지만 도시만 점령하면 된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보어군의 코만도 시스템은 필요한 순간에 군대가 모였다가 사라졌고 영국군이 정규전으로 대응하려고 했을 때에는 때가 너무 늦어버렸다. 영국군은 루드왈에서 참패한 후에 도시보다 보어 지휘관이 최우선 목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른 모든 지휘관보다 드 베트가 가장 중요한 목표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로드왈 전투부터 6주 후, 영국군은 드 베트를 찾아냈다. 드 베트는 다른 세 명의 지휘관과 함께 오렌즈 자치주 고원지대에서 영국군에게 포위되자 9,000명의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어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2개 부대만 탈출할 수 있었고, 놀랍게도 4,000명 정도의 보어군이 무기를 내려놓고 제발로 포로가 되었다. 드 베트는 "상상조차 안되는 멍청한 행동"이라고 기록했다. 

드 베트는 영국군에 대해 더 적극적인 공세로 나섰다. 7월부터 11월까지, 통신망을 끊고 철로를 부수고 군수품을 노획하면서 영국군이 예상하지 못하는 장소와 시간에 나타났다. 영국군은 드 베트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드 베트는 영국군의 통신망부터 끊은 후에 철도를 공격했다. 영국군이 다리를 다시 놓으면 드 베트가 다시 부쉈다. 

 

보어인들이 드 베트를 따르면서 그의 군대는 다시 늘어났다. 로버트가 보복하겠다며 보어인 농장을 불태울수록(사진참조) 더 많은 지원병이 몰려들었다. 드 베트의 은신처를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5개월이나 지난 11월, 로버트는 드 베트 근처에 가보지도 못했다. 

로버트는 임무를 완수했다며 키치너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고 영웅행세를 하며 런던으로 귀환했다. 


1990년 12월, 키치너는 계략을 쓰기로 했다. 드 베트가 오렌지 자치주와 케이프 콜로니 사이를 흐르는 오렌지 강을 건너 귀환할 것으로 보고 모든 다리와 도강지점에 병사를 배치했다. 

영국군이 아니더라도 강의 수위가 너무 높아져서 드 베트는 강 건너로 넘어갈 방법이 없었다. 키치너는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내려두었고, 드 베트는 이리 저리 말을 몰며 도강할 곳을 찾았다. 영국군이 드 베트를 거의 잡기 직전에 보어부대는 강상류 20km 지점에 비어있는 곳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드 베트가 영국군의 추격을 피해 필사의 질주를 했다. 드 베트는 "3,000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우리는 영국군의 추격을 피했다.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지만 8,000명의 병사 중에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초조해진 키치너는 보어 연합국 영토에 철조망을 치기로 했다. 이번에는 가축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가두려는 것이었다. 수 백 미터 거리마다 검문소를 두고 그 사이는 높은 철조망으로 막았다. 검문소는 철제 지붕과 총구만 있는 참호였다. 

영국군의 방책은 조금씩 거리를 좁히더니 원형이 되어서 마치 그물망으로 고기를 잡는 모습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영국군은 보어인과 가축을 잡아들였고 키치너는 계속 초토화작전을 고집했다. 영국군은 보어인을 강제로 집에서 끌어낸 후에 모든 것을 불태우고 여자와 아이들은 집단 수용소로 보냈다. 

 

그림 설명: 2차 보어전쟁을 한 눈에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철조망 가설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필요한 부분만 제가 번역해두었습니다.

 

전술적으로는 큰 효과가 없었지만 전략적으로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드 베트의 부대는 가족에게서 탄약과 식량을 구할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키치너의 방책설치, 초토화, 강제이주라는 3중 작전은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영국 언론은 드 베트를 영웅으로 다루고 있었고 민간인에 대한 잔인한 대우는 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국회의원은 "집단 수용소는 야만적인 방법이다"라고 비난했다. 

 

집단 수용소(그림 참조)는 이미 군사작전에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스페인은 쿠바 반란을 진압하려고 집단 수용소를 사용했었고 미국도 필리핀에서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보어인의 저항을 하루 빨리 진압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시작한 강제 이주는 비극이 되었다. 160,000명의 시민이 집단 수용소에 갇혔는데, 수용소는 이질, 콜레라, 홍역 등의 전염병에 상당히 취약했다. 수용소를 군사적인 목적만을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겨울에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전후 조사에 따르면, 26,521명의 여성과 어린이, 1,421명의 노인이 수용소에서 죽었다.

영국군 전사자가 21,492명, 보어 게릴라 전사자가 최대 9,000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희생이었다. 결국 영국 내에서도 문제가 불거져서 독립 인권그룹이 조사할 정도가 되었는데 키치너는 보어인의 더러운 식생활때문이라도 책임을 돌렸다. 

 

 

민간인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키치너는 드 베트에 대한 압박을 늦추지 않았지만 프레토리아 입성 후 18개월이 지난 1901년 12월까지도 드 베토는 여전히 맹활약 중이었다. 

1901년 12월 25일, 드 베토는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 새벽 2시, 드 베트와 600명의 병사는 트베폰테인(Tweefontein)의 검문소와 숙영지를 기습했다., 잠에서 깬 영국군이 몰려나와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전투가 끝났을 때에는 영국군 550명 중 3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군수품이 모자랐던 보어군은 심지어 여자 드레스를 입은 병사도 있었다. 250명의 영국군 포로는 다행히도 목숨을 건졌지만 군복을 모두 빼앗겨서 나체로 동료들을 기다려야했다. 


게릴라 전이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보이던 1902년 2월 5일, 드디어 키치너의 고집스러운 작전이 결과를 낳았다. 검문소와 철조망 방책이 완성되면서 8,000개의 검문소와 7,000km의 철조망이 보어인 영토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흑인 아프리카 현지인 부대까지 동원해 총공격에 나섰다. 

뉴욕 타임즈 2월 14일 자는 "북부에서 보어군이 포위망을 뚫으려는 필사적인 시도를 했다. 영국군이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고 보어군은 사방에서 총탄세례를 받았다... 20분 정도 지나자 한 발의 총성을 마지막으로 전투가 끝났다. 평상시와 같은 정적이 찾아왔고 포위망에서 탈출하려던 보어군의 시도는 실패했다. 몇 명의 병사만이 철조망을 넘었는데, 그 중에는 드 베트 장군도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키치너의 초토화 작전때문에 보어군 패잔병은 굶주려갔다. 특히 가족이 수용소에 갇힌 보어 코만도의 사기는 처참할 정도였다. 수용소에 가지 않았더라도 잔인한 영국군 병사, 아프리카 원주민, 야생동물 사이에 남겨진 가족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평화협상에 나설 때가 되었다. 

키치너와 드 베트는 1902년 5월 19일, 프레토리아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악수를 한 후에 협상 테이블에 앉자, 승자인 키치너는 몇 마디 농담을 던지는 여유를 보였다. 드 베토는 단호한 태도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협상이 단절되면 바로 전투를 재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협상은 10일 동안 계속되었고 키치너는 관대한 조건을 내보이며 드 베토에게서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평화협정은 5월 31일, 오후 10시 30분에 서명되었다. 키치너는 저녁 테이블 상석에 앉았고 드 베트는 그 오른쪽에 앉았다. 서로를 마주보며 "이제 우리는 친구입니다"라는 키치너의 축사에 축배를 들었다. 

그제서야 드 베트는 말을 타고 나가 보어군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