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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눈으로 본 스탈린그라드전투 - 대공세 준비

by uesgi2003 2024. 4. 7.

 

바르바로사 침략군은 정말로 엄청난 규모였다. 나치의 1935년 국방규정과 그에 따른 재무장 프로그램이 결합되어 세 개의 군대가 탄생했고, 1939년 이후의 짧고 성공적인 작전으로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 침공 당일, 약 350만 명의 독일군이 약 50만 명의 추축군과 함께 국경에 집결해 있었으며, 3천 5백여 대의 전차와 7천문의 대포, 3천 대에 가까운 항공기의 지원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기동력 부족은 곧 발목을 잡았고, 60만 대의 차량과 비슷한 숫자의 말만으로는 진격을 지속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러시아의 끈질긴 저항과 열악한 교통망때문에 1941년 말까지 독일 물류 시스템의 핵심인 4만 1,000대의 귀중한 트럭을 포함해 차량 6대 중 1대를 잃었고 전차 6대 중 1대를 잃었다. 
말 중 절반이 죽었고 겨울철에만 약 18만 마리를 잃었다. 탄약재고는 1941년 6월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고 연료공급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1월 초까지 전차 3,252대 손실에 겨우 1,138대만 보급받았는데, 그 중 상당수가 체코제 전차였다. 
심각한 정비 문제를 고려하면 1942년 초 동부전선의 16개 전차 사단은 총 140여 대만 움직일 수 있었는데, 전년 같은 시기 1개 사단의 전차보다 적은 숫자였다. 

 

 

3호와 4호 전차 생산량이 워낙 적었기 때문에 38t 등의 체코제 전차는 독일군 경전차보다 훨씬 귀중한 전력이었습니다. 

인명 피해는 훨씬 더 심각해서 사망, 부상, 실종된 병사만 100만 명에 달했다. 피해는 최전방 전투중대에 집중되었으며, 소수의 기동부대도 큰 타격을 입었다. 약 3만 명의 장교와 함께 운전병, 포수, 신호수, 전투공병 등 훈련된 전문가들이 대거 사라졌다. 
혹독한 겨울날씨에 10만 명 이상의 동상환자가 발생했고, 그 중 1만 4천 명은 손가락, 발가락, 코, 귀 등을 잘라냈다. 전차병 구스타프 빈터는 '양손의 새끼 손가락을 잃었고 코끝과 발가락도 손상되었다'고 했다. 
나치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일기에 히틀러가 겨울 걱정거리로 늙어간다고 말할 정도였다. 고향에서 '러시아 전선'이라는 단어는 거의 사형선고와 동의어가 되었다. 동방에서 복무하라는 징집통지를 받은 징집병들은 친구와 친척 모두에게 사형수 취급을 받았다. 

바르바로사와 타이푼의 실패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독일군은 전쟁 중 처음으로 러시아의 광활한 땅보다 유고슬라비아의 교외를 선호하며 점령지의 안전지대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여름 작전을 구상하던 1942년 3월 할더를 위해 작성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162개 사단 중 공격작전에 투입될 수 있는 사단은 8개에 불과했고, 다른 3개는 단기간 휴식 후 작전이 가능했으며, 47개는 제한적인 공격만 가능했고 나머지는 모두 방어에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1941년에 실패한 침공에 참여했던 다른 추축군은 어땠을까? 그들은 독일군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루마니아군은 바르바로사 전투에 가장 많은 군대를 파병했지만, 흑해의 항구 도시 오데사를 점령하면서 1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전열이 무너진 상태였다. 슬로바키아는 열악한 장비를 갖춘 슬로바키아 군단을 훨씬 작은 2개 사단으로 재편하여 하나는 전선작전을, 다른 하나는 후방지역 보안임무를 맡기고 나머지 병력은 본국으로 보냈다. 헝가리의 웅장한 이름의 카르파티아 그룹Carpathian Group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행진하며 약탈을 일삼았고, 러시아군보다 훨씬 더 사이가 나쁜 루마니아군과 분리된 채 큰 손실을 입었다.

 

 

헝가리군 토디Todi 전차입니다. 

러시아근교 쿠빙카 전차박물관에서 세계에서 1대뿐인 토디를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CSIR(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 러시아주둔 이탈리아원정군) 3개 사단은 '발레리나 신발보다 더 얇은' 부츠를 신고 1차 세계대전 구형소총으로 무장하고 수류탄을 던지는 사람이 오히려 죽는 수류탄을 들고 동쪽으로 비틀거리며 진격했다. 
독일의 동맹국들은 모두 20개 사단과 13개 여단을 동부전선에 보냈고 200대가 넘는 항공기를 보냈지만, 그 대가는 엄청난 손실이었고, 국민들은 자신들의 전쟁이 아닌 독일의 전쟁이라고 한탄헸다. 

 



사실 바르바로사 침략군은 1941년에 이미 전멸했다. 병력과 모든 장비에서 복구할 수 없는 손실을 입은 상태에서 보충이 거의 없었고, 북쪽의 볼호프 전투에서 여전히 병력, 전차, 대포를 잃고 있었다. 
베를린 참모장교들은 이 수치를 암울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1942년 제국의 공식 신병은 50만 명에 불과했지만, 전선에서는 62만 5천 명이 부족했고,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군의 규모를 훨씬 더 늘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1939년 독일 군수산업은 한 달에 전차 62대를 생산하다가 1941년 말에는 182대, 1942년에는 356대로 증가했지만 계속되는 손실을 간신히 따라잡는 수준이었고 완전히 보충하려면 거의 1년치 생산량이 필요했다. 
바르바로사의 상징이었던 3각 공세를 다시 재개할 기회는 없었고, 그럴 만한 병력과 기계도 없었기 때문에 제국은 1942년 여름, 히틀러가 결정한 단 한 번의 강력한 돌격을 위해 허리를 동여맸다. 
나치 독일은 블라우작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최선을 다해 남부집단군을 무장시켰다. 가장 먼저 보병사단을 재건해야 했다. 지난 8개월여 동안의 격렬한 전투로 인해 병력이 절반 정도로 줄어든 보병사단은 완전히 훈련된 신병들을 모조리 흡수했다. 

전선에서 빠져나온 남부집단군의 재활 프로그램은 축복받은 안도감을 가져다주었고, 바바로사 작전에서 지치고 더러워진 참전용사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많은 이들이 낡은 군복을 불태우고 새 군복을 지급받았는데 이전과 달랐다. 
M41 펠트블루스feldbluse의 화려한 주름과 불필요한 부풀림은 모두 사라지고 대신 합성 및 재활용 소재를 사용하여 훨씬 더 깔끔한 M42로 대체되었다. 독일군인의 상징인 가죽부츠 마쉬슈티펠Marschstiefel, 군인들이 직접 붙인 별명인 노벨베처knobelbecher('주사위를 던지는 사람')도 바뀌었다.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드는 전체가죽의 부츠는 41cm에서 29cm로 줄어들고 전투보병에게만 지급되다가 물량이 충분하지 않아 저렴한 발목부츠와 각반이 빠르게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구식 M35 헬멧이 사라지고 가장자리가 말려 있고 페인트가 더 저렴하며 안감이 단순화된 새로운 버전의 헬멧이 등장하면서 개인장비의 개조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