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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1) - 들어가기

by uesgi2003 2012. 10. 6.

요즘 직장에서 비정규직의 설움을 뒤늦게 경험하고 있는 안사람에게 죽어지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사람이 많은 축제는 친인척 여행일지라도 저 혼자 빠질 정도로 사람에 치이는 것응 싫어하지만, 어제 안사람이 졸라대서 경복궁 야간개장을 갔습니다. 사람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더군요. 매표소 앞에 선 줄을 보면 표구입만 30분 이상 걸리겠더군요. 


결국 입구에서 멋진 수문장과 입구만 구경하다가 근처 분식집에서 떡볶이 먹고 왔습니다. 

아래 사진은 제가 찍은 것이 아니고 인터넷에 있는 적당한 것을 가져온 것입니다.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1) - 들어가기


1862년 12월, 버지니아 프레드릭스버그(Fredericksburg)에 있던 올란도 포(Poe) 장군은 운명을 향해 돌격하는 북군(Union 또는 Federal) 병사들을 넋이 나가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는 수 많은 푸른색 군복차림의 시체가 널려있는데도, 그들은 마치 행진을 하는 것처럼 깃발을 높이 날리고 총검을 반짝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포는 "병사들은 축제라도 즐기듯이 죽음을 향해 곧바로 걸어갔다. 이제까지 본 적도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희생이었다"라고 기록했다. 남군(Confederate 또는 Rebel) 사령관 로버트 리는 대학살에 질려서 참모들에게 "전쟁이 무서운 이유지. 익숙해지는게 좋아"라고 말했다. 

프레드릭스버그에서 죽은 18,000명의 병사는 4년 동안 죽은 620,000명에 비하면 대단한 숫자가 아니었다. 남북전쟁에서는 500,000명이 부상을 당했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후유증을 앓았다.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전쟁이 벌어졌지만 참전했던 병사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북부인은 연방체제를 보존하기 위해 싸웠고 대부분의 남부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주의 독립자치권을 위해 싸웠다. 북군과 남군 모두 자신들이 생각하는 미국 건국정신에 따라 싸웠다. 1891년 봄, 군대에 입대한 자원병들은 자신의 이상이 옳다고 믿었고 열정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애국심은 끓어올라서 넘치기 직전이었다. 

지원병은 연대단위로 나뉘어져 나폴레옹시대와 똑같은 근접전 전술을 따랐다. 제83 펜실바니아의 노튼은 부모에게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대열과 행군훈련입니다. 그리고 또 훈련합니다. 식사시간을 빼고는 날이 저물 때까지 대열과 행군훈련을 합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노튼 일병은 이렇게 당시에 필요한 부대원이 되어갔다. 

남북전쟁의 전술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집중화력을 강조했고 병사들은 앞 열과 30cm의 간격을 두고 양옆의 전우와 팔꿈치를 맞댄 대열을 유지했다. 밀집대형이 일제사격으로 적의 전열을 무너뜨린 후에 총검을 앞세운 백병전으로 돌입했다.  

 

지휘관의 리더십이 전투의 승패를 갈랐는데 중위에서 장군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다양한 인물들이 부대를 이끌었다. 어떤 지휘관은 탁월했고, 조심스러웠고, 신앙심이 깊었던 반면에 재능도 없고, 무모하고, 속세에 찌든 지휘관도 많았다. 

북군 여단장 프란시스 벌로우가 "보병여단을 지휘하는데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어도 된다. 숫자가 늘어날 수록 문제도 많아지기 때문에, 1개 여단 정도는 훌륭하게 지휘할 사람이 많겠지만 군단이나 사단 지휘관은 많지 않다"고 말했듯이, 전장에서 일어나는 실수는 대부분 지휘관과 참모의 자질이 원인이었이었다. 여단장의 참모는 6~8명이고 군 사령관은 24명 이상의 참모가 있었지만 10km가 넘는 전선에서 적과 전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에 이미 과부하에 걸린 참모들이 중요한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북군과 남군 모두에서 심각한 오판과 실수가 벌어졌는데 처음 2년 동안은 남군의 지휘관이 훨씬 우수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웨스트 포인트 졸업생이 북군에 합류했지만 가장 우수한 사관생도들은 남군에 합류했고 남군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자신도 웨스트 포인트 출신이었다. 남부는 확고한 군사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북부보다 지휘관 경력을 쌓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버지니아 군사학교와 남캐롤리나 군사관학교는 20명 이상의 남군 장군과 수 많은 연대급 지휘관을 배출했다. 북부에 비해 역사가 짧은 남부 도시들은 생존위험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리더십에 민감했고 뛰어난 지휘관을 우대했다. 


북군은 기존의 군사체계에 안주해서 능력보다는 선임을 우대하는 상하식 계층구조였다. 링컨 행정부는 정치배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북부 주지사들의 협력을 받아내기 위해 도저히 능력이 안되는 지휘관에게 임무를 맡기는 일도 있었다. 전쟁초기, 북군 지휘관은 상충되는 목적이 주어졌고 서로를 배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862년, 남군 토마스 "돌벽(Stonewall)" 잭슨(Jackson)은 버지니아 새넌도어(Shenandoah) 계곡 전투에서 4:1의 병력열세에도 불구하고 4개로 갈라진 북부 부대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림 설명: 두 번째 불런 전투 또는 두 번째 머내서스라고 불리는 전투에서 압도적인 북군의 공격을 맞아 분전 중인 텍사스 남군입니다. 

남북전쟁을 재현한 상당한 수준의 그림이 많은데, 현대작품이고 돈 트로이아니(Don Troiani)의 그림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림 실력뿐만 아니라 고증도 철저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IE에서 보셔야 그림과 설명이 제대로 연결됩니다. 


북군의 패배가 계속되자, 링컨은 전쟁을 이겨줄 지휘관을 찾는데 전력을 다하게 되었고, 북부의 압도적인 산업, 운송, 인구 수를 활용하는 전략에 의존하게 되었다. 포토맥(Potomac) 군의 경우가 가장 좋은 예였다.  


그림 설명: 남북 양쪽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돌벽' 잭슨 장군은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북군을 무너뜨리고 최전선에서 복귀하던 중에 아군의 오인사격을 받아 결국 숨지게 됩니다. 이 그림에서는 전투 중에 숨지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부대로 복귀하다가 한적한 곳에서 아군에게 오인사격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무기와 병력이 모자랐던 남군은 뛰어난 지휘관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잭슨 장군의 사망은 너무나도 큰 손실이었습니다. 


1861년 7월 21일, 불 런 (Bull Run)에서 북군이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는 와중에 구성된 포토맥군은 맥클렐란(McClellan) 장군의 훈련과 규율에 따라 충분한 전투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맥클란 장군은 조심스러운 기동을 했던 반면에 남군의 리 장군은 패배를 각오한 과감한 작전을 펼쳤고, 맥클란은 남부의 수도인 리치몬드 부근에서 밀려났고, 리는 숫적으로 우월한 적을 앞에 두고 일부러 병력을 둘로 나누어 신속하게 우회해 두 번째 머내서스(Second Manassas) 전투와 챈슬러스빌(Chancellorsville) 전투에서 북군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리 장군은 두 번이나 북군 영토 안으로 침투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한데다가 앤티에탐(Antietam)과 게티스버그(Gettysburg)에서의 병력 손실을 메울 수 없었다. 남군 병사들의 투지와 지휘관의 재능만으로는 북군의 압도적인 전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리가 버지니아에서 북군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겨주는 동안, 남군의 가장 중요한 테네시 군을 브랙스톤 브래그(Braxton Bragg) 장군이 지휘했다는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림 설명: 전사 상으로도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로버트 리 장군입니다. 

정중한 태도와 진실된 인간성으로 일선 병사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보기 드문 지휘관이었습니다. 


브래그는 훌륭한 장군이었고 1862년 샤일로(Shiloh) 전투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는 변덕스럽고 화를 잘 내는 성격으로 부하들을 잘 다루지 못했다. 부하 장교들이 '그는 부하들의 사기를 죽이는데 일가견이 있다'며 공공연하게 불만을 터뜨렸다. '테네시 군 전체에서 그를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병사는 단 한 명도 없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1863년 10월, 브래그는 치카마구아(Chickamagua)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윌리엄 로즈크랜스(Rosecrans) 장군의 북군을 추격하지 못했고 11월에는 반대로 채터누가(Chattanooga)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해 지휘관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북군은 공교롭게도 최고의 지휘관 중 하나인 율리시스 그랜트(Grant) 장군이 지휘권을 잡게 되었다. 그랜트는 당시 북군 지휘관에게서는 보기 드물게 공격적이었고 테네시 강을 장악한 후에 1863년 7월 4일, 남군의 빅스버그 요새를 함락시키면서 최고의 지휘관임을 증명했다. 


1864년 초반이 되자, 남군은 170,000평방km의 영토를 잃었는데 무엇보다도 운송에 중요한 강과 교통 요충지를 내주면서 북군의 경제봉쇄로 서서히 무너져갔다(남부는 자세 산업시설이 부족해서 외국과의 교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랜트는 북군 총사령관 자리에 오른 후에 가장 신뢰하는 윌리엄 셔먼(Sherman) 장군에게 남군 수도를 향해 세 방향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셔먼은 끈질기게 버티던 남군의 조세프 존스톤(Jonston)과 존 벨 후드(Hood) 장군의 저항을 무너뜨리고 남부 최대의 교통 중심지 아틀란타를 함락시킨 후에 사반나(Savannah)와 해안을 향해 승리의 행진을 계속한다. 아틀란타를 내준 남군은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1864년 봄에 그랜트 장군이 직접 나서 버지니어 전투를 지휘하면서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수세에 몰린 리 장군의 군대는 요새화된 참호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북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북군 장교들은 너무 많은 부하들의 죽음에 좌절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랜트는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남군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모전을 계속 고집하기로 했다.

리 장군은 결국 1864년 여름에 남부 수도인 리치몬드(Richmond)와 피터스버그(Petersburg) 방어선까지 밀려났고 애퍼머택스(Appomattox)에서 항복하게 된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전쟁이 이렇게나 참혹할 수가 있습니까'라는 조지아 병사의 일기에서와 같이, 한 번의 유명한 전투에서 남북 양쪽에서 최소한 2~30,000명의 병사들이 들판에 시체로 남겨졌지만 신문에는 무미건조한 숫자와 활자로 인쇄되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기록된 모든 역사 서적에도 이런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남북전쟁은 인류사를 바꾼 노예제도 폐지로 시작되었고, 참전한 모든 병사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건국사상과 이상을 위해 싸웠다.


북군의 조슈아 로렌스 챔벌레인(Chamberlain) 장군의 회고를 기억하도록 하자. 


"병사들의 이름과 맹세가 기록된 병적부는 죽음의 문턱에서나 되물릴 수 있는 명예가 걸린 약속이었다.  그리고 병적부에 올라가 명예를 지킨 병사들은 영웅대접을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