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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중남미

패전으로 정복한 멕시코, 꼬르떼스의 멕시코 원정

by uesgi2003 2011. 1. 13.

 

 

(우에스기 왈: 제 잡설부터 먼저 나와서 죄송! 세계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영역이라 배경 설명을 먼저 해드리면 이해가 쉬울 듯 합니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은 엘도라도-El Dorado, 금으로 된 도시-라는 전설의 도시를 찾는 탐험가 꽁끼스따도르-Conquistador-를 지원해 중남미의 엄청난 금과 은을 발견하고 세계 최강대국이 됩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과 일본 항로를 개척해서 일본에 조총을 전해주는 바람에 임진왜란까지도 이어집니다.

중남미를 누비던 탐험가들은 미국까지 올라갔다가 금을 발견하지 못하자 탐험을 포기하고 다시 내려오는데, 그래서 미국 중남부의 지명이 모두 스페인어-예를 들어 로스앤젤레스는 로스 앙헬레스-인 이유입니다. 이들이 찾아낸 금과 은을 본국으로 수송하는데, 그걸 영국해적들이 중간에서 가로채고 여기에 재미를 느낀 영국왕실이 공식해적을 운용하면서 스페인과 영국 해전이 발발합니다.

영국과 전쟁을 벌인 프랑스, 독일 모두 그랬듯이 스페인 육군은 여전히 불패의 신화였지만, 해군은 무적함대-스페인이 원조-라는 명성과 달리 미숙하고 자만에 빠진 작전으로 패전을 해서 영국이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림 설명: 스페인과 포루투칼의 중남미 원정. 클릭하면 커집니다.

 

역사에서 What if라는 단어는 금기이지만, 그래도 해군이 무리한 작전을 펼치지 않고 영국을 이겼다면, 꽁끼스따도르가 사기꾼이 아니라 기업가 정신을 갖춘 탐험가여서 미국을 개척했다면 우리는 아마도 외국어로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을 것입니다.)

 

1519년 전멸직전이었던 탐험가가 아쓰떽(Aztec) 제국을 정복한다. 공교롭게도 아쓰떽의 라이벌이었던 뜨락스깔테깐(Tlaxcaltecan)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519 8월 말, 유까딴(Yucatan)에 상륙한 후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둔 에르만 꼬르떼스(herman Cortes)는 확신에 넘쳐 뜨락스깔라(Tlaxcala)로 기세 좋게 전진한다. 그는 마야족을 무찔렀고 그의 기병대와 포대는 걸프(Gulf) 해안을 따라 아쓰떽인들을 몰고 다녔으며 쎔뽀알라(Cempoala, 아즈떽 지배 하의 또또낙 도시) 도시와 동맹을 맺었고 다른 또또낙(Totonac) 요새를 무너뜨렸었다.

기세 등등해진 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다. 후원자인 디에고 벨라쓰께쓰(Diego Velazquez, 꾸바 총독)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기로 한 그는 베라 끄루쓰(Vera Cruz)를 건설한 후에 시의회를 지명해서 자신의 내륙원정을 허락하게 만들었다. 그는 배를 급히 모았고 꾸바로 돌아가려는 병사들을 처벌해서 탈영을 막았다. 원정에 도움이 안되는 병약자들과 롬바르드 대포 6문만 베라 끄루쓰에 남긴 채, 그는 내륙으로 향한다.

 

그림 설명: 스페인의 꽁끼스따도르. 그저 황금만 찾아나선 약탈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꼬르떼스는 약 300명의 스페인 병사, 50명의 또또낙 전사와 17마리의 말을 이끌고 떼노찌띠뜰란(Tenochititlan, 현재의 멕시코 시티)의 아쓰떽 수도를 향해 전진한다. 그 당시 멕시코(원 발음은 메히꼬이지만 너무 어색해서 이것만큼은 멕시코로 표시)는 마차나 노새와 같은 동물이 없었기 때문에 200명의 포터가 장비와 물품을 짊어지고 날랐다.

그들은 경로에 있는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고 보충하면서 2주 만에 뜨락쓰깔라 근처에 도달한다. 꼬르떼스는 이 도시가 아쓰떽과 분쟁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환영을 할지 아니면 숨어버릴 것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수의 인디오(Indian)를 발견하고 기병을 보내 그들을 잡으려고 하면서 그들의 대답을 알게 된다.

너무나도 놀랍게도, 그들은 맞서서 싸워 두 명을 부상 입히고 몇 마리의 말을 죽인 후에 달아났던 것이다. 꼬르떼스는 그들이 감히 저항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동안 그가 상대했던 원주민들, 다시 말해 마야족은 정규군이 아니라 몇몇 지휘관에 의해 소집된 농부였으며 아쓰떽인은 왕명에 따라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며, 또또낙 동맹군은 전쟁을 항상 기피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잘 훈련된 정규군과의 짧은 접전에서 그의 판단착오가 그대로 드러났다. 뜨락쓰깔라인과의 최초의 접전은 이후에 있을 패배를 암시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공격에서 기병공격이 먹혀 들지 않자, , , 석궁, 화승총, 창기병과 경포(falconet, 80~200kg의 소구경포) 등 멕시코에서는 처음 보는 모든 무기를 앞세워 공격한다. 스페인 군의 강철무기는 적의 목재와 석재 무기에 비해 월등한 화력과 성능을 자랑하는 것이다. 뜨락쓰깔라 병사는 후퇴하는 척하면서 스페인 군을 끌어들인다. 스페인군이 추격하자 약 3,000명의 뜨락쓰깔라 전사들이 기습공격을 해왔다.

스페인군이 61의 압도적인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꼬르떼스는 자신의 군대를 믿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 후에 전사자 비율이 251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생존자들의 이런 주장은 스페인왕가에게서 지원금을 타내기 위해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 251로 적을 죽였다면 꼬르떼스는 승리했을 것이고 스페인 군의 무기는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강철로 된 무기가 날이 오래 견디고 찌르고 베어 넘기는데 모두 유용했지만 인디오의 목재 무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목재에 흑요석이 박힌 큰 칼은 오히려 강철보다 날카로웠고 말의 목을 단 한 번에 베어낼 정도였다고 한다. 더구나 흑요석 날은 쉽게 부서지더라도 바로 교체할 수가 있었다.

 

그림 설명: 당시 유럽최강의 스페인 육군. 말을 처음본 중남미 원주민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뜨락쓰깔라 전사는 잘 훈련되고 규율 잡힌 군대였다. 처음 보는 무기와 맞붙은 전투에서 그들은 스페인 군을 바로 수세에 몰아넣었다. 날이 저물면서 끝난 전투에서, 17명의 뜨락쓰깔라 병사가 죽었고, 스페인 군은 5명이 중상을 입고 두 마리의 말이 죽었다. 다행히도 흑요석 날이 스페인 군의 갑옷을 꿰뚫지 못했기 때문에 부상자가 매우 적었다. 부상자들도 갑옷이 보호하지 못하는 얼굴, 목과 같이 열려있는 곳에만 부상을 입었다.

 

 

꼬르떼스는 병력을 재정비했지만 이제 겨우 13마리의 말밖에 없었기에 기병대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우에스기 왈: 그 당시 중남미에는 말이 없어서 기병이라는 존재자체가 없었다. 그러니 말을 타고 나타난 스페인 병사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웠겠는가? 그런데도 기병에 맞서 싸운 뜨락쓰깔라 인들은 전사였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제 사격무기가 가장 유용한 무기가 되었다. 사격무기는 뜨락쓰깔라인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뜰아뜰(atlatl. 그림참조)이라는 투척화살(dart) 45미터 이상 던질 수 있어서 근접전에서는 위력을 발휘했고 활은 100미터 이상을 쏠 수 있었다. 다만 서로의 거리가 워낙 멀었고 지형이 험해서 정확도가 크게 떨어졌던 것뿐이다.

 

스페인 군의 장갑은 장거리 전투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근접전에서는 아뜰아뜰을 제대로 막아주지 못했다. 화살로 장갑을 관통하지는 못해도 돌로 된 화살촉이 얼굴 근처의 갑옷에 맞아 부서지면서 큰 상처를 줄 수 있었다.

 

반면 스페인의 석궁은 45~100g의 화살을 유효사거리 70미터 정도까지 발사할 수 있었다. 화승총도 그 정도의 거리까지 발사할 수 있었고 경포는 거의 150미터 이상 떨어진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5~7센치 두께로 누빈 면으로 된 뜨락쓰깔라 갑옷도 어느 정도는 보호효과가 있었다. 가벼운 반면에 둔기나 칼의 충격을 잘 흡수해서 나중에 스페인 군도 선호하게 된다. 그렇지만 면 갑옷은 근접전에서의 사격무기에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그림 설명: 스페인군의 무장. 중남미에서 밀려들어오는 막대한 금은보화로 유럽최강의 무장을 갖출 수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뜨락쓰깔라 전사의 저항을 만난 꼬르떼스는 후퇴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그건 이미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벨라쓰께스에게 항명했기 때문에 그대로 돌아가면 처형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대로 물러나면 또또낙과의 동맹도 무너지고 아쓰떽의 보복도 예상되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꼬르떼스는 일단 그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이튿날 더 많은 수의 뜨락쓰깔라 전사들이 나타나 스페인 군은 계속 방어만 한다. 그 지역의 전투는 60미터 거리에서 화살과 돌팔매질로 시작해서 점차 거리를 좁혀가며 아뜰아뜰을 쏴대는 것이 보통이었다. 서로 근접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창으로 찌르고 흑요석 칼을 휘두르는 백병전으로 변한다.

 

그림 설명: 건물 안에 몰린 스페인군. 멕시코 원주민의 그림이다. 클릭하면 많이 커집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스페인 군이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뜨락쓰깔라 전사들이 보통 때보다 훨씬 먼 거리를 다가가야만 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동안, 스페인 병사들은 사격을 퍼부어 대열을 흩뜨려놓거나 후퇴하게 만들었다.

후퇴하는 적을 보고 들뜬 스페인 군이 추격에 나서지만 결국에는 사방에 숨어있는 뜨락쓰깔라 전사들을 만나게 된다. 다시 한 번 위기에 몰린 꼬르떼스는 간신히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주변에 있던 건물에서 방어선을 친다. 이번에도 1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귀중한 말이 5마리나 죽었다.

부상병의 숫자가 전사자보다 훨씬 많았는데 어디를 다쳤는지에 따라 운명이 달라졌다. 팔다리 또는 근육의 부상은 양쪽 모두 뼈를 맞추고 봉합수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장기의 부상은 전혀 손 쓸 수 없었다. 장기를 다치거나 감염된 부상자는 사실 전사자나 마찬가지였다. 이 때의 전투는 주로 사격무기로 인해 관통상을 입었기 때문에 부상자들의 운명은 관통상을 입는 순간에 결정되어 있었다.

 

 

그림 설명: 뜨락스깔라 전사들. 클릭하면 커집니다.

2일간의 전투에서 뜨락쓰깔라가 방어선을 무너뜨리지도, 스페인 군이 공세로 나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전투는 교착상태였지만 병력을 보충할 수 있는 뜨락쓰깔라가 훨씬 유리한 상태였고 꼬르떼스는 위기 그대로였다. 2일 동안, 스페인 군은 2명이 죽고, 2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으며 최소한 6마리의 말을 잃었다. 보충병력도 없으며 물품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다음 날 다시 뜨락쓰깔라가 전면공격을 해왔고, 꼬르떼스는 그들을 막아내는데 모든 화력을 집중시켰다. 절반씩 나누어 재장전하고 발사하면서 적의 사거리 밖에서 공격을 했다. 다시 한 번 위기를 벗어났지만 이번에도 1명이 죽고 60명이 부상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 말이 모두 다치는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 군의 전력도 조금씩 사라졌지만 사거리를 좁히지 못한 뜨락쓰깔라 전사들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다음 공격에서는 스페인 군의 우월한 사거리를 좁히는 계책을 마련한다.

 

멕시코에서는 야간전투가 매우 드물었는데 특히 야습은 거의 없었다. 북과 나팔소리로 새벽에 시작되는 전투는 정오에 절정에 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투 중에는 구두 명령이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에 기를 사용한다. 지휘관 등에 달린 깃발을 들어서 해당 부대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밤에는 깃발신호를 볼 수 없고 구두 명령도 기습효과를 날려보내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

 

스페인 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앞둔 뜨락쓰깔라 전사들은 좀처럼 하지 않던 전투를 벌이기로 한다. 어둠 속에서는 기동성이나 지휘가 어렵겠지만, 스페인 군의 화력도 정확성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불리하기는 서로가 마찬가지다.

스페인 군의 석궁, 화승총과 경포의 발사속도는 뜨락쓰깔라의 투척무기에 비해 느렸다. 화승총을 발사하려면 장전, 조준, 발사까지 1 30초 정도가 걸렸고 석궁은 1분 정도 걸렸다. 경포는 후장식이어서 30초 만에 발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느린 속도로 계속 발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페인 군의 사격무기는 매우 무거워서 석궁은 7kg, 화승총은 1~3kg 정도의 무게로 30분만 발사하면 그 다음부터는 제대로 들기도 힘들었다.

 

 

그림 설명: 당시 중남미 전사들의 흑요석 검. 영화 아포칼립스의 한 장면으로 클릭하면 커집니다.

 

반면에 뜨락쓰깔라의 투척무기는 어두워도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의 무기는 가볍고 사용하기 간편하며 스페인 군은 방어진지 뒤에 그대로 서있기 때문에 정확히 조준할 필요없이 그 부근을 향해 던지면 그만이었다. 만약 제대로 접근할 수만 있다면 뜨락쓰깔라 전사들이 훨씬 더 빠르게 원거리 공격을 펼칠 수 있었다.

아뜰아뜰이 단거리 투척무기이지만 분당 6발이나 발사할 수 있었다. 궁병이 밀집해서 발사할 수만 있다면 집중된 사격이 돌새총(sling)보다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새총은 스페인 군의 갑옷을 직접 타격하기 때문에 일단 맞으면 효과가 더 좋았다.

 

뜨락쓰깔라 전사들은 사방에서 야습을 감행했다. 궁수, 새총사수와 아뜰아뜰 사수는 멈춰 서서 세 방향에서 스페인 군에게 공격을 하는 동시에, 보병들이 다른 한 방향에서 쳐들어갔다. 다행히도 어두웠기 때문에 스페인 기병이 보병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공격을 할 수 있어서 기병이 반격한 쪽의 공격은 무산되었다.

야간전투에서 꼬르떼스의 300여 병사 중에서 50명이 죽고 거의 모두가 부상을 당하거나 병에 걸렸다. 이제 음식도 심각한 수준이었지만 그보다 어디에서도 보급받을 수 없었던 탄약이 문제였다. 32개의 석궁, 15개의 화승총 그리고 4문의 경포가 한 시간 동안 계속 발사하면 약 20~30kg의 탄약을 사용했다. 꼬르떼스가 보유한 탄약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200명의 포터가 탄약만 날랐을 리 없고 식량도 날라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충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까딴 해안을 떠났을 때에, 또또낙 전사와 포터까지 550명이었으며 한 명이 하루 900g의 식량을 소비했다고 계산하면 절반이상의 포터가 식량을 날랐을 것이다. 나머지 100명의 포터가 화살, 총알과 화약(4문의 경포는 병사가 직접 날랐다고 가정하고)을 날랐다면 연속적인 전투에서 겨우 7~12시간만 발사할 수 있는 탄약이 된다.

 

꼬르떼스는 절망적인 처지였다. 그는 음식을 조달하기 위해 근처 마을로 수색대를 계속 보냈지만 약간의 식량만 약탈할 수 있었다. 이제 많은 병사들이 노골적으로 항명하며 해안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공공연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어떤 방법을 써도 뜨락쓰깔라를 이길 수 없었으며 그보다 훨씬 강력한 아쓰떽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전멸의 위기에 올렸던 전투로부터 2년도 지나지 않아서, 꼬르떼스는 떼노찌티틀란의 폐허에 우뚝 서서 아쓰떽의 항복을 받아 들이게 된다. 어떻게 해서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해답은 바로 뜨락쓰깔라에게 있었다. 그들이 전투를 계속 감행해서 스페인 군을 전멸시켰다면, 꼬르떼스는 그냥 황금을 찾아 떠났던 탐험가로만 남았겠지만, 내부의 분쟁 때문에 스페인 군을 그대로 두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1519년 당시에는 아쓰떽이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1428년 건국이래 그들은 중앙 멕시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국으로 성장했다. 몇몇 도시는 그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나머지는 아쓰떽 동맹국의 무력에 정복되었다. 제국은 잘 훈련된 수만 명의 병사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매우 먼 거리까지 원정을 보냈다.

그렇지만 아직도 독립을 유지하거나 적대적인 도시들이 남아있었는데, 뜨락쓰깔라 연맹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런 애매한 정치구도가 가능했던 것은 아쓰떽이 많은 도시들을 정복했지만 그들을 모두 직접 통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군대를 주둔시켜 직접 통치하는 대신에 기존의 통치세력을 그대로 두고 아쓰떽의 요구대로 움직이게 했던 것이다. 이들은 공물을 바치기는 했지만 제국에 흡수되지는 않는 독립성을 유지했다. 너무 방대한 영토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림 설명: 아쓰떽 전사들. 재규어 전사, 독수리 전사 등으로 화려한 복장을 갖춘 특징이 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아쓰떽은 공물을 받기 위해 정복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권한은 매우 컸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이 왕을 선출하기 때문에, 그들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복지에서의 많은 공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계속 정복을 해나갔던 것이다.

멕시코 지역의 도시국가는 비교적 정복하기 쉬웠다. 도시는 보통 10km 반경을 넘지 않는 크기여서 아쓰떽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너무 작았던 반면에, 부족연맹이나 제국은 훨씬 대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영토가 매우 넓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쓰떽의 공격을 어느 정도는 흡수할 수 있었다.

 

열악한 도로와 행군체계 때문에 8,000 단위(Xiquipilli, 씨뀌삘리)의 아쓰떽 군대는 보통 하루 20km 정도로 산업혁명 이전의 군대와 비슷한 속도로 행군할 수 있었다. 체계가 가장 잘 잡힌 부대는 두 명의 병사에 한 명의 포터가 붙어 8일 정도의 식량을 보유했다. 보유한 8일의 식량을 감안하면, 아쓰떽 군대는 3일 내에 적이 있는 곳까지 행군해서 도시를 하루 안에 정복하고 하루 동안 정리와 휴식을 취한 후에 3일 안에 돌아와야만 했다. 거리로 따지면 겨우 60km 정도의 반경 내에서만 작전을 펼쳤다. 다수의 씨뀌삘리가 동시에 진군할 수 있지만 같은 경로로는 하루에 한 씨뀌삘리만 행군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병력이 합류하려면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고 그만큼 식량이 줄어들었다.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는 도시가 경로에 있는 경우에만 작전반경을 넓힐 수 있었다.

 

 

아쓰떽의 행군전략은 부족연맹이나 제국을 상대로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경에서 마주친 군대를 참패시킨다고 해도 그 지역의 주변에 국한된 일이다. 패배한 군대도 내륙으로 후퇴하면 아쓰떽은 그들을 추격할 병참조직이 없었다.

부족연맹이나 제국을 정복하려면 몇 년에 걸친 치밀한 사전준비가 필요했고 부담도 그만큼 컸다. 장거리 원정을 펼쳐도 바로 손에 들어오는 수확이 적었다. 그래서 그들은 공물을 기꺼이 지불할 보다 손쉬운 도시국가를 선택했다. 그리고 원정에서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복종도시가 반란을 꿈꿀 수도 있었다.

아쓰떽은 부족연맹이나 제국과의 장기간 원정에 군대를 투입하기 보다, 약간의 병력만으로 주변을 계속 위협하면서 복종하게 만드는 방법을 선호했다. 잘 조직된 도시연합을 복종시키려면 포위한 상태에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쓰떽은 목표지역을 동맹군에게서 분리시킨 후에 국경부터 조금씩 갉아먹어 들어가 무너뜨렸다.

 

그림 설명: 마야 전사들. 이번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지만 그냥 찬조출연 중. 클릭하면 커집니다.

 

뜨락쓰깔라는 지난 60년 동안 아쓰떽 제국과 전쟁을 벌여오고 있었으며, 우엑쏘뜨씽꼬(Huexozinco)와 아뜨릭쓰꼬(Atlixco)를 지원하면서 전쟁이 이제는 아쓰떽의 가장 큰 목표가 된 상태였다. 주변의 중요한 연합도시 중 하나가 정복되자 다른 도시들이 아쓰떽에게 투항하기 시작했다. 우엑쏘뜨씽꼬와의 동맹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은 1512년에 아쓰떽에게 가담했다가 1517년에 다시 이쪽으로 넘어왔던 것이다. 아직 독립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뜨락쓰깔라는 완전히 포위된 채로 주변도시들이 하나씩 정복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대부분의 멕시코 도시와 제국은 모든 권력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한 명의 군주에게 집중되었다. 뜨락쓰깔라는 반대로 4명의 왕이 다스리는 4개의 지역으로 된 연합이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일률적이기 보다 분열되는 경우가 많았다. 상황이 급변하면 그만큼 화합도 깨지기 쉬웠다.

4명의 왕 중에서 씨꼬뗀까뜰(Xicontencatl) 족장과 마씨쓰까뜰(Maxixcatl)이 가장 강력했고, 꼬르떼스와 전투를 벌이고 있던 씨꼬뗀까뜰이 힘을 얻고 있었지만 그가 스페인 군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그만큼 마씨쓰까뜰이 유리해지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몇 차례의 전투에서 피해가 누적되자 마씨쓰까뜰을 지지하는 귀족이 늘어나면서 뜨락쓰깔라 의회는 휴전결정을 내린다. 계속 전투를 벌이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씨꼬뗀까뜰의 아들은 결정을 무시하고 전투를 계속 하려고 하지만 마씨쓰까뜰이 지원군을 철수시키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군대도 철수시키게 된다.

내부의 권력투쟁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쓰떽이 본격적인 압박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투를 벌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뜨락쓰깔라는 아쓰떽의 전면적인 침공에 20년도 못 버텼을 테고, 꼬르떼스를 죽인다고 해도 그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해, 스페인의 우수한 리더십, 전략전술과 무기 덕분에 멕시코를 정복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뜨락쓰깔라인들이 아쓰떽 제국을 상대로 스페인의 무기를 사용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멕시코를 정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전통적인 전투에서는 밀집대열을 유지해서 옆이나 뒤를 신경쓰지 않고 눈앞의 적만 상대하는 것이 중요했다. 훨씬 많은 병력을 한 곳에 투입하거나 우회해서 적의 밀집대열을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적도 같은 무기와 전술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적보다 전선을 훨씬 넓게 펼칠 수 있는 쪽이 승리하기 마련이었고 소수의 부대로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스페인 군과의 전투에서 뜨락쓰깔라인들은 경포와 화승총이 밀집대열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무너뜨리는 지를 경험했다. 자신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음에도 스페인 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서 대열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소수이지만 막강한 스페인 군의 화력을 자신들의 병력과 결합한다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뜨락쓰깔라인들은 꼬르떼스와 동맹을 맺고는, 살아남은 250명의 스페인군의 화력으로 적의 전열에 구멍을 대열을 무너뜨린 후에 전사들이 돌진해서 취약한 측면으로 파고 들어 승리를 거뒀다. 꼬르떼스도 이런 전술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겠지만, 또또낙은 전쟁자체를 싫어하는 별 도움이 안되는 동맹군이었고 뜨락스깔라와 같은 전투적인 동맹군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뜨락스깔라와의 동맹의 초대를 받아들이게 된다.

 

멕시코 정복전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스페인에서 더 많은 병력이 도착해서 나중에는 거의 8배의 병력이 되었지만 한 번도 원주민의 병력을 압도한 적이 없다. 스페인 군은 아쓰떽을 상대로 한 병력 중 1%도 되지 못했다. 스페인 군의 정복은 모두 뜨락쓰깔라 전사들 덕분이었다.

마지막 전투에서도 아쓰떽은 뜨락쓰깔라 군의 대열로 돌진하는데 뜨락쓰깔라는 미리 변장시킨 스페인 군을 중간에 숨겨두었다가 돌격해오는 아쓰떽 병사들에게 화력을 집중시켜 승리를 거둔다. 이런 전략은 끝까지 효과를 발휘해서 결국 떼노찌티뜰란은 1521 8 13일에 함락되고 만다.

 

Military History Ross Hassig의 기사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다음에는 화려한 중남미 원주민 전사들의 모습과 꼬르떼스의 아쓰떽 전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