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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중남미

패전으로 정복한 멕시코, 코르테스의 멕시코 원정 - 아스텍 (2부)

by uesgi2003 2014. 5. 12.


오늘 MBC 기자 121명이 MBC의 보도행태에 대해 반성문을 발표했는데, 온라인에서의 반응이 아주 싸늘합니다. 그 동안의 MBC 행태에 실망한 사람들은, 기자직을 걸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범위 내에서 반성하고 행동하지 않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의문 등을 외부로 공개할 때에는 진심과 행동이 담겨있어야 문장의 무게가 느껴질 겁니다.  


패전으로 정복한 멕시코, 코르테스의 멕시코 원정 - 아스텍 (2부)


테노치티틀란이 염려스러워 서둘러 돌아온 코르테스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알바라도는 지휘관 자질은 충분했지만 외교나 전략은 너무 부족한 사람이었다. 틀락스칼란군은 멕시카의 전쟁신 축제일이 공격할 최고의 기회라고 설득했고, 알바라도는 코르테스의 당부를 무시하고 신전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비무장상태의 군지휘관과 귀족 3,000명을 학살했다. 



테노치티틀란 시민은 바로 무기를 들고 궁전으로 몰려갔다. 코르테스는 바로 이 때에 수도로 돌아왔다. 

120명의 스페인 병사와 6,000명 틀락스칼란군이 1519년 가을부터 고립되어 식량이 떨어가던 참에 , 코르테스가 1,300명의 스페인군과 2,000명의 틀락스칼란군을 데리고 왔다. 몬테수마는 측근 중 한 명을 석방하면 휴전을 교섭하겠다고 제안했다. 몬테수마는 동생을 골랐고 코르테스는 아무런 의심없이 그를 석방했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을 알바라도에게 맡긴 실수에 이어 결정적인 실수를 다시 저질렀다. 


아스텍 국민은 이미 결전을 다짐하고 있었고 몬테수마의 동생 쿠이틀라후악이 합류하면서 혼란스러웠던 지휘체계까지 정리되었다. 아스텍인뿐만 아니라 쿠이틀라후악도 형의 안전과 상관없이 협상할 생각이 없었다. 

쿠이틀라후악은 굶주리고 있는 적을 전멸시킬 계획을 세웠고 무수한 아스텍과 동맹군이 차례로 침략군의 거점을 공격하거나 반격을 막아냈다. 수 천 명의 궁수와 투석병이 근처 지붕에 올라가 화살, 투창과 돌을 퍼부어대서 스페인군의 거점은 고슴도치 모양이 되었다. 이들은 적에게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밤이 되면 전투에서 죽은 가족을 찾는 여성의 불빛과 흐느낌때문에 스페인군은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밤에도 지치지 않은 아스텍군은 "신께서 너희를 몰아넣어주셨다. 후이트실로포치틀리(전쟁의 신)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하신다. 죽은 자들의 돌과 칼이 너희를 향한다. 야수는 너희의 시체조각을 노리고 울부짖는다"라며 승리를 확신했다. 




스페인 병사,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는 아스텍군의 집념을 이렇게 기록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대포도, 머스킷총도, 석궁도 소용이 없었다. 백병전에서 돌격해서 3~40명을 죽여도 여전히 물러서지 않고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것처럼 더 힘을 냈다. 우리가 조금 밀어내면 후퇴하는 척하면서 우리를 끌어들인 후에 배후를 끊고 달려들었다. 우리가 거점으로 돌아가려고 물러날 때에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집에 불을 지르려고 했는데 도개교를 들어올려서 깊은 물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지붕에서 자갈과 큰 돌을 마구 던져서 부상을 입혔다... 우리 중에는 이탈리아에서 참전했던 병사가 3~4명 있었는데 그들도 이런 전투는 처음이라고 했다. 프랑스왕의 대포도 오스만의 대포도 이렇게 무섭지 않았고 어떤 인디안도 이렇게 달려들지 않았다."



당연히 더 많은 수의 아스텍 병사가 죽어갔지만, 교전을 벌일 때마다 침략군도 조금식 죽거나 다쳐갔다. 특히 전력이 동등한 틀락스칼란 병사의 피해는 극심했다. 아스텍과 동맹군은 전사자의 자리를 바로 채웠지만 그들의 무기는 스페인의 것에 비해 4,000년 이상 뒤진 것이었다. 

아스텍병사는 흑요석을 끼운 목검이나 곤봉을 휘두르는 반면에 스페인 병사는 날카로운 칼날을 틈새에 찔러넣는 검술로 훨씬 유리했다. 큰 힘들이지 않고 방패 틈 사이로 몇 센티만 칼날을 밀어넣으면 적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군은 유럽에서도 위력을 떨친 테르시오Tercio(로마군단과 비슷한 보병밀집대형)를 구사했고 화기가 없는 아스텍군에게는 움직이는 요새와도 같았다. 




프랑스나 스웨덴을 상대하는 스페인의 테르시오 대형입니다. 중장갑과 화기로 무장한 스페인군이 이런 대형을 유지하면, 원시적인 무기와 빈약한 천갑옷을 두른 아스텍군은 큰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페인군은 검술말고도 대포, 화승총과 석궁의 위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아스텍의 아틀아틀Atlatl 투창과 화살은 스페인 병사의 금속갑옷이나 퀼트 면갑옷을 뚫을 수 없었다. 아스텍군의 개인병기는 기껏해야 부상을 입히는 정도였다. 스페인군은 투석Sling병을 가장 두려워했는데, 그들이 쏜 돌은 머리를 깨트리거나 팔을 부러트리기 충분한 위력이었다. 


이슬람 세력에게서 이베리아 반도를 되찾던 레콩키스타도르를 거치면서 스페인은 유럽에게 가장 효과적인 전술을 습득하게 되었고 스페인군은 종교적 사명감으로 정복하려는 열의가 매우 높았다. 코르테스는 더구나 기병을 가지고 있었다. 아스텍인은 말을 본 적이 없었고 더구나 창으로 찌르고 밟는 기마병에게만큼은 두려움을 느꼈다. 



스페인군은 모든 면에서 아스텍군을 압도했지만, 쿠이틀라후악은 전략을 제대로 세우고 있었다. 시간과 숫자는 아스텍 편이었다. 초조해진 코르테스는 몬테수마를 거점의 지붕 위로 올려보내 공격을 중단시키게 했다. 병사들이 몰려들었고 4명의 아스텍 지휘관이 아래로 다가오더니 자신들은 이미 쿠이틀라후악을 황제로 모셨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몬테수마에게 돌과 투창을 던지기 시작했고 머리에 돌을 맞은 그는 아래로 실려 내려왔지만 며칠 후에 죽었다. 



그 날, 쿠이틀라후악은 여러 명의 지휘관을 코르테스에게 보내 만약 스페인군이 떠난다면 공격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코르테스는 거점을 떠나 수로에서 공격을 받으면 전멸할 수도 있다고 의심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코르테스는 아스텍군이 진심으로 휴전을 제안하도록 결정적인 반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화승총, 석궁과 대포로 무장한 4개의 나무탑을 세우고 500명의 스페인군과 3,000명의 틀락스칼란군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다. 도시 밖으로 연결된 도개교를 통제하는 건물이 목표였다. 

반격이 시작되자 마자 엄청난 수의 아스텍군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침략군을 포위했고 지붕 위에서 큰 돌을 던져 나무탑을 부쉈다. 스페인군은 다행히 거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주변의 높은 건물에서는 쉴새없이 투창이나 화살이 날아와 틀락스칼란 병사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