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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9부)

by uesgi2003 2012. 11. 25.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던 50명의 지도자가 이제 후반부에 들어섰습니다. 다행히 한글 위키자료가 있는 경우에는 편집해서 인용할 수 있어서 시간이 얼마 안 걸렸습니다만 한글 자료가 전혀 없는 경우에는 영문자료를 찾아야 하는데 의외로 재미없는 작업입니다. 

역사를 좋아해서 블로그까지 만든 사람인데, 제가 자료가 많다고 싫어할 리는 없고... 자료가 있기는 한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개인사가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는 경우에는 시간 낭비로 느껴지고 복잡하고 방대한 주변 역사가 얽혀 있는 경우에는 기가 질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인도 역사는 워낙 복잡한데다가 제 지식도 모자라니 어느 자료를 어디에서 줄일 것인지 판단이 안섭니다.

 

이번 9부도 다행히 한글 위키 자료가 있기는 한데... 없는 것이 마찬가지인 자료들이 있군요. 어차피 영문 위키 자료를 참조하기 때문에 번역해서 위키에 보내고 싶기는 한데 일단 제 블로그부터 먼저 챙기기로 하겠습니다. 의외로 몰트케에 대한 자료도 없어서 영문자료를 사용해야겠군요. 나중에 독일통일 과정을 한 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 William Weir, The Career Press

 

1부

1.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Sargon of Akkad)
2. 해양족(Sea Peoples)
3.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4. 손자(Sun Tzu)
5.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6.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
7. 한니발(Hannibal)

 

2부

8. 진시황(Qin Shih Huang)
9.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10.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11. 무함마드(Muhammad)
12. 샤를마뉴(Charlemagne)
13. 오토 대제(Otto the Great)
14. 토그릴 베그(Toghril Beg)

 

3부

15. 정복왕 윌리암(William the Conqueror)
16. 살라딘(Saladin)
17. 징기스 칸(Genghis Khan)
18.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4부

19. 잔다르크(Joan of Arc)
20. 메흐메트 2세(Mehmed II)
21.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22.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23.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5부

24. 이반 4세(Ivan IV)
26. 도쿠가와 이에야스(Tokugawa Ieyasu)
27. 나사우의 마우리츠(Maurice of Nassau)

 

6부

25. 성웅 이 순신(Yi Sun-sin)

7부

28. 장 밥티스트 드 그리보발(Jean Baptiste de Gribreauval)
29.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30.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31.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32.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8부

33. 나폴레옹 (Napoleon I)
34.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35.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9부

36.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37.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38. 샘 휴스톤(Sam Houston)
39.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40.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10부 예정
41. Ulysses S. Grant
42. Alfred Thayer Mahan
43. Togo Heihachiro
44. Giulio Douhet
45. Adolf Hitler
46. Heinz Guderian
47. Yamamoto Isoroku
48. Raymond Spruance
49. Mao Zedong
50. Matthew B. Ridgway

 

36.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 1783년~1830년

베네수엘라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으로,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함께 중남미 해방자로 불린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그란 콜롬비아로 독립시켰다.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아 아이들을 돌보지 못했고 흑인 여종 이폴리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는데, 시몬은 노예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어머니가 죽은 후에 큰 누나 마리아 안토니아와 같이 살면서 당시 진보적 가치였던 정치자유주의의 신봉자인 시몬 로드리게스(Simón Rodríguez)의 지도를 받았다. 당시 로드리게스는 장 자크 루소 몽테스키외의 사상을 심어주면서 시몬에게 자유주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당시 남아메리카에서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인 크리오요(Criollo)들을 비롯한 여러 인종들이 스페인의 식민통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크리오요들은 농장을 경영할 정도로 경제력과 지식을  갖고 있는데도 차별을 받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젊은 크리오요들은 자유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독립하려는 열정적인 투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로드리게스가 투쟁에 가담했다가 적발되어 유럽에 망명하면서, 누나 내외의 소개로 안드레스 베요(Andrés Bello)의 지도를 받게 된다. 시몬은 스페인어와 웅변술을 배웠고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798년 준위로 진급한 그는 99년부터 3년 동안 멕시코와 유럽을 여행했는데 같은 크리오요들과 만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고, 유럽여행은 남아메리카에서만 살던 청년 시몬에게 교양과 자유주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유럽에서 사는 동안 시몬은 1805년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을 보면서 절대권력을 증오하게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가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한다.고향으로 돌아가기전 시몬은 미국에 들르는데,미국에서의 짧은 생활은 그에게 남아메리카가 독립할 경우 미국처럼 합중국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게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시몬은 안드레스 베요,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와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어 1811년 베네수엘라를 독립국가로 해방시켰다. 그러나 독립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왕당파의 수도점령으로 실패했고 외국령 섬으로 도망쳤다.

이후 카르타헤나 선언으로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베네수엘라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독립전쟁을 지도하였다. 당시 시몬 볼리바르의 군대에는 에스파냐의 학정에 반감을 갖고 있던 청년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쟁은 연전연승하였고, 결국 1814년 8월 4일 카라카스에 입성하였다. 당시 베네수엘라 공화국에서 시몬에게 해방자라는 이름을 줄 정도로 그는 큰 영광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영광도 잠시, 스페인군의 반격을 받아 전쟁에서 졌고 당시 복수심에 불탄 시몬은 포로들을 모두 총살했다고 한다.

독립의회에서는 사병들이 경험이 부족한 신병들이었고 무기도 열악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나, 결국 전쟁에 패하여 아이티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아이티대통령 알렉산드르 페숑(Alexandre Sabès Pétion)은 남아메리카 독립시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다는 조건으로 4개 대대 약 1,200명의 군대를 지원했으나,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 부대로는 잘 훈련된 사병과 최신형 대포를 가진 스페인군을 이길수는 없는 일이었다. 2년에 걸친 전쟁에서도 진 시몬은 대평원지대의 군벌인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Jose Antonio Paez)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 전술로 에스파냐군과 전쟁을 벌여 1818년 2월 12일 승리했지만 스페인군의 반격으로 베네수엘라에서의 전쟁을 당분간 포기해야했다.

 

1819년 시몬은 2,500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5일간의 콜롬비아로 건너간 후에 5,000여명의 영국군과 아일랜드군의 병력지원과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8월 7일 콜롬비아를 해방시켰으며, 그해 12월 17일 미국의 연방정부를 따르는 그란 콜롬비아(그림 참조)를 선언하였다. 베네수엘라를 당시 공략한 시몬은 에스파냐군 총사령관과의 휴전을 협정한 뒤, 군인들을 훈련시켜 자신의 부대를 정예화 했다. 결국 시몬은 파에스와 함께 1821년 11월 21일 카라카스에 재입성하였으며, 아르헨티나의 독립운동지도자 호세 데 산 마르틴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해방에 자극을 받아 에콰도르를 해방시켰다. 산 마르틴이 페루 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유럽에 망명하자 부하 수크레를 보내 페루 내 왕당파들을 제거하였고, 페루 왕당파들과의 전쟁을 마지막으로 남아메리카는 스페인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전쟁에 지친 시몬은 1825년 2월 종신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그란 콜롬비아 의회

에 반납했으며 거액의 연금도 거부하였다. 하지만 권력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권력투쟁과 그의 흑인노예 해방의지에 반감을 가진 지주들의 반발이 원인이 된 암살미수사건(시몬은 자신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이 실패하자,주모자 국외추방 및 관련자 석방이라는 비교적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에 휘말렸다. 또한 그가 선언한 그란 콜롬비아도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페루의 독립으로 와해되자, 콜롬비아 보고타를 떠났다.

지병인 폐결핵과 동료 수크레의 암살로 인한 상심으로 건강이 최악에 다달은 시몬 볼리바르는 요양을 하던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에서 로마 가톨릭 사제의 병자성사를 받은 뒤, 별세하였다.

  

37.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 1778년~1850년

 

아르헨티나의 장군이자 페루 정치가로,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 남부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778년 2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그는 7살에 스페인 마드리드 귀족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1808년, 스페인군에 입대해 프랑스와 싸웠고 바일렌 전투나 알부에라 전투에 참전하면서 남아메리카 독립 지지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1812년 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서 남아메리카 합중국(아르헨티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813년 산 로렌소 전투 이후 1814년 북부군을 지휘하기도 하면서 리마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계획에는 쿠요라는 군대를 조직하여 칠레를 해방시켜 바다로 리마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1817년 그는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로 갔다. 그리고 차카부코 전투와 마이푸 전투(1818년)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치고 1819년 칠레의 독립과, 1820년 페루의 독립을 성공시켰다. 페루의 독립 선언은 공식적으로 1821년 7월 28일에 이루어졌다. 1822년 7월 22일 에콰도르에서 시몬 볼리바르를 만났고 볼리바르가 페루를 완전 해방하는 과업을 맡는다. 산 마르틴은 갑작스레 페루를 떠나 군대 지휘관직을 그만두고 정계와 군대에서 물러났다.

그 후 고국에서 중앙 집권론자의 비난을 받고 프랑스로 망명해서 가난한 생활을 하던 끝에 볼로뉴에서 죽었다. 시몬 볼리바르와 함께 남아메리카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아르헨티나 국민의 아버지로 높이 추앙받고 있다. 그를 기린 해방자 산 마르틴 훈장(Orden del Libertador San Martín)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높은 훈장이다.

 

(우에스기 왈: 영문 위키 자료를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많이 까다로와서 한글 위키 자료만 인용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가장 먼저 이 분의 전사에 대해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38. 샘 휴스톤(Sam Houston) - 1793년~1763년

미국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멕시코에게서 텍사스 일대를 독립시킨 인물이다.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했을때 대통령을 지냈고, 이후 미국 연방에 편입된 이후에는 상원의원과 주지사를 역임했다. 텍사스 주의 가장 큰 도시 휴스톤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난 그는 1818년 군대를 떠나 변호사가 되었다. 1823년 미국 하원의원, 1827년 주지사가 된 후에 1835년 텍사스 독립전쟁에서 텍사스 군대를 이끌고 멕시코와 전쟁을 벌였다.

1836년 산타 아나 장군을 사로잡아 독립을 이끌어냈고 텍사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838년 낙선했지만 1841년에 재선출되었다. 미국연방에 합병된 후에 13년 간 주 상원의원을 지냈고 1859년에는 텍사스 주지사가 되었다.

 

1861년, 남북전쟁을 앞두고 텍사스가 연방에서 이탈하고 남부 13개 주동맹에 가입하자 주지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텍사스 혁명(Texas Revolution)은 1835년 10월 2일부터 1836년 4월 21일까지 멕시코의 한 주였던 코아우일라 테하스 주 중 테하스(텍사스) 지역이 분리 독립을 목표로 시작된 전쟁이었다. 그래서 텍사스 독립 전쟁이라고도 한다.

 

멕시코 정부와 텍시언이라는 텍사스 미국 정착민 사이의 불화는 1835년 멕시코 대통령인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장군이 1824년 헌법을 폐지하고 연방 원리 (중앙집권적인 색이 강한)의 헌법을 선언한 7개 법률(Seven Laws)을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멕시코 사회는 동요했고, 일부 주에서는 폭동이 발생했다. 텍사스에서는 1835년 10월 1일, 곤잘레스에서 전투가 발생했고, 이것이 전쟁의 시작이 된다. 처음에는 라바이아와 샌안토니오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몇 달 후 같은 장소에서 증파된 멕시코 군에 참패하는 등 진퇴를 거듭했다.

전쟁은 지금의 휴스턴에서 약 32km 동쪽에 있는 산하신토 전투에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샘 휴스톤 장군은 멕시코 군대에 대승을 거뒀고 독립을 이끌어냈다. 

 

(우에스기 왈: 다행히 제 블로그에서 텍사스 독립전쟁과 산타 아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라모 전투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uesgi2003/80

산타 아나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uesgi2003/81 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산 하신토 전투는 유투브 http://www.youtube.com/watch?v=F_dlVFQOzCA 에서 박진감넘치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39.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 1824년~1886년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장군으로 1880년 대통령 후보로도 지명되었다.

1844년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46~48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활약했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의용군 준장으로 임명되어 전쟁 초반 아나콘다 작전을 제안했고 1862년반도 회전에 참가했다. 1863년 포토맥군 제2군 사령관이 되어 2년 정도 남은 전쟁을 이끌었고 1863년 7월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으며 1864년 봄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 진격전에 참여했다.

전쟁 후 소장으로 루이지애나와 텍사스 사단장을 맡았고 민주당의 지원을 받아 1880년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공화당에 근소한 차이로 지고 다시 군인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우에스기 왈: 윈필드 스콧이 과연 이 명단에 낄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미국인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제 블로그에 이 분의 전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으니까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83 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40.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 1800년~1891년

대 몰트케(Moltke the Elder)로도 불리는 그는 프로이센  독일 제국의 군인이자 근대적 참모제도의 창시자였다. 프로이센 참모본부의 참모총장으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함께 1871년 독일통일과 제2제국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군인이었다. 훗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소 몰트케의 삼촌으로서 ‘대 몰트케’란 별명은 조카와 구분하기 위해 붙은 것이다.

 

젊은 시절 3년 동안 실레시아와 포센에서 군사관측 임무를 맡았던 몰트케는 1832년 베를린에서 참모 임무가 주어지면서 중위로 진급했다. 이 시절 윌리암 왕자를 비롯한 고위층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과 역사를 즐긴 그는 1827년, 두 친구라는 단편 소설을 출간하기도 했고 주변국 역사에 대한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기도 했다.

1835년, 대위로 진급하면서 6개월 동안 남부 유럽을 여행할 휴가를 떠났다. 콘스탄티노플에 머무는 동안 오토만 제국군의 현대화를 도와달라는 마흐무드 2세의 요청을 받아 2년간 머무르게 되었고 터키어를 배우면서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여행했다.  

1838년, 몰트케는 이집트 원정에 나선 오토만군의 군사사절로 참전하면서 유프라테스 일대를 경험할 기회를 가졌다. 1839년 오토만군 사령관은 몰트케의 조언을 거부하자, 그는 참모직을 사임하고 포병사령관이 되었다. 6월 24일 벌어진 나지브 전투(Battle of Nezib)에서 오토만군은 패배했고 그의 후원자였던 마흐무드도 사망했기 때문에 1839년 12월에 실의를 안고 베를린으로 복귀했다. 

 

1840년, 제4군 군단 참모가 된 그는, 콘스탄티노플과 소아시아에 대한 각종 자료를 출간했고, 철도에 매료되어 함부르크-베를린 노선 공사에 참여한 후에 철도노선 선택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1845년,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The Russo-Turkish Campaign in Europe, 1828-1829를 출간했고 프러시아 왕자의 수행원으로 로마에 다녀온 후에 4군 군단 참모장(중령)이 되었다. 1855년, 몰트케는 프레드릭 왕자(나중에 프레드릭 3세 황제)의 수행원이 되어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를 여행했다.  

1857년 몰트케는 프러시아 참모총장에 올랐고 프러시아군의 전략 및 전술을 바꾸기 시작했다. 군의 기동력을 높이고, 무장과 통신수단을 개선시키고 장교 교육방법도 바꿨다. 그리고 향후에 있을 수도 있는 전쟁에 대비해 유럽국가의 정치역학에 대한 조사기관도 설치했는데 현대식 참모의 시작이 되었다.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Austro-Sardinian War)에 프러시아군이 동원된 후에 군대개편을 통해 전력이 2배로 증강되었다. 1862년, 덴마크와의 전쟁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은 몰트케는 바다에서 우세한 덴마크군이 섬에 틀어박힌다면 전쟁이 장기화되기 때문에 우회해 퇴로부터 차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이 터지자 몰트케의 전략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고 덴마크군은 섬 요새로 무사히 후퇴해 장기전 양상을 보였다. 4월 30일, 베를린에 있던 몰트케가 독일 연합군의 참모장으로 파견되었고 덴마크는 바로 독일의 휴전조건을 받아들였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긴장상태가 벌어지자 몰트케의 전략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몰트케는 전략은 목적에 따라 방법을 바꾸는 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당시 상황에 맞게 나폴레옹의 전략전술을 개선시켰다. 그리고 현대식 무기의 방어력이 얼마나 강력한 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적을 전면공격하는 것보다 포위공격하는 것이 훨씬 더 파괴력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바우체 전투(Battle of Bautzen)에서 나폴레옹이 네이의 부대를 자신의 부대와 합치지 않고 적의 측면을 공격한 전술과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에서 연합군이 보여준 연합작전의 교훈을 찾아냈다.

그리고 군대의 행군과 보급조건을 연구해, 같은 도로로 2개 이상의 군단이 이동하면 뒤에 처진 군단은 정작 필요한 최전선에서 무용지물이 되며, 좁은 지역에 밀집된 여러 개의 군단은 이틀이 넘어가면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찾아내고, 전투에 신속하게 투입하려면 군단의 행군과 배치를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 지를 분석했다. 큰 병력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여러 개 군이나 군단으로 나눈 후에 사령관은 큰 목표만을 지시하고 부대 지휘관이 상황에 맞춰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몰트케는, 군사작전은 전투가 시작된 후에는 모든 것이 바뀌기 때문에 여러가지 옵션을 고려해 전략을 세워야 하며, 지휘관은 예상되는 모든 결과에 대해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전계획은 적의 주력을 만날 때까지만 유효하다(No plan of operations extends with certainty beyond the first encounter with the enemy's main strength)" 그리고 "전략은 여러 방법을 체계화시킨 것이다(Strategy is a system of expedients)"가 그의 이론의 핵심이다.

그의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 전쟁계획은 매우 상세했으며 수 천 개의 변수를 고려하고 있었다. 몰트케의 "작전계획은 적의 주력을 만날 대까지 유효하다"라는 주장을 작전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몰트케는 1866년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Austro-Prussian War) 계획을 수립했고 성공을 거뒀다.  

몰트케는 먼저 모든 군사행동을 집중시켰다. 270,000명 규모의 오스트리아-색슨군과 120,000명의 북부와 남부 독일군이 330,000명의 프러시아군에 맞서고 있었지만 몰트케는 결정적인 순간에 집중력을 발휘했다.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278,000명을 동원하고 오스트리아의 독일동맹군에 대해서는 48,000명 만을 배치시켰지만 그 병력만으로 2주도 안되어서 남부 독일군을 전선에서 밀어냈다.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상대하려면 프러시아군이 먼저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몰트케의 철도지식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병력을 나누어 여러 노선으로 동시에 색소니 국경으로 수송했다.

국경을 위협받은 색소니군은 보헤미아로 후퇴했고, 이제 160km 떨어진 프러시아의 두 군대를 합쳐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할 차례가 되었다. 그는 두 군대가 각자 지친(Gitschin)으로 진격시켰다.

어느 쪽을 공격할 것인지 우선순위가 없었던 오스트리아군은 프레드릭 황태자의 병력에 집중되었지만 패배하면서 수세에 몰렸고 병력이 합쳐진 프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정면과 측면을 포위공격해 전쟁에서 이겼다.

 

몰트케는 쾨니히그레츠 전투에 만족하지 않았다(그림 참조). 그는 프러시아 엘베군이 오스트리아군의 퇴로를 막아주기를 바랬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프러시아 1군도 황태자군이 퇴로를 차단할 때까지 적당히 공격해주기를 바랬지만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일찍 퇴각하게 만들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프랑스의 개입을 우려해 색소니 왕국(Kingdom of Saxony) 합병에 반대했지만 몰트케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자신감을 보이며 전쟁계획을 제시했다.

몰트케는 프랑스-프러시아 전쟁(1870~71, Franco-Prussian War)에서 프러시아군을 이끌어 1871년 독일제국의 탄생을 주도했다. 몰트케의 사후에 출간된 문서를 보면, 그는 1857년 이후 통일전쟁을 준비해왔다. 철도로 병력을 수송하는 계획도 정치상황, 병력규모 그리고 철도체계에 따라 수정했다.

1866년의 성공은 몰트케 입지를 굳혀주었고 1870년 프러시아와 남독일군 동원령이 내려졌을 때에, 몰트케의 계획은 논쟁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참모총장으로 임명된 몰트케는 왕가의 지휘관과 동일한 지휘권을 가지게 되었다.

몰트케의 계획은, 마인츠 남부에 전 병력을 집결시켜서 전선을 일단 방어한 후에, 프랑스군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중립성을 무시하고 콜롱이나 라인강 남부로 진격한다면, 진격로에 있는 요새들이 진격을 늦추고 집결한 병력으로 측면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이 남부 독일을 공격한다면, 라인강을 거슬러 올라가 프랑스군의 진격과 집결을 막을 생각이었다.

독일군은 3개 군으로 나뉘어, 1군은 모젤에, 130,000명의 2군은 60,000명의 예비군과 함께 홈부르크(Homburg)에, 130,000명의 3군은 란다우(Landau)에 집결시켰고 3개 군 군단을 독일 북동부에 배치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협공하는 것에 대비했다. 

 

독일의 3개 군은 우측으로 선회해서, 우익의 1군이 메츠 반대편의 모젤 강변에 있고, 2와 3군은 전진해서 스트라스부르그 부근의 프랑스군을 밀어내고 모젤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프랑스군이 2군 정면에 있게 된다면, 2군이 정면을 공격하는 동안 1과 3군이 측면을 공격하고, 만약에 사아르부르크-부네빌(Saarburg to Lunéville) 부근에 있다면 2와 3군이 양측면에서 협공할 계획이었다. 크게 우회하는 전략은 프랑스군 주력을 북쪽으로 몰아붙이는 동시에 파리와 완전히 단절시킨 후에 궤멸시키고 파리로 진격하려는 것이었다.

몰트케가 예상하지 못한 전투와 승리가 연이어졌지만 그는 작전계획대로 계속 추진해나갔다. 그라블로트 전투(Battle of Gravelotte)에서 불필요한 손실을 입은 것에 대해 많은 비난을 샀지만, 전투명령을 내린 것은 황제였고 몰트케는 그 명령을 막으려하지 않은 잘못만이 있었을 뿐이다. 

 

세당 전투(Battle of Sedan), 파리 공성전(Siege of Paris). 메츠 공성전(Siege of Metz)에서 패한 프랑스는 1871년 1월 28일 휴전에 서명했고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끝났다. 

귀족작위를 받은 몰트케는 1871년 원수로 진급되었고 독일 의회에도 진출했다. 1888년, 참모총장에서 물러났고 3년 후에 베를린에서 죽었다.

몰트케가 세익스피어와 괴테의 작품을 읽는 육성이 축음기에 녹음되어 현재 토마스 에디슨 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육성 녹음이기도 하다.

 

(우에스기 왈: 몰트케를 설명하면서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을 건너뛸 수도 없고, 전쟁을 설명하자니 상당히 방대한 양이어서 좀 애매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독일 통일을 다룰 때에 보다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 프프 전쟁은 일반 시민을 의도적으로 포격한 첫 번째 전쟁이었습니다. 독일군은 파리를 무차별 포격했고 프랑스군의 항의에 대해 "파리에 더 가까워졌기 때문에 적십자기를 더 잘 맞출 수 있게 되었다"는 답변을 했습니다.

- 프프 전쟁은 후장식 소총이 양쪽 모두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전쟁이었습니다. 후장식 소총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는지에 대해서는 http://youtu.be/xScjkrcaAcc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동영상은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의 한 장면으로 전장식 소총을 사용하던 오스트리아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전했습니다.

- 프프 전쟁에서 적십자가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 프프 전쟁에서의 야만적인 행위때문에 1872년 국제법정 설치가 처음으로 제안되었습니다.

- 프프 전쟁에서 처음으로 기관총이 본격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 프프 전쟁의 결과로 독일이 통일되었고 이탈리아 통일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 프랑스는 미군의 엔필드, 스프링필드, 레밍턴 등과 같은 소총을 수입해서 배급했습니다.

- 미국인이 운용하던 응급마차가 가장 깨끗했기 때문에 파리 공성전의 부상자들은 미국 응급마차로 후송해달라는 쪽지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 파리 공성전 중 부상병을 시민의 집에 수용하게 되었는데, 백인이 아닌 모로코인이 후송되었다고 거부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 프러시아가 최초로 멸균 수술을 시도했습니다.

- 전쟁 기간 중, 양 진영이 고국으로 보낸 편지는 1억 통이 넘었는데 심지어 풍선이나 비둘기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http://www.youtube.com/watch?v=0DhbgJJ_M1s&feature=related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44분 동영상으로 영문인 점이 아쉽기는 한데 영어공부한다고 생각하시고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