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기타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8부)

by uesgi2003 2012. 11. 19.

 

오늘 드디어 문재인씨와 안철수씨가 독대를 했군요. 문재인씨야, 문대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 있는 사람이고, 안철수씨도 그동안의 행적을 보면 자신의 말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믿습니다.

김영삼씨와 김대중씨에게 단일화를 주문했을 때에는 두 사람의 배경과 지지세력이 워낙 달라서 각자의 길을 가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지만 문재인씨와 안철수씨는 빚을 갚아야 할 가신도 지지기반도 없기 때문에 결정이 나면 단일화할 것입니다.

 

오늘은 8부 차례인데... 윌리엄 바이르(? 정확한 발음은 모르겠습니다)가 정통한 역사학자가 아니다 보니 뒤로 갈수록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것도 지극히 미국 중심으로, 미국사에만 영향을 준 사람들이죠. 저작권때문에 책의 내용을 참조할 수도 없고 한글 위키에 자료가 없다 보니 제가 영문 자료를 찾는데... 찾아서 정리하다 보면 그럴만한 인물이 아니어서 중간에 포기하게 됩니다.

갸우뚱하는 인물이 나오면 그냥 잘 몰랐던 인물에 대해 이번 기회에 안다는 정도의 의미만 두시기 바랍니다.

 

번번히 이야기하지만, 편집할 때마다 오류(폰트, 띄어쓰기 기타 등등)가 생기는 다음 에디터가 시간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그나마 괜찮은 IE에서만 편집해도 오류가 계속 생기는군요.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 William Weir, The Career Press

 

1부

1.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Sargon of Akkad)
2. 해양족(Sea Peoples)
3.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4. 손자(Sun Tzu)
5.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6.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
7. 한니발(Hannibal)

 

2부

8. 진시황(Qin Shih Huang)
9.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10.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11. 무함마드(Muhammad)
12. 샤를마뉴(Charlemagne)
13. 오토 대제(Otto the Great)
14. 토그릴 베그(Toghril Beg)

 

3부

15. 정복왕 윌리암(William the Conqueror)
16. 살라딘(Saladin)
17. 징기스 칸(Genghis Khan)
18.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4부

19. 잔다르크(Joan of Arc)
20. 메흐메트 2세(Mehmed II)
21.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22.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23.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5부

24. 이반 4세(Ivan IV)
26. 도쿠가와 이에야스(Tokugawa Ieyasu)
27. 나사우의 마우리츠(Maurice of Nassau)

 

 

6부

25. 성웅 이 순신(Yi Sun-sin)

7부

28. 장 밥티스트 드 그리보발(Jean Baptiste de Gribreauval)
29.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30.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31.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32.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8부

33. 나폴레옹 (Napoleon I)
34.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35.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9부예정

36. Simón Bolívar
37. José de San Martín

38. Sam Houston
39. Winfield Scott
40. Helmuth von Moltke
41. Ulysses S. Grant
42. Alfred Thayer Mahan
43. Togo Heihachiro
44. Giulio Douhet
45. Adolf Hitler
46. Heinz Guderian
47. Yamamoto Isoroku
48. Raymond Spruance
49. Mao Zedong
50. Matthew B. Ridgway

 

33. 나폴레옹 (Napoleon I) - 1769년~1821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군인과 정치가이며, 프랑스 대혁명 시기 말기 무렵의 정치 지도자이자 1804~1815년까지 프랑스의 황제였다. 나폴레옹 법전은 세계의 민법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역할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 전체에 헤게모니를 형성했고,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을 퍼트렸으며, 제국 군주제를 통합했다. 그가 전쟁마다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가장 위대했던 장군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에서 프랑스 본부에서 포병 장교로 훈련받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제1 공화정에서 지위가 올랐고 제1차와2차 대프랑스 동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나폴레옹은 1799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제1 영사에 취임하였다. 5년 뒤에 프랑스 원로원이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유럽 강대국과 많은 충돌을 일으켰고 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적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폭넓은 동맹을 맺고 친인척을 파견해 프랑스의 영향력을 넓혔다. 그러나 스페인 무장시민과의 전쟁과 1812년 러시아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그의 대육군은 전쟁에서 큰 손상을 입었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했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게 패해 엘바 점으로 유배당했다. 1년 후에 엘바 섬에서 도망쳐 나오고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1815년 6월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했다.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영국 왕실에 의해 구속된 채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보냈다. 그가 위암으로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이 주장은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일부 학계 측에서는 비소 중독설도 제기되었다.

 

유년기에 나폴레옹은 점잖은 성격을 가졌으며,하루 종일 독서에 심취하였는데,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브리엔느 유년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만은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졸업 시험 성적은 58명 중 42위였지만, 통상 재적 시간이 4년인 곳을 불과 11개월 만에 필요한 과정을 모두 수료하였다.

1785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발랑스에 주둔한 라 페르 연대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 함락 소식을 듣고 나폴레옹 자신도 프랑스 혁명에 참가해 공화주의자인 자코뱅 파를 지지하는 소책자를 썼다가 체포되고 만다. 1792년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아작시오의 국민위병대 중령이 되지만, 영국을 지지하는 파울리와 불화가 일어나 일가족과 함께 마르세유로 도피행에 가까운 이주를 했다.

1793년 말, 프랑스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에, 툴롱 공성전 에서 왕당파 반란군을 진압하는 최초의 무훈을 세워 젊은 나이에 사단장이 되었다.1796년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결혼했고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이 이탈리아 원정을 20년 동안 펼쳐진 나폴레옹 전쟁의 서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때 나폴레옹의 나이는 27세였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혁명파와 반혁명파간의 이념 대립 등의 혼란 상태가 지속되어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1796년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은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는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과 싸우기 위해 몇 달에 걸쳐 알스프 산맥을 산맥을 그는 곧바로 이탈리아를 제압한 후, 1797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굴복하고 캄포포르지오 조약을 체결하여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북부 지방인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혁명 정부(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그를 견제해 이집트로 파견했다.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명목이었지만 프랑스 국민과 떼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1789년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 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했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의 실패 후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에 의해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은 이 비문을 해석하길 적극 권장했으나 살아서 이 돌의 해석을 보지 못하고, 후에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완벽히 해석된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가있는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나폴레옹은 인도원정을 취소하고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혼자서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프랑스로 귀국했다.

 

당시 오백인회와 원로원은 이 문제로 인해 거의 매일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정국을 지켜본 그는 동생인 오백인회 의장 루시앵과 시에예스, 탈레랑의 도움으로 1799년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통령 정부가 3명의 통령으로 이루어졌으나, 제2통령과 제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집중되었다. 제2통령은 법무, 제3통령은 재정을 책임지는 반면, 제1통령은 내정과 외교, 군사 등을 책임졌으므로 그 권한은 다른 통령에 비하여 더욱 막강했다. 나폴레옹은 연합국에 강화를 제의하지만, 거절당했고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직접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려 하였다. 과거 한니발 이후 대규모의 군사가 처음으로 알프스를 넘는 일을 당시 그의 부관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나폴레옹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외쳤다.

1800년 6월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고, 다음해 2월에 오스트리아는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라인 강의 절반을 프랑스측에 할양하였으며, 북이탈리아 등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했다. 이 강화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어, 영국만이 전쟁을 지속하다가 중심축인 소 피트가 사망하자 1802년 3월 양국간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10년 만에 안정을 맞았다.

나폴레옹은 내정 면에서도 일대 개혁을 실시했다. 전국적으로 세금 제도와 행정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혁명기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공업 생산력의 회복을 실시하여 산업 전반의 부흥에 힘을 쏟았다. 1800년에 프랑스은행을 설립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했다. 교육 개혁에도 힘써 공공 교육법을 제정하였다. 국내 법도 정비해 1804년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다. 이것은 각 지역의 여러 가지 관습법과 봉건법을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민법전으로 ‘만민의 법 앞에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 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왕당파와 자코뱅 파 등의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국내 정치를 융화로 이끌었다. 한편으로는 현 체제를 뒤집으려고 시도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그리고 1802년 8월, 그는 종신통령(종신 집정)이 되어, 자신의 독재권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나폴레옹의 강력한 내정 개혁 실시로 그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자 측근 인사들은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1804년 7월의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프랑스제국의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프랑스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세계 제일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도시에 대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가구의 새로운 계산법(짝수법, 홀수법)을 마련하고, 분수를 설치하고 묘지를 정리하였으며, 광장과 회관, 시장, 강변 구역과 제방 및 공공 시설과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정비하였다. 또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위인들의 동상이 거리 곳곳에 세워지고, 교량이 건설되었다.

얼마 후  영국이 아미앵조약을 파기하면서 다시 전쟁 상태로 들어갔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위해 도버 해협을 접한 브로뉴에 대군을 집결시켰다. 이에 대항하여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프로이센은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했지만, 영국과 오스트리아와의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중립국으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서 영국에게서 빼앗은 하노버를 프로이센에 양도한다는 약속을 했다.

프랑스 육군은 10월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빈을 점령한다. 그리고 12월 2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패배시켰다.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트 조약을 체결하여 항복을 선언했다. 이 전투는 3명의 황제가 한 전장에 모였기 때문에 ‘3황제 회전’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은 1805년 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해 영국 상륙 작전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유럽 대륙의 중앙부를 제압한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는 나폴리 국왕으로, 동생 루이는 네덜란드 국왕에 각각 앉히고 자신은 라인 동맹을 발족시켜 이를 보호국화함으로써 독일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샤를마뉴 대에서부터 거의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프로이센은 결국 프랑스와 대립하게 되어, 1806년 영국·러시아·스웨덴과 더불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10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쳤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동프로이센으로 도피했다.

1807년 나폴레옹은 폴란드로 진격했고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을 아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격파한 후에 러시아와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의 영토를 크게 축소시키고 폴란드 지역들을 하나로 묶어 바르샤바 대공국을 탄생시켰으며, 남동생 제롬 보나파르트 베스트팔렌 왕으로 임명하여 두 나라를 프랑스 제국의 위성 국가로 지정하였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국왕 페르디난드 7세를 내쫓고 자신이 통치했고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국왕 카를 14세가 되었다. 이 왕가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지만, 정작 베르나도트 자신은 나폴레옹에 대해서 큰 호의를 갖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스웨덴은 프랑스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강고한 동맹관계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1810년  나폴레옹은 14년 동안 함께 살아온 황후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딸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지만 프란츠 1세는 사위인 나폴레옹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나폴레옹 역시 장인을 망국의 군주로 업신여겼기 때문에, 훗날 프란츠 1세는 대프랑스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전한다.

1808년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국민들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스페인의 호세 1세로 왕위에 앉히고, 점령국 사람들의 환호는 저항으로 바뀌었다.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난 스페인 사람들의 프랑스에 대한 게릴라 투쟁은 프랑스를 계속 괴롭혀서, 나폴레옹 자신도 스페인의 게릴라들을 위궤양에 빗댈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골칫거리는 역시 영국이었다. 영국은 섬나라라는 지형상 장점과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철저하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만다. 이것은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퇴각하면서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러, 프랑스군이 손대지 못하게 하고 깊숙이 달아났다.

그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을 기다린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프랑스의 대패를 목격한 유럽 각국은 일제히 반(反)나폴레옹의 기치를 내걸었다.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 프로이센이었으며, 주변 나라들에게 호소하여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에는 베르나도트의 스웨덴도 참가했는데 러시아 원정으로 수십만의 군사를 잃은 나폴레옹은 강제적으로 청년들을 징집하였다. 1813년 봄, 변변찮은 군대로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휴전을 하였다. 메테르니히와의 평화교섭이 불발된 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동맹군에게 포위공격 당하여 대패한 후, 프랑스로 도망갔다.

1814년 정세는 한층 더 악화되어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트베르크와 블뤼허의 연합군 25만이,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의 16만이, 남쪽에서는 웰즈 리 장군의 10만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을 강요당했다. 3월 31일에 제국의 수도 파리가 함락된다. 나폴레옹은 종전을 목적으로 퇴위를 하겠다고 했지만, 배신한 마르몽 원수 등에 의해 무조건 퇴위를 강요당하여, 결국 1814년 4월 퐁텐블로 조약을 맺고 엘바 섬의 영주로 추방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곳곳에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왕정이 다시 복구되었다. 이들은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로 하고 싶었지만, 동맹국 측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베르나도트 역시 프랑스의 새 왕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주위의 반발을 사 포기했으며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가가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빈 회의가 열려 전후 유럽을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를 의논을 하였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좀처럼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대해 민중은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 복위하는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여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연합국에게도 강화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하여 결국 또다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승세를 거두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 공격으로 완패하여 백일천하는 끝났다. (실제로는 95일)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되어 미국으로의 망명도 시도했지만 항구 봉쇄로 단념하였고, 결국 영국 군함에 투항하였다. 영국 정부는 아서 웰링턴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폴레옹을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에 유폐시켰다.

 

나폴레옹은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롱우드의 저택에서 생활하였다. 그 저택 주위에는 많은 보초병들이 지키고 서서 나폴레옹의 행동을 실시간 감시하였다. 또 집밖으로의 외출도 제한되어 실질적으로 감금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은 수행원에게 구술 필기시킨 방대한 회상록을 남겼다(에마뉴엘 라스 카즈의 세인트 헬레나의 회상 등). 이것들은 그의 인생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관과 역사관, 인생관을 총망라한 것이어서 나폴레옹 전설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나폴레옹은 특히 섬의 총독인 허드슨 로로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그는 무례하게도 자부심 강한 나폴레옹에게 보나파르트 장군이라고 부르며 썩은 포도주를 따라주는 등 나폴레옹을 철저하게 우롱했다. 또, 나폴레옹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를 본국으로 귀국시켰다. 그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 매일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1821년 5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암살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정식 사인은 위암이라고 발표되었다.

 

(우에스기 왈: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내용이 줄였는데도 많아졌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에 대해서는 워낙 유명해서 제 블로그에서는 아직 다루지 않고 있는데 나중에 자세하게 다룰 기회가 있을 겁니다.

많은 영화가 제작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제 블로그 성격과 맞기도 하고, 다시는 제작되기 힘든 엄청난 규모의 워털루가 최고입니다. 요즘에야 CG로 제작되지만 아무래도 아날로그 필름의 박력에는 따라갈 수 없죠. 워털루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대부분이 전투신이어서 강추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oKmqRqY0RLg&feature=related 에 전편이 올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왠만하면 굿다운로드나 dvd 구입해서 큰 화면으로 보실 것을 권합니다.)

 

34.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 1758년~1805년

허레이쇼 넬슨 자작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해군 제독이었고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을 구하고 전사했다.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지휘관으로 추앙받고 있다.

 

넬슨은 1770년 12세의 나이에 해군에 입대했고 1771년 평범한 선원이자 키잡이로 해군복무를 시작했는데, 외삼촌 모리스 서클링(Maurice Suckling) 선장이 그 배를 지휘했다. 얼마 후 해군 사관생도가 된 넬슨은 본격적인 장교 훈련을 마쳤지만 사실 그는 일생동안 배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1775년 해군 감사관(Comptroller)이 된 서클링의 도움을 받아 빠른 승지를 했고 1777년 부관이 된 넬슨은 동인도로 배치되었다. 그는 영국 해군 부관의 직위로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가하였으며, 20세가 된 1779년 6월 프랑스로부터 나포된 대포 28문의 프리깃함 힌친브로크(Hinchinbroke)의 지휘권을 받았다.

1780년 넬슨은 니카라과의 산 후안(San Juan)에 있는 스페인 요새에 대한 공격에 가담하였다. 공격은 완패로 끝났지만 넬슨의 노고를 높이 산 덕에 비난은 거의 없었다. 이후 말라리아에 걸린 넬슨은 영국으로 돌아와 일년 이상을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완치된 그는 앨버말(Albemarle)로 발령받아 1783년 독립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 독립군과 싸웠다.

 

1794년 코르시카(Corsica)의 칼비(Calvi)에서의 해전 당시 근거리 포격으로 튀어오른 돌 파편에 얼굴을 맞아 오른쪽 눈의 시력과 오른쪽 눈썹의 반을 잃었다. 그는 남아있는 눈을 보호하기 위하여 차양을 사용하기는 했다.

1796년 지중해 함대의 새 지휘관이 된 존 저비스(John Jervis) 경은 넬슨을 준장으로 임명하고 프랑스 해안을 따라 독자적으로 해상 봉쇄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넬슨이 가장 좋아했다고 하는 아가멤논은 이제 낡아 수리를 위해 영국으로 돌려보내졌으며, 넬슨에게는 74문의 대포가 장착된 HMS 캡틴(HMS Captain) 호가 주어졌다.

1797년은 넬슨의 해였다. 2월 14일 그는 성 빈센트(St. Vincent) 곶 해전에서, 그는 위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스페인 함대의 탈출을 저지했으며, 고위 장교로써는 드물게도 두 척의 적선에 직접 올라갔다. 덕분에 함대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으며, 승리 이후 넬슨은 배스 기사단(Order of the Bath)의 일원으로 기사 서훈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넬슨은 영국 해군에서 9번째로 높은 청색 해군 소장(Rear Admiral of the Blue)직에 올랐다. 당시 제독으로의 승진은 능력이 아닌 관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넬슨은 제독은 아니었지만 제독과 같은 액수의 급여와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해 후반에 넬슨은 테세우스(Theseus) 호를 타고 산타크루즈(Santa Cruz)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오른팔에 적탄을 맞고 상완골이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는 부상을 당해 오른팔 전체를 잃었다. 

 

1798년 넬슨은 프랑스 함대와 조우하여 또 한번의 대승을 기록했다. 8월 1일 벌어진 나일 해전(또는 아부키르만 해전-Battle of Aboukir Bay. 그림 참조. 붉은 색이 영국함선이고 푸른 색이 프랑스 해군)은 인도로 진출하려던 나폴레옹의 야심을 좌절시켰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북부로 진군하였지만 이는 함장 시드니 스미스(Sidney Smith) 경의 공격으로 분쇄되었다. 나폴레옹은 영국 군함들을 피해 프랑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는 상당한 전략적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일부 사학자들은 트라팔가르 해전보다 이 전투가 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2월 프랑스군이 나폴리를 침공하자 넬슨은 나폴리 왕가를 구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넬슨은 나폴리 주재 영국대사의 젊은 아내 엠마 해밀턴(Emma Hamilton)과 사랑에 빠졌다. 엠마는 이윽고 넬슨의 정부가 되었으며, 영국에 돌아와서는 넬슨과 가까이 지내며 둘 사이에 딸 허레이시아(Horatia)를 낳았다.

1799년 넬슨은 해군 서열 7위인 적색 해군 소장(Rear Admiral of the Red)직에 올랐다. 같은 해 7월 넬슨은 나폴리 탈환에 참여하였으며 나폴리 왕으로부터 브론테 공작(Duke of Bronte) 작위를 받았다. 그의 품행 관련 문제로 실망한 상부는 넬슨을 본국으로 소환해 바다로 보냈다. 결과적으로 나폴리에서의 그의 이력은 그의 이름에 먹칠하는 결과를 낳았다.

 

1801년 1월 1일 넬슨은 해군 서열 6위인 청색 부제독(Vice Admiral of the Blue)직에 올랐다. 수개월 후 그는 코펜하겐 해전(Battle of Copenhagen, 1801.04.02)에 참전해 덴마크와 스웨덴, 러시아의 무장중립 상태를 해제하기 위해 나섰다. 그의 상관인 하이드 파커(Hyde Parker) 경은 덴마크의 포화가 너무 강력하다고 판단하여 넬슨에게 물러날 것을 지시했지만 따르지는 않았다. 넬슨은 그의 기선을 지휘하는 토마스 폴리(Thomas Foley) 함장을 돌아보며, '폴리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눈이 하나밖에 없어서 오른쪽 일들을 종종 놓치곤 한다네' 라고 말하고는 망원경을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에 대고 '아무 신호도 보지 못했어!'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공격을 지속했으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5월 그는 발트해를 담당하는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영국 왕실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위한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였고, 넬슨은 프랑스 침공에 대하여 영국 해협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1801년 10월 22일 영국과 프랑스간에 휴전 협정이 맺어지면서 넬슨은 악화된 건강상의 이유로 퇴역하여 영국으로 돌아갔다.

아미앵 휴전협정(Peace of Amiens)은 오래 가지 않았고, 넬슨은 곧 전선으로 복귀해 지중해 총사령관의 임무를 맡았으며, 1803년 HMS 빅토리(HMS Victory)호를 받아 프랑스 툴롱(Toulon) 항구 봉쇄에 참가하였다.

1804년 4월 23일, 넬슨은 바다에 머물며 해군 서열 5위인 백색 부제독(Vice Admiral of the White)의 직위에 올랐다. 1805년 초 프랑스 함대는 툴롱 항구를 출발하여 서인도로 향하였다. 이 함대의 추적에 실패한데다 건강이 다시 악화된 넬슨은 영국 머튼(Merton)으로 퇴역하였지만 2개월도 안 되어 다시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1805년 10월 21일 넬슨은 그의 마지막 전투,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전했다. 영국 해협에 대한 제해권을 확보하기에는 해군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유럽 각지에서 배를 끌어모았다. 이윽고 33척의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는 카디스 항을 출발하였고, 넬슨은 27척의 배를 끌고 이에 맞섰다.

넬슨은 자신의 빅토리 호 후미 돛대에 '영국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길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내걸었다. 프랑스의 기함 뷔상토르(Bucentaure) 호에 심각한 손상을 안긴 빅토리 호는 르두타블(Redoutable) 호로 돌진하여 뒤엉켰고, 르두타블 호의 전투실 상부에 있던 프랑스 저격수들은 빅토리 호의 갑판을 훤히 내려다보며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들이 쏜 탄환은 넬슨의 왼쪽 어깨에 적중하여 폐를 관통하고 척추에 박혔다. 넬슨은 이러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네 시간 동안 의식을 잃지 않고 지휘를 계속하였고, 전투가 영국의 승리로 끝난 것을 확인하고 전사했다.

 

날짜

1805년 10월 21일
장소 스페인 남서쪽 트라팔가르곶
결과 영국의 압도적 승리
교전국
영국 영국 Flag of France.svg프랑스 제국
Flag of Spain (1785-1873 and 1875-1931).svg 스페인 왕국
지휘관
호레이쇼 넬슨 제독 † 드 빌뇌브 제독
병력
27척 프랑스: 18척
스페인:15척
피해 규모
전사 449명
부상 1,246명
포로:7,000명
21척 나포, 1척 침몰

프랑스:전사 2,218명
부상 1,155명
스페인:전사 1,025명
부상 1,383명

 

(우에스기 왈: 트라팔가 해전에 대한 영화장면을 찾을 수 없어서 마스터 앤 커맨더로 대신합니다. 프랑스와 영국 함선 모두 상대의 상선을 요격하는 전함인데 프랑스 함을 유인해 전투를 벌이는 장면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t2zfbvzeBuA&feature=related  저는 영국군 해군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 영화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35.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 1780년~1831년

프러시아 군인이자 군사이론가로 전쟁의 사기(Moral, 심리학)와 정치면을 강조했다. 그의 대표적인 이론 전쟁론(On War)는 완성되지 않은 채 출간되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유럽 계몽사상의 합리주의를 믿고 있으면서도 전쟁을 선호하는 개념을 완성시켰다. 그의 이론이 변증법을 참조하고 있어서 헤겔주의로 오해를 받고 있지만 그의 변증법은 헤겔주의와 상당히 다르며 헤겔을 따르고 있지도 않다. 그는 전쟁의 안개(Fog of War)가 갑자기 걷히면서 불완전하고 잘못된 정보, 엄청난 공포, 의심, 흥분과 같이, 뛰어난 지휘관이 신속하게 판단을 내려야 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변증법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역사를 배워 경험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앙투안 앙리 조미니(프랑스 군인으로 당대 최고의 군사사상가 중 한 명. 나폴레옹 전쟁에서 누명을 쓰고 러시아로 망명해 러시아군의 현대화를 도왔다 Antoine-Henri Jomini)와 달리, 전쟁은 숫자로 계산되거나, 지도, 지리, 그래프로 요약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클라우제비츠는 많은 격언을 만들어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격언은 "전쟁은 다른 수단들이 만들어낸 정치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War is the continuation of Politik by other means)"이다.

 

 

(우에스기 왈: 그러고보니 저도 전쟁론 책을 가지고 있었군요 ㅡ.ㅡ  그런데 읽지 않았습니다.

전쟁론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http://crissj.net/archives/760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ngrumong&logNo=140023935666 를 참조하시고 관심있는 분들은 책을 구입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동양의 대표적인 군사사상가 손자는 전쟁을 하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승리로 추천했지만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가져오는 다른 이점에 대해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