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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10부)

by uesgi2003 2012. 11. 30.


정치 선진국과 정치 후진국의 차이는 바로 국민성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정치 선진국의 경우에는 자신의 배경과 이익에 따라 정당을 지지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에는 기독교, 부유층, 백인, 장노년층, 중남부 보수지역이 공화당을 지지하고, 혼혈, 청장년, 중산층 이하, 대도시 개방지역이 민주당을 지지하죠. 그래서 이번 대선에서도 이런 지지계층에 따라 미리 판도를 알 수 있었습니다. 플로리다가 캐스팅보트가 된 것은, 원래 플로리다는 이민온 라틴계열의 중산층 이하 지지자가 많아서 민주당 지지로 알기 쉽지만 여유가 있는 백인 노인층이 대거 플로리다로 은퇴를 하기 때문에 동네에 따라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가 극명하게 갈리는, 막판까지 가봐야 하는 재미있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정치 후진국을 보면 자신의 배경이나 이익에 전혀 상관없는 '인지부조화' 지지가 특징입니다. 

또 다시 예를 들면, 정치혼란이 계속되는 태국의 경우, 부정부패가 이명박정부만큼이나 심각해서 군 쿠데타로 밀려난 탁신정부를 의외로 농촌, 저소득층, 저학력층에서 절대 지지하고, 반대로 탁신정부의 노선과 비슷한 대도시, 고소등, 고학력층은 탁신정부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구시의원부터 국회의원과 대통령까지 자신의 배경과 이익을 위해 선출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그런데 왜 수도권에 사는 저소득층이 강남과 영남 고소득층을 위한 정당을 지지하는 것일까요? 

서울 르네상스라는 허울 아래 목적도 없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한강 유람선과 새빛 동동섬, 청계상가 빈터 등에 1조원 가까운 돈을 쏟아붓는 것을 감싸고, 정작 자신들이 절뚝이며 힘들게 오르내리는 강북 지하철 계단을 에스컬레이터로 바꿔달라는 요구는 하지 못할까요? 

저소득층을 보호하려던 정부는 욕을 하고, 1%를 위해 파렴치한 짓을 하는 정부는 그렇게 옹호하는, 이런 '인지부조화'는 언제쯤 끝날까요?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 William Weir, The Career Press

 

1부

1.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Sargon of Akkad)
2. 해양족(Sea Peoples) 
3.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4. 손자(Sun Tzu) 
5.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6.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 
7. 한니발(Hannibal)

 

2부

8. 진시황(Qin Shih Huang) 
9.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10.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11. 무함마드(Muhammad) 
12. 샤를마뉴(Charlemagne) 
13. 오토 대제(Otto the Great) 
14. 토그릴 베그(Toghril Beg)

 

3부

15. 정복왕 윌리암(William the Conqueror) 
16. 살라딘(Saladin) 
17. 징기스 칸(Genghis Khan) 
18.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4부

19. 잔다르크(Joan of Arc) 
20. 메흐메트 2세(Mehmed II) 
21.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22.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23.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5부

24. 이반 4세(Ivan IV)
26. 도쿠가와 이에야스(Tokugawa Ieyasu) 
27. 나사우의 마우리츠(Maurice of Nassau)

 

6부

25. 성웅 이 순신(Yi Sun-sin) 

7부

28. 장 밥티스트 드 그리보발(Jean Baptiste de Gribreauval) 
29.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30.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31.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32.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8부

33. 나폴레옹 (Napoleon I) 
34.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35.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9부

36.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37.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38. 샘 휴스톤(Sam Houston) 
39.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40.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10부
41.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 
42.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Alfred Thayer Mahan) 
43. 도고 헤이하치로(Togo Heihachiro) 

 

11부 예정

44. Giulio Douhet 
45. Adolf Hitler 
46. Heinz Guderian 
47. Yamamoto Isoroku 
48. Raymond Spruance 
49. Mao Zedong 
50. Matthew B. Ridgway


41.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 - 1822년~1885년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으로 남군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이었다. 

 

1843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해, 1846년 멕시코 전쟁에 참전해 활약했지만 성격이 내성적이던 그랜트는 가족과 떨어진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알콜중독증에 시달렸으며, 이로 인하여 1854년에 불명예 제대했다. 

1861년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그랜트는 다시 준장으로 군에 복귀, 남부군이 차지하고 있던 헨리요새와 도넬슨요새를 점령하였다. 여기서 그랜트는 적에게 무조건 항복과 전투 중에 선택하라고 하여 별명이 'Unconditional Surrender' 즉, 무조건 항복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빅스버그 전투에서도 큰 전과를 세우자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그랜트를 북부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랜트는 게티즈버그 전투 이후 사기가 꺾인 남부군을 몰아붙였으며, 그리하여 1865년에 애포매톡스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링컨 암살 후, 앤드루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고, 그랜트는 국가군통수 대원수 겸 육군참모총장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존슨은 의회의 탄핵을 받았고 그랜트는 당시 여당인 공화당의 지지를 받아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랜트는 대통령이 되자 빈부격차와 인종차별 등 극심한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정부 각료들과 그의 비서들이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는 사태와 대규모 금융 스캔들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전쟁영웅인 그의 이미지는 완전히 추락했지만 1872년에 재선되어 많은 국민들이 의아해 할 정도였다.

대통령 퇴임후, 친구가 경영하는 중개회사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다가 사기를 당해 1884년 파산 선고을 했다. 사망 직전에 자서전을

완성했고 그 자서전은 미국 군 역사상 최고의 자서전 중 하나로 평가받았고, 1885년 7월 후두암으로 죽었다.


(우에스기 왈: 그랜트 장군에 대해서는 제가 잠시 중단하고 있는 미국 남북전쟁 시리즈

에 앞으로 자세하게 설명될 것입니다. 

지금은 http://blog.daum.net/uesgi2003/205, http://blog.daum.net/uesgi2003/206, http://blog.daum.net/uesgi2003/208, http://blog.daum.net/uesgi2003/209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보다 좋은 이야기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도 충분한 자료가 있지만 그림과 같은 자료를 주문했습니다. 다음 주면 도착하겠군요.

 

DVD 영화를 400장 이상 가지고 있다가 언제라도 볼 수 있는 하드 디스크에 담아놓으면서 얼마 전에 소장해야 할 것들을 빼고 모두 버렸습니다.

전사관련 DVD도 꽤 많더군요. 그 다음부터는 안사겠다고 생각했는데...

블로그 자료 때문에 다시 사기 시작합니다. )

 

 

 

 

 

 

 

 

 

 

 

 

42.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Alfred Thayer Mahan) - 1840년~1914년

미해군 장관이자 전략지정학자로 '19세기 미군의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국가가 세계적으로 더 강력한 영향력을 점유할 수 있다는 머핸의 해양력’(sea power)을 집대성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이 1890년에 출간되었다. 머핸의 해양력 개념은 전 세계 해군의 전략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미국, 독일, 일본, 영국 등이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때문에 1890년대 유럽의 해군력 증강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머핸의 사상은 지금도 미국 해군 교리 곳곳에 남아있다.

 

머핸은 17세기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19세기 프랑스와 영국 간의 해전에서 결국 영국이 승리해서 적의 침공을 막아내고 해상봉쇄를 풀었던 역사에 주목했다. 그는 해군전력이 국력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설명했지만 외교와 육군의 역할을 간과했고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의 성공은 설명하지 못했다.

또한 그는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전쟁의 불확실성을 완전히 없앨 수 없기 때문에 해군장교는 반드시 역사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해군이 독일제국을 봉쇄해 몰락시켰고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의 이론은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미국이 캐리비안해와 태평양에 방어기지를 가져야 하며 하와이도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머핸은 역사를 연구해, 평화 시에는 교역로로 전쟁 시에는 봉쇄를 할 수 있는 해상력이 있어야 국력이 커진다고 믿었다. 그리고 적의 함대뿐만 아니라 상선도 무력화시키려면 잘 훈련된 선원과 전함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잠수함이 진화하기 전에 만들어진 그의 이론때문에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유보트를 막을 호위함 도입이 늦어졌으며, 정작 이론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미해군은 1930년대에 일본 상선을 요격할 장거리 잠수함을 개발하고 있었지만, 머핸에 심취한 일본군은 잠수함을 함대의 보조전력으로만 활용하고 미상선을 요격하지 않았다.

머핸은 영국이 미국 동부 항구를 봉쇄할 경우를 대비해서 모든 전력을 뉴욕과 같이 트여있는 한 곳에 집중시키고, 다른 항구는 어뢰정으로 방어한다는 비상계획을 준비했었다. 영국도 미함대를 견제하기 위해 전력의 대부분을 그곳에 집중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항구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판단이었다. 미해군의 순양함 별동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계속 공세를 취하다가 영국 함대가 다른 항구로 이동하면, 뉴욕 항의 대함대가 영국 본토 항구를 공격해서 영국 함대는 귀환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크게 발전한 선박기술과 맞물려 머핸의 이론은 전세계 해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 황제 빌리암 2세는 머핸의 이론을 읽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알프레드 폰 티피츠 제독(Alfred von Tirpitz 18491930)은 머핸의 명성을 이용해서 해군에 대한 지원을 받아냈다. 

머핸과 영국 제독 존 피셔(John Fisher 18411920)는 해군이 근해와 원양을 모두 지배할 전력이 못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머핸은 근해에 해군력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피셔는 근해는 잠수함으로 방어하고 원양은 전함과 순양함으로 지배해야 한다는 균형론을 주장했다.  

프랑스는 처음에는 머핸의 이론을 중요하게 받아들였지만 1차대전을 겪으면서 육군과의 합동작전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미국은 남북전쟁 후에 증기선을 대거 도입하는 것에 반대를 했었지만, 머핸이 전함으로 구성된 대함대로 대회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최신기술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역사에 미친 해양력(The Influence of Seapower Upon History, 16601783)은 일본어로 번역되어 제국해군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극동에서 러시아의 확장을 막을 수 있었지만 전함중심의 함대운용을 고집해, 비행기와 잠수함의 역할이 커진 2차대전에서 패전하게 되었다. 

 

43. 도고 헤이하치로(Togo Heihachiro) - 1848년~1934년

 

일본의 해군제독으로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군인으로 인생을 마감했다. 일본인들은 그를 '군신'으로 여기며, '동양의 넬슨(The Nelson of the East)으로도 불린다.

 

그의 집안은 13세기부터 무사 집안이었으며, 도고도 무술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로부터 '반항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반항이 잦았다.

그는 대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워서 '사쓰마' 지역의 다이묘 시마즈 다다요시의 사무라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63년 어느 날, 그는 "앞으로 있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 일본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막강한 해군력을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처음으로 참가한 전쟁은 1894년의 청일 전쟁이었다. 대만은 일본의 영토가 된다.

두 번째로 참가한 전쟁은 러일 전쟁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발트해 함대를 보유한 해군 강국이었고, 일본조차도 패배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러시아 해군에게는 심각한 흠이 있었다. 

러시아 해군은 함장과 해군 제독들의 무능과 일부 관료들의 예산 횡령이 잦았고, 제독들이 귀족출신에다 힘든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 해군은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발트해 함대를 보유했다는 장점이 있었음에도 제독들의 무능, 낮은 도덕성, 하층민 병(兵)들과의 계급대립, 미숙한 군사능력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부정부패에 물들지 않은 사람은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가 유일했다. 그는 황제의 허락으로 발트해 함대를 이끌고 일본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국가들은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 즉, '거대한 대포를 가진 큰 몸집의 전함으로 해상의 표적을 일소한다'는 생각이었고 지금과는 달리 일만 여톤의 거대한 몸체를 지닌 전함들과 전함보다는 작지만 속도가 빠른 순양함을 건조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도고 헤이하치로는 생각을 달리 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들이 포탄 개량에 있어서 포탄이 적의 전함의 장갑을 뚫고 들어가는 데 중점을 두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포탄의 폭발력 및 화재를 일으키는 능력을 중심으로 하여 '시모세'라는 화약을 개발하였고, 이 포탄은 두께는 작지만 속에 화약을 많이 넣었기 때문에 폭발력이 강하여, 러시아 군함에 쓰던 부식 방지용 페인트는 '시모세' 한 대 맞고 쉽게 화염에 타올랐다고 할 정도로 무력화시키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더구나 발트해에서 아프리카를 돌아 일본근해까지 이동거리가 너무 길었던 러시아해군의 한계도 패배의 한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도고제독이 명성을 얻은 쓰시마 해전은 1905년 러일 전쟁  쓰시마 섬 부근 바다에서 일본 연합함대 러시아 발트해 함대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노급전함을 주력

 

으로 한 함대가 정면으로 격돌한 당시 세계최대의 해전이었다. (그림은 청일전쟁의 그림으로 클릭하면 많이 커집니다.)

일본 해군이 승리했고, 러시아 발트해 함대는 전멸했다. 일본에서는 일본해 해전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동해 해전이라 부른다. 이후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러일전쟁 중 러시아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함대를 동워하려고 했지만 일본 해군보다 3배나 많은 함대를 보유하면서도 각 지역에 흩어진 러시아 함대를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흑해 함대는 오스만 제국 때문에 출동이 불가능했기에 출동 가능한 함대는 태평양 함대밖에 없었다. 

러시아 해군 사령부는 태평양함대만으로는 일본함대에 대항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트해 함대와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제독이 이끄는 제3태평양함대를 추가로 파견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주력함대를 유럽에서 동아시아까지 이동시키는 일은 당시로써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함대의 대부분이 증기선이기에 항상 석탄공급이 필요했다. 수시로 보급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고, 또한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만 했다(그림 참조).

그런데 러시아는 이들 항구와 운하를 지배한 영국과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 1904년 10월 21일, 북해에서 일어난 도거뱅크 사건에서 러시아 해군은 영국 어선을 일본 수뢰정으로 오인하고 공격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영일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은 일본을 지지했고, 스페인에게 러시아 발트해 함대에 보급을 하지 말라는 압력과 함께 영국 식민지 항구에도 발트해 함대의 입항을 금지시켰다.

 

사실상 수에즈운하 통과도 일부 함대만 가능하여 함대를 둘로 나누어 제2 태평양함대 주력은 아프리카대륙 남쪽 끝 희망봉을 돌았고, 함대는 마다가스카르의 노스베항에서 합류했다.

이후 인도양에서는 러시아의 우호국 항구는 매우 적었고, 동맹국 프랑스에게도 냉대를 받아 약 반년간의 항해는 피로가 극에 달했고, 사기도 매우 저하되었다. 제2, 제3 태평양함대는 1905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캄란 만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목표로 항해를 시작했다.

 

한편 일본 연합함대는 황해해전과 울산해전에서 동아시아에 있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격파해 무력화시킨 뒤 발트해 함대와 대결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발트해 함대를 어디서 맞아 싸울 것인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캄란만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항로는 3곳으로 쓰시마 해협, 쓰가루 해협, 소야 해협이었다.

 

러시아 함대에 비해 세력이 열세인 일본 연합함대는 이중 한 곳에 전력를 집중시켜야 했다. 일단 두 곳은 거리상 및 기뢰에 의한 방어가 튼튼했기에 도고 제독은 쓰시마 해협을 통과할거라 예상하고, 한반도 남부해안에 주력함대를 배치하고 경계망을 폈다.

5월 14일 발트해 함대가 캄란항을 출항했으나, 발트해 함대의 진로를 알 수 없게된 일본 연합함대는 초초해지기 시작했고, 발트해 함대가 태평양에서 호카이도로 향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있었다. 도고는 일본 대본영에 연락해 훗카이도로 이동하고자 한다는 전보를 보냈고, 대본영에서는 일단 신중하게 기다리라는 연락이 왔다. 도고는 5월 26일 정오까지 기다리다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날 오전 발트해 함대의 석탄운반선 6척이 상해에 25일 저녁에 입항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운반선이 함대에서 떨어져 나왔다는것은 항속거리가 긴 태평양 루트로는 가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것으로 도고는 쓰시마 해협에서 발트해 함대를 기다리기로 했다. 만약 운반선이 하루라도 늦게 입항했다면 도고의 함대는 훗카이도를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1905년 5월 27일 오전 2시 45분, 규슈 서쪽해역 203호 지점에서 연합함대의 순양함 시나노마루가 발트해 함대의 병원선 아리욜의 조타를 발견했고, 뒤이어 발트해 함대의 모습을 확인하고 4시 45분에 “적함 발견”이란 의미가 있는 "타타타타타"(실제 타의 연속)로 시작되는 “적함 203지점에서 나타남 0445”을 타전했다.

곧 시나노마루는 순양함 “이즈미”와 교대 후, 적에게 발견되지 않게 이탈했다. 이즈미는 적의 위치 및 방향을 무선으로 연합함대에 통보했다.

시나노마루가 야간에 병원선을 발견한것은 병원선이 조타관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발트해 함대는 시나노마루가 무선으로 통보하는 동안에도 포격을 가하지 않았고, 전파방해도 하지 않았다.

강력한 무선기를 갖고 있던 우랄 함장의 방해전파발신허가에 대해 로젠스트 벤스키는 "일본측의 무선을 방해해야하나"라고 명령했다. 시나노마루가 야간에 발트해 함대를 관측하면서 전파를 발신하는 동안 러시아 함대는 이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당시 무선방위측정기는 실용화 이전이었다)

 

5시 05분 한반도의 진해만에 대기중인 연합함대가 출항했다. 바다가 거칠었기에 원래 계획이던 기뢰작전은 하지 않고, 포격전 위주로 전투를 진행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10시 최초로 달려온 연합함대 제5,6 전대가 발트해 함대를 확인했다. 11시 최초로 발트해 함대에서 위협포격을 가했고, 서로간의 포격이 벌어졌으나 전투상태로까지 번지지 않고 일정거리를 유지했다.

양쪽 모두 1발의 명중탄도 없었으나 이때 일본 연합함대의 일부가 발트해 함대 앞을 가로지르기를 몇번을 하여 발트해 함대는 대열이 2열종대에서 3열종대로 바뀌었고, 순양함 함대는 후열로 밀리게 되었다.

13시 39분까지 연합함대의 모든 함대가 집결하고, 연합함대 주력 제1, 제2 전대가 발트해 함대를 좌현 남쪽에서 시야로 확인하자 전투깃발을 내걸고 전투개시를 명령했다. 13시 55분 도고는 연합함대 기함 미카사에서 Z기를 기양하라고 지시했다. Z기는 "황국의 흥폐, 이 전투에 달려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노력하라."라는 의미를 가진 신호기였다.

14시 2분 침로를 남서로 정한 연합함대와 침로를 북동으로 정한 발트해 함대는 반항로(평행과는 다른)상에 있었다. 14시 3분 양측 함대의 거리가 11,000m까지 접근했다. 거리 8,500m 에 이르자 포술장교가 포격전의 사격준비를 우현으로 할것인지 좌현으로 할것인지 물었다.

어느덧 거리 8,000m가 되자, 도고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는 모습을 보였고, 선두에 있던 기함 미카사는 크게 좌현으로 돌기 시작했고 러시아군 앞에서 대반전하는 일명 '정(丁)자전법' 혹은 '도고 턴'의 개시였다.


러시아 함대는 전함, 순양함의 대부분을 침몰 혹은 나포당해 대부분의 전력을 이 해전에서 잃어버렸다. 일본함대의 피해는 경미했다. 대함대끼리의 해전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의 차가 이렇게 크게 난 적이 거의 없었기에 해전사 역사상 매우 보기 드문 승리였다.

이 승리는 세계를 놀라게 했고,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할 시 일본에게 매우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 양국 함대의 피해
    • 러시아 함대: 격침 16척(전함 6척, 기타 10척), 자침 5척, 나포 6척, 중립국 도피 6척, 자국항 도착 3척(순양함 아르마즈, 구축함 브라브이, 크로즈누이)
    • 일본함대: 침몰 3척(수뢰정 3척)
      • 일본 수병 전사 117명, 부상 583명

 

(우에스기 왈: 쓰시마 해전은 일본관점의 기록만 우리에게 알려져왔었는데, 몇 권의 귀중한 러시아 자료가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러시아 전사를 러시아어에서 한국어로 제대로 번역할 번역가가 없어서 거의 대부분 상당히 조악한 수준인데 '짜르의 마지막 함대'는 다른 책에 비해 번역이 잘되어 있습니다.

특히 러시아관점에서 처음부터 이 해전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어서 러일전쟁에 관심있는 분들에게는 강추입니다.

 

쓰시마 해전의 동영상은 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인 http://www.youtube.com/watch?v=P5ze4-iFEL4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