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은 역사 그것도 전사 블로그를 만들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드렸었습니다. 언어의 장벽때문에 관심있는 자료를 이용하실 수 없는 분들을 위해 제가 대신 전달해 드리는 것이고 좀 더 바란다면 국내에 잘못 알려진 역사에 대해서도 정확하고 다양한 시각을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토요 역사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제가 전달하고 싶었던 주제는 '역사를 통해 배우는 리더십'입니다. 그런데 제가 감히 이리 저리 자르고 재면서 재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섣불리 여러분에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러니 그렇게 알아두세요'라고 던지기 보다는 지루하더라도 직접 판단하실 수 있는 사실(Fact)을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라고 일부 인기있는 강사들처럼 자극적으로 재단해서 마구 던지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던진 오류가 얼마나 심각하게 확대 재생산되는 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고, 제 이야기에 여러분이 주시는 귀중한 의견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정리하는 '너구리의 손에 놀아난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이야기는 일본어로 된 훨씬 정확한 자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일본어를 잘 하시고 관련 자료를 많이 아시는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 나름대로 오랜 동안 모은 자료를 가지고 정리했지만 아무래도 현지에서 연구하신 일본인 학자들의 자료만큼 정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두 무장 모두 제가 상당히 싫어하는 자들이지만 그 지역으로 일본 여행을 가시는 분이 있어서 특별히 정리해봅니다. 혹시 이 두 인물을 좋아하시는 분은 없겠죠?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의 두 축 중 하나였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역시 우리 선조를 상당히 괴롭힌 놈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게임의 영향을 받아 황당한 역사관을 가진 분 (특히 청소년)이 있을텐데, 간단하게 말해서 상당히 창피스러운 일입니다. 마치 프랑스인이 독일군 나치 복장에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본론에서는 역사의 사실을 중심으로 설명해야 하니까 예의를 그리고 객관성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달라지는 톤을 나무라지 마시고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 너구리의 손에 놀아난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이번 이야기는 두 무장의 주군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무장 특유의 단순하고 순진함이 오히려 주군을 해치고 자신도 토사구팽당하게 되는 우여곡절많은 이야기다. 이들의 새옹지마 인생을 설명하기 전에 우선 간단한 소개부터 하도록 하자.
대부분의 그림은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그리고 마치 당시의 기록화같은 고풍스러운 그림이 많은데, 대부분 200년 이후에 그려진 그림이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왼쪽 오징어 머리는 마에다 도시이에 - 히데요시의 절친이자 가신)는 상당히 높은 투구를 자신의 상징으로 만들었는데 180cm가 넘는 거구를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실제로 키가 크지 않아서 투구로 키를 크게 보이게 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그림은 기요마사의 특징을 창 하나만 빼고는 한 눈에 모두 보여주는데, 그가 일본 최고의 축성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조선에서 호랑이 사냥한 것을 일본에 들여와서 상당히 요란스럽게 선전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상징인 투구다.
그가 입었던 갑옷을 현대에 재현한 것으로 실제 판매되고 있는 상품이다. 약 7,000,000원 정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통 무장의 갑옷을 장식하거나 코스프레하는 사람이 없지만 일본에서는 젊은 층에서도 생각보다 많은 편이다.
가토 기요마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먼 친척으로 다른 6명의 무장과 함께 히데요시가 패권을 잡는 결정적인 전투에서 대활약해서 '시즈가타케(賤ケ岳)의 일곱 자루 창[七本槍]'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아래의 그림에 7본 창의 몇 명이 보이는데 가장 오른쪽이 가토 기요마사.
1.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政則)
2.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3.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또는 가토 요시아키라.
4.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5.가타기리 가쓰모토(片桐且元)
6.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7.가쓰야 다케노리(糟野武則)
히데요시의 가장 총애받는 무장으로 다이묘까지 오른 기요마사는 제2 선봉으로 고니시 유키나가(그림의 왼쪽, 오른쪽의 기요마사 옆은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조선을 침공해 조선과 명나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호전성을 보였다.
이 그림은 조선침공을 협의하는 장면으로 두 사람에게 그리고 일본 역사에 큰 반환점이 된 인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바로 뒤에 숨어있다.
조선침공에서 승승장구한 기요마사는 호랑이를 대대적으로 사냥했고 귀한 가죽을 히데요시에게 조공을 보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호랑이 사냥과 가죽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당시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었기 때문에 호랑이 사냥은 마치 일본설화에 나오는 괴수사냥과도 같았다.
조선의 두 왕자를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던 문신 이시다 미쓰나리가 군감찰 역을 맡으면서 조선에 출병한 무장들의 발언과 행동을 숨기지 않고 히데요시에게 알렸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 후에 자신과 아들을 보필할 행정과 정치전문가로 키우던 인물로 히데요시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내는' 꼴을 당한 무장들의 심사가 편할 수가 없었는데 주군에게 숨겨줘야 할 어쩔 수 없는 명령불복종이나 독단적인 언사까지도 그대로 보고하는 바람에 무장들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몹시 화가 난 히데요시는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무장인 기요마사를 일본으로 불러들이고는 만나주지도 않았고 기요마사는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시다 미쓰나리부터 만나서 화해하고 잘 보이라'는 것이었다. 기요마사는 반드시 미쓰나리를 자신이 죽이겠다는 맹세를 하고 차라리 은둔하겠다고 대답했는데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임진왜란이 아직도 한창이던 1596년 여름 중부지방에 큰 지진이 일어났고 기요마사는 즉시 히데요시에게 달려가 병사들을 풀어 경비를 서게 하고 자신이 직접 성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히데요시는 화를 풀고 다시 기요마사에게 조선 출병을 명령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상황은 크게 달라져있었고 정유재란에서 울산성에 몰린 기요마사는 말의 피를 먹고 종이를 끓여먹을 정도로 굶주리다가 '내 모습을 태합님(문신 중 최고직으로 일왕을 대리하는 관백을 물려주고 막후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알려달라'며 최후의 순간을 준비했다.
죽음 직전에 조선 남부에 있던 일본군이 모두 달려와 구원에 나서 그를 구출했다.
그는 축성술의 대가였고 왜군도 공성과 수성은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울산성도 난공불락의 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히데요시가 죽고 히데요시 가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앞의 오징어머리 투구)가 노환으로 죽어가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정실 네네(관직 키타노만도코로)를 앞세워 교묘하게 히데요시의 무장파 다이묘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인다.
문신출신으로 거대한 이에야스에 맞서 히데요시 가문을 지키려고 분투했던 이시나 미쓰나리입니다. 그의 문장 대일대만대길은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 모두가 한 사람을 위한다면 만사가 잘 풀린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세키가하라 도박이 계획대로 맞았다면 일본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일본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야스는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앞세워 아직 히데요시에게 충성심이 남아 있는 다른 다이묘들의 반감을 누그러트렸다. 그림에 그런 배경이 너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자신은 숨어있고 히데요시의 무장파 중 양대 기둥인 기요마사와 마사노리가 다른 다이묘들을 설득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히데요시를 배반한 것도 아닌데 이에야스를 편들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텐데, 거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에야스의 검은 속셈을 꿰뚫어본 이시다 미쓰나리가 반 이에야스 세력을 결집시키고 있었는데 개인적인 원한이 너무나도 컸던 두 사람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다른 무장파 다이묘들을 앞장 서서 설득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어머니와 같았던 네네가 이에야스 편을 들었기 때문인데, 네네는 후손을 못 낳았고 측실인 요도도노 (본명 차차)와 히데요리가 히데요시 가문을 물려 받은 것이 못마땅했고 이에야스의 감언이설과 평소 무장파 다이묘들의 원한을 자주 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야스의 검은 속셈대로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해준 가토 기요마사는 영지가 서군 진영에 있었기 때문에 세카가하라 전투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고 대신에 큐슈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고니시 유키나가의 성을 함락시키고 자신의 걸작품 구마모토 성을 지었다.
7본 창 당시의 활약으로 3,000석이라는 큰 상을 받았던 그가 자신도 모르게 주군인 히데요시 가문의 미래를 막는 전공으로 54만석이라는 큰 영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세카가하라 전투에서 반 이에야스 진영을 모두 궤멸시킨 이에야스는 아예 히데요시 가문멸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중간에서 난감해진 기요마사는 어린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평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병에 걸려 1611년에 죽었다.
히데요시 가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걸림돌이 되던 기요마사를 제거하기 위해 독살했다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히데요시 가문의 멸족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연 오사카성 공방전입니다.
기요마사가 죽고 4년 후인 1615년 6월, 오사카 공성전에서 패전한 히데요리와 요도도노가 목숨을 끊었고 히데요시 가문은 완전히 멸족하게 되었다. 주군에 대한 지극한 충성심, 개인적인 원한 또는 전장에서 평생을 보낸 무장의 순진성으로 오히려 최대의 적에게 이용당하고 주군의 가문을 멸망시킨 새옹지마 인생이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기요마사보다도 이에야스에게 더 이용당하고 철저하게 당한 인생이었다. 기요마사가 주군 가문의 멸족까지는 못보고 급사한 반면에 마사노리는 두 명의 후계자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봤고 이에야스 가문의 철저한 말려죽이기로 말로가 비참했다는 점에서 비극의 무장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마사노리가 자신의 상징으로 삼았던 물소뿔 투구.
(가끔씩 물어보시는 분이 있는데, 실제로 무거웠습니다. 일본 갑옷 자체가 전체 갖춰입으면 15kg이 넘기 때문에 당시 체격이 상당히 작았던 일본인에게는 상당한 무게였고 뒤로 넘어지면 잘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실제 전투에서는 투구를 바꿔 쓰고 경량화된 약식 갑옷을 입기도 했습니다.)
기요마사와 함께, 히데요시의 먼 친척이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무장교육을 받아 7본 창 중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리며 기요마사보다 많은 5,000석을 하사받았을 정도로 용맹했다. 잔인할 것만 같은 그의 외모와 달리 의리에 상당히 약해서 (당시 기록은 카더라 식의 미화가 워낙 많아서 신빙성은 떨어집니다) 훈훈한 일화를 많이 남긴 독특한 무장파 다이묘였다.
조선출병을 앞둔 일본 다이묘들입니다. 역시 오른쪽 한 편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있습니다.
히데요시의 대표적인 무장이었기 때문에 이후 행보가 기요마사와 거의 비슷하다. 조선침공에도 참가했었는데 도중에 돌아와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의 할복을 직접 지켜보는 검시관이 되면서 순탄치 않은 인생이 시작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쓰구는 후손이 없었던 히데요시의 조카로 관백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라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받았지만 친아들 히데요리(豊臣秀頼)가 태어나면서 위기에 몰렸고 처신을 잘못해 할복 명령을 받았다.
그림은 조선침공 회의에 참석한 마사노리인데, 오른쪽 털복숭이 무장 중에 눈이 부리 부리한 사람이다. 오른쪽 한구석을 보면 이시다 미쓰나리가 조용히 숨어 있는데, 조선에서 다른 무장과 함께 미쓰나리와 원수지간이 되었다.
기요마사는 부침을 거듭한 반면에 비해 마사노리는 240,000석을 하사받는 등, 히데요시의 신임을 계속 유지했지만 히데요시의 사후에 벌어진 혼란에서는 기요마사보다 훨씬 더 어리석고 결정적인 언행을 보였다.
앞의 그림을 다시 가져와 설명하면, 이에야스의 편을 드는 것이 히데요시 가문(히데요리)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주저하는 무장파 다이묘들을 설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으며 이용당했다.
다른 다이묘들 : 미쓰나리 놈은 저도 죽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히데요리님이 서군을 지지하시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사노리 : 히데요리님이 서군을 지지하시면 당장 오사카 성으로 들어가 히데요리님의 옆에 설 것입니다. 그렇지만 8살인 히데요리님이 그렇게 판단하실 리가 없고,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모두 다 미쓰나리놈의 계략입니다. 이에야스님을 믿도록 합시다.
그래도 다이묘들이 마지못해 따르는 분위기가 계속 되자. 마사노리는 아예 자신의 성을 이에야스에게 바쳐 사령부로 사용하실 수 있게 해드리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했고, 분위기가 달아오른 다이묘들은 앞다퉈 군사제공과 편의제공을 약속하게 되었다.
아마도 정치 9단인 이에야스가 창과 칼 밖에 모르는 마사노리에게 사전에 바람잡이 역할을 교묘하게 설득했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주군의 가문을 멸족시키는 예고편인 줄도 모르고 6,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서군의 우키타 히에이에의 17,000명의 공격을 막아내며 맹활약했다.
전투 후 논공행상에서 수훈갑을 인정받아 50만석의 대 다이묘가 되었지만 히데요리와의 오사카 성 공방전에서는 이에야스의 의심을 받아 공격군에 가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영지 위치때문일 수도 있고, 요도도노(히데요시의 측실, 히데요리의 어머니)와의 소원한 관계때문일 수도 있고,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부터 이미 이에야스에게 복종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인지 히데요리 측의 도움 요청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사카 성에서 필요했던 것은 정작 경험과 명성이 높은 지휘관과 정예병이었는데, '성만 잘 지키면 될 것'이라는 조언과 쌀 제공에 그친 것을 보면 말년의 그는 현실에 타협하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히데요리가 자결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이 멸족하자 새로 열린 이에야스의 에도막부는 노골적으로 도요토미 가문 출신의 다이묘들을 숙청하기 시작했고 가장 큰 목표는 바로 마사노리 자신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연 직후 겐나엔부를 선포했는데, 막부 첫 해부터 무기를 창고에 넣고 자물쇠를 채워 두번 다시 열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 어떤 다이묘도 군비를 확충해도 안되고 사사로운 영지확장을 노려서도 안된다는 경고를 했다.
마사노리는 홍수에 부숴진 성을 보수하겠다는 요청을 막부에 미리 했지만 일부러 허가를 내리지 않고 시간을 끄는 혼다 마사즈미(이에야스의 모사꾼)에게 속아 보수공사를 했다가 이것이 빌미가 되어 엉뚱한 영지인 가와나카지마(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의 혈전으로 유명한) 45,000석으로 쫓겨났다.
마사노리는 정이 많았던 주군이었기 때문에 많은 가신이 그대로 따라왔고 고생을 하는 가신을 보며 그리고 에도 막부의 '토사구팽'이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쿠시마 가문은 마사노리의 사체를 막부의 허락도 없이 화장했다는 이유를 들어 모든 영지를 몰수하고 몰락시켰다.
개인적으로야 임진왜란의 원흉인 두 무장의 말로가 조금도 불쌍하지 않지만, 이들의 인생 새옹지마를 보면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다시금 생각나는군요.
지금 누구를 위해 충성하든, 누구를 해치고 있든 더 크고 나쁜 놈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마치 양심선언이라도 하듯이 찔끔 찔끔 "당시 상황이 그랬다.", "시켜서 그랬다"라는 모 인사들이 생각나서 역시 역사는 돌고 돈다라는 말이 씁쓸한 입맛을 남깁니다.
이야기를 정리하고 나니 두 장면이 생각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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