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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일본

용과 호랑이의 싸움 - 가와나카지마 전투 (2부)

by uesgi2003 2013. 3. 3.

 

제가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많은 분들의 의견을 반갑게 맞이하고 진지하게 답변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강조했듯이 저는 단순히 다른 학자 분들의 자료를 정리해서 전달하는 메신저이기 때문에 제 이야기는 불투명한 역사에 대한 한 시각에 불과합니다.

 

다른 분들의 적극적인 의견을 언제라도 환영하고 제가 더 공부할 수 있는 도움을 주시는 분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양한 의견이나 반박 중에도 제가 한사코 거절하는 종류가 있습니다.

 

1. 인터넷 신조어를 섞은 반말투.

예를 들면, '님은 000가 0000에게 발린 것을 모르삼?' 식의 근거도 없고 예의도 없는 의견은 바로 삭제합니다. 1:1 대화라면 이런 댓글을 수용하지 못하는 제가 속좁은 사람이지만 수 백 명이 보는 자료에서는 다른 분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의견을 주신 분뿐만 아니라 우연하게 그 내용을 보실 분들을 위해서 무례하지 않은 글을 적습니다.

 

2. 아는 척이 하고 싶은 지적.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지적해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언제라도 환영합니다. 제 잘못으로 많은 분들이 함께 오류에 빠지시면 안되기 때문에 너무나도 귀중한 의견이죠.

그렇지만 말꼬리 잡기 식의 지적은 더 이상 참지 않고 삭제하기로 했습니다. 의견이 갈릴 수 밖에 없는 부분에 대해 한사코 지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제가 정리한 내용은 그것이 아니라고 해명해도 '당신이 주장하려고 했던 것이 그거잖아!'라며 계속 말꼬리를 잡고 자신의 지식을 뽐냅니다.

그런 분에게는 부족한 제 이야기에 오시지 말고 더 나은 자료를 정리해서 공개하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는 ----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맞지 않나요?'라는 지적과 '----라는 것도 모르나요? 다시 확인해보세요'라는 지적은 모두 제가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왕이면 첫 번째와 같이 부드러운 지적이라면 '제가 좋은 분들을 만나고 있구나'라는 작은 기쁨을 주는 반면에 두 번째의 지적은 학술회 발표처럼 피곤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즐겨주시는 분, 특히 토요 역사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주말 아침부터 피곤한 몸을 일으키시는 분들덕분에 제가 오늘도 부족한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장 먼저 제 감사인사를 받으실 분은 수십 년동안 자료를 연구, 정리하신 학자분들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안내를 드리면, 지명 중에 야마, 가와 등 지명 뒤에 따라 붙는 단어가 있는데 산, 천(강)의 일본어입니다. 남산을 번역할 때에 그대로 남산으로 두던가 아니면 남 마운틴으로 하는 것이 혼란스럽지 않기 때문에 저는 야마는 산으로 가와는 강이나 개울로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대신에 중간 공백을 두어서 제가 바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후카시 성, 차우스 산, 치쿠니 강... 이런 식으로 한 칸씩 공백을 두도록 하겠습니다. 

 

용과 호랑이의 싸움 - 가와나카지마 전투 (2부)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는 시나노 지역의 주요 다이묘로 현재의 마쓰모토 지역에 있는 후카시 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다케다 신겐이 1544년에 아나 계곡을 침공했을 때에 다카토 요리쓰구 편을 들었다가 스와 지역을 내주고 말았었는데 신겐이 우에다하라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용기를 내서 무라카미 편을 들어 스와 호수 근처에 있던 다케다의 외곽요새를 공격하기로 했다.

6월 1일, 시나노 연합군은 다케다의 요새를 불태웠지만 3개월 후에 다시 내주고 말았다. 나가토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높은 지역을 선점한 나가토키군은 다케다군을 유리한 지역에서 기다렸지만 지리한 대치를 하던 신겐은 말의 발굽을 짚으로 묶으며 야습을 감행했고 나가토키군은 갑옷도 챙겨입지 못하고 그대로 달아났다.

 

1550년, 신겐은 시나노 침공을 재개했고 그 첫번째 희생양은 나가토키였다. 3개의 성을 연달아 빼앗긴 나가토키는 본성마저 공격당하자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에게 도망쳤다.

지난 번에 패배를 당한 신겐은 요시키요를 공격하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했다. 먼저 요시키요의 지지세력부터 배반하게 만든 신겐은 10월 9일에 요시키요의 도이시 성(戸石城)을 포위했고 8일 동안 쉬지않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도이시 성은 끝내 성문을 열지 않았다.

11월 9일, 신겐은 더 이상의 공성을 포기하고 고후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도이시 성의 수비군이 반격에 나섰고 성안에 있는 것으로 알았던 요시키요는 정작 외부에서 기습을 해와 다케다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신겐의 공격을 두 번이나 막아냈지만 세 번째는 그러지 못했다. 신겐은 1551년 다시 시나노를 침공해 도이시 성을 결국 함락시켰다. 

선봉장은 사나다 유키타가(真田幸隆)로 원래는 신겐의 침공으로 주군을 잃어서 다케다 가문과는 원수가 되어야 했지만 사나다 가문 특유의 실리감각으로 다케다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무장이었다. 사나다 가문은 다케다 가문이 멸문당한 후에도 계속 그 이름을 남겼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었고 가문 특유의 실리감각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1553년 1월, 신겐의 아들 다케다 요시노부와 신겐의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가 요시키요의 본성인 가쓰라오 성(葛尾城)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세를 읽은 요시키요의 지지세력이 신겐에게 합류하면서 가쓰라오 성은 7일만에 함락되었다.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북쪽으로 도망쳐 우에스기 겐신에게 달려가 시나노 일대가 모두 신겐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경고를 했다. 몇 개 남지 않은 자신의 성이 모두 함락된다면 다케다군은 우에스기 가문의 영토인 에치고 국경까지 밀어닥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가와나카지마 1차전, 1553년

 

1차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와나카지마 전투만을 따로 떼어서 설명하기가 매우 힘들다. 9월 29일 후세(布施) 전투를 가와나카지마 1차전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 전투는 몇 개월 동안 광범위한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의 한 장면일 뿐이다.

 

사진 설명: 일본인들의 상술도 대단한데, 심지어 가와나카지마 1차전인 후세전투까지 지역축제의 테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이름만 후세전투로 보이고 지역 특산품 홍보축제로 보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IE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됩니다.

 

우에스기 겐신은 요시키요의 요청을 받는 즉시 행동에 나섰는데 다케다 신겐이 요시키요를 추격하는 동안 상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와나카지마에서 만나지 못하고 좀 더 남쪽인 하치만에서 신겐의 채석장을 발견했다.

다케다 신겐은 가쓰라오 성을 함락시킨 후에 방심하지 않고 요시키요의 영지를 흡수하는 동시에 전초부대를 북쪽의 치쿠마 강(千曲川)까지 내보냈다. 하치만까지 진출한 신겐의 정찰대는 우에스기군이 개울 반대편에 있으며 전초전이 벌어졌다는 보고를 해왔다. 우에스기군의 병력은 약 5,000명 정도로 손쉽게 승리를 거뒀는데 그것이 기록에 남은 전부일 뿐이다.

겐신은 개울을 건너 가쓰라오 성을 공격해 신겐의 지휘관을 죽였지만 성은 함락시키지 못했고 다케다 신겐도 아직 시나노 일대를 완전히 합병하지 못한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에 겐신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후퇴했다.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과감하게 반격에 나서 시오다 성(塩田城)을 탈환하고 자신에게 등을 돌렸던 배반세력을 몰아내면서 1차전의 중심은 시오다성으로 옮겨졌다.

 

(하치만 전투. 파란 색이 우에스기군, 붉은 색이 다케다군)

 

3개월 후인 9월에 다시 시나노로 돌아온 다케다 신겐은 아예 요시키요의 잔재세력을 목표로 삼고 두 개의 성을 함락시키면서 모든 수비군을 처형하고 시오다성에 남아있는 수비군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9월 12일, 다케다군이 시오다 성으로 다가오자, 만용보다 현실을 택한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성을 버리고 다시 한 번 시나노를 탈출했다. 그가 떠나자 마자 16개 요새가 모두 항복했고 요시키요의 영지는 철저하게 약탈을 당했다.

 

10월 초에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첫 번째 조우를 하고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으며 어떻게 조우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기록이 없다. 아마도 요시키요를 추격하던 다케다군이 우에스기군과 마주쳤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겐신이 다케다군의 북상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는 것이다. 며칠 후에 양쪽은 다시 하치만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번에는 겐신이 다케다군을 추격하면서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고 겐신이 다시 한 번 유리한 전투를 벌여 가와나카지마 1차전에서는 우에스기 겐신이 판정승을 거뒀다.

 

(후세전투 그림)

 

다케다군은 순순히 물러났고 겐신은 아라토 성을 싸우지도 않고 함락시켰다. 10월 10일, 우에스기군의 선봉대가 불을 지르며 외곽을 공격하지만 신겐이 반격에 나서 아라토성을 불태웠고 겐신도 사사키 지역을 불태우며 맞대응했지만 직접적인 전투를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11월이 되면 폭설로 퇴로가 끊기게 되는 우에스기군이 먼저 진영을 거두고 후퇴했고 신겐도 11월 22일에 고후로 되돌아간 기록이 남아있다.

1553년에 벌어졌던, 한 순간의 전투가 아니라 일련의 작전의 연속이었던 가와나카지마 1차전은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 모두에게 상대의 명성이 헛소문이 아니라는 교훈을 남겼다. 겐신은 본성인 가스가 산성(春日山城)으로 철수하기 전에 가와나카지마 북쪽의 가쓰라산과 모토도리 산에 성을 쌓으면서 다케다 신겐이 다시 침공한다면 가와나카지마를 전장으로 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가와나카지마 2차전, 1555년

 

다케다 신겐은 한동안 에치고 국경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조용히 시나노 공략을 마무리했다. 우에스기군과 본격적인 대결을 하려면 배후를 다져놓아야 했고 그렇게 1554년이 지나갔다.

2차전은 1555년에 신겐이 지지세력을 모아 이토이 강 부근의 우에스기 영역을 공격하도록 후원하면서 시작된다. 자신의 영지에서 아직은 먼 지역이었지만 가쓰가 산성 서쪽으로 바로 이어지는 강이었기 때문에 겐신은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겐신은 7월에 반격에 나서 시나노 국경을 넘어 젠코 사에 진영을 차렸다. 그렇지만 불심이 각별했던 겐신이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긴박한 상황에 본진을 절에 마련했을 것 같지 않고 근처의 조 산에 차렸을 것으로 보인다.

겐신에게는 불운하게도 젠코 사의 주지는 신겐에게 동조하는 승려였기 때문에 몰래 빠져나와 다케다군에게 우에스기군의 움직임을 누설했다. 이동 중이던 신겐은 급하게 3,000명을 보내 전략요충지인 아사히 산의 수비를 보강시켰다. 이 때 양쪽의 대결에서 처음으로 화승총 300자루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사이강 전투 犀川の戦い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보세요.)

 

다케다군은 치쿠마 강을 건너 오쓰카 지역에 본진을 차렸고 우에스기군은 계속 남진하다가 8월 4일에 사이 강에서 첫 번째 전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바로 가와나카지마 2차전의 시작이었다. 

2일에 걸친 첫 번째 전투에서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양쪽은 서로를 견제하며 무려 4개월이 넘도록 대치상태를 이어갔다. 한 때, 겐신이 아사히 산(旭山城)을 공격했지만 다케다군의 화승총에 물러난 전투를 빼고는 산발적인 충돌이 전부였다. 

양쪽의 선봉대가 적진 앞에서 빈틈을 보이며 유인하려고 시도했지만 겐신이나 신겐 모두 대단한 지략가였고 일선 부대의 군율도 엄격해서 잔꾀에 빠지지 않았다. 

 

결국 진을 허물고 각자의 영지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는데, 추수의 계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추수를 제 때에 하지 못하면 다음 해에 어떤 전투도 벌일 수 없기 때문에 병사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본대가 먼저 철수했고 마지막 부대가 11월 27일에 철수하면서 2차전도 별다른 성과없이 끝났다. 휴전의 조건으로 아사히 산성은 허물어졌다. 

 

가와나카지마 전투 3차전, 1557년

 

1557년 다케다 신겐이 겐신의 영토 내로 진입하면서 3차전이 벌어지게 된다. 북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진출로를 막고 있던 우에스기군의 가쓰라 산(葛山 )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했고 첫 번째 목표가 되었다.

1557뇬 3월, 늦은 폭설로 발목이 잡힌 틈을 노려 다케다군의 바바 노부하루(馬場信春, 일명 노부후사)가  6,000명을 동원해 가쓰라 산성을 공격했다. 아직 눈덮인 가쓰라 산성 수비군은 눈이 녹을 때까지 저항을 계속했지만 대부분의 수비군이 전사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끝에 함락되었다.

산성의 유일한 약점은 샘물이 없어서 산 아래의 절에서 물을 길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수비군은 다케다군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쌀로 목욕을 하며 물이 많다는 것을 과시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승려가 배신을 하면서 물의 공급이 끊겼고 화공을 당한 산성의 수비군과 가족은 모두 자살했다.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버린 산성을 파면 지금도 구운 쌀이 나온다는 전설이 있다.

 

다케다 신겐은 고삐를 늦추지 않고 우에스기 지지세력을 하나씩 제압해나갔고 태양여신 아마테라스 사원이 있는 도카쿠시까지 손에 넣으면서 더욱 기세를 올렸다. 우에스기 겐신이 철수하면서 펴놓았던 방어선은 교묘하게 돌파당했고 겐신은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반격에 나설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다케다 신겐은 에치고로 향하는 통로를 확보한 김에 모토도리 산성은 그대로 우회하고 이이 산성(飯山城)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이 산성을 지키던 다카나시 마사요리는  지원군이 없다면 얼마 못가 함락된다는 급한 전갈을 겐신에게보냈다. 다카나시 가문과는 인척관계였던 겐신은 매형인 나가오 마사가게(長尾政景)를 먼저 보내고 자신도 4월 말에 이이 산성 근처에 도착했다. 이이 산성의 공성전 결과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5월 16일에 시나노 국경을 넘은 겐신은 2차전에 본진을 차렸던 젠코 사 부근의 다케다군 진영을 공격해 물리치고 아사히 산성을 다시 쌓고 수비군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다케다군과 승부를 결정내기로 마음먹고 다시 이이 산성으로 후퇴해 신겐의 접근을 기다렸다. 

그가 원했던 결전의 장소는 우에노하라로 모토도리산성이 다케다군의 우회를 막고 이이 산성은 만약의 경우에 퇴로를 확보해주는, 겐신에게 유리한 지역이었다. 

 

다케다 신겐은 6월 초에 가와나카지마를 향해 출발했지만 겐신의 미끼를 완전히 물지는 않았다. 겐신은 병력을 전진시켜도 신겐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기마부대를 보내 고사카성을 함락시키며 다케다의 외곽부대를 괴롭히고 다녔다. 

 

"내가 작전을 시작하자 적은 3~5리 정도를 후퇴했다. 적을 궤멸시킬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겐신이 보낸 편지처럼, 신겐은 결전을 피했고 겐신도 더 이상 병력을 밀어넣었다가는 포위당할 수 있기 때문에 별동부대를 불러들였다. 

그러자 다케다군의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 다케다 가문의 4천왕 중 한 명) 병력이 전진을 시작했는데, 그가 받은 명령은 전면전을 피하고 우에스기가 했던대로 괴롭히라는 것이었다.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해서 오타리 성을 함락시켰고, 겐신의 본성인 가스가 산성에서 불과 45km 밖에 안떨어진 곳이었다. 

 

처음에는 유인하기 위해 후퇴했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급하게 다케다군의 별동부대를 막아야 할 판이었다. 겐신의 작전은 완전히 무산되었고 3차전이라고 할 수 있는 우에노하라 전투가 막판에 벌어지게 되었다.

우에노하라 전투는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 사이에 벌어졌는데 가와나카지마 전투 중에서 가장 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주력간의 본격적인 대결이 아니라 다케다군의 선봉대 야마가타 마사카게와 우에스기군의 후위 이치카와 후지요시(市川藤吉)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었다. 우에스기 겐신은 이미 본성을 지키기 위해 에치고로 돌아간 상태였다.

우에노하라 전투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아침밥을 먹던 우에스기군을 기습해 기세가 올랐지만 반격에 밀려 후퇴를 했고 다케다군의 피해는 1,013명, 우에스기군의 피해는 897명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전부다.

 

우에노하라 전투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과장이거나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에스기 겐신이 다케다 신겐과 반드시 대회전을 벌여 승부를 보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이고, 일본 전국시대 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가와나카지마 4차전이 그렇게 벌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