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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일본

용과 호랑이의 싸움 - 가와나카지마 전투 (1부)

by uesgi2003 2013. 2. 25.

 

격주에 한 번, 토요 역사세미나를 진행하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실겁니다.

지난 주로 일본 전국시대를 끝냈는데,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도 계시고 전국시대 전투 중에 가장 격렬했고(양쪽 피해가 70% 이상) 가장 서정적이었던 가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를 더 이상 미뤄둘 수도 없어서 이번에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요즘 일본 일부 극우파들이 경제불황의 돌파구로 '혐한'과 '극단적인 보수'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분위기가 좋지 않아 오해를 살 수도 있겠습니다만, 역사의 한 장면을 정리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역사 인물이 바로 우에스기 겐신인데, 안타깝게도 이 분은 은둔형에 가까웠고 일본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인기도에 비해 의외로 보잘 것이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설명하면, 항상 같이 등장하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다케다 신겐은 전국시대의 판도를 뒤흔들 정도로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우에스기 겐신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우에스기 겐신이 일본인들이 손꼽는 인물 그리고 심지어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도 자료가 출간되었던 것일까요? 바로 이번에 정리하는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대단한 능력 그리고 전국시대에서는 유례가 없는 수도승의 고결한 모습때문입니다.

 

이미 다케다 신겐에 대해서는 제 블로그에 자세하게 설명해두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중복설명을 피하고 우에스기 겐신에 대해서만 주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불만이신 분은 제 블로그 한참 오래 전의 이야기를 찾아보시면 우에스기 겐신의 분량과는 비교도 안되게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두 군신의 맞대결 - 가와나카지마 전투

 

11년에 걸쳐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군대가 다섯 번에 걸쳐 싸운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대하소설, 영화와 드라마로 계속 재현되고 있는 전국시대 최고의 이야기다. 가와나카지마(川中島)는 '강 중간의 섬'이라는 뜻으로 다케다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이 국경을 확장하기 위해 자웅을 다툰 곳이다(사진은 현재의 가와나카지마 일대).

두 영웅의 치열한 전술 그리고 우에스기 겐신의 돌격으로 주로 서정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두 나라가 총력전을 펼친 곳이었다.

 

1180, 1184, 1221년에 우지 다리를 두고 세 번의 전투가 벌어진 경우가 있었는데,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어떤 한 지점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다섯 번 모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전투를 벌였다. 1553년의 후세 전투(1차전)는 하치만 전투의 한 부분으로 섬 남쪽에서 벌어졌고, 1555년의 사이가와(2차전) 전투는 아사히 산을 둘러싼 대결이었고 3차전이었던 우에노하라 전투(1557년)는 가와나카지마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전투인데다가 가쓰라 산 공방전의 한 부분이었다. 5차전은 거의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대치상태로 끝났다. 1568년에 있었던 전투는 6차전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을 정도의 작은 전투였다.

8차전까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가와나카지마에서 벌어진 전투를, 두 가문에 국한하지 않고 찾아보면 무려 11번의 전투가 있었으니까 전세계 역사상 보기드문 경우였다. 보통 가와나카지마 전투라고 부르는 것은 1561년 바로 섬에서 벌어진 4차전 하치만바라 전투를 말하며 여기에서도 4차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1년 동안 이 지역을 두고 물러설 수 없는 전투를 벌이게 된 이유는 다케다 신겐의 영토확장이었다. 그는 시나노 지역을 합병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에스기 겐신의 영토인 에치고와의 국경이었던 가와나카지마로 접근하게 되었다.

 

(다케다 신겐에 대한 설명은 오래 전에 정리한 내용을 먼저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38

http://blog.daum.net/uesgi2003/45 )

 

우에스기 겐신(그림 참조. 우에스기 겐신의 그림은 거의 모두 무장의 모습이다.)은 다케다 신겐과 같은 전통있는 배경이 없었다. 그의 출세는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다. 겐신이 태어난 1530년에 우에스기 가문은 오기가야쓰 우에스기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로 나뉘어져 있었고 우에스기 겐신은 우에스기 가문과 직접적인 관계도 없었고 겐신이라는 이름도 불교로 출가한 후에 받은 이름이었다. 

겐신은 나가오 타메카게의 아들로 원래 이름은 나가오 가게토라(長尾景虎)였다. 나가오 가문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이었고 아버지는 센단노 전투에서 패배해서 목숨을 잃었다. 남은 네 아들 중에서 하루카게가 가문을 이었지만 자질이 모자랐다고 한다. 15살이 된 가게토라는 형과 함께 토치오 성을 관장했고 반란군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면서 명성을 얻었다.

당시 주군이었던 우에스기는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형인 가게야스가 전사했지만 가게토라는 반란을 훌륭하게 진압했다. 곧이어 출가해 승려가 된 가게토라는 다시 한 번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구로다 히데타다를 공격해 자살하게 만들었다.

 

가게토라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가주가 되었던 하루카게는 스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가게토라는 19살의 나이에 가쓰가 산성(春日山城)에 가주로 입성했다.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에 대해 변함없는

충성을 다했지만 우에스기 가문은 급격하게 몰락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게토라에게 의지하는 가문이 점점 늘어갔다. 

당시 우에스기 가문은 현재의 도쿄 일대인 간토(관동)을 놓고 호죠 가문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1545년에는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우에스기의 두 가문이 연합해 호조 쓰나나리가 지키던 가와고에 성을 공격했다. 성 안의 수비병은 겨우 3,000명에 불과했지만 85,000명의 공격군에게 성문을 열지 않았고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가 8,000명의 구원군으로 야습을 성공시켜 관동일대를 장악할 수 있었다. 

가와고에 성에서의 패배로 우에스기 가문의 몰락은 더욱 급격해졌다. 1551년에 다시 한 번 호조 가문에 참패한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가족을 데리고 가쓰가 산성으로 피신했고 가게토라는 무릎을 꿇고 보호를 맹세했다.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그를 후계자로 정하면서 우에스기라는 성을 주고 에치고와 간토 수호령 직함을 내렸다. 우에스기 가게토라로 가문과 이름을 바꾼 겐신은 호조 가문과의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고 1552년부터 우에스기 겐신을 사용했다. 

 

우에스기 겐신의 그림은 거의 모두 군신으로 불렸던 모습으로 그려진 반면에 다케다 신겐은 유명한 말총머리 투구를 쓰고 의자에 앉아 지휘하는 전략가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후지산을 바라다 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우에스기 겐신은 불교에 귀의했고 신겐과 대조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금욕에 가까운 생활을 했기 때문에 후손이 없어서 호조 우지야스의 7번째 아들을 양자로 입양해서 1564년에 가게토라라는 자신의 예전 이름을 줬다. 

 

(제가 세미나에서 설명했듯이 전국시대 당시에는 3남 이후부터는 일찍부터 양자로 내보내거나 상인이나 스님으로 만들어 가문의 분쟁을 막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절대 앙숙이었던 호조와 다케다 가문에서 양자로 각각 한 명씩 보내게 됩니다.)

 

뛰어난 행정가이자 전략가인 다케다 신겐과 달리, 그는 무장이 되고 싶어했고 무라카미 요시키요와의 대화에도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요시키요에게 물었다. "신겐은 병사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말해주시오." 요시키요는 "그는 한 장소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병사들을 계속 이동시킵니다. 그는 최후의 승리를 노립니다."라고 대답하자, 겐신은 "그는 땅이 목적이니까 최후의 승리를 노리겠지. 나는 다르오. 나는 적을 만나서 싸우는 것이 목적이오. 내 창을 무디게 둘 생각이 없소."라고 대답했다.

 

또 다른 기록에서 우에스기 겐신의 결벽증에 가까운 무사 정신을 볼 수 있다.

 

신겐의 영지는 해안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동쪽 해안지역에서 소금을 구입했는데,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호조 우지야스와 결탁해서 소금 판매를 금지시켰다. 가이(다케다 신겐의 영지)가 큰 고통을 겪었고, 겐신이 이 소식을 듣자 신겐에게 편지를 보내 '우지야스와 우지자네가 소금을 가지고 당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정말 치졸한 짓이오. 나는 당신과 활과 화살로 싸우고 싶지, 쌀과 소금으로 싸우고 싶지 않소. 여기 소금을 보내니 잘 사용하기 바라오.'라며 소금을 보냈다.

 

다케다 신겐의 시나노 침공 

1550년대 초반만 해도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의 영지는 완전히 떨어져있어서 만날 일이 없었다.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를 따라 시나노를 침공하기 시작했던 신겐은 1542년 3월, 스와 영지를 침공했다. 정략결혼으로 처남이 된 가문이었지만 신겐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처남 스와 요리시게는 다이묘인 동시에 유서깊은 신사의 제사장였는데 다른 사람들과 불화가 생겼고 신겐이 개입할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신겐이 시나노로 진입하자, 스와 요리시게, 오가사와라 나가토키, 무라카미 요시키요가 키소 요시야스와 연합해 신겐과 세자와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참패하고 말았다.

 

...하루노부(당시 신겐의 이름)의 가신들은 연합군을 보자 겁을 먹었다. 하루노부는 "저 네 사람이 연합했지만 의견이 맞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전투에 끌어내서 궤멸시켜야 한다."라고 말한 후에, 해자를 더욱 넓히고 방벽을 크게 높여 스와 연합군을 속였다. 네 무장은 하루노부가 겁을 내고 있다고 단정하고 요새로 전진했다. 하루노부는 밤에 이동한 후에 안개비로 시야가 가려진 것을 틈타 기습을 했고 대성공을 거뒀다...

 

연합군을 궤멸시킨 신겐은 조용히 물러났고 3개월 후에 되돌아와 스와 요리시게를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어느 누구도 응원하러 오지 않았다. 8월 13일, 신겐은 우에하라 성(아래 그림은 조감도)을 점령하고 바로 다음 날에 구와바라 성을 포위했다.

요리시게는 구와바라 성문을 열고 목숨을 구했지만 하루노부는 원정이 끝난 후에 처남이었던 요리시게를 할복시켰다.

 

(일본 성을 생각하면 하루 이틀만에 함락시키는 것이 이상한데, 무장이 살던 주요 성을 제외한 나머지 성은 보통 작은 요새 수준으로 몇 백 명이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로 나무 울타리 정도였기 때문에 화공 등으로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신겐 편을 들어 요리시게의 제사장 직책을 노렸던 다카토 요리쓰구는 신겐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병사를 일으켰고 신겐은 교묘하게 요리시게의 아들을 전면에 내세워 스와 가문이 자신을 편들게 했다. 1542년 10월, 성을 빼앗긴 요리쓰구는 남쪽으로 달아났지만 나중에  토벌되었다.

신겐은 요리시게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자신이 죽인 사람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절대로 좋은 결정이 아니었다. 스와 지역에서는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그녀가 낳은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 대에 이르러 명문대가였던 다케다 가문이 멸문당하게 된다.

 

1543년, 사쿠 지역(위 지도 참조)의 동맹이었던 오이 사다타카가 이탈하자 신겐은 다시 스와를 통해 사쿠 지역을 침공했다. 성을 함락시킨 신겐은 사다타카를 고후로 보낸 후에 죽였다. 

이나 호족의 위협을 제거하느라 잠시 지체했던 신겐은 1546년 6월에 우치 산성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낸 후에 가사하라 기요시게가 지키던 시가 성을 공격했지만 식수가 끊긴 상태에서도 성문을 열지 않았다. 기요시게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버티고 있었던 것은, 우에스기 노리마사(우에스기 겐신을 양자로 받아들인 간토 수호령)가 구원군을 보낸다는 정보때문이었다.

우에스기가 3,000명을 보내자, 신겐은 오다이하라에서 이들을 맞아 궤멸시켰다. 그래도 성문을 열지 않자, 신겐은 15명의 무장과 300명의 병사의 목을 창에 꽂아 성문 앞에 전시해 수비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린 후에 화공으로 함락시키고 기요시게를 죽였다.

시가를 손에 넣게 되자 신겐은 시나노 지역의 맹장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를 상대하게 되었다. 요리키요는 병력을 모아 다케다 신겐의 위협에 대처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겐도 고후에 있던 병력까지 불러들였고 우에다하라(현재의 우에다 부근)에서 3월 23일에 전투를 벌였다, 양쪽의 병력은 각각 7,000명으로 비슷했지만 신겐의 가이 병력은 긴 행군으로 지친 상태였다(사진은 우에다하라 전투의 지방축제).

선봉대에 섰던 이타가키 노부카타가 서전에서 포위를 당해 전사했고 기세가 크게 오른 요리키요의 본대가 신겐의 본대로 쳐들어갔다. 여기에서 다시 아마리 도라야스와 하지카노 덴에몬이 전사했고 신겐 자신도 백병전에 휘말려 왼팔에 부상을 입을 정도로 격전이 벌어졌다.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물러선 양쪽 군대는 20일 동안 대치하다가 서로 물러났고 신겐은 700명을 잃으며 평생의 전투에서 유일한 패배를 당하게 된다. 물론 신겐 쪽의 기록에는 승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라카미 요시키요가 우에스기 겐신에게 보낸 자료에 따르면 우에하라 전투에서 화승총이 대대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기마병에 대응하기 위해 2백 명의 사수를 선발했고 그 중에 150명에게는 5발의 화살과 활을, 나머지 50명에게는 에이쇼 7년(1510년)에 수입했던 화승총과 3발의 탄환으로 무장시켰따. 명령 전에는 쏘지 않도록 주의시켰고 화승총을 쏜 후에는 버리고 칼로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활을 먼저 쏜 후에 화승총을 쏘게 했는데, 5명 한 조로 조직했다.

 

1510년이라는 기록은 연대오기였을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중국에서 수입된 원시형태의 화승총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불과 5년 전에야 포루투칼 화승총이 일본에 전해진 것을 감안하면 요시키요가 대규모로 화승총을 사용했던 첫 번째 무장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