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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일본

용과 호랑이의 싸움 - 가와나카지마 전투 (3부)

by uesgi2003 2013. 3. 10.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저이지만, 요즘 영화관을 가지 않고 있습니다. 오즈같은 영화는 용산 IMAX 3D로 벌써 즐겼어야 했지만 두려움이 앞서서 못가고 있습니다.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요? 오즈가 가족용 영화라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상영관 안에서 카카오톡을 즐기는 민폐족과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철판족이 크로스로 만나는 경우입니다. 보통은 조심해서 그리고 항의라도 받으면 미안해 하는데, 극히 일부 변종들은 당당하게 '당신이 뭔데?'라던지 '무시해'와 같은 철판무장까지 합니다. 


몇 개월 전에 이런 변종을 만났고 좀 심하게 철판무장을 해체시키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는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기로 한 것입니다. 


상영관에서 왜 카카오톡을 하는 것일까요? 그렇더라도 숨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 가까이 들고 하는 것일까요? 그런 민폐족일수록 자신의 권리는 주장하면서 왜 다른 사람의 권리는 당연하게 무시하는 것일까요? 


용과 호랑이의 싸움 - 가와나카지마 전투 (3부) 


가와나카지마 전투 4차전, 1561년


가아나카지마 전투라고 하면 보통은 4차전을 말한다. 그림이나 이야기에서도 4차전을 그린 것이 많으며 이전의 모든 전투를 합친 것보다도 훨씬 규모가 강도가 크고 강했다. 당시에 벌어진 어떤 전투보다도 격렬했고 피해도 컸으며 극적인 순간도 많았다. 

1561년 10월 18일에 벌어진 다케다 신겐이 국경을 넘고 우에스기 겐신이 가와나카지마 지역으로 출격하면서 시작된 것은 맞지만 그 이전부터 양쪽의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이전 3차전과 마찬가지로 양쪽은 기만과 우회기동을 하고 습격을 하고 반격을 했다. 

3차전이 있었던 1557년에서 4년이 지났었는데 그 기간 동안 일본 전국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지만 우에스기 가문이나 다케다 가문은 다른 지역의 변화와 상관없이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1년 전인 1560년에는 오다 노부나가라는 신흥세력이 당대 최고 세력가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습격해 죽였는데, 아마도 두 사람에게는 오다 노부나가라는 무장의 이름보다는 다음에 넘어야 할 높은 산이었던 이미가와 가문의 수장이 죽은 것이 더 반가웠을 것이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이미가와 요시모토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최초의 전투였기 때문에 과장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마가와 본진이 전쟁에 이미 승리했다고 방심을 했고 오다 노부나가가 이것을 노려서 기습해서 성공을 거뒀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IE에서 설명과 그림이 제대로 연결됩니다. 


1561년까지 양쪽은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었지만 계략의 대가 다케다 신겐은 가만히 있지 않고 우에스기 가문의 외곽 지지세력을 끊임없이 흔들고 무너뜨렸다. 1561년 3월 관동관령(수호직)에 있었던 겐신이 관동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호조 가문을 제압하기 위해 다케다 가문의 영지 옆을 지나 호조의 본성인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포위했었는데 다케다 신겐은 5월과 6월에 북부 시나노로 병력을 이동시켜 겐신의 배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케다의 선봉대가 국경근처의 와리가다케성을 공격하자 이미 오다와라 성을 포기하고 돌아와 있던 겐신은 1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와나카지마로 들어섰다. 이와시로와 데와 지역의 지지세력도 병력을 보냈고 엣츄지방의 침입에 대비해 사이토 도모노부와 삼본지 사다나가가 파견되었다. 겐신의 매형인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는 본성인 가스가 산의 방어를 위해 남겨졌다. 겐신은 치쿠마 강(千曲川) 서쪽 제방을 따라 젠코 사로 진격하면서 치쿠마 강을 자신과 신겐의 중간지대로 만들었다.

 

지난 3차전 동안 겐신은 가와나카지마를 방어할 성 3개를 만들어 두었었고 신겐도 대응 성을 만들어 두면서 그 이전에 빼앗은 성까지 합치면 치쿠마 강이 양쪽의 국경처럼 변했다. 젠코 사에 5,000명을 후위대로 남겨두고 사이 강과 치쿠마 강을 건넌 겐신은 아메노미야 여울목을 건너 근처의 고지를 점령하려고 했다. 사이조 산(妻女山)이라고 부르는 이 고지는  다른 산에 비해 낮은 편이었지만 신겐에 미리 펼쳐놓은 진영을 충분힌 견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겐신은 사이조 산에 요새를 쌓고 다케다군의 접근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다케다군의 선봉대는 고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가 지휘 중이었고 신겐은 아직도 고후에 있었지만 미리 준비해 둔 봉화신호와 파발마로 단 두 시간 만에 고후의 신겐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다. 신뢰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당시 기록 중에서는 가장 믿을만한 고요쿤칸(甲陽軍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에이로쿠 4년 8월 16일(음력), 시나노의 가와나카지마에서 파발마가 도착해서 '데루토라(겐신의 당시 이름)가 도착해 사이조 산에 진영을 차렸고, 가이즈 성을 곧 공격할 것이라고 합니다. 병력은 약 13,000명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우에스기 겐신은 이 전령을 막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가이즈 성을 위협한 것은 신겐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 3차전부터 별러왔던 다케다군의 본대와 일전을 치룰 생각이었다. 

가이즈 성의 보고를 받은 신겐은 가이 지역에 총 동원령을 내리고 16,000명을 이끌고 고후를 떠났다. 다케다군은 사이조 산보다 훨씬 높은 차우스 산(茶臼山)을 중심으로 병력을 전개했다.

 

데루토라의 무장들은, 에치고로의 후퇴로가 끊겼을 뿐만 아니라 다케다군에게 포위되었다고 많은 염려를 했다. 그러나 데루토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사이 강을 두고 양쪽이 대치했던 2차전과 비슷한 전개였다. 양쪽 모두 균형을 깨려면 뭔가 충격적인 일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10월 8일(양력)에 다케다 신겐이 갑자기 진영을 걷고는 우에스기군이 보는 앞에서 치쿠마 강을 건너 가이즈 성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시나노 일대의 병력이 합류해서 20,000명으로 늘어난 병력이었고 가이즈 성이 수용하기에는 너무 많은 병력이었다. 당연히 신겐과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가 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야마모토 간스케는 신겐의 무장 중 가장 흥미로운 면이 있는데 다리 하나와 눈 하나를 사용하지 못했지만 다케다 무장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지략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70세의 많은 나이로 신겐의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야마모토 간스케가 실존 인물인지 또는 알려진 것처럼 중요한 역할이었는 지에 대해서는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다케다 가문의 유명한 무장 중에서도 그 존재나 역할이 불분명한 무장들이 꽤 있는데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낮은 지휘관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고, 다케다 신겐이 자신의 전력을 부풀리기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다케다 군의 배치와 참전무장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옮길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니어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딱따구리 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다케다군의 기동은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 놀라서 나오는 벌레를 잡아먹는 것처럼, 10월 17일(양력)에 8,000명이 가이즈 성을 몰래 빠져나가 사이조 산에서 관측이 안되는 히로세 여울목으로 강을 건너 가와나카지나 중심의 하치만바라로 진격해서 유리한 지역에서 전투진형을 차릴 계획이었다. 

이 기만기동이 성공하면, 고사카 마사노부가 딱따구리 역할을 맡아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어둠을 틈타 사이조 산을 배후에서 올라 기습하기로 되어 있었다. 기습공격에 놀란 우에스기군이 산을 내려와 치쿠마 강을 건너면 기다리고 있던 8,000명이 앞을 막게 되고 앞뒤로 포위당한 우에스기군은 꼼짝없이 궤멸될 것으로 보였다. 

 

가스가 산성을 떠날 때에 18,000명을 동원했던 겐신은, 겐코 사에 5,000명을 후위부대로 남겨두었고 13,000명을 사이조 산에 이동시켰었다. 그 중에서 아마카스 가게모치가 1,000명을 데리고 여울목을 확보했고 나오에 가게쓰나가 2,000명을 데리고 병참선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겐신의 휘하에는 10,000명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000명을 이끌고 자신이 원하던대로 가와나카지마 중심에 학익진을 펼친 다케다 신겐은 허둥지둥 도망쳐오는 우에스기군을 공략할 준비를 마쳤지만 새벽이 되어도 사이조 산쪽에서 전투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우에스기 겐신은 다케다군의 작전에 대해 정확하게는 몰라도 뭔가 꾸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이즈 성 정찰에서 밥을 하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겐신은 자신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았다. 상대의 작전이 파악되지 않았지만 그대로 앉아서 기다리기 보다는 자신이 먼저 움직이기로 하고 사이조 산의 진영을 거두고 한 발 먼저 산을 내려와 강을 건넜다. 

다케다 신겐에게 유리한 기록이 남을 수 밖에 없는 고요쿤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 상황보다는 전투 후의 결과에 따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신겐공이 27살, 내(겐신)가 18살이었던 15년 전부터 우리는 여러 전투에서 싸웠다. 신겐공은 매사에 있어서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신중했고  전장을 주도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내가 패배했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이제 그가 내일의 전투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의 전략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여기로 와서 전투를 벌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후퇴할 때에 배후를 끊으려는 것이다.

이번 전투만큼은 그를 앞서야겠다. 우리가 먼저 강을 건넌 다음에 새벽이 오면 신겐의 본진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배후를 공격하기로 한 병력이 오기 전에 일전을 벌여 그를 죽일 것이다. 그렇게 못한다면 휴전을 할 생각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던, 내일의 전투는 평생에 한 번 있을 경험이 될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겐신은 가이즈 성에서 미처 병력이 나가기도 전에 이미 강을 건너 대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겐신은 10월 17일(양력), 저녁 10시에 다케다군의 눈을 피해 산을 내려왔다. 다케다군을 속이기 위해 100여 명을 남겨두고 밥짓는 연기를 일부러 피웠다. 

 

다케다 신겐은 당연히 정찰대를 보냈어야만 했는데 겐신이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11일 연속으로 그대로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8,000명을 이끌고 곧 나타날 지리멸렬한 우에스기군을 기다리고 있던 신겐의 눈 앞에는 완전히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바로 우에스기군이 맹렬한 기세로 돌격해 온 것이다.

가장 전위에 있었던 다케다 노부시게에게 첫 번째 공격이 쏟아졌다.

겐신은 적과 부딪칠 때까지 머리를 낮추고 적을 쳐다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하면 다케다군이 쏘는 화살이나 총알을 투구가 막아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겐신이 '에잇! 에잇!'이라고 외치면 무장들이 '오! 오!'라고 대답하면 돌격해들어갔다.

 

우에스기군의 선봉장은 가키자키 가게이에(柿崎景家)로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

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병력에 부딪쳐 들어갔다. 신겐의 동생으로 한 때 가문을 이어받기로 되어 있었던 노부시게는 백병전에서 전사했다. 기세를 올린 가게이에 부대가 잠시 물러나 휴식을 취하는 동안, 다케마타 히로쓰나가 다케다군의 베테랑 나이토 마사

토요(内藤昌豊)와 모로즈미 마사키요를 공격해 들어갔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우에스기 겐신의 전위대 교체 전술에 따라 곧바로 다른 부대로 교체되었다.

 

가키자키 가에이에의 군 깃발. 독특하게도 무를 사용했다.

 

겐신이 전위부대를 계속 교체하는 것은 '풍차 진형'이라고 해서 횡으로 진격하던 부대가 차례로 적의 전위부대를 궤멸시키는 것이다. 맹렬한 기세로 한 덩어리가 되어 밀고 들어오는 우에스기군의 전진을 막지 못하고 다케다군의 진형은 무너져내려 신겐의 막사 바로 앞까지 전투가 벌어졌다. 신겐의 아들 다케다 요시노부가 부상을 입었고 흰색천을 머리에 두른 우에스기 겐신이 막사에 뛰어들어 신겐에게 칼을 휘둘렀다. 신겐은 미처 칼을 뽑지도 못하고 지휘용으로 사용하던 철 부채로 간신히 막아냈다. 고요쿤칸의 기록에 따르면,

 

겐신은 3번 칼을 내리쳤지만 살짝 빗나갔고 신겐은 지휘 부채로 치명상을 모면했지만 두 곳에 상처를 입었다. 시동과 20인 시위무사가 달려들어 신겐을 보호했고 근처에 다가오는 사람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베어 넘겼다.

 

신겐의 시위무사인 하라 오스미 노 카미가 신겐의 창을 들어 겐신을 찔렀지만 창끝은 갑옷을 뚫지 못했고 말을 때렸다. 놀란 말이 뒤로 물러나자 신겐의 시위무사들이 몰려 들어 겐신을 밀어냈다.

작전실패의 책임을 통감한 야마모토 간스케는 창을 들고 우에스기군에게 돌격해들어갔다. 온 몸에 80군데의 상처를 입은 그는 후퇴해 자결했다.

 

이 그림에서는 야마모토 간스케가 우에스기 무장들을 날려보내고 있는 마지막 분전을 과장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생과 참모에 이어 삼촌인 모로즈미 마사키요까지 전사했지만 다케다군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가 가키자키 가에이에의 공격을 막아냈고 아나야마 노부키미(穴山梅雪)가 시바타 하루나가의 공격을 무산시키며 거꾸로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가와나카지마에서 맹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사이조 산에 올랐던 고사카 마사노부의 12,000명 별동대는 우에스기군의 본진이 비어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산 아래에서 전투함성이 들려오자 바로 군대를 돌려 산을 내려갔고 아메노미야 여울목을 건너려고 했다. 

여기에는 겐신이 아마카스 가게모치(甘糟景持)에게 1,000명을 주고 추격군을 막게 했지만 12,000명을 막기에는 너무 적은 숫자였다. 별동대가 여울목을 지나 우에스기군의 배후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전황은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다시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의 병사는 신겐이 전투에서 졌다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사이조 산으로 갔던 10

명의 지휘관이 적의 계략을 깨닫고 급히 말을 달려 치쿠마 강을 건너 배후에서 우에스기군을 공격했고 적은 물러났다...

 

다케다군이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우에스기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다케다 노부시게와 모로즈미 마사키요의 목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역전당한 우에스기 군은 간신히 퇴로를 뚫고 사이 강을 건너 후퇴했고, 다음 날 아침 겐신은 무장을 보내 사이조 산에 남겨둔 요새를 모두 불태웠는데 다케다 신겐은 이것을 막지도 않았고 심지어 겐신이 사이 강을 건너 젠코 사로 후퇴하는 것도 막지 않았다.

4차전에서 판정승을 거둔 다케다군이었지만 우에스기군보다 많은 병력으로 사지에 몰아 넣고도 패배를 간신히 모면했다.

 

대일본전사의 분석에 따르면, 다케다군은 전사 4,600명. 부상자 13,000명이었고 우에스기군은 전사 3,400명, 부상자 6,000명으로 양쪽 모두의 피해를 합치면 총 병력의 83%가 희생당한 일본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우에스기군은 사이 강을 건너기 직전에 다케다 별동대에게 퇴로를 막혀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적진에 뛰어들었던 우에스기 겐신은 아예 본대와 떨어져나와 크게 우회했을 정도로 마지막 순간은 다케다군이 완전히 승기를 잡았습니다.

 

우에스기 겐신의 깃발. 유명한 비사문천, 곤, 용의 한자가 있습니다.

 

4차전은 양쪽 모두에게 큰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찾아왔는데, 기회는 살리지 못했어도 위기는 용케 벗어났던 독특한 전투였다. 만약 신겐이 사이조 산의 우에스기군 진영을 제대로 정찰했다면 우에스기군은 협공당해 궤멸되었을 것이다.

만약 겐신이 아메노미야 여울목에 1~2천 명의 병력을 더 남겨두었다면, 젠코 사에 남겨두었던 5,000명까지 불러들여 일전을 치렀다면 다케다 신겐의 이름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양쪽 모두 승리를 주장하며 명예를 챙겼지만 4차전을 끝으로 다케다군이 북시나노의 가와나카지마와 젠코 사 일대를 수중에 완전히 넣게 되었다.

우에스기 겐신이 나카조 마쓰모토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시나노 가와나카지마에서 다케다 하루노부와 전투를 벌인 다음 9월 10일(음력)에 떠났소. 그자는 정말 대단한 무장이었소. 전투에서 그의 인척, 시위무사, 예비대까지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지만 비겁한 행동은 없었소. 적이 수 천 명의 기병으로 우리를 공격했지만 결국 대승을 거뒀소. 앞으로 당분간은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 같소. 우에스기 가게토라 가문은 이 영광을 잊지 않을 것이오. 우리 가문은 귀하이 전장에서 보여준, 다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무공을 치하하는 바이오.

 

가와나카지마 전투 5차전, 1564년

 

4차전이 워낙 격렬한 반전의 연속이어서 5차전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564년 5차전이 벌어지기까지 3년의 시간을 양쪽은 여전히 지지세력을 끌어들이며 계략을 꾸몄다. 다케다군은 호조군과 연합해 우에스기 노리카쓰가 지키던 무사시-마쓰 산성을 1563년에 공략했고 1564년에는 무쓰 지역의 아시나 가문을 부추켜서 겐신이 자리를 비운 에치고를 침공하게 만들었다.

만약 이 공격이 주효하면 자신도 시나노에서 에치고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5월 18일에 시나노 호족이 와리가다케 성을 함락시키고 모든 병사를 죽이면서 본격적으로 에치고를 침공했다. 아시나와 다케다군은 우에스기의 본성 가스가 산성을 목표로 협공할 계획이었지만 겐신이 아시나군을 물리치고 바로 군사를 돌려 와리가다케 성을 탈환했다.

신겐은 작전이 실패하자 군사를 물렸지만 겐신은 이를 알지 못하고 9월 4일에 젠코 사로 병력을 전진시켰다. 8일에 사이 강을 건너 가와나카지마에 들어선 겐신은 신센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지만 다케다군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9일, 겐신은 신겐이 오지 않는 것에 실망하는 편지를 썼고 10월이 되어서야 신겐이 마침내 모습을 나타냈다.

 

시오자키 대치(塩崎の対陣)라고 부르는 5차전은, 이미 일부러 시간을 끌며 교묘하게 다가온 다케다 신겐이 유리한 지형을 차지했기 때문에 일전을 바라던 겐신도 무모한 행동을 피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겐신은 이이 산성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성을 보수한 후에 11월 4일 본성으로 돌아갔다.

 

1565년 8월 19일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우에스기 겐신은 여전히 시나노를 침공해 그 일대를 해방시키고 싶어했지만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서 두 다이묘가 직접 힘을 겨루지 않고 적의 적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힘겨루기가 계속 되었다.

1566년 미노와(箕輪城) 공성전이 좋은 예인데, 우에스기 영향력의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가 죽자 나가노 집안은 다케다 신겐의 침공이 두려워 이를 숨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겐은 즉시 성을 공격했지만 가미이즈미 히데쓰나라는 무사의 맹활약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가문을 이었던 나리모리가 전사하자 사기가 크게 떨어진 수비군은 평화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568년 에치고와 시나노 국경에서는 마지막으로 전투함성이 울려퍼지게 된다. 가와나카지마를 완전히 내준 우에스기 가문은 시나노에 지지 세력을 거의 갖지 못했고 1567년 이이 산성을 지키던 이치가와 가문마저 다케다 가문으로 돌아섰고 신겐은 국경의 나가하마 성을 보수해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했다.

1568년에 엣츄 다이묘를 설득해서 우에스기 가문에 대해 연합전선을 펼쳤고 겐신은 엣츄를 침공했지만 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신겐의 획책에 우에스기 가문의 중진인 혼조 시게나가(本庄繁長)가 배반을 했다. 기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신겐은 에치고를 침공했고 마지막으로 가와나카지마와 새로 보수한 나가하마 성으로 들어갔다.

반란군보다 다케다 신겐의 침공을 우선 막기로 한 겐신은 국경으로 즉시 달려갔고 양쪽은 다시 국경을 사이에 두고 눈싸움을 벌였다. 겐신은 다케다군과 막대한 피해를 무릅쓰고 일전을 벌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신겐도 이미 남쪽으로 진출방향을 바꾸기로 마음먹은 상황이었다. 자신이 겐신과 출혈만 있는 소모전을 벌이는 동안 남쪽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1569년에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호조의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지만 결국 공략하지 못했고 미마세토게 전투에서 매복한 호조 무사에게 부상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일본 영화 '하늘도 땅도'에서 대단한 스케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아마 3차전인 것으로 보이는데... 영화나 소설은 정사와 다르니까 그냥 참조만 하시기 바랍니다. 

해상도와 소리를 높여 감상할 것을 권합니다. 3차전이라 본격적인 대결은 없습니다.   

    

 

4차전 본격적인 대결이 벌어지는 장면입니다. 우에스기군이 기습으로 나오고 당황한 다케다군이 수세에 몰리는 장면입니다.

안타깝게도 해상도 높은 클립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중간 부분을 유투브에서 공유하지 못하도록 설정해서 영화가 후반부로 점프했습니다. 가키자키 가에이에의 일기토 장면이나 막사 습격 장면이 사라졌습니다.

영화에서는 달아난 신겐을 겐신이 추격해서 한 칼 먹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