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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현대 미국해군의 아버지, 존 폴 존스

by uesgi2003 2013. 10. 15.


갈수록 운전을 꺼리게 됩니다. 달리기 전용인 인피니티를 가지고 있으면서 운전을 꺼린다니, 이상하기는 합니다만 화를 안내고 운전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반쯤 차선을 걸치고 앞에서 알짱거리는 택시, 신호를 무시하고 목숨을 거는 퀵 서비스 오토바이, 인명은 재천이라는 식의 무대포 무단횡단, 길 한복판에서 회합을 하는 술주정꾼, 은신모드로 역주행하는 자전거... 


이제는 한 발 늦게 출발하고, 한 템포 느리게 가속하고, 차 한대의 공간을 더 떼고 다니면서 방어운전을 하려고 하지만, 달려드는 무대포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지다 보니 더욱 전투적으로 변하는 모양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오래간만에 미국 역사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해군이야기입니다. 


현대 미국해군의 아버지, 존 폴 존스 John Paul Jones


존 폴 존스는 역사상 가장 불리한 상황을 계속 이겨낸 전사이자 강인한 지휘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항해 시대에 단 한 척의 전함으로 말이다. 그는 미국독립을 위한 헌신, 용기와 결단력으로 바다의 전설이 되었다.

그는 넓은 시각의 전략을 생각하는 이상가이기도 했다. 미국이 열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독립전쟁에 참전하면서 미 해군의 밑그림을 그렸다. 

존스는 미국의 미래가 강력한 해양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고 개척단장 토마스 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친구였던 벨은 1778년에 존스에게 필라델피아와  대륙해군Continental Navy의 암울한 상황에 대해 편지를 썼고 존스는 이렇게 답변했다. "우리 둘 다 낙담하지는 말도록 하지. 내가 예언자는 아니지만 다들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빠른 시간 내에 첫 번째 도시와 첫 번째 해군을 가질 걸세... 우리 해군은 마치 마법처럼 나타나서, 세계의 경탄과 질시를 동시에 받게 될 것이네."


존스가 생각하던 미래의 큰 그림과 비교하면 대륙해군은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전투전용 전함도 없는 임시방편의 해군으로 항구 밖을 나서지도 못하고 봉쇄되기 일쑤였다. 

압도적인 영국해군과 바다에서 만나면 늘 패배했고 장교는 해전경험이 거의 없는 장교가 지휘했다. 선원이라기 보다는 육군에 가까웠고 정치배경을 우선하다 보니 전술과 생존에 급급했다. 


대륙의회(독립전 의회)가 국방에 대해서도 관여하면서 해군의 상황은 더욱 난감했다. 시민 지도자는 해군의 역할을 해안선을 방어하고 대륙육군의 작전을 엄호하고 외교관을 유럽으로 실어나르는 정도에 국한시키고 있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 대륙해군이 미독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존 폴 존스는 자습형 해군장교로 용기와 전문지식으로 싸웠을 뿐만 아니라 바다 전체를 바라보는 큰 이상을 가졌다. 다른 장교가 수세에 급급하고 패전을 거듭하는 동안, 그는 전략적 차원에서의 공격을 노렸다. 


1776년 10월, 첫 번째 함선을 가진 그는 영향력있는 의원인 로버트 모리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10문짜리 슬루프 프로비던스Providence를 지휘해 캐나다 앞바다 노바 스코샤 부근의 성공적인 항해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그의 임무는 해양력 투사Naval Power Projection 면에서 보면 평범했지만 대륙해군의 한계를 감안한다면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 (해양력투사는 해양력 장악과 비슷한 군사용어로 여기에서 재미있는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6척의 영국 브리간틴, 슬루프와 스쿠너 포획 또는 파손 전과를 보고했다. (소형범선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노바 스코샤 해안 부근의 어항을 성공적으로 약탈했다. 


존스가 모리스에게 보낸 편지는 전과뿐만 아니라 모병과 유지에 관한 정책도 제안했다. 그는 "당당한 해군이 없다면 - 신이여 미국을 구하소서!"라는 한탄과 함께 장교의 자질과 향후의 해군조직에 대해서는 언급했다. 


...어떤 조건에서도 장교를 충원할 수 있겠지만 임무에 맞는 장교를 찾기 힘들 것입니다. 전문성을 가지고 사심없이 장교의 자질을 판단하고 해군의 기동과 작전을 감독하고 통제하고 지명할 해군본부를 설립하지 않는다면 의회만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대륙해군 장교가 민간지도자에게 보내기에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조언이었다. 존스는 의회에 감히 충고를 한 것이었고 해군 대위의 조언따위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집요했다.

편지 말미에는 자신이 14문짜리 안드레아 도리아에 승선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며 자신이 소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항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일단 그곳에 가면 영국상선을 노획해서 "영국의 아프리카 교역로에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해안을 따라 상선을 보이는대로 노획할 것이기 때문에 바로 회복되지 않는 충격이 될 것입니다."


미국 항구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신생 대륙해군의 무능력을 감안하면, 아프리카 원정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대담한 제안이었다. 그렇지만 유능하고 과감한 장교가 이끄는 소함대가 적의 취약점을 강습하는, 전략적 효과를 노리는 대단한 감각이었다. 

존스에게는 안타깝게도, 의회는 해군의 전략적 잠재성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자원도 부족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원정은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에 존스와 안드레아 도리아는 프로비던스 호를 타고 했던 임무를 다시 받았다. 그래도 그가 제안했던 전방위 투사Forward Projection 개념은 독립전쟁의 결정적인 단계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1778~79년에, 존스는 전방위 투사의 효과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두 번의 임무를 맡았다. 역사가는 18문의 레인저Ranger와 40문의 프리킷 봉옴므 리차드Bonhomme Richard의 임무를 별도의 사건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존스는 두 번의 임무를 통해 영국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남겼다. 그리고 미국 해양전략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왼쪽 아일랜드 일주가 레인저호 임무의 항로이고 영국 전체 일주는 봉옴므 리차드호 임무의 항로입니다. 


1778년 4월과 5월에, 존스는 레인저호를 몰고 아일랜드 해 부근에서 작전을 펼쳤다 (미국에서 영국까지 직접 간 것이 아니라 당시에 미독립전쟁을 지원했던 프랑스 해안에서 출발한 것이어서 큰 위험은 없었습니다.) 그는 4월 22일과 23일에 영국의 와이트헤븐 항구를 습격했다. 존스는 선원을 설득해야 했고 심지어 장교 중 일부는 상륙작전에 동참하지 않았다. 

존스는 간신히 30명의 병력을 모아서 보트를 탔지만 때 마침 바람이 안 불어서 기습효과가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존스에게는 다행히도 항구에는 영국군이 없었고 부두에 쌓아둔 물품을 불태울 수 있었다. 


존스는 셀커크 공작을 납치해 포로가 된 대륙해군 선원과 교환할 생각으로 다시 세인트 메어리 섬으로 갔다. 그렇지만 공작은 부재 중이었고 상륙병력 일부가 공작의 대저택을 약탈하는데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모양새가 우스워졌다. 존스는 엉망인 규율에 당황했고 자신과 대륙해군을 위해 전문경력을 만들어보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20문의 HMS 드레이크Drake를 상대로한 교전에서는 훨씬 긍정적인 결과를 보였다. 두 배는 4월 24일에 벨파스트 항구 앞에서 만났다. 드레이크의 병력이 좀 더 많았지만 레인저의 포가 중포였고 포연이 걷히자 영국 범선은 백기를 들었다. 그는 드레이크호를 끌고 프랑스로 귀환했다. 



치열한 포격전을 벌이는 레인저와 드레이크호입니다. 영국 드레이크호는 병력이 더 많았지만 정찰선이었기 때문에 레인저에게 노획당합니다. 유화인데 미국의 자랑스러운 전사이어서 그런지 상당히 많은 그림이 있습니다. 


와이트헤븐처럼 무인지경의 항구를 습격하고 작은 전함을 노획한다고 해서 영국이 입은 상처는 거의 없었지만 미국이 얻은 심리적인 가치는 대단했다. 독립전쟁 내내 영국해군에게 일방적으로 눌렸던 패전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미국에게는 대단한 전과였다. 특히 영국본토 해안에서 벌일 작전이었기에 그 가치는 더욱 대단했다. 

영국 내부에서도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가제티어와 뉴 데일리 어드버타이저는 항구 민간인의 반응을 실었다. "식민지 노략선원의 무자비한 공격에 너무 놀랐습니다." 모닝 크로니클과 런던 어드버타이저는 "민병대 4개 중대가 왔다"라고 과장보도했다. 


미국 노략선은 예전에도 영국 수로에서 노략질을 한 적이 있었지만 미국의 전함이 항구를 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100년 훨씬 전인 1667년에 템즈강을 거슬러 올라와 요새를 불태운 후로는 다른 국가의 습격도 처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함선까지 끌고 갔다. 


존스의 1779년 봉옴므 리차드 출격은 레인저의 확장 버전이었다. 이번에는 슬루프가 아니라 프리깃함인 기함인 소함대였다. 함대에는 36문의 프리깃함 USS 얼리이언스와 3척의 프랑스 함선, 26문의 프리깃함 팔라스, 12문의 브리간틴 벤전스와 12문의 커터 르 세르프가 참여했다(커터는 작은 배로 알고 있는데... 12문을 무장한 것을 보면 커터 중에는 큰 배였거나 소형포였던 모양입니다). 존스가 프랑스 함선도 임시로 지휘했다. 


프랑스의 동인도 선박을 개장한 봉옴므 리차드호는 느린데다가 무장이 너무 구식이었다. 얼라이언스는 신형이었지만 황당한 마인드의 소유자라고 비웃음을 사던 전직 프랑스 해군장교 피에르 론데가 지휘했다. 

소함대가 프랑스를 떠나기 전에, 프랑스 해군장관 자케스 샤몽은 프랑스 선원이 옳다고 판단할 때에는 미국인 제독의 지휘를 거부해도 좋다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존슨은 프랑스의 배와 선원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계약서에 서명했다. 

반대로 미국 대사 벤자민 프랑클린에게서는 전권을 인정받아서 공격적인 제독에게는 더 없이 좋은 명령이었다. 프랑클린은 단순히 아일랜드 서해안을 따라 북진해서 영국을 일주하면서 적의 재산을 마음껏 노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존스는 1779년 8월 14일에 로리엉을 출발해 8월 23일에는 아일랜드 해안을 지났다. 9월에는 영국 상선을 노략하고 해안을 위협했다. 영국해군성본부는 민병대를 조직해서 존스를 찾아다녔는데 존시의 소함대에 비하면 상당히 큰 함대였다. 

9월 23일, 존스가 리차드 피어슨 대위의 44문 프리깃함 HMS 세라피스Serapis와 맞대결을 벌이면서 작전의 최대고비를 맞았다. 두 전함의 전투는 요크셔 해안의 플람버러 헤드Flamborough Head에서 벌어졌다. 



봉옴므 리차드와 세라피스의 맞대결 장면입니다. 참 멋진 그림인데, 인터넷에서는 작은 해상도밖에 없군요. 


존스와 퍼슨의 지휘는 다른 전투처럼 예상을 빗나갔다. 상선경력 14년차의 존스는 날렵한 적의 전함을 따돌린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영국 포수는 미국 포수보다 경험이 많았다. 

가벼운 바람을 받으며 두 배는 천천히 다가섰다. 갑자기 봉옴므 리차드에서 머스킷총 한 발이 발사되었다. 총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두 배는 기를 올리고 대포를 발사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세라피스는 봉옴므 리차드 주변을 선회하며 조직적으로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존스의 배에서는 사상자가 늘어갔고 영국 피어슨은 전투깃발을 내리지 않겠느냐며 항복을 권유했다. 그 당시의 전투상황을 보면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배와 함께 죽겠다. 항복하면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미군 해군사에는 이렇게 변형되어 전해졌다 "아직 전투를 시작도 안 했어."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든지, 존스의 앞을 내다 본 기동이든지 아니면 피어슨이 승리를 과신했든지, 두 배가 나란히 서게 되었다. 존스와 선원은 갈고리를 던져 세라피스에 엮으면서 전투의 흐름을 반전시켰다. 존슨은 평소보다 더 많은 해병을 승선시켰었고 갑판과 삭구Rigging에 병력을 제대로 배치시켜두었다. 해병의 머스킷총과 검은 세라피스 갑판 위에 보이는 영국 선원을 모조리 쓰러트렸다. 


영화에서 많이 봤듯이, 육박전이 벌어지기 전에 선원을 갑판과 삭구에 배치시켜 소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집니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연한 사건 하나가 존스의 승리를 결정지었다. 돛 끝에 올라가 있던 선원 한 명이 세라피스 갑판 위로 수류탄을 마구 던졌고, 그 중의 하나가 열린 해치로 들어가 포 갑판의 화약 덩어리에서 터졌다. 연쇄폭발이 일어나면서 내부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고 세라피스의 포대는 완전히 침묵을 지켰다. 이제는 피어슨이 항복할 차례였다. 그는 전투깃발을 내렸고 영국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 해군이 바다에서 처음으로 승리했다. 미국은 감격에, 유럽과 영국은 충격에 빠졌다.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얼라이언스가 지원하려다가 양쪽 배에 모두 난사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존스가 직접 가르키며 세라피스의 돛대를 날려서 기동을 못하게 만들었군요. 꼭 필요한 부분만 번역해두겠습니다. 


Bonhomme Richard

1. Captain John Paul Jones, 32 years old, U.S. Continental Navy. 

2. 개전 시에 322명 승무원, 종전 시에 150명 이상이 전사 또는 중상. 

3. 8파운드 포를 존슨이 세라피스 주 돛대에 겨냥. 

4. The other two quarterdeck 8-pounders.  육박전 당시에 3문만이 동작. 

5. 스코틀랜드 출신 윌리암 해밀톤이, 수류탄 통을 들고 돛대 끝으로 이동. 

6. 포수 헨리 가디너 기절. 배를 적에게 넘겨주려고 하자, 존스가 권총으로 기절시킴. 

7.A group of nine men operating one of the mainmast pumps. 

8. 개전 시에 포격을 맞은 프랑스 해병 15명이 전사. in the battle when Serapis fired three raking broadsides into Bonhomme Richard's stern. 

9. 세라피스의 갑판 포(two upper-deck 9-pounders and three lower-deck (18-pounders)가 준 피해. 2시간 30분 동안 마음대로 포격했음 

10.Damage created by Serapis' aft cannons (three upper-deck 9-pounders and three lower deck 18-pounders). 

11.Midshipman Fanning and others throwing down their coats and stomping on them to extinguish the fire that has traveled up the rigging into the maintop. 

12.Bonhomme Richard's large "fighting tops," in which Jones placed seamen and French marines to clear Serapis' tops and decks. 

13. 대륙해군 프리깃함 얼라이언스가 봉옴므 선수와 세라피스 선미에 발사해 입힌 피해. 

14.The three-lantern recognition signal in the fore, main and mizzen shrouds 존스 얼라이언스를 위해 랜턴 3개로 표시Jones has hoisted for Alliance. 

15.The setting of Bonhomme Richard (approximately six inches) with five feet of water in her hold due to seven 18-pound shot-holes below her waterline. 


Serapis

1. Captain Richard Pearson, 48 years old, Royal Navy. 

2. 존스의 직격탄으로 세라피스 주돛대 반파.  

3. 포 갑판의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주 해치 개방. 여기로 해밀톤의 수류탄이 들어가 연쇄폭발. 포 갑판 무력화. 

4. Serapis' starboard spare anchor, which is hooked into Bonhomme Richards's mizzen channels, locking the two ships together. 

5. The broken bowsprit, snapped off when Serapis ran into Bonhomme Richard's starboard quarter and then pivoted. 

6. Cable leading to the port bower anchor, which has been let go and snatch up and break Serapis free from Bonhomme Richard.  This failed, so both ships are locked together by Serapis' starboard spare anchor and grappling irons from Bonhomme Richard. 

7. 얼라이언스의 포도탄으로 입은 피해

8. Dead and wounded as a result of intense fire from Bonhomme Richardtops. 

9. 284명 중 130명 이상이 전사 또는 중상. 


10월 3일 존스와 봉옴므를 제외한 나머지는(봉옴므는 전투 후에 침몰) 네덜란드 섬항구 테셀Texel로 향했다. 존스는 영국해안 노략임무를 맡아 상선을 노획하거나 파괴하고 영국전함과의 함대전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의 영웅, 유럽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작전은 영국의 해군전략을 변경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프랑스의 영국침공을 우려했었기 때문에 마음놓고 미국으로 지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플람버러 해전은 독립전쟁의 흐름을 바꾼 육지에서의 요크타운 전투에 해당된다. 


존스는 민간 지도자로서도 결단력과 선견지명을 발휘했다. 1782년 9월, 그는 로버트 모리스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해군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전했다. 당시 모리스는 의회의 해군위원이자 아직 잉태 중인 미국해군의 정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존스의 편지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으며 빈정대는 투로 시작했다. "우리 해군의 태동은... 역사상 전례가 없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시기에, 대영제국과 같은 강대국을 상대로 바다로 나간 해군장교는 미치광이였을까요?"

존스는 영국과 프랑스 해군전술을 비교하면서 단함Single ship 전투와 함대전술의 차이를 평가했다. 그리고 장교계급 개선, 신혹체계와 해군본부 설치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미국은 프리깃 함대를 만들고 어린 사관생도를 모집해서 수학과 기계공학을 가르치며 미래의 장교로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생각은 1845년 10월에 해군학교(사관학교의 전신)가 설립되면서 실현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프리깃함 한 척을 몰고 유럽으로 건너가서 정식으로 상선과 해군협약을 교섭하겠다고 제안했다. 만약 배를 보낼 비용이 없다면 자신만이라도 상선을 타고 건너가서 그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식민지에서 간신히 일어난 신생국가로서는 대담한 비전이었지만 그는 언젠가는 해야 할 일로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해서 먼저 검토해야 하는 것도 압니다. 그렇지만 빠르면 빠를 수록 큰 도움이 됩니다. 평화시에는 준비하고 전쟁 시에는 해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존스가 그린 큰 그림을 실현할 예산이 없었고, 해군에 대한 이해도 상당히 부족했다. 1785년에 미국은 해군을 전혀 보유하지 못한 상태까지 된다. 그렇게 9년을 지내다가 프랑스와의 유사Quasi 전쟁, 바르바리Barbary 전쟁 그리고 1812년 전쟁을 겪게 된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유사 전쟁은 미국 내에 상당한 영역이 프랑스령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 후의 임시정부와 선전포고없이 벌였던 전쟁이며, 바르바리 전쟁은 북아프리카 해적이 미국 상선에게 공물을 요구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며, 1812년 전쟁은 영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미국 선원을 징집하면서 벌인 전쟁입니다. 모두 미국의 강력한 함대가 없어서 벌어진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르바리 전쟁은 두 차례 일어났는데 1804년 트리폴리 항구 해전에서 불타는 USS 필라델피아 전함입니다. 


로버트 모리스, 조세프 휴스와 조지 워싱턴이 미해군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지만 존스를 선각자로 인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강력한 해양력을 주장했다. 


존스의 말년과 1792년 파리에서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홀로 죽었고 묘지위치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6년에 걸친 조사 끝에 1905년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사가와 전기작가가 몰려들면서 다시 그의 영웅담이 부활하게 되었다. 


지금은 미해군사관학교 예배당 안에 마련된 묘지의 대리석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그는 해군에게 최초로 영웅심과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외롭게 죽은 미해군의 아버지 존 폴 존스의 발견당시 시신입니다. 



지금은 해군의 아버지로 당연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해군사관학교에 마련된 묘입니다. 


PS. 무명씨의 묘지


존 폴 존스는 1792년, 45세의 나이로 외롭게 죽었고 파리 외곽의 작은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장례비는 파리 시민이 마련해주었을 정도로 미국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100년이 넘도록 그의 묘지위치는 알려지지 않았고 (사실은 관심도 없었고), 1899년에 파리주재 미국외교관으로 간 호레이스 포터 (전직 중장)가 시신발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해군에 큰 관심을 가졌던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에게 지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서조사부터 시작한 포터는 그의 시신이 외국인 개신교도 전용의 상 루이 공동묘지에 안장된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돈으로 여러 차례 발굴을 시도합니다. 결국 3개의 관을 찾아내는데, 그 중의 2개는 명판이 달려 있었고 아무런 명판이 없는 것에 마지막 희망을 겁니다. 


매장 당시에 알콜을 넣어두어서 시신(위의 시신사진)은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었고, 기록에 남겨진 존스의 외모와 흡사했는데 메달과 같은 결정적인 유물이 나오면서 발굴팀은 "폴 존스!"를 외칩니다. 

파리 의대의 조심스러운 법의학 조사에서도 그의 신원을 재확인했습니다. 프랑스에서 국장을 다시 지낸 후에 순양함 브룩클린 호에 실려 미국으로 향합니다. 이 때에는 7척의 미국 전함이 영접을 나왔고 1905년 7월 23일에 그렇게 그리던 조국의 땅에 올라서게 됩니다. 


승리 후에 침몰한 봉옴므 리차드 호의 탐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http://www.oceantechnology.org/BHR.htm


존 폴 존스의 일대기 영화, 1959년 작입니다. 


세라피스 호와의 전투는 8분 정도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