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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전쟁 - 칼카둔 전쟁

by uesgi2003 2013. 9. 1.


투쟁파 독립운동가의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안중근의사와 윤봉길의사의 기념관 신세가 처량합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남산의 굉장한 건물에서 상당한 지원을 받고 있지만 그 배경이 의심스럽고, 윤봉길의사 기념관은 폐관은 둘째치고 유품조차 훼손되고 있다는군요. 



일본의 망언이 어쩌고 저쩌고, 한국역사 교육이 어쩌고 저쩌고 하기에도 민망한 현실입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대한 글도 따로 정리해야겠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전쟁


19세기 식민지 역사는 유럽 정착민의 역사일 뿐 토착 원주민의 투쟁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고 그대로 잊혀졌다. 미서부의 대평원이든, 남아프리카의 초원이든, 오스트레일리아의 지평선이 안보이는 황무지이든, 토착민은 백인 거주지의 탐욕스러운 확장을 막아내느라 투쟁했고 수 천 년 동안 살아온 터전을 잃었다. 

아메리카 인디언과 아프리카 원주민의 저항 이야기는 그나마 잘 기록되어 있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백인 침입자에게 저항한 기록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백인 정착민은 1788년 1월 26일 시드니에서 형벌지로 첫 번째 정착을 시작한 후에 토착민과 끊임없이 충돌했다. 특히 1850년대의 골드러시 이후에 정착민의 거주지는 크게 확대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원주민은 백인이 가져온 홍역이나 천연두에 많은 목숨을 잃었다. 

1860년대가 되자 서부의 스완강뿐만 아니라 남동부와 동부 모두에 백인 정착지가 영구하게 자리잡았다. 정착지가 확립되자, 국경너머 한 번도 발을 밟지 않은 아웃백의 황무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수의 소와 양이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의 주 수입원이 되면서 목장주는 더 많은 땅을 원했다. 

가축들이 먹을 더 많은 초원을 찾으면서 국경은 계속 확장되었고 목장주는 필연적으로 원주민과 마주치게 되는데, 무력충돌에 따른 적대감 그리고 빅토리아 개척시대 특유의 인종차별로 그들을 대했다. 원주민을 마치 해충보듯이 여겼고 그들이 보이면 사살하거나 물에 독을 푸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부족은 백인 침입자에게 용감하게 맞섰지만, 정착민의 총, 말 그리고 탐욕이 결국에는 승리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북동쪽 한 구석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퀸즈랜드는, 1870년대 당시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의 6개 자치구역 중 하나였다. 백인은 퀸즈랜드의 서부와 북부의 방대한 지역을 개척하지 못한 상태였다. 북부 퀸즈랜드는 열대기후로 백인이나 가축이 살기 힘들었다. 그리고 울창한 숲과 호전적인 원주민 부족때문에 정착민은 서부로 확장할 수 밖에 없었다. 


1874년까지, 상당한 수의 백인이 지금의 클론커리와 마운트 아이자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 지역은 수 만 년 동안 살아온 칼카둔(Kalkadoon) 부족의 터전이었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정착민의 모습입니다. 정착지는 아니고 광산이나 전초지로 보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칼카둔 부족은 자존심 강하고 호전적인 부족으로 인접지역의 부족들은 그들을 몹시 두려워했다. 칼카둔 부족의 상징은 황새 발이었으면 바위에 표시해두어서 영역을 표시했다. 다른 토착 원주민과 달리, 칼카둔은 위기 시에 여러 부족을 통합해서 지도할 전쟁 지휘관의 존재를 인정했다. 

1870~80년대에, 말호니(Malhoni)로 알려진 전쟁 지휘관이 있었는데 계급인지 아니면 이름인지는 불분명하다. 칼카둔 전사는 180정도의 키와 건장한 체구였으며 다른 부족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살아가는 땅과 환경에 매우 집착했다. 백인이라면 멸종했을 그런 지역에서 칼카둔은 세대를 이어가며 살아남았다. 


칼카둔이 사용한 무기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모두가 사용한 전통적인 무기였다. 투척용 막대기를 이용한 투창은 약 60m 거리의 사람을 관통할 수 있었고 양손용 장창을 사용했다. 불로 달군 나무의 양쪽을 날카롭게 다듬은 전투용 막대, 양날을 세운 50cm 길이의 양손용 목재 검, 큰 전쟁용 부메랑(돌아오지 않는, 사진참조)도 사용했다. 


다른 대륙의 원주민과 달리,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매우 보수적이었고 부족장은 신기술 도입을 몹시 주저했다. 금속제 도끼와 칼처럼 유용하고 오래 쓸 수 있는 도구는 바로 받아들였지만 총은 문제가 되었다. 

원주민도 일부 총을 사용하기는 했어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먼저 그들은 총을 백인의 무기이자 마술로 생각했다. 그리고 후장식 소총이전의 단발 총이나 권총은 자신들의 무기에 비해 크게 좋아보이지 않았다. 총이나 화약을 계속 얻을 수 없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1861년에 로버트 오하라 버크와 윌리엄 존 윌스가 이끄는 백인 탐험대가 칼카둔의 영토를 처음으로 관통해 갔다. 젊은 전사들은 백인을 공격하고 싶었지만 연장자들은 탐험대가 데리고 있는 낙타가 두려워서 그대로 두었고 버크와 윌스가 아웃백으로 사라지면서 더 이상 백인이 보이지 않았다.

1870년대에 소수의 백인 무리가 구리를 찾아 칼카둔 영토 근처의 언덕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정착민들은 언덕에만 머물렀기 때문에 칼카둔도 행동에 나서지 않았는데, 그 뒤를 따라서 목장주가 가축을 데리고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는 12월~4월까지 우기로 폭우가 자주 오는 계절, 그리고 5월~11월까지 건기로 아예 비가 오지 않는 계절이 특징이었기 때문에 사람과 동물 모두 샘물과 연못 근처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목장주의 소와 양이 물을 차지하면서 물을 더럽혔고 칼카둔은 샘물을 더럽히는 가축을 죽였다. 정착민은 가축 근처에 오는 칼카둔을 사살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칼카둔은 정착민의 공격을 피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황소를 죽이고 식량으로 가져갔다. 


칼카둔과의 충돌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자, 정착민은 지방정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퀸즈랜드 정부는 퀸즈랜드 원주민 기마경찰(QNMP, 사진참조)을 파견했다. 백인이 호전적인 원주민을 부르는 '야생 흑인'을 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된 QNMP는 남부 빅토리아와 사우스 웨일즈 식민지에서 모은 원주민들이 주축이었다. 

그들은 북부 원주민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공격대상이 되는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리고 원주민 출신이기 때문에 추적과 매복에는 아주 능숙했다. 

식민지 정부는 그들에게 자동권총(리볼버)은 과도하다고 여겨서 스나이더-엔필드 후장식 카빈을 지급했다. 장교는 영국군 출신의 백인이었으며 카빈말고도 자동권총과 장검으로 무장했다. 


칼카둔과 QNMP 사이의 첫 충돌은 1874년 12월, 칼카둔이 연못에서 헤엄치던 4명의 카우보이를 죽이면서 시작되었다. 시체는 훼손되었고 신장을 가져다가 의식에 사용했다. QNMP는 칼카둔의 흔적을 추적해서 가축으로 축제를 벌이고 있던 전사들을 습격했다. 12명의 칼카둔 전사가 죽었고 나머지는 고지로 도망쳤다.

QNMP와 정착민이 추격했지만 산위에서 돌과 창을 던지며 저항하는 칼카둔에게 막혔다. 더 이상의 추격은 어렵다고 판단한 QNMP는 산 아래로 내려갔다.

 

칼카둔 모하이는 QNMP를 물리친 것에 고무되어 전사들을 불러 모아 술리에만 크릭의 정착지를 공격했다. 정착민의 기습을 받은 칼카둔은 300명이 죽었다.

칼카둔은 매복과 기습으로 전술을 바꾸었고 정착민은 무장병력의 호위없이는 정착지를 빠져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위협받았다. 칼카둔은 유인에도 뛰어나서 한 쪽에서는 QNMP를 유인해내고 다른 쪽에서는 정착민을 공격했다. 그들이 즐기던 전술은 소총 사거리 밖에서 고기를 요리하며 무장병력의 추격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칼카둔의 유인작전은 대성공을 거둬서 정착민은 가축을 포기할 정도가 되었는데 결국 더 큰 보복을 들러들이게 되었다.

 

몇 년에 걸쳐서 신문은 퀸즈랜드의 정착지가 크게 위협받고 있으며 정부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정착민 대표단이 자치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877년에 이민을 온 스코트랠드 출신의 알렉산더 케네디의 목소리가 가장 컸는데 칼톤 힐과 함께 칼카둔의 성지를 더럽히고 샘물에 독을 풀면서 원주민을 말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론에 밀린 정부는 QNMP 부대를 클론커리로 급파했다. 부대의 지휘관 마커스 베레스포드는 1883년 1월 24일, 칼카둔 무리를 추적하던 중에 캠프에서 공격을 받았다. 무장이 잘된 QNMP는 어렵지 않게 공격을 막아냈고 의외로 몇 명의 포로를 손쉽게 잡았다. 베레스포드는 날이 새면 클론커리로 끌고 갈 생각으로 좁은 협곡에 몰아 넣어두었는데, 칼카둔은 협곡에 이미 무기를 숨겨둔 상태였다.

나무 틀을 부수고 나온 포로들은 베레스포드와 3명의 QNMP를 죽였고, 넓적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병사 한 명이 32km를 걸어가 도움을 요청했다. 

가장 가까운 경찰서는 400km 밖에 있었고 그들이 도착할 때에는 이미 칼카둔은 멀리 사라진 다음이었다. 

 

그 후 12개월 동안, 칼카둔은 자신의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립된 정착민과 가축을 죽였고 목장주가 더 이상 가축을 돌볼 수 없게 되자 가축은 야생동물이 되었다. 정착지는 요새화되어 창과 문에는 총구가 만들어졌고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정착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지휘관을 잃고 말까지 칼카둔때문에 말까지 잃어버린 클론커리의 QNMP는 막사에서 틀어박혀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몰렸다. 

다시 한 번 여론의 공격을 받은 정부는 프레드릭 찰스 어쿠하트를 클론커리의 QNMP 지휘관으로 임명했고 이를 계기로 칼카둔 부족의 끝이 시작되었다.

 

어쿠하트는 클론커리에 도착하자 마자 QNMP의 기강을 바로 잡고, 말을 모은 다음에 칼카둔 영토를 정기적으로 순찰했다. 칼카둔은 신임 지휘관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느 날 밤에 전통 치장을 한 전사가 클론커리로 들어가 어쿠하트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그가 고지대로 오면 브레스포드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어쿠하트는 그런 경고를 가볍게 들을 사람이 아니었고, 칼카둔 영토 깊숙이에 경찰 캠프를 설치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곧바로 칼카둔 전사들이 기습을 한 후에 덤불로 도망가는 일이 빈번해졌고, 어쿠하트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칼카둔의 게릴라전은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부유한 지주 제임 파웰이 내장이 꺼내진 사체로 발견되자 정착민 사회는 분노했다. QNMP와 정착민 무장병이 대거 북쪽으로 말을 몰아 파웰을 죽인 칼카둔을 찾아 나섰다. 백인에 대한 혐오가 너무 지나쳤던 탓인지 칼카둔은 파웰의 소지품을 흘리면서 달아나서 경찰과 정착민에게 좋은 흔적을 남겼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는 혼전이어서 파웰의 동료는 칼카둔 전사에게 눌려 익사하기 전에 간신히 살아났고 대부분의 칼카둔은 소총 사거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조롱을 퍼부은 후에 고지대로 모습을 감췄다.


파웰이 죽은 후 몇 개월 동안, QNMP와 정착민은 칼카둔 영토를 휩쓸고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원주민은 모두 사살했다. 어떤 혐의나 확인도 없이 보복했고 다시 칼카둔의 보복이 이어지면서 그 일대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1884년 9월, 그라나다 역 근처에서 가축을 돌보던 중국인 인부가 다시 훼손된 사체로 발견되자 정착민은 대규모 무장병력을 모아서 칼카둔을 완전히 없애기로 결정했다. 칼카둔도 정착민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전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지막 대결이 시작될 차례였다. 


지금의 클론커리에서 북서쪽으로 100km까지의 지역은 거친 산악지대로, 안쪽 깊숙히에서는 많은 칼카둔 부족이 집결해서 정착민을 영원히 영토에서 몰아내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의 계획은 백인군대를 고지대로 유인한 후에 위에서 강습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고지 위에 많은 돌과 무기를 모아 두었다. 이 방식은 이전에도 계속 성공했었기 때문에 다른 전술을 검토할 필요도 없었고, 더구나 이번처럼 많은 전사가 한 자리에 모인 적도 없었다. 


10월까지 약 200명의 정착민이 모였고 어쿠하트의 지휘에 따라 칼카둔을 찾아나섰다. 원주민을 발견하자 그들은 배틀 마운틴으로 알려진 산 아래에서 산개했다. 투창거리 밖에서 칼카둔에게 '여왕폐하의 이름으로"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칼카둔은 비웃음과 돌팔매로 답변을 보냈고 어쿠하트는 즉시 돌격을 명령했다. 

200명의 기마병력이 산을 타고 올라갔고 급경사지에서는 말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올라가며 모습을 드러내는 칼카둔을 사살했다. 돌, 부메랑과 단창이 쏟아지면서 여러 명이 부상당했고 어쿠하트도 바위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원주민이 던진 돌에 맞아 기절했다. 어쿠하트의 목숨을 빼앗으려던 전사는 사살되었고 어쿠하트는 안전지대로 옮겨졌다. 

어쿠하트가 부상당한 것을 본 정착민병력은 사기를 잃고 뒤로 물러나 불평만 늘어놓았다. 


백인이 물러나는 것을 본 칼카둔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승리를 축하했고 산아래에서는 정착민병력이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어쿠하트가 정신을 차리자 병력을 둘로 나우어 하나는 산 뒤로 돌아가 칼카둔을 공격하게 했다. 승리에 들떠 방심하고 있던 칼카둔은 백인의 공격에 크게 당황했고 고지 위에서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좋은 목표물이 되었다. 정착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많은 전사를 사살했다. 


분명한 지시가 없자 칼카둔은 밀집대형을 이룬 후에 어쿠하트를 향해 달려내려왔다. 산아래로 내려온 전사들은 대열을 맞춘 후에 창과 방패를 휘두르며 앞으로 전진해왔다. 

정착민 병력에게는 너무나도 완벽한 상황이었다. 한 번에 이렇게 확실하게 소총 앞에 나선 적이 없었다. 근거리에서의 소총사격은 빗나갈 수가 없었다. 앞대열이 모두 쓰러졌는데도 그 다음 대열이 다가왔다. 도저히 집중사격을 견딜 수 없었던 생존자들은 이리 저리 몸을 숨겼다가 다시 대열을 정비해서 다가왔다. 

극히 소수의 전사만이 정착민 대열까지 다가와 창을 꽂을 수 있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일제사격에 쓰러져갔다. 결국 몇 명만이 살아남았고 조금 전까지 기세를 올리던 거의 모든 전사가 땅 위에 쓰러졌다. 


단 하루 만에 칼카둔과의 전쟁은 끝이 났다. 식민지 정부라면 당연하게 그랬듯이, 퀸즈랜드 정부는 이 날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칼카둔 부족이 목숨을 잃었는 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약 600명에서 1,000명의 칼카둔 부족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몇 년 동안 배틀 마운틴 근처의 골짜기, 마른 시내바닥 그리고 바위 산에는 수 많은 사람 뼈로 덮였다고 한다. 

어쿠하트는 고지로 달아난 소수의 칼카둔을 추적했지만 더 이상의 전과는 올리지 못했다. 그는 추적을 단념하고 전장으로 돌아와서 딩고라는 야생개에게 원주민의 시체를 넘겨줬다. 


왜 칼카둔이 그렇게 무모한 전술을 사용했는 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노래에서 나오듯이 백인의 마술에 맞설 정도로 자신들의 숫자가 많았고 고지대에 갇혀있기 보다는 평지에서 전투를 벌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틀 마운틴에서의 전투가 끝나자, 칼카둔은 다시는 정착민을 위협하지 못했고 거꾸로 그들의 영토로 백인들이 밀고 들어갔다. 마지막 순수 칼카둔 혈통이 1930년에 클로커리 병원에서 숨을 거뒀는데, 그들의 역사는 훨씬 오래 전에 잊혀진 상태였다. 아마도 이 이야기로 6,000년 동안 퀸즈랜드 일대를 누볐던 토착문화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겠지만 다시 잊혀져 갈 것이다. 

 

17,500년된 칼카둔의 암벽화입니다. 큰 그림으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칼카둔의 배틀 마운틴 전투를 현대에 그린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