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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의 유럽데뷰 - 툴롱 전투 1793

by uesgi2003 2013. 10. 22.


제 블로그에 오시는 분의 요청으로 이번 주 금요일에 공주대학교를 방문해서 수업시간에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MS에서 개발자 마케팅을 지휘할 때에는 일년에 2차례 정도 전국 대학투어를 했었기 때문에 대학생들과 자주 어울릴 기회가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만날 일이 없었죠.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수업과의 연관성 그리고 시간제약 때문에 안타깝지만 많이 줄여야 할 겁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나폴레옹의 유럽무대 데뷰전인 툴롱 전투입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자료가 있어서 다루고 싶지 않았는데, 게으름때문에 다른 자료를 찾지 않고 그냥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게으름이 오히려 더 많은 수고를 부르는군요. 나폴레옹에 대해 어설프게 설명하더라도 프랑스 혁명의 배경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고... 무수한 프랑스 지명과 인명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나폴레옹의 유럽데뷰 - 툴롱 전투 179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uonaparte(코르시카이름, 프랑스어로는 Bonaparte)는 도대체 코르시카 촌뜨기에서 프랑스 황제로 급상승할 수 있었을까? 역사상 가장 난감한 질문일텐데 수 많은 저자가 책장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온갖 증거와 주장을 제시했는데도 앞으로도 같은 질문과 답변이 계속될 것이다. 


나폴레옹의 화려한 군경력은 1793년 가을에 있었던 툴롱Toulon이라는 항구도시에서 시작되었다.  툴롱은 왕당파의 반란 후에 프랑스, 스페인, 나폴리와 피에몬테Piemonte 연합군에게 점령되었다. 프랑스 공화정 장군 장 프랑수아 카르토Jean Francois Carteaux군은 9월에 툴롱을 포위했다. 


(민간인 출신의 군지휘관 중에는 의외로 천재성을 보인 인물이 간혹 있지만, 병력규모와 무기체계가 복잡해지면서 무능한 지휘관이 더 많았습니다. 장 프랑수와 카르토가 그런 인물로, 화가에서 군지휘관으로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툴롱전투에서 황당한 결정을 계속 내려 결국에는 경질당했고 나폴레옹의 데뷰를 더욱 인상깊게 만들어주었습니다.

포대진지 공사를 공들여했는데 정작 완공후에 보니 사정거리 밖이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자신이 보유한 포의 스펙조차 몰랐다는 믿을 수 없는 일화입니다. 옆의 그림을 보면 예술성이 옅보이는 군지휘관입니다.)


전투초반에 카르토의 포병장교가 부상을 입었고 정치적인 배경과 운 덕분에 유능하고 젊은 포병대위 보나파르트가 급히 투입되었다. 나폴레옹은 자중지란의 부대에 배속되어 황제로 향하는 길에 첫 발을 내딛었다. 


툴롱은 반란직전의 상황이었다. 1792년 여름, 자코뱅당이 폭력과 협박으로 시를 장악했지만 1년 후에 흐름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자코뱅당에 대한 반감에 힘을 얻은 부르주아(유산층)가 무혈 쿠데타에 성공했고 주변지역의 동조세력을 끌어들였다. 반혁명의 움직임은 미디 피레네 지역을 휩쓸었다. 


1793년 2월 1일, 국민의회는 투표를 거쳐 만장일치로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사실 영국정부는 프랑스가 전쟁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1792년 12월에 프랑스로의 곡식과 원자재 수출을 금지시켰고 1월에는 런던주재 프랑스 공사를 추방했다. 영국은 선전포고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응했다. 해군을 소집했고 대륙연합에 상당한 예산을 투입했다. 이 때부터 워털루전투까지 그리고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은 대프랑스 연합의 금고역할을 하면서 동맹국이 군대를 계속 투입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댔다. 

해군의 경우에는 대양에서 프랑스 상선을 노략질했고 항구를 봉쇄하고 식민지를 공격했다. 


영국이 툴롱에서 벌이고 있는 일도 이런 움직임의 일환이었고 보나파르트의 등장에 상당한 원인이 되었지만, 그 과정은 우연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중에는 보나파트르가 신이 자신에게 내려준 운명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카르토가 지휘하는 프랑스 혁명군은 반란군의 툴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카르토의 아버지는 7년 전쟁 중에 한쪽 다리를 잃고 파리에서 부상으로 죽었는데, 카르토는 9살에 처음으로 군복을 입었고 용기병과 보병을 거친 후에 1779년에 초상화가로 전향했다. 화가로 성공한 그는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그려 6,000리브레(1795년까지 사용된 프랑스 화폐)를 받았다.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왕당파가 아닌 혁명군 편에 가담했다. 1792년 8월 10일에, 중위계급으로 튈르리를 공격했다. 나중에 알프스군이 연방주의군에게 대승을 거두자, 자신이 연방주의군의 리용과 마르세이유 공격을 막아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하고 무능한 군지휘관이었다. 

9월 7일, 카르토 군대는 툴롱에서 몇 km 떨어진 울리울(Ollioules)이라는 마을을 힘들게 점령했다. 전투 도중에 1명이 죽고 2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하필이면 포병장교 도마르틴 대위가 부상을 당했다. 당시 관측통의 표현에 따르면 상당히 재능있는 장교가 포병을 지휘하게 되었다. 


9월 16일 당시, 보나파르트는 니스의 친구 살리체티Saliceti(의회대표)를 방문 중이었는데, 그는 보나파르트가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사령관인 카르토에게 상의도 하지 않고 포병지휘관 자리를 제안했다. 보나파르트는 그 자리에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살리체티는 "이렇게 좋은 기회가 없었다. 이탈리아군으로 전출 중이던 동지 보나파트르를 불러 세워서 도마르틴을 교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라고 기록했다. 

살리체티는 툴롱에 대한 초반공격을 직접 지켜보았기 때문에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령관이나 참모가 "병력, 무기, 그 효과 어느 것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이해도 못하고 있다"라며 비난했었다. 살리체티가 툴롱작전에 파견된 의회대표, 코르시카 출신 그리고 보나파트르의 친구라는 절묘한 우연의 3박자는 보나파르트의 앞길을 열어주었다. 



당시의 툴롱(지도참조. 클릭하면 커집니다.)은 세계에서 가장 공략하기 힘든 요새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8월 말에 영국군이 합류하면서 영국함대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방어선을 보강했다. 혁명군은 포위전 초반에 몇 차례의 작은 승리를 거뒀지만, 보나파르트가 도착할 때에는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카르토는 아비뇽과 같은 반란군을 상대로한 국지전에 적당한 지휘관이었지, 공성전에는 무능력한 지휘관이었다. 특히 작전파견대표Representatives-on--mission가 공안위원회Committee of Public Safety(1793~1795년 동안 사실상의 정부. 자유확립을 위한 폭력을 주장하며 공포정치를 했다)에 보내는 보고는 신랄했다. 

예를 들어 한 편지에서는 카르토의 무능력을 비난한 후에, 살리체티와 또 한 명의 작전파견대표는 보나파트르가 작전에 걸맞는 유일한 포병장교라고 추켜세우며 진급을 제안했다. 


보나파르트가 전선에 도착한 지 겨우 2주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그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사전에 작전파견대표가 의견을 모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카르토군의 난맥상이 파리로 보고되었다.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를 벗기 위해 군에 입대한 마르세이유 출신 병사들이 심각한 문제이며, 실전경험을 가진 장교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공안위원회는 살리체리의 보고를 받아들여 10월 18일에 보나파르트를 소령으로 진급시켰다. 보나파르트는 카르토보다 공성전에 대해 유능했을 뿐만 아니라 든든한 정치적 후원도 받고 있었다. 정치인맥, 운 그리고 재능이 한꺼번에 작용하면서 보나파트르의 출세길이 활짝 열렸다. 


보나파르트는 툴롱에 도착하면서 포병대를 맡았다. 4문의 캐논(직사포), 2문의 구포 그리고 자원병 몇 개 중대가 고작인 이름만 포병인 상태였고 지휘체계도 엉망이었다. 사령관부터 일반 병사까지 명령을 내렸고 마음대로 포대위치를 변경했다. 보나파르트는 포병 사령부를 만들고 모든 장교, 병사와 포를 총동원했다. 

합류한 지 3일 만에, 그는 14문의 캐논과 4문의 구포를 충분한 포병과 함께 배치했다. 대포, 말, 황소와 탄약저장소로 연결되는 명령전달체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르세이유에서 매일 5,000개의 흙자루를 날라서 방벽을 만들었다. 울리울에는 포병창을 만들고 80명의 대장장이와 마차목공이 소총과 포탄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마르세이유에서 숙련공을 징집하고 부근의 주조소를 수용해서 구포의 포탄을 생산했다. 심각하게 부족했던 화약을 확보하기 위해 보급창과 매일 말싸움을 벌였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포가 보이는대로 징발했다. 

그의 놀라운 열정과 조직력 덕분에, 포병은 이제 100문의 대포로 하루 20시간을 포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포병을 라 몽타뉴La Montagne(혁명의회의 한 파벌)와 상퀼로트Sans Culottes(혁명의 주도계층) 2개 포대로 나누고 카르토에게 카이로Caire산 공격을 제안했다. 카이로 산을 점령하면 에기에트Eguillette 요새와 발라키에Ballaquier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고 그곳에서 툴롱을 포격할 수 있는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카르토는 소수의 병력과 대포만 투입했고 9월 22일에 벌어진 카이로 공격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더구나 영국군은 카이로산이 전략요충지라는 것을 알아채고 수비선을 보강하고 20문의 중포와 4문의 구포를 배치시켜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요새보강을 마친 영국군은 지휘관 이름을 딴 멀그레이브Mulgrave 요새까지 만들어서 프랑스군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상관의 무능력에 좌절한 보나파르트는 10월 25일에 편지로 공안위원회에 보고했다. "저는 포병을 제대로 지휘할 포병장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합니다. 계급이 맞아야 지금의 바보같은 참모들의 편견과 아집을 누르고 이론과 경험으로 성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기에트 요새를 공격해서 툴롱을 점령하려던 계획도 설명하면서 비난을 했다. 툴롱과 주변지역은 아작시오Ajaccio(코르시카섬의 해안지역)와 매우 흡사했기 때문에, 보나파르트는 도착하자 마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툴롱으로 통하는 열쇠는 에기에트 요새였고 여기를 점령하면 툴롱의 내외곽 도로를 모두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툴롱뿐만 아니라 영국함대까지도 포격할 수 있었다. 영국함대를 몰아내면 툴롱은 완전봉쇄되어 저절로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 보나파르트가 이 계획을 구상해낸 것은 아니고, 그가 도착하기 전에 다른 장군과 작전파견대표가 이미 결정했던 작전이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계획으로 만들어서 진행시켰다. 



툴롱 항구의 영국-스페인 연합함대 모습입니다.


살레치는 카르토의 한심스러운 행동과 결정때문에 포병을 독립시킬 생각을 했다. 그렇게 되면 보나파르트는 단독 작전수행이 가능해지고 대표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1개 포대를 설치하고 6주 동안 (10월 15일~11월 30일) 영국의 멀그레이브와 말보스케Malbousquet 요새를 두들겼다. 영국군은 찰스 오하라의 지휘로 17,000명(프랑스 반란군 포함)의 연합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도 카르토를 소환하고 프랑수아 도페이Francois Doppet를 임명했지만 그는 카르토보다도 더 한심스러운 사령관이었다. 보나파르트가 살체이에게 다시 영향력을 발휘해 3주 만에 65세의 진정한 지휘관인 자케스 듀고미에Jacques Dugommier가 다시 부임했다. 


11월 25일, 듀고미에는 전투회의를 소집했고 보나파르트를 부관으로 참석시켰다. 3가지 계획이 검토되었지만 살레치는 보나파르트의 에기에트 요새 공략이 최선이라고 강변했다. 실제로도 듀고미에는 보나파르트에게 전권을 위임할 분위기였다. 문제는 언제라도 연합군이 말보스케 요새에서 기습공격을 나올 수 있고 울리울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듀고미에와 보나파르트는 반격을 했고 양쪽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했지만 오하라 사령관을 포로로 잡았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그를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지만 2명의 지원병과 2명의 정규군이 잡은 것으로 보인다.


보나파르트의 지휘 하에 2주간 더 준비를 했고, 그 동안 앙드레 마세나Andre Massena 준장(미래의 원수, 그는 툴롱에서 나폴레옹을 처음으로 만났다)의 새 병력이 합류했다. 

12월 17일, 맹렬한 포격과 폭우의 엄호를 받으며 마지막 공격을 개시했다. 6,000명의 병사가 멀그레이브 요새를 강습했고 1,000명의 피해를 입는 치열한 전투 끝에 새벽 3시에 점령했다. 보나파르트는 그 동안 다른 두 요새를 공격하면서 다리에 총검상을 입었다. 


요새를 함락당한 영국함대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고, 후드 제독은 항구 밖으로 함대를 소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두 가지 다른 명령도 내렸는데, 먼저 보복이 두려운 시민은 영국함선으로 피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약 7,500명의 시민이 승선했지만 배가 부족해서 훨씬 더 많은 시민이 남겨두어야 했다. 목숨을 건지려고 보트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처참한 광경이 부두 전체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 보트와 뗏목이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라 앉았다. 항구는 죽음에서 달아나려는 사람들로 가득찼고, 눈물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헤엄을 치며 보트에 매달려서 애원하는 사람들을 노와 칼로 밀어냈다. 승선을 기다리던 나폴리 병사들은 조급함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가까이 오는 시민들에게 발포했다...


두 번째 명령은 윌리엄 스미스 대위에게 내려졌다. 그는 시리아에서 보나파르트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프랑스 함선을 최대한 수장시키라는 명령이었다. 12월 18일 하루 종일 파괴준비를 하는 동안, 몇 명의 스페인 선원이 화약이 만재된 프리깃함 아이리스에 불을 놓는 바람에 작전이 엉망이 되었다. 프랑스 공화국 포로가 훼방을 놓으면서 병기창은 폭파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9척의 프랑스 전열함과 3척의 프리깃함이 침몰했고 12척을 견인해갔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모아온 선박건조 목재가 모두 불탔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해군에게는 치명상이었는데, 1798년 8월에 있었던 나일해전의 피해(전열선 2척과 프리깃함 2척 침몰, 전열선 9척 나포) 이상 가는 피해였다. 정작 그 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피해가 3척 침몰에 18척 나포였다는 점을 보면 툴롱에서의 자침처리가 얼마나 큰 피해였는 지를 알 수 있다. 



툴롱 소개와 자침작전 중인 영국해군입니다. 영화에서 자주보는 특수효과가 있군요.  


12월 19일, 공화당군이 툴롱에 입성하자 보복이 바로 시작되었다. 살해위협을 받고 도시에서 탈출했던 공화당파가 보복에 나서면서 학살이 벌어졌다. 보나파르트는 학살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탈출하던 4척의 배를 침몰시켜서 여성과 아이들을 죽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보나파르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장교가 학살장면에 구역질을 느끼며 중재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작전파견대표는 완강했다. 공포정치로 반란군을 굴복시키려고 했다. 실제로 혁명공화당파는 반혁명세력을 상대로 폭력과 공포를 필수적인 수단으로 생각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런 단두대 처형 모습이 흔했는데, 1793년의 루이 16세 처형장면입니다. 

 

툴롱의 작전파견대표는 피에 굶주린 것처럼 보였다. 현장에 있었던 5명의 대표가 서명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국민의 보복이 거행되었다. 사격이 계속되었고 해군장교는 모두 처형되었다. 반란군에게 마땅한 대접을 해주어야 애국자의 영혼이 위로받을 것이다."

심지어 툴롱을 지도상에서 아예 삭제하자는 위험한 이야기까지 나왔고 하루에 200명씩 처형해서 더 이상 처형할 반역자가 없다는 자랑아닌 자랑도 있었다. "우리는 매일 반혁명 공모자를 처형했다." 이런 기록에는 과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많은 처형과 무고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영국 박물관이 소장한 툴롱의 학살장면입니다. 1814에 만들어진 에칭화입니다.


보나파르트의 명성은 툴롱 공성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며 일부 역사가는 마치 그가 툴롱 공성전을 전적으로 지휘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강조하는 실수를 하고 있다. 보나파르트가 작전을 제안했을 수는 있지만 단독으로 툴롱을 함락시킨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지휘관 자질은 툴롱에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병 지휘관만 놓고본다면 당대 최고라는 것에 누구나 동의한다. 


프랑수아 도페이가 1797년에 쓴 회고록을 보면, 보나파르트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탈리아의 영웅이 된 젊은 장교는 남다른 재능, 보기 힘들 정도의 용기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활동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방문할 때마다 그는 늘 진지에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쉬더라도 진지에서 망토를 덮고 쉬었다. 그는 절대로 포대를 떠나지 않았다."


툴롱 공성전 이후에, 보나파르트는 정치가와 군지휘관의 눈에 띄었고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렇다고 탄탄한 출세길로 들어선 것은 아닌데, 그 당시의 계급체계는 언제라도 뒤집어 질 정도로 위험했다. 수 십 명의 장성, 수 백 명의 영관급 장교가 혁명의회의 기대에 못 미쳤다는 이유만으로 단두대로 보내지거나 해임당했다. 1793년에만 17명의 장성, 그 다음 해에는 67명의 장성이 처형당했다. 

보나파르트는 천재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탄탄한 정치적 후원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혁명군의 시민학살을 보여주는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노파심에서... 프랑스 혁명당시의 부작용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시민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초석이 된 역사의 대단한 사건입니다. 단두대의 공포정치, 수구세력의 재집권, 공화당파의 분열 등등의 부작용은 역사에서 항상 존재해왔고 이런 부작용을 무력과 평화로 극복하면서 지금의 민주주의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우리 상황이 생각이 나서 레미제라블의 유명한 장면을 가져와 봅니다. 지난 해 말에 이 장면을 보면서 많이도 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