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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의 마지막 승리 - 바그람 전투 (1부)

by uesgi2003 2013. 11. 6.


초저녁에 대로변 골목을 지나갔는데, 저녁장사를 준비하는 노점상이 많더군요. 예전같으면 활기차고 행복한 소시민의 생활로 보였을텐데, 지금은 저 많은 사람들이 하루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우울한 감상입니다.


이번에 수능을 볼 고등학생부터, 사회에 진출하려고 지원서와 면접을 준비하는 대학생, 내년도 진급대상이 사회인 그리고 인생 이모작과 삼모작 중인 퇴직자, 하다 못해 추운 겨울을 마음씨 좋은 인간에게 의지해야 하는 길냥이와 유기견까지 모두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나폴레옹 이야기는 피하겠다고 해 놓고서는 두 번째로 정리합니다. 뒤레프스 사건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그냥 눈에 보이는 자료부터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승리 - 바그람 전투 (1부)


1808년 여름, 바일렌Bailen 전투 그리고 프랑스의 스페인 주둔군 전체가 치욕스럽게 항복했다는 소식은 유럽전체를 뒤흔들었다 (마드리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대프랑스 저항은 지역봉기로 이어졌고 게릴라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정도로 비정규전으로 프랑스군을 궁지에 몰아 넣었고 결국에는 7월 23일에 바일렌에서 피에르 듀퐁의 군대가 항복하고 8월에는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도망치게 만들었습니다. 되돌아온 프랑스군을 상대로 스페인, 포루투칼, 영국 연합군은 5년을 더 전쟁을 하게 됩니다.) 

1796년 이후로 프랑스군에게 계속 패배했던 오스트리아는 희망을 보았다. 정규군도 제대로 없는 스페인 민병대가 프랑스군에게 이겼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듀퐁장군이 항복하고 있고 프랑스 병사가 항의하는 모습입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600명 정도가 사상당한 반면에 무려 17,000명 이상이 항복했습니다. 


아래 지도는 바일렌 전투의 상세도인데... 스페인어입니다. 붉은 색이 스페인 왕국의 정규군과 민병대입니다. 불과 300년 전만 해도 중남미부터 유럽 러시아 국경까지 스페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었는데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유럽의 2등 국가로 전락했습니다. 





1809년 당시의 유럽 상황도입니다.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잘 확인하면 이야기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럽은 지금의 국경이 만들어지기 이전이어서 세력의 배치를 잘 알아두어야 합니다. 


1808~1809년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강경파와 화의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강경파는 1796년 이후에 빼앗긴 이탈리아, 독일 일부와 폴란드를 되찾고 1805년의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패전을 복수하고 싶었지만 화의파 지도자인 카를Charles 대공은 아직 프랑스와 결전을 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프란츠Francis 1세 황제는 전쟁파의 의견을 선택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에 한쪽 발을 붙잡혔기 때문에 독일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겨우 200,000명 정도일테고 그 정도면 해볼만 하다는 판단이었다. 


스페인에 있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조만간 전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하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차르를 독일 에르푸르트로 초대해 유럽문제를 협의하려고 했다. 1808년 10월 12일에 맺은 에르푸르트 조약에 따라 프랑스가 공격을 받으면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개전하면 러시아군은 참전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잠시 두고 보았다가 승리하는 쪽으로 참전해서 전과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독일의 작은 영지까지 압박해서 병력을 마련했고 독일중부로 이어지는 경로를 따라 보급창을 준비시켰다. 

1809년까지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모두 상대할 충분한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3개 전선에서 동시에 협공해서 나폴레옹을 격파하려는 계획이었다. 요한John 대공은 이탈리아 방면으로, 페르디난트 대공은 나폴레옹의 폴란드 동맹을, 카를 대공은 주력을 이끌고 독일중부를 공격하기로 했다. 

카를은 오스트리아군을 개혁해서 훈련을 늘리고 대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척후병의 활용도를 높였다. 개혁덕분에 오스트리아군은 1805년 당시보다 훨씬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2개 전선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그는 독일 다뉴브강을 따라 주력이 공격하고 양아들 위젠Eugene(그림 참조)은 이탈리아군을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상대하기로 했다. 나폴레옹은 2개군이 합류해서 빈 근처에서 오스트리아 주력을 격파한 후에 평화조약을 끌어낼 계획이었다.



전투는 나폴레옹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1809년 4월 9일에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놀라운 속도로 바바리아에 들어섰는데 위젠도 미처 준비가 안된 상태였다. 4월 16일, 사실레Sacile 전투에서 위젠은 7,000명의 병력을 잃으며 패배하면서 나폴레옹을 실망시켰다. 그렇지만 5월 8일, 위젠은  피아베Piave 전투에서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하면서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길목을 열었다. 

나폴레옹은 위젠에게 본대와 함께 다뉴브강을 따라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폴레옹은 카를 대공의 본대를 바바리아에서 보헤미아로 밀어냈다. 그리고 빈으로 진격해서 5월 16일에 점령했다. 


5월 말, 요한 대공의 병력은 헝가리 라브(현재의 죄르Gyor) 방면으로 후퇴해서 보급품과 헝가리 병사를 충원했다. 빈에서 남동쪽으로 150km 떨어진 라브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의 우측을 위협했고 프랑스군은 이탈리아군으로 대응했다. 위젠은 요한을 라브 전투로 끌어들였고 6월 14일에 오스트리아군에게 다시 한 번 패배를 안겨주었다. 나폴레옹은 우측이 안전해지자 위젠을 다시 빈으로 불러들였다. 



라브 전투 모습입니다. 위젠의 프랑스군이 대승을 거둔 것은 아니고 양쪽이 엇비슷한 피해를 냈지만 라브를 장악해서 본대의 옆구리를 안전하게 보호했다는 점에서 프랑스군의 확실한 승리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제 오스트리아 주력을 궤멸시킬 준비가 되었다. 그는 빈의 북동쪽을 도강해서 전략교두보를 확보하기로 했다. 5월 20일, 나폴레옹은 40,000명의 병력과 함께 출발했다. 처음에는 도강이 순조로웠지만 카를이 아슈페른Aspern과 에쓸링Essling 마을 사이의 프랑스 교두보를 공격했다(아래 전황도 참조). 

상류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돌이 실린 바지선, 나무 심지어 풍차까지 흘려보냈고 결국에는 프랑스이 급히 만든 다리를 부수는데 성공했다. 



다뉴브 북쪽 강변에 겨우 절반 정도의 병력을 상륙시킨 나폴레옹은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그는 다리수리를 명령하고 아슈페른-에쓸링에서 후퇴했다. 앙드레 마세나Andre Massena와 장 란Jean Lannes 원수는 다리가 보수될 때까지 교두보를 방어해내자, 나폴레옹은 22일 밤에 병력을 로바우Lobau로 후퇴시켰다. 장 란은 후퇴하다가 대포탄에 두 다리를 잃었고 나중에 부상악화로 죽었다. 

나폴레옹은 뼈아픈 교훈을 잊지 않고 다시는 오스트리아군을 얕잡아보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다뉴브강을 다시 건너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기 전에, 위젠의 이탈리아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180,000명과 거의 500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도 버틸 수 있는 확실한 다리를 만들었고 로바우를 요새로 만들었다. 

아슈페른-에쓸링 전투에서 화력이 부족했었기 때문에, 그는 빈의 병기창에서 노획한 오스트리아 대포를 배치했다. 그리고 노획한 대포를 10척의 전투함과 20척의 바지선에도 장착해서 다리를 보호했다. 


6월 중순이 되자, 로바우는 중포 100문을 갖춘 요새로 보강되어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어느 방향으로 공격해 나가더라도 지원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6월 말에 아슈페른-에쓸링에서 루스바하Russbach강의 고지로 퇴각했다. 카를 대공은 로바우의 프랑스군이 다뉴브강을 건너는 것을 가까이에서 견제하는 동시에 대포를 보다 잘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스트리아군의 기동은 나폴레옹이 정확하게 예상한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카를의 병력을 두 지역에서 북쪽으로 끌어내 고정시킨 후에 로바우의 동쪽에서 다뉴브강을 건널 생각이었다. 

북쪽에서의 기만작전으로 오스트리아군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에, 프랑스군, 독일군과 이탈리아 동맹군은 다뉴브강을 건너 아슈페른-에쓸링에서의 실수를 만회할 계획었다.


7월 4일 저녁, 나폴레옹은 로바우의 북쪽 포대에게 오스트리아 진영을 향해 포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계략은 적중했다. 프랑스의 니콜라 샤를 우디노Nicolas Charles Oudinot 군단은 어둠을 틈타 다뉴브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했다. 베르트랑Bertrand의 공병은 미리 준비한 배로 15분 만에 16개의 부교를 놓았다. 마세나와 루이 니콜라 다부Davout 군단은 밤동안에 모두 강을 건넜다.

이튿날 오전 10시가 되자, 나폴레옹은 교두보에 95,000명을 안전하게 상륙시켰고 나머지 병력도 곧 합류할 예정이었다. 7월 5일, 프랑스군은 루스바하강변의 마르흐펠트Marchfeld 평원에 배치된 카를의 방어선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카를은 프랑스군의 도강을 막기에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좀 더 방어하기 쉬운 지역으로 질서정연하게 퇴각했다. 7월 5일 저녁, 오스트리아군은 도이치-바그람Deutsch-Wagram 마을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진영을 펼쳤다. 루스바하강 고지를 점령한 방어선은 매우 강력했다. 

프랑스군은 마세나가 좌익을,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Jean-Baptiste Bernadotte의 작센군단, 위젠의 이탈리아와 오귀스트 드 마몬트Auguste de Marmmont 군단이 중앙을, 우디노와 다부군단이 우익을 맡았다. 엠마누엘 드 그루시Emmanuel de Grouchy 기병군단은 최우익에 섰다. 나폴레옹은 장 밥티스트 베시에르Bessiere 군단과 황실근위대과 함께 예비군으로 남았다. 

나폴레옹과 카를이 노심초사하던 결전의 무대가 모두 마련되었다. 


나폴레옹은 좌익의 측면을 로바우 요새의 중포로 엄호하고, 아데르클라아Aderklaa에서 바우머스도르프Baumersdorf까지 적의 병력을 묶어두는 공격을 하는 동시에 우익에서 강력한 공격으로 적의 좌익에서 중앙까지 말아 올려갈 계획이었다. 


나폴레옹의 작전이 성공하려면, 멀리 떨어진 두 명의 원수가 전령으로 긴밀하게 교신해야 했다. 마세나는 낙마하면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마차를 타고 좌익을 지휘하게 되고, 우익에서는 다부가 루스바하 고지를 통제하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 점령한다. 프랑스군이 이 마을을 점령하면 오스트리아군은 고지를 포기할 것으로 믿었다. 

그렇지만 카를은 프랑스/연합군을 포위해서 섬멸한다는 작전을 세워두었다. 요한 대공의 프레스부르크Pressbrug(현재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12,000명이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프란츠 폰 로젠베르크-오르시니Rosenberg-Orsini를 도와 좌익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7월 5일 초저녁이 되자, 나폴레옹은 카를이 다시 퇴각해서 보헤미아에서 전장이 옮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루스바하를 넘어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어설픈 공격은 거의 재앙수준으로 진행되었다. 베르나도트가 바그람을 공격하는 동안, 우디노는 위젠의 지원을 받아 바우머스도르프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다부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제 때에 공격하지 못했다. 그가 전진 명령을 내렸을 때에는 이미 우디노의 바우머스도르프 공략이 실패했기 때문에 병사를 불러들였다. 


베르나도프는 프랑스와 작센 혼성사단과 2개 작센사단으로 바그람을 공격했는데 처음에는 마을의 일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카를은 직접 반격을 이끌며 작센군을 마을에서 루스바하 고지대로, 다시 강 건너로 몰아냈다. 지원을 위해 접근하던 위젠의 이탈리아 보병사단은 작센군을 보자 적으로 오인하고 사격을 퍼부었다. 오스트리아, 작센과 이탈리아군 모두 흰색 계통의 군복을 입었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되었던 일이었다. 

기회를 포착한 오스트리아군은 전진했다.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 사이에서 협공당한 작센군은 대열을 무너트리고 달아났다. 프랑스군은 반대로 이탈리아군에게 응사를 했고 이탈리아군도 달아났다. 대혼란이 일어나면서 나폴레옹의 중앙은 붕괴되었다. 



뒷부분에 아주 자세한 전황도가 있습니다. 지금은 이 정도만 참조하시면 됩니다. 


전장에 밤이 내리기 시작하자, 오스트리아군은 어둠 속에서 총공격을 할 생각이었다. 새벽 2시, 카를은 요한 그라프 폰 클레나우Klenau와 요한 카를 그라프 폰 콜로브라트Kollowrat는 프랑스 좌익의 마세나를 공격하고, 로젠베르크-오르시니는 우익의 다부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공격은 4시에 시작되었다. 로젠베르크-오르시니의 공격은 성공적이었지만 콜로브라트와 클레나우는 공격할 준비가 안되었다. 카를은 옆구리가 노출된 로젠베르크-오르시니를 불러들였고 덕분에 다부는 대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43년 전 영화 워털루입니다. 2시간 8분짜리 전체영화인데, HD 화질과 영어자막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게티스버그와 함께 영화 역사상 가장 큰 스케일로, 다시는 제작하지 못할 영화입니다. 워털루 전투장면은 단연 압권입니다. 

러시아판 전쟁과 평화도 대단한 스케일을 자랑하는데 이건 다음 2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