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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7년전쟁

프리드리히, 프러시아 그리고 7년전쟁 참조자료 (4)

by uesgi2003 2014. 1. 7.


여행을 다녀왔더니 교학사 것들의 찌라시가 많이 외면을 받았더군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이렇게 힘들게 되돌려야 하는 상황이 슬프기까지 합니다. 독립성과 다양성을 주장하는 개념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죠. 주로 교학사 찌라시를 조장했던 새눌당 무리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생각하기 조차 힘든 묻지마 콘크리트들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분야에서는 독립성과 다양성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무리들이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왜 일본 편을 들며 전국을 돌아다닐까요?


이제 나이도 들어서 일체의 사고가 마비된 콘크리트와는 대화시도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슬그머니 말을 섞었다가 실망하게 됩니다. 


이제 프리드리히의 7년 전쟁의 마지막 편입니다. 언젠가는 자세한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겠죠. 다시 한 번 용어의 혼선에 대해 정리를 하면,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이며 프러시아는 프로이센입니다. 외국 자료에서도 흔히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승기를 잡았을 때에 압박하지 않았을까? 러시아군은 뭐하고 있었을까? 프랑스군은 뭐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텐데 프리드리히 대제와 다른 편에서는 영국. 하노버, 프러시아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규모 전투를 계속 벌였고 규모나 전투의 치열함은 여기에 못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프리드리히 그리고 프러시아와 관련된 결정적인 전투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1760년 8월 15일, 슐레지엔 북부 카츠바흐Katzbach 강변에서 벌어진 리그니츠Liegnitz 전투입니다. 프러시아군 30,000명과 중포 74문이 오스트리아군 25,000명을 상대한 전투입니다. 다운Daun 원수의 66,000명이 증원되었지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프러시아군은 3,394명의 피해를 입었고 오스트리아군은 8,500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군이 80문의 야포를 잃었습니다. 

이 전투로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이 다시 한 번 합류하는데 실패했고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의 프리드리히 대제의 모습입니다. 패전과 위기로 밤잠을 못 이루었을 겁니다. 



전투 후에 베른베르크 연대가 프리드리히 대제에게 달려가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 연대는 드레스덴에서 부대 장식을 몰수당하는 처벌을 받았었는데, 프리드리히는 그들의 눈부신 분투에 화답하며 명예를 회복시켜주었습니다. 이 전투로 땅에 떨어졌던 프러시아군의 사기가 올랐고 프리드리히 대제의 위엄도 되찾았습니다. 



용기병과 대화를 나누는 프리드리히 대제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용기병은 기병이라기 보다는 기마보병으로 요즘의 기계화보병과 같습니다. 기동력을 살려 위기와 기회에 따라 적절하게 투입되는 보병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기병처럼 운용하기도 합니다. 기병은 전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러시아 척탄병의 모습입니다. 




프러시아 수발총병의 모습입니다. 유럽국가마다 수발총병Fusilier의 의미가 조금씩 달랐는데 독일에서는 경보병을 의미합니다. 

그림 옆으로 설명을 달면 크롬과 IE에서 서로 문제가 발생해서 보기 불편해도 위아래로 달기로 했습니다. 프러시아 경기병의 모습입니다. 경기병은 현대의 경전차에 해당합니다. 

프러시아 쾨니히스 기마근위병 모습입니다. 이 연대는 리그니츠 전투에서만 24명의 장교와 475명의 병사를 잃었습니다. 



7년전쟁의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토르가우Torgau전투입니다. 1760년 11월 3일, 작센 토르가우 마을에서 프러시아군 48,500명(보병 35,000명/기병 13,500명/중포 309문)이 오스트리아군 52,000명(보병 42,000명/기병 10,000명/중포 275문)을 상대했습니다. 


프러시아군은 총 병력 중 1/3인 16,670명을 잃었고 오스트리아군은 15,500명과 중포 49문을 잃었지만 포로가 7,000명으로 인명피해는 프러시아군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프러시아군은 초반의 패전위기를 견디고 결국 승세를 뒤집는데 성공했습니다. 



전세를 역전시킨 치이텐Zieten 장군을 맞이하는 프리드리히 대제입니다. 그림만 봐도 그의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오스트리아군 포대를 점령하고 두 번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반격이 성공했습니다. 전투 초반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군 포대를 공격하다가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고 오스트리아군 다운 원수는 성급하게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승전보고를 보냈을 정도로 프러시아군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토르가우전투 중 교회에 있던 프리드리히 대제의 모습입니다. 전장에 있어야 할 시간에 교회에 머문 이유는 전장에서 총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부관 베렌호르스트가 급히 대제를 교회로 피신시켰는데 일체의 감사인사도 받지 못해서 몹시 실망했다고 합니다. 

베렌호르스트 대위가 교회 밖에 노획한 오스트리아 군기를 도열시키고 승전을 축하하려고 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제는 병사들의 피해에 놀라서 어떤 축하행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프러시아 상이용사 군단입니다. 프러시아는 상이용사에게 군대 또는 공공 일자리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당시의 의료수준으로는 신속한 팔다리 절단이 유일한 치료법이었습니다. 프러시아는 일찍부터 군국주의를 표방한 덕분에 병사들이 프러시아의 민간의료시설보다 좋은 야전병원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치이텐 장군을 방문하는 장면입니다. 

치이텐 장군은 라시Lacy 병력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다가 방향을 바꿔 전세를 역전시켰고 반대로 라시 장군은 적극적으로 프러시아군을 압박하지 못해 패전한 비난을 들어야했습니다. 다운 원수가 부상을 입고 후송되자 라우돈Loudon 장군이 지휘권을 맡았지만 라시 장군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부상당한 다운 원수가 다시 지휘권을 이어갔습니다. 



1762년 7월 21일, 슐레지엔 중부에서 벌어진 부르케르스도르프Burkersdorf전투입니다. 프러시아군 40,000명이 오스트리아군 45,000명 그리고 러시아군 20,000명을 상대했습니다. 


이 전투를 끝으로 러시아군이 전열에서 이탈하면서 프러시아군은 동맹국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러시아 엘리자베타 여왕이 사망하고 조카 표트르 3세가 차르가 되었는데 그는 프리드리히 대제의 열렬한 팬이었고 당연히 휴전을 희망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군 사령관 트체르니쇼프에게 오스트리아군의 전투에 호응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오스트리아군은 그 배경을 모른 채로 단독으로 전투를 벌이다가 양쪽 모두 별다른 피해없이 전장을 떠났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치이텐 장군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부상당한 척탄병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병사에게 전황에 대해 물었고 병사는 적이 도망치고 있으니 승리라고 대답했습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신자(?) 러시아군 사령관은 프러시아군이 왜 그렇게 충성스러운 지를 잘 알겠다며 칭찬을 했습니다. 

프러시아 기병부관의 모습입니다. 흰색 군복은 전장에서 눈에 너무 잘띄고 더러워질텐데 당시는 위장색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일반 병사들도 즐겨 입었습니다. 설마 이등병이 모두 세탁한 것은 아니겠죠?

프러시아 드럼병사의 피곤한 모습입니다. 드럼병이라고 해서 군악대처럼 뒤에서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두에 서야 했기 때문에 기수와 함께 매우 위험한 보직이었습니다. 


이제 7년전쟁의 마지막 유럽전투인 프라이베르크Freiberg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 대제의 동생 하인리히Henry 공이 22,000명을 병력으로 오스트리아군 30,000명을 상대했습니다. 프러시아군의 피해는 1,400명, 오스트리아군은 포로를 포함해 7,400명을 잃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계속 후퇴를 했고 결국 프리드리히 대제에게 휴전을 제의하게 됩니다. 



프러시아 보병이 거친 들판을 뚫고 오스트리아군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하인리히 공은 유능한 지휘관으로 40년 가까이 군대를 지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