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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7년전쟁

프리드리히, 프러시아 그리고 7년전쟁 참조자료 (2)

by uesgi2003 2014. 1. 2.


프러시아(프로이센)을 계몽주의와 군국주의로 일으킨 프리드리히 대제는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슐레지엔을 합병했고 독일 내의 강력한 선제후국인 작센을 항복시키지면 통일국가 독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렇지만 노쇠하고 분열된 합스부르크제국이라고 해도 신흥국이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였는데, 프리드리히 대제는 선제공격을 택하며 7년 전쟁에 돌입했고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자살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프리드리히 대제는 로스바흐전투에서 자신과 미래의 독일을 모두 거는 승부수를 던집니다. 



1757년 11월 5일, 작센 서쪽에서 벌어진 로스바흐 전투지도입니다. 프로시아군 22,000명(보병 16,600명/기병 5,400명/중포 79문)으로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 42,000명(중포 105문)을 상대했습니다. 

콜린전투에서 워낙 큰 피해를 입었었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더라도 피해가 예전 전투처럼 컸다면 독립국가 프러시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제의 기동전 그리고 기병대의 분전으로 기적과 같은 완승을 거둬 기사회생한 유명한 전투입니다.

프러시아군은 겨우 500명 정도의 피해로 연합군 10,000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 전투시간도 겨우 90분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폰 자이들리츠Seydllitz 장군이 자신이 피우던 담배 파이프를 하늘로 던지며 기병의 돌격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프러시아 기병이 프랑스군 보병을 궤멸시키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기병의 돌격장면이 많습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프랑스군의 전통(?)답게 수송마차에는 장교들의 호사스러운 물품이 가득했고 프러시아군이 비웃고 있습니다. 필사적인 군대와 외유를 하는 듯한 군대가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와 아래 모두 프리드리히 대제의 지휘모습입니다. 그는 로스바흐 여인숙 다락에서 전장을 보며 지휘했습니다. 




오후 5시가 되어 어두워지자, 프리드리히 대제는 슐로스 부르크베르벤에서 밤을 보내려고 했지만 부상당한 프랑스 장교로 가득차 있어서 다른 집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병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절대군주와 평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동양에서의 군주는 절대자이기 때문에 감히 머리를 들 수도 없었습니다. 


로스바흐에서의 참패는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되었고, 나폴레옹이 제나전투에서 로스바흐의 복수를 하게 됩니다. 프랑스군은 로스바흐 기념물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조지 2세는 프러시아에 지원군을 파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의 전설이 완성된 로이텐전투 지도입니다. 로스바흐전투에서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물리치고 기사회생했지만 오스트리아 본대의 위협은 건재했고 실제로 어렵게 합병했던 슐레이엔 지역을 오스트리아군이 탈환했습니다. 

합스부르크제국은 오스트리아군과 헝가리군 외에도 슐레지엔, 크로아티아, 심지어 이탈리아군까지 동원했고 63,000명(보병 41,000명/기병 22,000명/중포 210문)으로 프러시아군 33,000명(보병 21,000명/기병 11,000명/중포 167문)을 공격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제는 적을 우회기동하는 놀라운 기동전으로 훗날 후손의 전격전의 전설을 만들어냈고 7,000명 정도의 피해만으로 연합군에게 22,000명(포로포함)의 피해를 입히며 생애최고의 승전을 올렸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로이텐 교회 앞에서 지휘관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전장을 바라보고 있는 프리드리히 대제입니다. '설마 군주가 정말로 저렇게 전장에 나섰을까?'라고 의심하는 분이 당연히 있을텐데, 그는 총상을 입을 정도로 전장에 가깝게 있기도 했습니다. 



프러시아 보병이 전진하고 있습니다. 역시 발밑에 포탄이 있군요. 포탄을 너무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로이텐 마을로 진입하는 프러시아군입니다. 일반 사관 또는 장교의 사상률이 높을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로이텐전투 후의 모습입니다. 분위기가 꽤 조용한데, 실제로는 독일역사상 가장 눈부신 승전이기도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슐레지엔의 수도에 들어가 오스트리아 장교들을 놀라게 하는 장면입니다. 물론 이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인척인 총사령관 카를 공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습니다. 나다스티Nadasti 장군도 경질되었는데, 카를의 반발을 달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