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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7년전쟁

프리드리히, 프러시아 그리고 7년전쟁 참조자료 (3)

by uesgi2003 2014. 1. 2.

 

(크롬에서 정리하면 모바일이나 IE에서는 포맷이 완전히 깨집니다. 수정하느라 했는데도 서로 호환이 안되어서 깨지는군요. 그림자료이니까 어느 한 쪽은 그대로 두고 다음부터는 옆으로 쓰는 글을 피해야겠습니다.)


철도파업 대체인력으로 임시고용되었던 분들이 오늘 계약해지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노조탄압용으로 투입된 임시고용이었지만, 겨우 2~3일 출근하고 전광석화처럼 해고되는군요. 코레일은 계약해지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고, 사장자리에 평소 신념도 버리고 '어머니의 심정' 운운하며 날뛰던 앞잡이는 '때려죽이는 계모의 심정'으로 외면하겠군요. 

(욕을 많이 먹더니 2~3개월 고용유지하겠다고 바꿨습니다.)


여행다녀와서 나머지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했는데 제가 궁금해서 못 참겠군요. 7년 전쟁 중후반까지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테인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 프리드리히 대제가 이번에는 가장 힘든 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러시아군입니다. 평소 우리의 기억 속에는 광대한 영토덕분에 그럭 저럭 버티며 살아가는 오합지졸의 러시아군 모습이 남아있지만, 이 당시의 러시아군은 제가 좋아하는 표트르 대제가 대북방전쟁을 일으키며 개혁시킨 현대식의 막강한 군대였습니다.


러시아군이 오데르강 동쪽에 나타나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려고 합니다. 그대로 두면 대군을 만나게 되고 프러시아군의 참패 그리고 베를린의 함락은 기정사실이 되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제는 서둘러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1758년 8월 25일, 프랑크푸르트 북쪽 오데르강 동쪽 강변에서 벌어진 조른도르프Zorndorf 전투지도입니다. 



동요하는 프러시아 보병을 직접 이끌고 있는 프리드리히 대제입니다. 


옆은 러시아군 척탄병의 모습입니다. 

예전의 러시아군이었다면 쉽게 물러났겠지만 표트르 대제가 남긴 현대식 군대였기 때문에 많은 피해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지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프러시아군 35,500명(보병 2,5000명/기병 10,500명/중포 193문)으로 러시아군 43,000명(보병 36,500명/기병 3,500명/중포 136문)을 상대했습니다. 


프러시아군은 무승부라고 해도 될 정도의 신승을 거두었습니다. 프러시아군은 13,000명을 잃었고 러시아군은 19,000명을 잃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러시아병사를 죽이기는 쉬워도 이기기는 어렵다"라는 말을 남겼고 연합군의 조우를 차단했기 때문에 전략적 승리라고 자축했습니다. 


조른도르프전투는 7년 전쟁의 모든 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힙니다. 참모장군은 프리드리히 대제에게 러시아군의 전력을 조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이번에도 자이들리츠Seydlitz 장군의 기병이 큰 활약을 했고 기병의 교범이 되었다는 칭송을 들었습니다. 

러시아군의 군목이었던 타게Tage는 개신교 찬송가를 부르며 전진하는 프러시아군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찬송가를 들을 때마다 조른도르프의 참상이 떠올라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조른도르프전투에서 위기 시에 일선 지휘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의사결정권을 위임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른도르프전투의 격전을 잘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프러시아군이 러시아군을 향해 전진 중입니다. 



러시아의 코사크에게 약탈당한 쿠스트린Kustrin 시를 돌아보는 프리드리히 대제입니다. 



이번에도 대단한 활약을 한 자이들리츠 장군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자이들리츠의 기병에게 밀려난 러시아 기병은 후퇴 중에 러시아 포병의 오인사격을 받아 더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758년 10월 14일, 작센 동부에서 벌어진 호크키르히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는 프러시아 30,000명(보병 20,000/기병 10,000/중포 200문)이 오스트리아 78,000명(보병 50,000/기병 28,000/중포 340문)을 상대했습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연결되는 것을 막기는 했지만 워낙 큰 피해를 입었던 프러시아군은 다시 오스트리아의 대군을 상대해야 했고 큰 패배를 당했습니다. 더구나 오스트리아의 무능했던 카를공이 물러나고 지휘권을 잡은 다운Daun원수가 프러시아의 보병대열을 모방했습니다. 



그림의 상황이 꽤 위급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프러시아군은 9,000명을 잃었고 오스트리아군은 8,500명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앞 뒤로 몰린 상황이라면 승리할 수가 없었겠죠. 



프러시아 제임스 케이트James Keith 원수가 전사하는 장면입니다. 케이트원수는 영국내전 당시에 스코틀랜드를 탈출한 군인으로 러시아군에서 복무하다가 프러시아로 진영을 바꾸었습니다. 그림과 달리 전장에 발가벗겨진 채로 남았고 오스트리아군이 예우를 갖춰서 장례를 치뤘습니다. 

케이트원수는 "오스트리아군이 호크키르히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죽어 마땅하다"라며 프러시아군의 상황을 한탄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전투에서 처남도 잃었고 심지어 사랑하는 누님의 죽음소식까지 들어야 했으니 우울증에 걸리만도 했습니다. 



병력손실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귀중한 중포를 101문이나 잃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포병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림 안의 대화가 이렇군요. 다른 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포병, 너희들의 포들은 어딨느꺄?

밤에 마귀들한테 빼앗겼습니다.

그럼 낮에 되찾아오면 되겠네! 안 그런가 척탄병?  



오스트리아군이 프러시아 진영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당시 군대에는 가족이나 상인이 따라다녔기 때문에 그림과 같이 여성의 모습이 보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다시 한 번 좌절하였고 깊은 시름에 잠겼습니다. 만약 다운원수가 서둘러 패주하는 프러시아군을 추격했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심스러운 다운은 프러시아군이 슐레이엔으로 퇴각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고 작센의 수도인 드레스덴을 포위했습니다. 



호크키르히전투가 벌어지고 거의 1년 후인 1759년 8월 12일, 오데르강 동쪽에서 벌어진 쿠네르스도르프Kunersdorf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는 프러시아가 러시아(41,000명과 200문)와 오스트리아(18,523명과 48문) 연합군을 상대하느라 50,000명(보병 36,900명/기병 13,000명/중포 140문)을 투입했지만 프리드리히의 3대 참패로 꼽힐 정도의 심각한 피해를 입고 패전했습니다. 


























심각한 표정의 프리드리히 대제입니다. 반면에 오스트리아군의 지휘관 라우돈은 꽤 여유있는 모습입니다. 



러시아의 흉갑기병과 용기병입니다. 

러시아 보병입니다. 

러시아의 기마척탄병과 경기병입니다. 




















 

 

쿠네르스도르프전투의 혼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코사크가 죽은 프러시아군의 시체를 뒤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코사크족은 화기로 무장했는데, 그림에서는 활을 무장하고 있군요. 


프러시아군은 이 전투에서 19,100명을 잃었고 중포는 거의 모두인 172문을 잃었습니다. 러시아군은 13,500명을 잃었고 오스트리아군은 2,000명을 잃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조른도르프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인내력을 직접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얕잡아보았고 결국에는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큰 피해를 입은 보병대 앞에 선 프리드리히 대제는 깃발을 들고 "용감한 병사는 나를 따르라!"라고 외쳤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오데르강을 건너 서쪽으로 신속한 진격을 해야 했지만 헨리공의 위협을 받은 오스트리아군이 작센으로 후퇴했고 러시아군도 건너왔던 오데르강을 건너 폴란드로 퇴각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