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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미국

라스트 모히칸의 배경 - 윌리암 헨리요새 공성전과 학살 (1부)

by uesgi2003 2014. 3. 17.


사회생황을 오래 하신 분은 이런 일을 많이 경험했을 겁니다. 실제 기획과 집행은 평사원들이 했는데, 정작 상여금과 진급은 팀장이나 부서장이 받는 경우가 있죠. 사회생활이 다 그런 것이라 위로하기도 하고. 부서장의 인정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라는 조언도 하죠. 

저도 한 두 번 당한 일이 아니어서 그런 일에는 무감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을 할 때에 아시아태평양조직이 되지도 않는, 본사에 보여줄 겉치례(쇼잉이라고 합니다) 프로젝트를 꾸몄고 제게 은근한 압박성 도움요청이 와서 80% 이상의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단한 결과라고 본사에서 수상을 하더군요. 제게는 고맙다는 이메일 하나가 전부였고요.


이번 체육훈장 청룡장 수상자를 보면서 생각난 김에 한탄 좀 해봤습니다. 정작 동계올림픽정도가 아니라 한국의 동계스포츠 자체를 세계에 알린 두 선수는 강화된 기준으로 사실상 받을 수 없는 반면에 온갖 추문으로 좌천된 모 씨는 당당하게 받았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이 워낙 거세니 두 선수에게 수여하겠다고 변경했는데... 어이없는 결정이죠. 

그럼 훈장수여 기준을 강화한 이유가 있을텐데 예외적용을 하기 시작하면 기준은 왜 만들었나요? 처음부터 무분별한 수여를 하지 말았어야 하죠. 어쨌든 추문을 달고사는 모 씨는 별로 티도 안나는 추문을 다시 하나 더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오랜 동안 정리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역사고증따위는 상관없이 멋있는 장면에 올인한, 대작 '라스트 모히칸'에서도 등장하는 윌리암 헨리요새 공략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학살이야기입니다. 왜 역사고증따위냐고요? 오래 전 영화라 기억이 나실 지 모르겠지만, 인디안 출연자 대부분이 머리만 깎은 미국인입니다. 콧날 오똑하고 눈동자가 파란... 그리고 전장식 머스킷 총을 뛰어가며 장전하죠. 그래도 애절한 음악과 굉장한 스케일때문에 제가 참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라스트 모히칸의 배경 - 윌리암 헨리요새 공성전과 학살


몽칼름Montcalm 후작은 멋진 공성기술로 윌리암 헨리William Henry요새를 함락시켰지만 동맹군을 다루는 기술은 서툴렀다. 


프랑스와 인디안 전쟁의 전반기 그리고 유럽의 7년 전쟁 동안, 영국군은 프랑스 루이 15세의 군대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연거푸 당했다. 1755년, 에드워드 브래독Edward Braddock 중장이 펜실바니아 마논가헬라Monongahela강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디언 동맹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브래독 중장이 머논가헬라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장면입니다. 이 전투는 보기 드물게(?) 과감한 프랑스군의 대처로 1,500명의 영국군을 궤멸시켰고 유럽식 전열전술과 미국식 산개전술이 맞붙은 유명한 전투입니다. 미국의 독립영웅 조지 워싱턴이 23살의 나이로 훌륭한 지휘를 보여주어 미국인에게 큰 의미가 있는 전투이기도 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대포를 포함한 영국군이 요새로 접근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프랑스군 250명이 과감하게 선제공격을 하기로 하고 인디안동맹군 600명 정도의 도움을 받아 숲의 오솔길에서 매복공격을 했습니다. 영국군은 고집스럽게 유럽식 전열전술을 사용했고 대열을 만드느라 큰 피해를 자초했습니다. 영국군은 약 880명이 사상했고 프랑스군의 피해는 인디안 동맹군을 포함해 50명 정도였습니다. 특히 영국군은 지휘관을 포함해 대부분의 장교를 잃었습니다. 


영화 라스트 모히칸에서도 영국군의 고집스러운 전열전투 방식을 잘 묘사했습니다. 인디안의 매복공격을 받는 장면입니다.

대사는 스페인어 더빙이니까 안들린다고 자신의 영어실력을 원망하지 마시길...



브래독 원정대의 실패는 1758년까지 이어지는 영국군의 패전 시리즈의 시작에 불과했다. 1756년, 지중해의 영국령 미노르카Minorca섬을 프랑스에 빼앗겼고 북미에서는 몽칼름 후작인 루이 조세프 드 생 베랑Louis Joseph de Saint Veran 소장에게 온타리오호수 남쪽의 오스베고Oswego요새를 내주면서 더 이상 공세를 펼칠 수 없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서, 조지George 호수 부근이 전운이 감돌았고 결국 악명높은 윌리암 헨리 요새의 학살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유럽대륙에서 벌어진 7년 전쟁의 여파로 영-프 두 나라의 신대륙 식민지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무대이니까 지도를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브래독의 후임이 북미 파견군 사령관으로 도착하면서 윌리암 헨리 요새 함락으로 향한 첫 걸음이 시작되었다. 메사추세츠 총독 윌리암 셜리Shirley가 1756년 7월까지 브래독의 후임역할을 하다가 로우던Loudounn 공작 존 캠벨Campbell 중장이 지휘권을 잡았다. 

그는 제임스 에버크롬비Abercrombie 중장과 다니엘 웹Webb 중장을 대동했는데, 아마도 프랑스가 가장 바라던 유형의 지휘관이었을 것이다. 캠벨은 우유부단했으며 병사와 함께 작전지역을 둘러보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서류작업으로 보냈다. 애버크롬비는 나름대로 경험많은 지휘관이었지만 비만하고 게을러서 나중에 책임질 일은 일체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웹은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위기에 닥치면 이성이 마비되는 경향이 있었다. 웹은 사실 원정지의 지휘관에 올라가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캡벨이 도착하고 한 달도 안되어서 오스베고요새가 함락되었고 뉴욕 식민지의 국경이 위험하게 노출되었다. 웹은 프랑스군이 모하크Mohawk강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공포에 질려서 진격로에 있던 불요새를 허물어버렸다. 단 한 차례의 정찰병도 내보내지 않고 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병사들을 동원해 프랑스군의 예상 진격로의 나무를 쓰러트려 장애물을 만들었다. 

요새를 부순 웹과 수비군은 프랑스군의 공격이 윌리암 헨리 요새로 집중되리라 판단하고 공격계획을 취소한 후에 요새의 방어를 강화했다. 헨리 요새는 조지호수의 남쪽 끝에 위치해서 허드슨강 상류계곡의 진입을 방어하는 전략요충지였다. 


프랑스군은 실제로 헨리요새를 함락시킬 생각이었고 1757년 작전이 시작되면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캐나다 총독 피에르 드 리고Rigaud는 몇 개월 동안 공격준비를 했다. 총독은 동생 프랑소아 피에르에게 1,500명으로 요새를 공략하게 했다. 1757년 3월 중순, 눈과 얼음을 뚫고 남진한 프랑스군은 요새 앞에 도착했고 명예항복을 제안했다. 요새 지휘관이었던 윌리암 아이어Eyre 소령은 항복을 거부했고 4일 동안 프랑스군은 요새를 공격했지만 공성무기가 없이 소총만으로는 요새의 목책을 무너트릴 수 없었다. 

소총과 사다리 만으로는 요새목책을 넘을 수 없었던 프랑스군은 대신에 외곽 건물과 요새부근의 모든 배를 부쉈다. 프랑스군은 요새공략은 실패했지만 영국군이 조지 호수를 오갈 수단을 없애버렸고 나중의 공격경로를 열어두는 성과를 거뒀다. 


모논가헬라와 오스베고 전투소식이 퍼지자 오대호Great Lakes 지역(지도참조)뿐만 아니라 아이오와Iowa의 원주민 인디안까지 전리품을 노리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1757년 봄이 되자, 33개 부족이 프랑스군과 함께 영국을 상대하겠다고 나섰다. 


몽칼름은 베르사이유에서 영국군이 (캐나다 북동쪽 케이프 브레턴 섬에 있는)루이스버그Louisbourg요새를 공격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받았지만 수비군이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인디안이 데리고 온 영국군 포로의 말도 베르사이유의 정보를 뒷받침했다. 캠벨이 뉴욕 국경을 지키는 정예병력을 빼내 핼리팩스로 보냈다는 것이다. 몽칼름은 수많은 인디안 동맹군을 얻은데다가 영국군이 국경방어를 소홀히 했다는 정보까지 얻자, 헨리요새를 함락시킬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몽칼름은 원정준비를 위해 먼저 보급품부터 조달했고 그 후에 챔펄레인Champlain 호수를 내려가 카리용Carillon요새에서 지원군을 기다렸다. 7월 말이 되자, 3,000명의 정규군, 3,000명의 해병대troupes de la marine(식민지출신의 프랑스군으로 외국원정에 동원되었음)와 캐나다 민병 그리고 2,000명의 인디안이 집결했다. 몽칼름은 8월 1일에 헨리요새를 향해 출발했다. 


 

헨리요새의 새 지휘관 조지 먼로Munro 중령은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6월 말이 되면서 카리용요새에서 탈출한 영국군 포로가 프랑스군의 계획을 알려주었다. 급박한 정보를 입수한 먼로는 즉시 정찰대를 여러 차례 보내 카리용요새 병력이 급증하는 것을 확인했지만 더 이상 정확한 정보는 파악하지 못했다.


7월 23일, 존 파커 대령이 22척의 크고 작은 배에 300명의 식민지군을 태우고 조지호수의 프랑스 제재소습격에 나섰다. 동이 틀무렵 첫 번째 배가 강에 들어섰다. 파커는 배를 그룹으로 나누었고 3척의 배가 처음으로 프랑스군과 마주쳤다. 프랑스군의 기습을 받은 3척의 병력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했고 그 뒤를 따르던 3척의 배도 그대로 항복했다. 6척의 병력이 총 한 방 쏘지 않고 항복했다. 

나머지 16척의 배는 강을 따라 내려갔는데, 주변의 숲에서 갑자기 총탄이 빗발쳤다. 일부는 공포에 질려 물에 뛰어 들었는데 인디안이 카누를 타고 다니며 그들을 죽였다. 나머지는 전의를 잃었고 조금만 버티면 프랑스군에게 항복할 수 있었는데도 인디안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다. 4척의 배만이 살아남아 헨리요새로 귀환했다. 


생존자가 돌아오기 시작하자, 웹 장군은 처음으로 요새를 방문했다. 파커 원정대의 전멸소식을 듣자, 그는 먼로에게 요새수비는 정규군에게 맡기고 요새의 식민지군은 산 정상에 따로 숙소를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약 25km 떨어진 에드워드요새로 돌아가면서 더 많은 병력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먼로의 부대는 지원군을 기다리며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헨리요새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는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전임 지휘관 아이어 소령의 치밀한 설계덕분에 프랑스군이 공격하기 난감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그림참조). 요새 벽 위에는 18문의 중포, 13문의 경선회포, 2문의 구포와 1문의 곡사포가 있었다. 웹 장군의 명령에 따라 1km 떨어진 야전숙소는 통나무와 돌 방벽이 만들어졌고 10문의 경포가 배치되었다. 

먼로 대령이 야전숙소의 지휘를 맡았고 웹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요새에는 50명의 정규군과 385명의 식민지군을 배치했다. 8월 2일, 약속대로 1,000명의 병력이 증원되면서 수비군은 2,372명으로 늘어났다. 


  

증원군이 요새에 들어서기도 전에, 프랑스군의 선봉대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8월 2일, 호수 서쪽 12km 지점에 3개의 큰 모닥불이 보였다. 먼로대령은 즉시 2척의 배에 정찰병력을 보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이 되자 망원경으로 프랑스군 보트가 대포를 싣고 이쪽 호수가로 오는 것이 보였다. 먼로는 웹에게 더 많은 지원군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다. 대포가 있다는 것은, 지난 3월에 있었던 비정규군의 습격이 아니라 정규군의 정통 공성전이 벌어진다는 뜻이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질 헨리요새의 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