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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미국

미국독립전쟁 당시의 첩보전 - 미드 턴의 배경 (2부)

by uesgi2003 2015. 6. 19.


워싱턴은 신중한 사람이어서 컬퍼에게만 의존하지 않았다. 톨맷지의 통신망이 위험할 정도로 노출되어 있었다. 맨하탄의 연락원은 타운젠드의 보고서를 동쪽으로 약 88km 떨어진 세타우켓Setauket까지 가져가면 칼렙 브류스터 중위의 지시를 받는 선원이 롱아일랜드 해협을 건너 페어필드Fairfield로 건네주었다. 대기하던 용기병이 뉴욕(뉴욕시와 다른)이나 뉴저지의 사령부로 다시 전달했다.

당연히 며칠이 걸릴 수 밖에 없는 경로였고 워싱턴 손에 들어갈 때가 되면 이미 그 정보는 쓸모 없어지기도 했다. 워싱턴의 참모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맨하탄에 첩보원을 만들었고 1779년 여름이 되자 훌륭한 첩모망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트렌톤Trenton전투 전후에 30살의 대위 엘리하 헌터Elijah Hunter가 첩보원을 자원했고 마치 전생이 첩보원이었던 사람같았다. 왕을 위해 병력을 모으는 토리당원으로 위장해 뉴욕시에 들어간 후에 영국군 간부들과 어울리며 사령관과 총독의 정보를 얻어냈다.

영국군도 헌터가 첩보원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정말로 충성하고 있다고 착각했고 17793월에는 사령관이 직접 첩보원역할을 제안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필라델피아로 가서 워싱턴의 신임을 얻은 후에 정보를 캐내달라는 부탁이었다. 헌터는 제안을 받아들이며 돈까지 받았지만 상관인 알렉산더 맥도겔Alexander McDougall장군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다. 맥도겔은 헌터가 이중스파이로 영국군 최고사령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워상턴에게 보냈다.

 

워싱턴은 헌터를 믿지 않았고 이중스파이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대륙군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누리다보면 배신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헌터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애국심과 보상 그리고 한 명의 첩보원이 500명의 병사보다 가치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한 후에 다시 뉴욕으로 돌려보내 클린턴사령관의 의도를 알아내게 했다.

워싱턴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5월 중순, 헌터는 맨하탄에 돌아와서 클린턴의 참모인 트라이온과 존 안드레를 만났다. 그들의 질문에서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허드슨강 요새 수비병이 얼마나 되는지? 코넷티컷을 공격하면 요새 수비병을 유인해낼 있는지?

 

헌터는 급히 숙소로 돌아와 워싱턴에게 편지를 보냈다. 허드슨강 상류로 영국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예상된다는 경고였다. 헌터의 예측이 옳았다. 530, 클린톤(그림참조)은 킹스 페리Kings Ferry 방면으로 공격을 펼쳐 뉴잉글랜드New England 지역과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대륙군을 불리한 전장으로 끌어내려고 했다.

워싱턴은 이런 정보를 미리 알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요새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고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와 픽스킬Peekskill의 요충지에 병력을 보강했다. 클린톤에게 킹스 페리와 주변 지역을 내줬지만 함정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헌터의 결정적인 정보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은 그는 뭔가 미심쩍은 모습입니다라며 헌터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헌터는 귀중하고 정확한 정보를 계속 넘겨주었고 워싱턴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일원화된 명령체계가 중요하지만 효과적인 첩보원덕분에 얼마 안되는 자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고 첩보조직을 한 곳에 집중시켜 관리하기 보다는 기존의 분산조직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워싱턴은 장군들의 사설첩보망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대신에 전체적인 조율을 했다. 17795, 그는 윌리암 맥스웰William Maxwell 여단장에게 대륙군에 대한 거짓정보를 보내 영국군에게 넘겨주라고 지시했다. 워싱턴은 일부러 악필과 비문법으로 무식한 토리당 농부의 보고로 가장했다. 그는 병사 중에 불만을 가진 자도 있겠지라며 대륙군에 숨어든 첩보원에게 일부러 가짜정보를 흘려 영국군에게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톨맷지와 다른 사람에게 복잡한 암호를 만들게 했다. 투명잉크만으로 기밀성을 유지하던 때는 이미 지났다. 매일 병력의 이동을 보고 받으려면 암호를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정보가 적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 큰 곤욕을 치렀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다.

 

톨맷지는 이전에도 컬퍼와 교신하면서 간단한 암호를 사용했었는데 장소나 이름을 숫자로 대신하는 정도에 불과했었다. 1779년 여름, 톨맷지는 수백 개의 단어와 숫자를 조합해서 훨씬 복잡한 암호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세계최고 수준은 아니었지만 컬퍼와 교신하는데 충분한 수준이었고 영국군은 종전 시까지 해독하지 못했다.



위는 투명잉크를 사용한 방식이고 아래는 암호를 사용한 방식입니다. 



일부 역사가는 컬퍼 첩보망을 독립전쟁 당시 최고의 미국 첩보작전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대단한 역할을 했다. 워싱턴은 다양한 배경의 첩보원을 계속 고용했다. 우호적인 인디언과 누더기의 개척민이 숲을 누비며 캐나다와 중서부에서의 영국군 동향을 보고했다.

여성, 농부와 상인은 영국군 진영을 넘어가 상품을 거래한 후에 워싱턴에게 돌아와 병력배치를 알려주었다. 뉴욕을 포함한 영국군 점령지역의 의사, 사면된 죄수, 상인, 선원, 창녀 등이 정보를 모으거나 신문을 몰래 반출했다.



워싱턴은 필요하다면 휴전을 해서라도 정보를 수집했다. 영국군이 뉴욕시를 점령한 직후에 그의 첩보원이 도시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든 불을 질렀다는 주장도 있었다.


 

워싱턴은 자신이 추구했던 노선을 열렬히 믿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렇지만 실전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고문과 같이 악랄한 수단은 동원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177810, 워싱턴은 대륙화폐를 위조하고 적에게 정보를 유출한 존 블레어와 데이빗 판스워드에게 사형을 선고하고는 알렉산더 맥훠터 목사에게 사형전 기도에서 두 사람이 정보를 불게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실제로 맥훠터 목사가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779년부터는 대륙군의 정보망이 초기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했다. 워싱턴의 첩보원은 영국군의 배치와 이동에 대해 상당히 정확한 정보를 수집했는데, 연대의 지휘관, 규모, 무장수준, 헤센용병의 배치, 요새의 전력까지 파악했다.

클린톤이 맨하탄을 떠나 롱아일랜드 어딘가로 향하면 그 내용이 바로 워싱턴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뉴욕 주둔군과 런던 정가와의 알력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고 영국군 군복가격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1783년 종전까지 대륙군 첩보원은 유럽수준으로 정교해졌고 워싱턴은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자 정보원장이었다



다양한 복장의 대륙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