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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터키

오스만 제국의 붉은수염 제독(2부)

by uesgi2003 2014. 5. 4.


16세기 당시, 4가지 유형의 배가 지중해를 통행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전한 갤리Galley는 4~6명의 노꾼이 노 한 개를 저었고 한쪽에만 50~60개의 노가 있었다. 돛도 달았지만 순풍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300명 정도되는 노꾼은 모두 범죄자나 포로로 사슬에 묶인 채로 노를 저었다. 갤리는 선수에 포를 장착해서 오스만 선박이 다가와 충돌하려고 할 때에 포격을 했다. 


갤리온Galleon은 돛으로만 항해하는 반면에 많은 대포를 장착해서 옆구리로 다가오는 적 함선을 격침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갤리선보다 크기와 속도를 더욱 높여 전함으로 사용한 갤리어스Galleass가 있다. 



마지막으로 지난 이야기에서 설명했던, 노만으로 항해하던 갤리엇Galleot이 있다. 

지중해의 긴 여름에는 노로 항해하는 선박이 더 적합했고 갤리온의 성능이 향상될 때까지 그 추세는 계속되었다. 


유럽의 연합함대를 격퇴한 바르바로사는 10년 동안 스페인 선박과 지중해 도시를 괴롭혔다. 14척의 작은 갤리엇으로 8척의 스페인 갤리선을 노획한 적도 있었다. 안델루시아 해안을 약탈하면서 스페인에서 노예상태로 살고 있던 70,000명의 무어Moor인을 알제리로 데리고와 해방시키기도 했다.



스페인은 아프리카에서 건너간 우마미야 왕조에게 점령되어 있다가 국토수복성전Reconquista으로 지금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르바로사의 시절에도 상당한 무어인(스페인과 북아프리카계 이슬람인)이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르바로사가 한창 세력을 키워나가는 도중, 오스만 제국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고 하즈렛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520년, 냉혈왕 셀림 술탄이 이집트에서 죽고 장엄왕 술레이만 2세가 왕위에 올라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1522년, 술레이만은 로도스섬의 성요한 기사단을 크레테로 몰아냈다가 말타로 다시 몰아내 지중해 동부에서 기독교 본거지를 완전히 제거했다. 


술레이만의 군대는 다뉴브강을 거슬러 올라가 발칸지역을 합병했다. 1521년에 벨그라드를 점령했고 1526년에는 부다페스트를 점령했다. 그렇지만 1529년에 빈 공략에는 실패했다. 폭우, 홍수와 진흙탕때문에 공성포를 가져가지 못했고 결국 예니체리는 빈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술레이만의 빈 공성전 이야기는 http://blog.daum.net/uesgi2003/72에 설명해두었습니다. 


빈은 오스만군의 공격을 계속 막아냈고, 결국 예니체리는 사상 처음으로 명령에 불복종하고 공격에 나서려하지 않았다. 술레이만도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술레이만이 다른 곳을 노리는 동안, 유럽에서 가장 유능한 제독이었던 안드레아 도리아는 1528년에 칼 5세 황제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1532년, 그는 자신의 제노바 함대를 이끌고 지중해 동부를 성공적으로 습격했고 남부 펠로폰네소스(그리스)의 코론과 파트라스 섬을 점령하고 다른 섬과 마을을 약탈했다. 

술탄은 바르바로사를 이용하기로 했다. 북아프리카는 아직 영토를 확장할 곳이 많았고 이곳으로 유럽을 위협할 수 있었다. 1533년, 술탄은 그에게 알현을 허락했다. 

바르바로사는 아무런 미련없이 본거지를 버리고 이스탄불로 향했다. 그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모은 온갖 진상품을 실은 갤리온과 갤리옷 함대를 이끌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항해했다. 


그는 고향 레스보스를 떠난 지 30년 만에 오스만 제국 최고의 함장이 되어 에게 해에 들어섰다. 황금만Golden Horn에 도착한 그는 어떤 왕도 가지지 못한 사자, 낙타와 진귀한 아프리카 동물, 막대한 비단, 황금, 보석과 기독교 노예미인을 앞세워 술레이만을 만났다. 

술레이만은 바르바로사에게 함대와 병력을 주고 튀니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나중에 이 전력을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투입할 생각이었다. 


황금만 부근의 조선소는 갑자기 전함건조로 소동을 벌였지만 오스만 제국은 선박건조술이 부족했고 바르바로사가 직접 조선소를 지휘해야만 했다. 그는 직접 갤리엇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노획한 갤리를 해체해서 갤리엇으로 개조하기도 했다. 

바르바로사는 행정업무에도 재능을 보여서 1533~34년 겨울에만 50척의 갤리와 갤리엇을 건조했다. 오스만은 양쪽 노 14개씩의 갤리엇을 선호했는데, 유럽의 갤리를 상대하려면 당연히 훨씬 크고 빠른 갤리가 필요했다. 

그는 막대한 비용에도 불구하고 갤리를 여러 척 만들었고 300명의 노예를 배치했다. 노예는 누군가가 몸값을 내거나 죽기 전까지 사슬에 묶여 평생을 노를 저어야 했고, 매일 약간의 비스킷과 물을, 2일에 한 번 스프를, 1년에 4번 고기와 와인을 먹을 수 있었다. 



스페인 갤리의 노꾼입니다. 당연히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1534년 7월, 바르바로사는 오스만 해군의 제독에 올랐고 84척의 갤리와 갤리엇을 이끌고 황금만을 나섰다. 그는 메시나Messina 해협에 들어선 후에 북쪽으로 선수를 돌렸다. 그는 레기오Reggio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해안을 따라 약탈하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나폴리를 지났다. 


그는 유명한 미인 지우헤Giuhe를 납치해서 술탄에게 바치려고 했지마, 늦지않게 경고를 받은 지우헤가 잠옷차림으로 이탈리아 기사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다. 기사는 탈출과정에서 그녀에게 무례한 짓을 했고, 나중에 암살당했다. 

바르바로사는 11,000명의 노예를 이스탄불로 보냈다. 그의 대담한 원정이 끝나자,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진해서 튀니지로 향했다. 

1504년에 형과 함께 튀니지에 왔을 때에는, 튀니지왕이 약탈품의 20%를 받는 조건으로 항구를 내주었었다. 해적질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두 사람은 아예 튀니지를 점령했었다. 


30년이 지난 1534년, 바르바로사는 이제 더 이상 튀니지의 보호가 필요없었다. 골레타 항에 함대를 정박하고는 포격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시 튀니지의 주인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 남부해안 전체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렇지만 칼 5세도 오스만군의 위협에 신속하고도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튀니지에서 쫓겨난 물레이 후세인은 스페인이 왕좌를 되찾아준다면 봉신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튀니지를 되찾으면 알제리를 고립시켜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1519년에 했던 것처럼, 칼 5세는 다른 유럽국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 시실리와 사르디나왕, 성요한 기사단, 제노바, 심지어 멀리 독일에서도 연합군에 합류했다. 


다시 한 번 안드레아 도리아가 함대지휘를 맡았고 가을태풍을 피하려고 일찍 출항했다. 7월 중순, 연합함대는 튀니지 앞바다에 도착했고, 바르바로사는 가지고 있는 전력으로는 기독교 침략군에게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