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는 KKK, 나치, 스킨헤드와 같이 극우테러 조직이 존재했고 친일파조차도 그 존재, 적어도 연관성을부인해왔습니다.
그런데 당당하게 서북청년단의 재건을 주장하며 나선 것들이 있습니다. 서북청년단이 겉으로는 멸공을 내세운 우익청년단이었지만 속으로는 정치깡패와 테러단이었고 제주 4.3학살부터 국민방위군 참사까지 가장 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범죄조직이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서북청년단' 문구를 등뒤에 새기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은 썩소부터 나오는 무식함입니다만, 일베에게 서북청년단 완장을 채워주는 순간부터는 공포로 변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역사를 배워야 합니다. 반드시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과거의 잘못이 지금 재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 대해 정리하기 시작했으니까 아예 마지막 순간까지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포격전 – 콘스탄티노플 공성전
1452년 초, 헝가리 대포 제작자 오르반Orban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해 미래를 걸기로 했다. 발칸반도에서 유행하던 기술용병 중 한 명이었던 그는 콘스탄틴Constantine 11세에게 당대 최고의 비밀인 대형 주조대포 제작을 권했다.
당시 비잔틴제국은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150년 동안, 제국의 국경은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했고, 콘스탄틴 황제가 황위에 오른 1449년에는 영토가 콘스탄티노플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오스만의 새 술탄, 젊고 야심만만한 메흐메드Mehmed 2세는 서쪽 200km 지점의 유럽수도 에디드레Edirne에서 다음 원정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왕이 실패했던 콘스탄티노플이 다음 목표라는 것은 스파이를 보내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콘스탄틴은 오르반의 제안에 당연히 관심을 가졌고 그를 붙잡아 두기 위해 약간의 월급을 지급했다. 그렇지만 신무기를 제작할 자금은 거의 없었다. 대형 청동대포는 그렇지 않아도 국경을 지키기에도 힘든 황제의 빈 금고로는 시작도 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심지어 오르반의 쥐꼬리만한 급여도 없는 달이 늘어갔고 거대한 부를 꿈꾸던 그는 반대로 궁핍한 삶을 살았다. 결국 1년도 안되어서 다른 곳에서 부를 찾기로 했다. 그는 에디르네로 가서 젊은 술탄과의 면담을 청했다.
메흐메드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함락시켜서 무슬림 예언을 실현하고 오스만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아야 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700년 전부터 무슬림의 공격을 막아낸 난공불락의 요새도시였다.
삼각형 모양의 거대 도시의 2면은 바다였고 다른 한 면은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성벽(아래 그림참조)으로 막혀 있었다. 약 6.5km 길이의 거대한 성벽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요새였고 외적이 23번이나 포위했지만 성벽에 구멍 하나 내지 못했다.
메흐메드는 오르반의 방문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술탄은 즉시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무너트릴 정도의 큰 돌을 날릴 수 있는 지를 물었고 오르반은 “전하가 원하는 크기의 포탄을 날려보낼 대형 대포를 주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벽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게 조사해왔습니다. 대포의 포탄으로 콘스탄티노플 성벽뿐만 아니라 바빌론까지도 가루로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메흐메드는 대포주조를 명령했다.
1452년 여름, 오르반은 에디르네에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대포 주조소를 만들었고 메흐메드는 엄청난 양의 구리, 주석, 초석, 유황과 숯을 사들였다. 인부는 거대한 주조 구덩이를 파낸 후에 벽돌을 늘어놓은 화로에서 녹인 동물을 주조틀에 부었다.
오르반의 주조소에서 주조틀을 깨트리자 괴물과 같은 거대한 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8.2m 길이에 20cm 두께였다. 포 구경은 무려 76cm로 성인이 무릎을 꿇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돌 포탄의 무게는 500kg을 넘었다.
1453년 1월, 메흐메드는 황궁 앞에서 시험포격을 해보았다. 대포를 성문 앞으로 끌고 와서 화약을 채워 넣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돌 포탄을 포신에 밀어 넣은 후에 점화구에 불을 댔다.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연기구름 속에서 튀어나간 포탄은 1.6km를 날아 부드러운 땅을 2m 가까이 파고 들어갔다.
메흐메드는 200km 떨어진 콘스탄티노플로 대포를 옮기라고 명령했다. 200명의 인부와 60마리의 황소가 수송작업에 투입되었다. 거대한 포신을 여러 대를 연결시킨 마차에 싣고 하루 5km의 속도로 천천히 옮겼다. 다른 수송팀은 도로를 다지고 강과 개울에 다리를 미리 놓아 지체되지 않게 했다.
오르반의 주조소는 다양한 구경의 대포를 계속 생산해냈다.
대포는 6주 후인 4월 초에 콘스탄티노플 앞에 도착했다. 이미 80,000명의 오스만군이 성벽을 따라 참호를 파고 대기 중이었다. 인부들이 대포와 성벽 사이에 있는 과수원과 포도밭을 모두 불태워 시야를 확보했다. 그리고 대포를 보호할 토벽을 쌓아 올렸다. 비잔틴 군은 성벽에 겨우 8,000명만 배치했다.
메흐메드는 14~15문의 대포를 1개 포대로 편성해서 사전에 파악된 취약지점에 배치시켰다. 비잔틴군이 바실리카Basilica라고 부르던 초대형 포는 술탄의 숙소 앞에 배치해서 술탄이 직접 그 성능을 확인했다.
한 포대에는 대형 포 한 문에 소형 포 여러 문을 편성했기 때문에 오스만 포병은 ‘새끼를 데리고 있는 곰’이라고 불렀다. 90kg부터 500kg까지의 돌 포탄을 날릴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셀 수 없을 정도의 무기가 동원되었다고 하지만 약 69문의 대포를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상 가장 큰 포병부대였다.
대포말고도 전통적인 트라부쳇 등의 공성무기도 동원되었다. 300년 전 십자군 도시를 점령하면서 얻은 가장 효과적인 공성무기였지만 이제는 원시시대의 것처럼 보였다.
대포를 설치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노동이었다. 인부들이 땅을 파올려 나무포대를 만들었고 목책 가운데에 여닫는 문을 만들어서 대포를 쏠 때에만 열어 적의 반격에서 보호했다.
그리고 탄약을 보급하는 일도 절대로 쉽지 않았다. 선박이 흑석 포탄을 운반해왔고 엄청난 양의 초석도 운반해 와야 했다. 에디르네의 주조소 인부가 대포 발사와 현장수리를 책임졌다.
준비과정도 오래 걸렸지만 장전과 발사과정도 여의치 않았다. 포탄을 구경에 맞게 잘 다듬어야 했고 발사각도와 사거리를 측정할 방법이 없어서 몇 발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탄착점을 수정했다.
1453년 4월 12일, 최전선에 배치된 포대가 불을 뿜으면서 역사상 최초의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은 본격적인 화약무기 시대를 알리는 역사적인 전투가 되었다.
거대한 돌덩이가 목표로 정해둔 지점을 두들기자 그 효과는 기대했던 만큼 치명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성벽의 한 부분을 완전히 무너트렸다”고 한다. 포탄을 맞은 곳은, 성벽, 흉벽, 탑 어디고 부서져 내렸다.
특히 성벽에 배치된 비잔틴군의 공포는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2천 년에 걸쳐 완성된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붕괴는 콘스탄티노플이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비군은 말을 잃고 지켜볼 뿐이었다.
바실리카의 포탄은 성벽을 넘어 시내에 떨어지기도 했다. 성벽이 무너질 정도의 위력이었으니 돌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3km 떨어진 곳에서도 진동을 느꼈고 심지어 항구의 배 안에 있던 사람들도 선체가 흔들리는 공포를 느꼈다.
시민은 최후의 순간을 직감하고 집에서 뛰쳐나와 가슴을 두들기며 십자성호를 그었다. 여인들은 기절했고 교회는 신의 가호를 바라는 사람들로 넘쳤다.
수비군은 포탄의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성벽외부에
석회나 벽돌가루를 섞은 물을 뿌려 코팅하거나 양모나 가죽을 늘어뜨리거나 값비싼 양탄자까지 아낌없이 걸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비잔틴군도 얼마 없는 대포를 올려서 적의 포대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초석이 턱없이 부족했고 어쩌다가 멀리 간 포탄도 오스만 인부가 미리 만들어놓은 토벽에 가로막혔다. 무엇보다 성벽과 탑은 포대를 만들 정도의 공간과 내구성이 없었다. 포탄을 발사하다 보면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벽에 금이 가는 경우도 있었다.
큰 대포가 포격 중에 터져 주변의 병사들이 몰살을 당하면 제작자는 오스만과 내통했다는 말도 안되는 죄로 사형당했다. 어쨌든 화약무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고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메흐메드의 전략은 소모전이며 장기전이었다. 그는 포격으로 성벽을 무너트리며 소규모 전투를 계속 벌여 수비군을 약화시킨 후에 최후의 돌격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비잔틴군의 기록에 따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고 포격과 공격이 계속되었고 돌과 포탄이 성벽을 두들겼다. 술탄은 수와 무기를 믿고 우리를 지쳐 쓰러질 때까지 괴롭혀 손쉽게 함락시킬 생각이었다.”
오스만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바실리카는 하루에 겨우 7번 발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봄비가 오는 날에는 포대 밖으로 밀려나와 진흙에 처박히면서 포병이 많이 깔려 죽었다. 포신이 터지면서 주위의 병사들을 몰살시키는 일도 있었다.
오르반은 바실리카의 내구성이 염려되었다. 이 정도의 대포를 주조한 것도 처음인데다가 불순물이 섞인 포신이 계속되는 열과 압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발사 후에는 포병이 달려들어 포신을 따뜻한 기름으로 적셔 온도차로 인한 균열을 막았다.
그렇지만 이런 조치도 결국에는 소용이 없었다. 바실리카는 마치 포격을 맞은 것처럼 여러 조각으로 부숴졌고 많은 병사를 죽였다. 포신을 철 고리로 보강해서 다시 사용했는데 몇 발 쏘지도 않고 금이 갔다. 메흐메드는 몹시 화를 냈다.
바실리카의 포격은 멈췄지만 그 가치는 충분히 입증했다. 초대형 포는 수비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트렸고 다른 중소형 포가 계속 성벽을 두들기고 있었다.
기록을 한 번 보자.
포격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서 헝가리 사절이 술탄의 진영을 방문했다. 포격전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 사람은 같은 지점을 계속 때리려는 포병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포병에게 두 번째 포탄은 같은 높이로 10m 정도 떨어트려 쏘라고 조언했다. 세 번째 포탄은 앞선 두 포탄의 중간 아래를 노려서 삼각형 모양이 되게 하라고 말했다.
소형 포로 처음 두 포격을 가한 후에 바실리카로 중앙 아래를 포격하자 성벽은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포격은 6일 동안 계속 되었다. 69문의 포는 하루 120발의 포탄을 날렸고 주로 성벽의 중앙부분에 집중시켰다. 성벽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탑과 내부 성벽 일부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렇지만 수비군도 공포에서 벗어나 피해를 복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너진 성벽의 잔해를 다시 쌓아 올려 임시 성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탑이 무너진 곳에는 흙을 채운 통을 쌓아서 오스만군의 화살과 총탄을 막는 방벽을 만들었다. 날이 저물면 시민이 몰려나와 밤새 통나무, 돌과 흙을 쌓았다.
포탄을 막기에는 오히려 임시 성벽이 더 적당했다. 돌과 함께 쌓아 올린 흙은 포탄의 충격을 흡수했다. 무용지물이 된 대포도 큰 포탄대신에 호두알 크기의 납덩이 10개 정도를 근접거리에서 발사해서 오스만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갑옷을 뚫는 정도가 아니라 뒤에 있는 사람까지도 관통할 정도의 대단한 위력을 발휘해서 한 번 발사할 때마다 2~30명의 오스만 병사가 쓰러졌다.
그렇지만 메흐메드에게 있어서 일반 병사는 얼마던지 보충이 가능한 값싼 무기였다.
4월 18일, 술탄은 성벽에 충분한 피해를 입혔다고 판단하고 본격적인 공성전을 시작했다.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실패했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그의 전략은 소모전이었다. 다시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역사상 이렇게 막대한 물량의 화약이 사용된 전투는 처음이었다. 대포는 밤낮 돌을 쏘아댔고 성벽은 계속 무너져내렸다.
수비군의 기록을 보면 이제 포격, 공격 그리고 수리가 일상생활이 되었다.
“5월 11일, 육상 쪽에서의 포격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3일, 오스만군 일부가 공격해 왔지만 하루 종일 별 다른 일은 없었고 포격만 계속되었다.”
포격 47일 째인 5월 28일, 이 때까지 2.5톤의 화약이 사용되었고 약 5,000발의 포탄이 성벽을 두들겼다. 테오도시우스 외벽에는 9개의 큰 구멍이 뚫렸고 임시 방벽으로 간신히 틀어막은 상태였다.
양쪽 모두 지쳐갔다.
1453년 5월 29일, 메흐메드는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고 전면공격을 시작했다. 새벽 1시 30분, 드럼과 심벌즈가 울리면서 오스만군이 6.5km 성벽 전체로 전진해갔다. 포격은 이제 성벽 위를 노렸다. 마치 지옥에 들어선 것처럼 사방은 소음과 괴성으로 가득찼다.
몇 시간의 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대형 포탄 하나가 임시방벽을 뚫고 큰 구멍을 냈다. 오스만군은 흙먼지 속을 뚫고 성벽 안으로 들어섰고 콘스탄티노플은 그렇게 무너졌다.
메흐메드는 이전의 어떤 왕도 해내지 못한 대업을 완수했고 그 원동력은 초대형 대포였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구식 중세시대의 종말이었으며 역사상 가장 끔찍한 화약무기 시대를 열었다. 집중포화 전술은 1차대전과 2차대전에도 그 위력을 발휘했다.
메흐메드는 자신이 정복한 도시의 모스크에 안장되었고 그의 묘지 앞에는 돌 포탄이 전시되어 있다.
영국 박물관에 전시 중인 오스만 투르크의 초대형 포입니다. 포신을 나사 돌리듯이 결합하는 형식입니다.
마지막으로 터키의 자랑스러운 역사였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그린 영화 Feith 1453 중 일부입니다. CG 범벅이고 손발이 오글거리는 장면이 많지만 꽤 볼만한 영화입니다. 유투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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