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국민들이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고 있는 틈을 타서 '정부의 무책임론'을 펼치는 벌레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벌레들의 주장은 그럴 듯합니다. 이번 참사의 책임은 선사에게 있지, 정부나 해경은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이트에서 갑론을박하고 있어서 여기에서 재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간단하게만 정리하겠습니다. 정부가 관리감독 부실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섭게 요구하고 지켜보지 않는다면, 무고한 사람이 많이 죽어간 대형참사는 계속 이어집니다. 참사가 벌어질 때마다 정부는 책임자를 엄벌하고 조직을 개편하고 감시체제를 상시 가동시킨다고 했습니다. 지금 정부도 같은 레파토리를 늘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안전을 갉아먹은 국정원과 군부대 여론조작부터 간첩조작 사건 조차도 해결의지가 없습니다. 개인의 일탈을 주장하며 정직 1개월 등으로 대놓고 '너희따위가 뭘?'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대통령 하야는 물론이고 집권당의 전면교체를 요구해도 무서워하는 시늉만 낼 뿐인데, 옹호를 하면 다음 사고는 더욱 빨리 그리고 더 참혹하게 발생할 겁니다.
국민이 정권과 정부를 무섭게 다루어야, 그들이 국민에게 봉사하고 국민의 안전을 생각합니다. 정권과 정부는 사랑으로 가꾸는 조직이 아닙니다. 엄격한 감시와 비판은 건강한 정권과 정부를 만드는 필수 영양제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붉은수염 제독(3부)
유럽 연합함대를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바르바로사는 1519년에 그랬던 것처럼, 함대를 여러 항구로 분산시켰다. 골레타는 바로 함락되었고 10,000명의 기독교 노예는 무슬림 주인에게 칼을 들었다. 튀니지도 항복했고 쫓겨났던 물레이 후세인이 왕좌로 복귀했다. 도시에서는 약탈과 강간이 자행되었다. 30,000명의 무슬림이 살해당했고 더 많은 사람이 노예가 되어 유럽으로 끌려갔다. 오스만 제국은 1594년에 튀니지를 다시 탈환했다.
역사 이야기는 지역과 인물이 중심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도를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당시 지도를 제공하는 전문서적이 아니라도 이렇게 구글지도라도 참조해야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왕위에 오른 지 5개월 만에 튀니지에서 빠져나온 바르바로사는 15척의 갤리엇을 피항시킨 뵈네Bone로 갔다. 에게해와 오스만으로 향하지 않고 발레아릭Balearic 군도로 향해 북동진했다. 유럽이 튀니지 탈환을 축하하는 동안, 그는 무방비상태의 미노르카Minorca와 마혼Mahon을 약탈했다. 그는 도시를 불태우고 18,000명의 시민을 노예로 끌고갔다.
1535년 가을, 그는 알제리는 하산 아가에게 맡기고 이스탄불로 돌아갔다. 그의 두 번째 방문은 첫 번째 방문과 같았다. 2년 동안 황금만 부근의 조선소는 전함건조에 한창 열을 올렸다. 1537년 봄, 오스만 해군사령관Capudon Pasha으로 승진한 바르바로사는 100척의 갤리와 갤리엇을 이끌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나섰다.
술레이만은 빈 패전 이후에 중앙 유럽을 공략할 방법을 찾고 있었고 이탈리아에 눈을 돌렸다. 그는 바르바로사에게 아드리안해를 쓸고 올라간 후에 이탈리아 아퓰리아Apulia의 브린디시Brindisi(이탈리아 장화의 뒷꿈치 부분)로 향하는 수송선단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술탄은 이미 브린디시 총독을 매수해두었기 때문에 상륙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 상륙한 육군은 이탈리아 반도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계획이었지만, 총독의 배반을 예상하고 상륙을 포기하고 코르푸Corfu를 공격했다.
바르바로사는 아퓰리아 지방 대부분을 폐허로 만들며 약탈품과 노예로 배를 가득 채웠다. 험악한 겨울이 다자오자 오스만 함대는 귀향을 서둘렀다. 바르바로사는 브린디시나 코르푸를 점령하지는 못했어도 이노니아해의 베니치아 거점을 점령하면서 도리아 함대가 튀니지 마을에 했던 약탈을 보복했다.
유럽과 오스만 모두 노예가 귀중한 약탈품이었고 다음 원정을 준비할 수 있는 재원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서양일변도의 역사교육을 받은 덕분에... 마치 이슬람은 악의 근원처럼 생각하게 되었죠.
어쨌든 노예가 된 사람 중 부유한 계층은 가족의 몸값 지불로 석방되었고 그렇지 않은 계층은 평생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바르바로사가 활약(?)하던 시기에서 100년 후에 노예구제수도회Mercedarians가 몸값을 지불하고 유럽출신 노예를 해방시키는 장면입니다. 우리도 임진왜란에서 잡혀간 조상들을 협상 등으로 구출하기는 했습니다만... 구해낸 후의 이야기가 참혹했죠. 무려 500년이 지난 지금의 정부도 전혀 달라지지 않아서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1537~38년 겨울동안, 보스포러스 해협에서는 더 많은 전함이 건조되었다. 1538년 봄, 바르바로사는 최고의 원정으로 손꼽힐만한 원정에 나섰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크게 늘어난 갤리 함대의 노예를 보급할 생각이었다. 그는 이오니아해를 건너 남쪽으로 항해하면서 베네치아 전초기지를 체계적으로 하나씩 점령하고 약탈해나갔다.
크레테의 수도 칸디아Candia는 다행히도 그의 공격을 막아냈고, 해안을 따라 약탈하던 바르바로사는 기독교의 대함대가 아드리아해를 따라 내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즉시 북쪽으로 선수를 돌렸다.
지난 여름에 있었던 이탈리아 원정계획에 크게 놀란 유럽은 바르바로사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베니스가 앞장서 166척의 갤리와 64척의 네프Nef를 모았다. 15세기 북유럽 한자동맹에서 주로 사용했던 코그Cog를 프랑스에서 개조한 네프는 둥근 선수와 선미와 사각형 돛이 특징이었다.
베니스는 80척의 갤리를 내놓았고 교황 바울 3세는 36척의 갤리, 스페인은 30척의 갤리, 사령관 도리아는 20척을 내놓았다. 스페인은 전함말고도 50척의 수송선과 10,000명의 병사를 지원했다. 바르바로사는 유럽의 연합함대를 상대로 겨우 122척의 갤리와 갤리엇이 전부였다.
포세이돈으로 표현한 안드레아 도리아 제독입니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언제가는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기독교를 신봉하면서도 그리스로마 신화는 가져가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심지어 바르바로사까지도 삼지창을 들고 있는 초상화가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우리의 주인공 등장이 너무 늦었군요. 유럽인이 그린 바르바로사의 초상화입니다. 이슬람권이니 벗기지는 않았군요.
바르바로사는 그리스 서쪽 해안의 프레베자Preveza 앞바다로 가서 함대전체를 아르타Arta 만으로 들여보냈다. 갤리는 선수를 아드리아해 방향의 좁은 입구로 돌리고 큰 반원대형 유지했고 입구를 방어하는 요새에도 오스만군을 배치했다.
도리아와 기독교 연합함대가 그날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만 안에 틀어박힌 오스만 함대를 본 그는 만 입구를 막았다. 바르바로사는 안전한 만 안에서 겨울 태풍이 불어와 적을 흩어놓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찌만, 1538년 9월 26일에 함장들이 바르바로사에게 결전을 벌이자고 설득했고 다음 날 오전을 작전일로 결정했다.
27일 날이 밝자, 바르바로사의 기함은 "내 기동에 집중해서 대형을 맞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리아는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봉쇄대형을 풀고 남쪽 50km 지점의 레우카스Leukas에서 적의 기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레베자 전투가 벌어진 해역의 위성사진입니다. 안드레아 도리아는 충분한 전력을 가지고도 의외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제노바 출신이다보니 전통적인 경쟁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피해를 좀 더 즐기려고 했고 개인 소유의 함대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상황을 보면 상당한 이유가 됩니다.
양 함대 사이에는 베니스호가 속절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노를 사용하지 않는 대형전함 갤리온은 바람이 거센 아드리아해에서는 위력을 발휘했지만 바람을 예상할 수 없는 지중해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여름에는 산들바람 정도였다가 겨울에는 드닷없이 폭풍이 불기도 했다.
갤리온 선측의 대포만 가지고도 3척 정도의 갤리는 충분히 격퇴시킬 수 있지만, 능숙한 함장이라면 노를 이용해서 갤리온을 노획할 수 있었다.
봉쇄망을 벗어난 오스만 해군은 주저앉은 갈레온을 보고 달려들었따. 베니스호의 함장은 위기를 느끼고 도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갈레온의 베네치아 포수는 오스만 갤리와 갤리엇이 근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치명적인 포격을 시작했다.
오스만 갤리 한 척이 침몰하고 다른 한 척이 파손되었지만 공격은 계속되었다. 20척의 소함대가 기민하게 움직이며 선수의 포로 포격을 하고는 선측의 포격을 회피기동했다. 오스만 해군이 갤리온을 공격하는 동안 도리아는 17km를 오가며 갤리온을 도우려하지 않았다. 베니스호는 예상 외로 노획당하지도 않았고 피해도 겨우 13명 전사와 40명 부상에 그쳤다. 오스만 해군은 갤리를 여러 척 잃었고 파손도 꽤 되었다.
도리아는 그날 밤에 갤리온에게서 떨어져 북쪽으로 향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업는 결정을 내렸다. 바르바로사는 연합함대를 정면공격하지 않고 측면을 요격하면서 7척의 갤리를 노획했다. 다행히 밤에 바람이 불면서 분전을 펼쳤던 베니스호는 기적처럼 탈출했다.
오스만 해군은 총공격을 온 몸으로 받아낸 갤리온의 위력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프레베자 해전 이후에도 오랜 동안 지중해는 갤리와 갤리엇이 지배했지만, 만약 이날 전투에서 보여준 갤리온의 위력을 받아들였다면 1571년의 레판토 해전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고 유럽 중 상당부분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프레베자에서 유럽연합함대를 공격하는 바르바로사입니다. 연합함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49척의 함선과 3,000명을 잃었습니다.
프레베자 해전은 무승부로 끝이 났지만 기독교 함대는 지중해를 오스만에게 완전히 내주는 결과가 되었다. 향후 30년 동안 베네치아 상선은 매년 술탄에게 236,000 두카트(현재의 6억원)을 통행료로 지급하고 지중해를 오갔다.
바르바로사는 술레이만에게 승전소식을 알렸다. 함대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환했고 바르바로사는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
유럽은 1541년에 다시 한 번 대함대를 구성해서 바르바리 해적의 본거지를 소탕하려고 했다. 육군을 잔뜩 태운 500척 이상의 대함대가 알제리로 내려갔지만 다시 한 번 하늘은 오스만의 편을 들었다. 10월 중순에 태풍이 강타하면서 150척의 함선과 8,000명 이상의 병사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알제리에서는 "노예시장의 기독교 노예는 양파 값도 안된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1543년, 술레이만은 바르바로사를 프랑스로 파견했다. 프랑스는 연합군에 한 번도 참전한 적이 없었고 1526년부터 프랑소아 1세가 오스만 제국과 내통해서 스페인을 상대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프랑스는 오스만의 승리를 은근히 즐겼다.
바르바로사는 프랑스로 향하는 항해 길에서 이탈리아 해안을 약탈했다. 두 번째로 레기오를 공격하면서 레기오 시장의 18살 딸에게 반해 결혼한 후에 계속 북진하다가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 프랑스는 바르바로사와 함께 니스를 약탈했고, 툴롱Toulon에 본거지를 마련한 바르바로사는 스페인 해안까지 노렸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는 프랑스를 혐오했고 함대의 보급품을 과다하게 요구했다. 봄이 되자 프랑스는 바르바로사와의 이별을 기대했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프랑스가 노예와 약탈품을 모두 넘겨준 후에야 오스만으로 출발했다.
1544년, 이스탄불에 돌아온 그는 나머지 2년을 행정부의 관료로 지냈다. 그는 1546년에 73세의 나이로 이스탄불에서 죽었고 보스포러스 해변의 베쉬크타쉬Beshiktash에 매장되었다.
유럽은 오스만 해군에게 도전하지 않았고 레판토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도 아프리카와 지중해 연안은 오스만의 손에 있었다. 미국은 1805년에 바르바리 해적에게 치명타를 가했고, 프랑스,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1835년에 모로코가 더 해적질을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터키는 히지렛딘을 해군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으며 영국의 호라치오 넬슨이나 미국의 존 폴 존스와 같은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다.
바르바로사에 대한 참조 동영상을 찾아봤더니... 당연하게도 터키어가 전부이군요. 영화로는 1951년에 만들어진 110분짜리가 전부이고요. 이번 이야기와는 관련이 없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충돌을 터키 시각으로 만든 영화장면을 붙입니다.
CG를 적당하게 사용했다면 참 좋았을 영화죠.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공성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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