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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터키

오스만 제국의 붉은수염 제독(1부)

by uesgi2003 2014. 5. 1.


수십 년 동안 건드리지 않아 마피아를 형성한 해상관련기관의 추악한 현실이 드러나면서 (그나마 꼬리자르기로 일부일테지만) 우리들, 특히 유가족의 한은 더욱 깊어질 것 같습니다. 

언론과 소문의 과장이라며 일부러 외면하고 싶은 사실까지 드러나고 있는데... 정말 이 말만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라고요. 


요즘 오스만 제국의 역사 일부를 들여다보고 있어서 오스만 제국 전성기 당시의 인물, 하이렛딘 제독에 대해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들은 오스만 제국을 육지의 제국으로만 기억하고 있는데 해상을 지배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절,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붉은수염 제독


유럽역사학자는 히즈렛딘Khiz-ed-Din(하이렛딘으로 개명하기 전의 이름)을 무시하거나 단순한 해적정도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16세기 절반의 기간 동안 히지렛딘은 해적 이상으로 두려운 존재였다. 그가 나타났다는 소문만으로도 바다의 배는 항구로 서둘러 들어갔고 해안마을의 주민은 산으로 도망쳤다. 그는 스페인, 베니스와 제네바에게서 지중해를 빼앗은 가장 위대한 해군 지휘관이었다. 




1740년 스페인 펠리페 5세를 위해 만든 걸개그림입니다. 1534년 튀니지 전투장면으로 실제 걸개그림은 이보다 더 많은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히지렛딘이 스페인에게 튀니지를 내준 전투입니다. 이 당시의 스페인은 중남미에서 들어온 막대한 보물 그리고 적극적인 리더십으로 육군은 세계최강이었고, 해군역시 무적함대로 불리며 오스만 제국을 상대할 유럽의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그의 붉은 빛이 도는 수염때문에 유럽에서는 바르바로사Barbarossa로도 불렸던 그는 300년 후까지도 지중해를 지배할 수 있는 강력한 오스만 해군과 바르바리 해적Barbary Corsairs(북아프리카 해안에서 지중해까지 장악했던 이슬람 해적)을 만들었다. 



1650년에 그린 바르바리 해적의 모습입니다. 오스만 해군제독이 해적출신이라 폄하하기 쉬운데, 영국도 해적의 활약덕분에 해양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고 부제독까지 오른 프란시스 드레이크가 스페인 상선을 노략질하고 영국에 바친 액수가 영국왕정의 세입보다 많았고 결국에는 스페인과 전쟁까지 치루게 됩니다.. 

당시 해적은 전쟁 시에 적대국의 해안을 교란하고, 교역로를 차단하고, 해전에서 귀중한 전력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심지어 양성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은 왜구를 모아 수군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지중해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신앙의 수호자'로 불리며 케말 아타튀르크Kemal Ataturk(터키공화국의 초대대통령) 다음으로 추앙받고 있다. 1994년, 터키정부는 보스포러스의 무덤 근처에 큰 기념비를 세웠다(사진참조).   



바르바로사의 가장 큰 상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제이자 스페인 왕인 칼 5세였다. 제노바와 베니스부터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유럽국가는 반 바르바로사 연합군에 합류했다. 1538년 프레베자Prevesa 전투에서, 바르바로사는 제노바 안드레아 도레아Andrea Dorea가 이끄는 연합군 함대를 격파했다. 

그 순간부터 1571년의 레판토 해전까지, 지중해의 모든 배는 이스탄불의 장엄문(Sublime Porte, 행정부)에 통행료를 바쳐야 했다. 


히즈렛딘과 형 우르지Aruj는 전사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 야쿠브는 그리스 출신의 은퇴한 예니체리로 1462년에 레스보스 섬의 땅을 받았다. '새 병사'를 의미하는 예니체리는 모든 기독교 국가가 두려워하는 공격부대였다. 술탄은 비이슬람 신민에게서 연공으로 어린 아이를 데려와 이슬람 종교를 주입시킨 후에 전사, 공무원, 종교 충복으로 양성했다. 

전사의 운명이 된 아이는 엄격한 군영에 죽거나 은퇴할 때까지 가뒀다. 예니체리는 술탄과 이슬람에만 충성했다. 야쿠브는 살아 남았고 레스보스의 땅을 보상으로 받고 카텔리나의 이름을 가진 그리스 신부의 미망인과 결혼했다. 부모는 모두 기독교 배배경을 가졌지만 히즈르와 아루즈는 철저한 이슬람교도였다. 


히즈르는 40년 동안 형의 그늘에 가려져있었다. 그와 우르지는 2척의 작은 갤리엇Galleot을 가지고 해적질을 하기 시작했다. 갤리엇은 한쪽에 18개 미만의 노를 가진 개방형 전함으로 바람이 불 때에는 돛도 사용했다. 



갤리엇은 갤리선보다 작은 형태로, 지중해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대포는 2~10문을 장착할 수 있고 보통 50~100명 정도를 태웠습니다. 


우르지의 첫 번째 항해에서, 성요한 기사단의 갤리선에게 나포되었고 우르지와 선원은 갤리선의 노예가 되었지만 오스만이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풀어주었다. 


1504년경, 우르지와 히즈르는 튀니지에 도착했다. 보통 갤리엇은 2~3명의 전투원이 노 한개를 젓다가 전투를 벌인 반면에 기독교의 갤리선은 한쪽에 훨씬 많은 60개의 노를 장착했고 발목에 사슬을 매단 노예가 전투 시에도 노를 저었다. 

히즈르와 우르지는 교황과 스페인 갤리선과 싸우며 몇 차례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힘을 키워나갔다. 스페인 페르디난드 5세가 1516년에 죽자, 알제리는 스페인에게서 독립을 선언하며 아루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16척의 갤리엇, 800명의 오스만군 그리고 5,000명의 이슬람 선원을 동원해 지원했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알제리의 지배자가 되었다. 


알제리인이 갤리엇을 불태우려 한다는 음모를 듣고는 방화음모를 막은 후에 금요일 예배에서 보복을 단행했다. 음모 가담자와 일반 알제리인이 모스크 안으로 들어오자, 오스만군이 둘러싸고는 문을 잠궜다. 우르지는 기독교를 돕는 행위는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고함을 쳤고 오스만 병사가 머리의 터번을 풀어 알제리와 무어인의 손을 묶었다. 지도층 인사를 밖으로 끌어내 목을 베고 시체는 그대로 거리에 늘어 놓았다. 

아주르는 남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명령에 잘 따를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런 무자비한 방식으로, 우르지는 아랍, 베르베르, 스페인이 통치했던 남지중해 해안을 오스만 영토로 합병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입지도 강화시켰다. 냉혈왕 술탄 셀림 1세는 그를 알제리 태수로 임명한 후에 트렘센Tiemcen, 테네즈Tenez, 셰르셀Shershell의 술탄으로 임명했다. 


기독교의 갤리선에 올라 전투를 벌이는 우르지입니다. 


1517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스페인은 트렘센을 공격했다. 페즈Fez 술탄이 약속한 지원군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우르지는 알제리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스페인은 배후를 끊고 1518년에 그를 죽였다. 


알제리의 통치권은 자연스럽게 동생 히즈르에게 넘어갔다. 그는 18년 전에 바르바리 해안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형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800km에 달하는 아프리카 해안을 물려받게 되었다. 우르지를 죽인 스페인군은 오스만군의 반격을 예상했고 오란과 모로코의 동맹군도 더 이상 히즈르를 압박하지 않았다. 

히즈르는 귀중한 시간동안 입지를 굳혔다. 그는 장엄문에게 형의 죽음을 알렸고 오스만 제국의 승인을 요청했다. 셀림은 이집트 원정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서쪽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그는 알제리의 봉신요청을 받아들이고 신임태수에게 선물을 보냈다. 


스페인은 오스만 제국이 아프리카 해안으로 병력을 파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유럽 관련국에게 50척의 갤리선과 200척의 수송선을 만들어 알제리에서 오스만군을 몰아내자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연합함대는 늦여름까지 출범하지 못했고, 그 때에는 이미 아프리카 해안의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이제 바르바로사라는 별명이 붙은 히즈르는 첩보원을 통해 유럽의 공격계획을 알았다. 갤리엇만으로는 연합함대를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알제리의 항구에 분산시켰다. 술탄은 2,000명의 예니체리를 포함한 상당한 지원군을 파견했다. 

연합함대는 1519년 8월 말에 알제리 앞바다에 도착했지만 이슬람 해적함대를 찾지 못하자 닻을 내리고 병력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미 오스만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병력이 하선하기도 전에 북쪽으로 부는 태풍이 함대를 대양쪽으로 몰고갔다. 

갤리선은 역풍을 맞으며 노를 저어도 해안으로 다가갈 수 없었고 범선은 속절없이 멀어졌다. 바위에 좌초한 배들은 오스만군의 공격을 받고 죽거나 노예가 되었고 나머지는 바다 멀리 떠내려갔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연합함대는 원정을 중단하고 회항할 수 밖에 없었다.

하늘의 도움을 받은 히즈렛딘은 이렇게 알제리의 통치자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사이의 해협을 다니는 배는 히즈렛딘의 자비를 구하게 되었다.